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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피스물의 관계 어때? 5

ㅁㄴㅇ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9.02 18:58:46
조회 914 추천 30 댓글 8




평소보다 일찍 끝나도 갈 곳은 마땅찮다.

계속 남은 찝찝함이 안나에게 위험한 신호를 보낸다.

엘사와의 관계가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해졌음을.


'그래야지.'


그 한마디가 남긴 인상은 너무 강한 것이었다.

엘사는 아마도 오늘 작정했을지도.

아니 분명히 그랬어! 

섬짓하게 등줄기를 훑고 간 느낌은 틀리지 않는다.


안나가 무서운건 엘사 그 자체였다.

속에 품은 경외로움에는 두려움도 함께다.

저렇게나 대단하고 입지적인 사람이 한 번 손을 흔들면 나가떨어진다.


늘상 하는 생각이지만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안나는 반드시 1순위로 반년전으로 돌아갈거다.

돌아가서 너무 과욕부리지 않고 지낼 것이다.

엘사의 휘광에 유혹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정직한 삶을 사는 것이다.

엘사의 편법에 휘말려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하지 말고.


주말을 앞둔 초저녁 거리는 이미 광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문득 펍의 테라스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샛노란 맥주를 꿀꺽 꿀껌 삼키고 있다.

안나는 평소에 술에 관심이 없지만 지금은 딱 어울리는거지.

옛날부터 우울할 때가 아니라 기쁠 때 마시라고 배웠지만.

고리타분한 옛소리를 지킬 때가 아닌거 같다.


대로변의 중심지는 별로였다.

경치는 좋지만 혼자 가기에는.

근방에 안나가 아는 술집이라곤 딱 하나뿐이다.

뒷골목 어귀로 몇 번 돌아가야한다.

마치 세상과 점점 단절되는 다른 세계에 있는 곳이지.

높은 건물의 그림자가 장막이 생겨 숨겨주는 비밀스러운 아지트였다.

뒷골목에는 모서리가 깨져 맛이 간 사이킥이나 퇴폐적인 형광등 걸린 리큐어 샵이 있었다.

그 앞을 혼자 지나가기는 조금 떨렸지만 안나는 눈 감고 지나쳤다.


이어 도착한 곳은 허름한 바였다.

검은 크로커스 문양이 마치 비밀 결사대 같은 육중한 문이 걸려있다.

안나는 마지막으로 대로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돌아봤다.

혹시 오지는 않겠지?


'딱 두 잔만.'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바로 들어갔다.





안나는 고민하지도 않고 엘사와 왔을 떄 마신걸 골랐다.

아주 무난하게도 애플 모히또.

그게 안나가 알고 있는 술중에 제일 유명했으니까.

검은 크로커스의 바는 출입이 엄격했다.

안면이 있거나 지인이 동행해야지만 출입이 허가된다.

철저한 회원제를 유지하는 은밀한 이유가 있다.

안나도 알고 싶지 않았던 이유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안나는 여기가 숨죽일 수 있어서 좋았다.

조명도 유달리 어두웠고 으슥한 구석 자리는 거의 암실 같았다.

어둠에 숨어있는게 심리적인 편안함을 느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바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금요일이라 그런가?

안나는 평소랑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이랑 눈이 맞추면 금방 고개를 돌렸다.

이 바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 같이 여자라는것.

바텐더부터 손님들까지 전부.


그리고 혼자인 사람은 괜한 시그널 보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바의 룰은 간단하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바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

원피스 어깨를 거의 탈의한거 같았던 어떤 여자는 금방 다른 여자와 합석했다.

그녀는 몇 마디 주고 받는거 같더니 테이블 자리로 커튼을 치고 들어갔다.

저게 안나가 제일 으슥한 자리에서 고개 낮추고 모히또 잔에만 집중하는 이유다.


특별한 이유는 없이 술만 마시러 오는 사람도 있지만.

더 사람이 많아지면 마냥 그러고 있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든다.

빨리 먹고 취기를 안고 돌아가야지.

안나는 두번째는 일부러 쎈 걸 먹고 싶었다.

바텐더에게는 물어보기 뻘줌해서 메뉴판의 도수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게 좋은데요. 롱티."


"어?"


안나는 오른쪽에서 들린 음성에 오른쪽을 바라봤다.

의자 끌리는 소리는 왼쪽에서 들렸다.


"헙?!"


