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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피스물의 관계 어때? 19

ㅁㄴㅇ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11.09 21:37:21
조회 360 추천 15 댓글 4



하반기 늦여름.

사내가 조금 어수선했다.

위크로 미뤄진 인사이동이 시작되고 있다.

몇 명의 인원 재배치 정도여도 들뜨기는 충분했다.

그중에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안나였다.


안나는 정식으로 팀 매니저로 승진했다.

엘사가 주도한 MD/기획 통합 팀 전체 매니저.

여러 뒷말에도 보통 이견 없이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 이유중 하나는 엘사의 말수가 부쩍 줄어든 탓이다.


엘사의 스트레스가 적다는 증거는 말이 없다는거다.

덧붙여 무표정하면 제일 좋은 징조고.

말인즉 다시 엘사가 신경 안쓸 만큼 잘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안나에게 원래도 관대한 부분이 있다는걸 고려하고서도.


"식사들 해요. 승진겸해서 제가 살려고 하는데 전부 가실 거죠? 퇴근후 회식은 진부하고 싫은거니까 이걸로 대신 할게요."


안나에게 팀원들은 환호했다.

안나는 뒷말하는 사람들도 신경 안쓰고 공평하게 대한다.

자신의 성공을 열성적이게 증명하려기 보다 뻔뻔스럽다고 해야할까.

애초에 적수가 없을거란 자신감.

그 자신감이 가랑비에 젖어가듯 손쉽게 모든걸 안나 손에 떨어뜨려 놓았다.


"팀장님도 가실거에요?"


안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고개 돌렸다.

엘사는 벼르는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짖을려 하는 맹수처럼.

거기에 대고 안나는 턱끝을 들며 슬며시 내려다봤다.


"어차피 알면서 뭘 물어?"


"사적으로 묻는게 아니고 예의상이에요. 회사니까."


"예의? 그런게 있는줄 몰랐네. 치레했으면 이제 가봐."


안나는 후- 하는 숨을 쉬었다.

한숨이라기 보다는 푸념 같은.


"가볼게요. 식사 맛있게 드세요 팀장님."


안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졌다.

저 멀리에 사람들 틈에 섞여서.

엘사는 할 일이 없는 모니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할 일이 없다니.

오후의 일은 완벽하게 나눠져 있었다.

그것들까지 뻇어서 해버릴까?

본인이 컨트롤 해야 할 일이 없다니.

엘사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엘사는 그 상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는걸 보고만 있었다.


"식사 안하나?"


잠시후.

엘사는 곁눈질로 아그나르를 보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하는건 없지만 말을 걸기까지 못 본척 했다가 늦게 답했다.


"네, 일이 있어서요."


"일 중독이야. 밥도 거르고."


"무슨 일 있으신가요?"


"무슨 일은. 팀원들은 전부 식사하러 가는거 같은데 혼자 있으니까 그랬지. 할 이야기도 있는데 개인적인 일이야. 식사 거를거면 나가서 커피라도 마시지. 그 정도 시간은 괜찮지 않나?"


"이 자리에서 말씀하세요. 사장님이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하셔도 별거 아닐거잖아요. 저보고 이제 팀에서 나오라는 소리 아니겠어요?"


아그나르는 알아 맞췄다는듯 넌지시 웃었다.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으니까 나가도록 하지."


엘사는 못 이기는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켜놔야 했던 모니터도 껐다.

부산스럽게 정리해야할 서류도 없어서 가벼웠고.





"안나가 승진하고 일주일 정도 된거 같은데 잘하고 있나?"


"잘해봤자겠죠. 저만은 못해요."


아그나르는 회사 바로 코앞의 아담한 카페를 골랐다.

당연하게도 대형 프렌차이즈를 생각했던 엘사는 실망하고 있던 터였다.

거기에 첫 질문은 기름을 부어놨고.


"이상하네. 요즘 안나에 대해 평가가 박해. 이전에 비슷한 질문을 하면 잘하고 있다고 칭찬일색이더니."


"제가 뭘요? 딱 할 만큼만 하고 있어요. 원래 그 정도였으니까."


"평가치고는 금방 팀을 휘어잡은거 같아. 업무 평가도 나쁘지 않고. 위크 때 대행 할 때부터 이미 제격이라 생각했던거 같은데 사실 그보다 더 이전부터도 괜찮았지. 내가 보기에는 제2의 엘사처럼 보이기까지 하는걸."