안나는 머리가 삐죽서도록 놀라 자빠질뻔했다.

엘사...라고 착각한 비슷한 생김새였다.

같은 금발 머리에 청백안.

피부가 지나치게 금발 백인이다.

딱 모델 잡지에 있을 그런 백인 여자?

어둠에 잘 익게 입은 검은톤 옷차림도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내가 정한걸로 살래요? 독한 술이 가득이지만 콜라도 잔뜩 들어가서 맛 없게 느껴지지도 않거든요."


"누구신데 아는척을 하세요."


"여기가 알아서 아는척하나요. 혼자 있으면 합석하는거지. 그리고, 나도 이 자리 좋아하거든요."


안나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휙휙 움직였다.

다들 이쪽은 신경도 안쓰는거 같다.

게다가 으슥한 구석자리는 도리어 안나가 벽쪽에 내몰린 꼴 같았다.

엘사를 닮은 그 여자는 여유롭게 자기가 들고 온 잔을 홀짝였다.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바텐더가 이쪽에 커다란 콜린스 잔을 내려놓고 간다.


"미리 시켰어요. 맛 보고 아니다 싶으면 내가 먹을 생각으로."


여자가 내민 롱티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본다.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기가 먼저 한 입 먹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음료 CF라도 되는냥 짜릿하다는 리액션과 함께.


"일단...고마워요."


여자는 별거 아니라는듯 손사레쳤다.


"에리사 리글렛이에요. 뒤에 이름은 후회하는거 같아서 별로라...에리사로 불러요."


안나는 대뜸 내미는 악수를 얼결에 받았다.

에리사가 어떤 의도인지 몰라도 남의 친절을 거절하기는 죽도록 어려우니까.

건배를 제안한 에리사가 먼저 잔을 크게 넘긴다.

안나도 따라서 마셨다.

롱티라는 칵테일은 첫맛과 다르게 뒤가 알싸했다.

양도 엄청나게 많아서 안나는 이게 마지막 잔으로 딱 맞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즐기러 온건데 방해했나요?"


"혼자온게 맞기는 해요."


"술이 고파서?"


"그 비슷한거죠. 가끔은?"


"난 애정이 떨어지면 술도 생각나고는 하던데. 여기가 처음은 아닐거고요."


"처음은 아닌데에...편해서요."


"편해서! 뭔가 불편한 일이 있었구나."


"그럴까요?"


"그럴까요는 질문인데."


에리사의 눈빛이 너무 끈적거려서 부담스러웠다.

안나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경직된 몸을 까닥거렸다.

괜히 긴장되서 순식간에 잔을 절반이나 비웠다.

에리사는 끈질기게 캐물었다. 

안나는 어색하게 대화가 끊겨 있느니 묻는대로 답한다.

머리가 일순간 핑하고 돌아가는거 같더니 고개가 주르륵 에리사쪽으로 돌았다.

에리사의 손가락 한 마디가 안나의 턱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너무 빨리 마시면 안돼요. 말했잖아요. 생각보다 독한 술이 가득이라고."


"아.....네.....그렇....."


안나는 말하면서도 잔에 꼿힌 빨대를 쫍쫍거렸다.

에리사의 손이 허벅지 위에 닿았지만 안나는 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까닥거리자 안나는 부끄러운 시선으로 살짝 다리를 벌렸다.

엘사와 닮았지만 억세지 않고 부드러운 손길이다.

그 손짓 한번만으로 안나는 오늘 조퇴한 텅 빈 회사에서 벌어져야 할 일을 떠올렸다.

평소라면 저질렀을 일들.

그렇지만 이번주만큼은 조용히 넘기기 위해 벗어났다.

그 해소되지 못한 갈증이 갑자기 안나를 애태웠다.


"뭔가 답답해 보이는데 조용한 곳에서 더 대화할까요?"


"조용한곳?"


"안쪽에서."


에리사는 안나를 잡아 당겼다.

안나는 테이블이 놓여진 커튼 쳐진 룸을 경계했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늠이 가니까.

하지만 한 번 발을 담그니까 말할 수 없이 아늑했다.

딱딱한 바 의자가 아니라 폭신하고 넓은 소파.

최대한 밖에 일을 신경쓰지 않게 신경 쓴 테이블들.

완전히 외부와 차단되는 커튼 안쪽에서는 건너편 테이블의 색정적인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안에서 들리는 노골적인 소리들에 얼굴이 빨개졌다.

알고 있었지만 진짜 생각보다 훨씬 더하구나.

가슴이 빠르게 맥박치고 손에 땀이 났다.

에리사는 그런 안나의 손을 놓아주고 언니처럼 어깨를 마주잡았다.


"그 사이에 그걸 다 마셨어요? 아까 마신걸로 하나 더 주문해야겠다."


에리사는 안나가 손에 쥔 얼음만 남은 잔을 부드럽게 뻇었다.

두 잔 뿐이었는데 머리가 징징 울린다.

안나는 자기 손에서 떠난 잔이 놓여지는 것까지만 확인했다.

그 다음에는 얼굴 전체를 채운 에리사의 고개짓에 가려졌다.

목소리가 귀에서 또렷하게 들어와 내리꼿힌다.


"아까 마신 칵테일 기억나요?"


"아니요."


"롱티에요. 레이디킬러의 대표인데."


"아. 레디이킬러..."


"이런 뜻인데."


에리사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입 맞췄다.

안나는 탄식처럼 에리사에게 안겨서 그 템포에 똑같이 발맞춘다.

갈증이 순식간에 채워진다.

안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과 반비례로 정신은 차갑게 벼려졌다.

오늘 채우지 못한 일이 기묘하게 해결됐다.

일도 다 끝났고, 갈증도 해소됐다.

안나는 그 두가지만 생각했다.

앞에 있는게 누구였든지는 신경쓰지 않고 더 격하게 몸을 던질뿐.





엘사는 속으로 욕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지 세지 않았다.

오늘은 여러가지로 다 욕 나오는 하루다.

안나의 반응, 틀린 직감과 시나리오.

덕택에 허공에 던져버린 호텔 비용.

괜히 눈에 들어오는 성에 차지 못한 팀원들의 일머리.

남아있는 잔업들.

헛소리하는 상사들.

막히는 차들과 후덥지근한 날씨도.

아무튼 하나부터 열가지 안 풀리는 머피의 법칙 날이다.


엘사는 이 스트레스를 당장 풀어야 했다.

만만해 보이는 아무나 붙잡아다가 다짜고짜 길들이고자 결심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음주 운전도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면 근방 어딘가의 싸구려 모텔이라도 좋아.

엘사는 골목길 사이에 차를 던져놓다 싶이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최대한 안나를 닮은 어린 여자를 찾아야지.

그래서 가장 만족스러운 절정을 맞이할거다.


그리고 검은 크로커스가 있는 바의 100미터쯤?

엘사는 바에서 나오는 두 명의 사람을 눈여겨 봤다.

처음에는 좋은 사람을 뺏겼다고 생각했다.

얼핏 본 술 취한듯 흔들리는 갈색 머리는 안나랑 닮았으니까.

금요일 일찍부터 재미들 보는구나.

그런 찰나에 다시 보였다.

잘못 본게 아니라 안나잖아!


옆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엘사는 우뚝 멈춰서 지켜봤다.

발이 땅에 박히는 느낌.

안나를 부축하는 여자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안나는 완전히 엉겨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옷차림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머리도 산발이다.

잠시후 안나는 그 여자에게 진하게 입 맞춘다.

요염하게 몸을 흔들면서 허리를 감싸 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모르는 여자는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안나와 그 여자는 도착한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택시가 떠나는 뒷모습.

엘사는 여러 악재에도 쉽게 분노가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다.

잠시후 그게 아니고 너무 심하게 압축되고 압축되서 구겨졌구나 했다.

엘사의 눈은 한 번을 깜작이지 않고 이글거리고 있었다.

두 손은 주먹을 꽉 쥔채 부르르 떨고 있었고.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차오른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느껴본적 없는 모욕감과 패배주의.

욱하고 치솟은 열기가 몸을 덥히다가 차분한 심호흡과 함께 내려갔다.


엘사는 싸늘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웃어야지. 웃긴 일이잖아?'


엘사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역시 작위적인 웃음은 금방 핏기 가신다.

너무 차갑게 식어버려서 온몸의 혈류가 얼어붙은 느낌이다.

엘사는 분노는 아이러니하게 매우 차가웠다.

엘사는 시간까지 얼어붙어서 온 세상이 또렷하게 보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때로는 질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엘사는 한 번도 그런적 없었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는거지.

다만 갚아준다.

그때 배로 돌려주면 될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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