"안나 이야기는 그만하죠. 제가 키운건 맞지만 만족하지는 않아요. 결론은 제가 더..."


"결론은 안나한테 맡겨. 안나 말고도 너희 팀 전부한테."


아그나르는 엘사의 말을 가로챘다.

엘사는 자기 말을 뻇겨 움찔했다가도 아그나르의 표정을 보고 물러났다.

아그나르는 정말로 진지한 눈을 하고 있었다.


"기획 전략 선정, 업체 관리, 매장 점검, 제작, 온라인 검수, 고객 컴플레인......최근에는 모델도 했나? 하여튼 회사 전반에 한 번은 다 손대고 있지? 하긴 그럴만하지. 너랑 내가 처음 시작할 때 지독하게 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때는 그랬었어. 뚜렷히 구분 없이 하나부터 열가지 직접."


"사장님만 만나면 과거 이야기만 하네요."


"나는 이제 과거가 더 긴 사람이니까."


"언제 죽을지 정해놓기라도 하셨나봐요."


"하고 싶은 말은 이거란다. 단순히 팀에서 나오라는게 아니야. 할만큼 했어. 재능에 넘치게 마음껏 만개했다고. 이제는 임원 자리 꿰차고 편히 앉아도 되잖아. 그것마저도 고집을 피워대서 부서 통합한 총괄 팀을 만들었지. MD/기획이 명목이지만 그것도 모자라서 이곳 저곳 한 마디씩은 전부 손 뻗고 있잖아."


"그래서 제 간섭이 불편하데요? 제작팀 로라가 그래요? 아니면 디자이너들? 매장 직원들?"


"오히려 불편한건 너일거 같은데. 성미대로 안 풀리면 답답해 죽을려고 하니까."


엘사는 뚱한 얼굴로 샐쭉였다.


"적어도 지금 팀에서는 할 일이 없지?"


"아니요. 방금도 보셨잖아요. 저만 남아서 일하는거."


"흠, 내가 볼 때는 일거리가 없어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던 얼굴이던데. 책상도 깔끔했고. 아, 원래 정리가 깔끔하다는 말은 아니고."


엘사는 표정을 안비치려고 최선을 다 했다.

아그나르에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풀은걸 다 잡았다.

엘사가 아그나르를 아는 만큼 아그나르도 그렇다는걸 느꼈으니까.


"팀에서 나와. 이제 그만하면 됐어. 억지로 총괄 할 필요도 없고 굳이 일선에 있으려고 팀장 꼬리 달고 웃기는 모양새로 있을 필요도 없어. 이제 회사 CEO로 최고 임원 자리에 들어와. 이 회사는 나 말고 네 회사나 다름 없으니까."


"사장님."


"그만하면 쉴 때야."


"저보고 그냥 손 놓으라는건가요."


"일선 실무에 있는 것보다 이 방편이 낫지 않겠나?"


"CEO나 팀장 자리에 있나 똑같아요. 어차피 얼마 안가서 보고 듣고 있기가 답답해서 다시 똑같을걸요?"


"안나가 이제 너만큼 할 수 있어. 안나 말고 다른 팀의 누구든."


"안나는 고작 매니저고요!"


"또 곧 있으면 팀장이 되겠지."


"사장님! 저를 의심하세요? 여전히 제가 있어서 돌아가고 있잖아요!"


"엘사, 솔직하게 말해볼까. 일이 좋아서 몰입하는게 아니라 일 밖에 할게 없지?"


엘사는 말문이 턱 막혀왔다.

말문이 막혔다기 보다 숨이 콱 막혔다.

엘사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목에서 엘사는 반박할게 없었다.

또한 다음 대화가 어떨지 알아서 심각한 얼굴이 됐다.


"일말고 친구나 가족은? 하다 못해 취미 생활은?"


"아시잖아요."


"알고있으니까 더 확실히 확인하는거야."


엘사는 별로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위탁 가정에서 자라며 모진 학대를 겪었다.

정부 지원금이 월 800$가 나오지만 엘사는 끼니마다 4$ 이상의 식사도 못 했다.

학교 생활도 관심이 없는 위탁모 덕에 엘사는 왕따로 지내야 했다.

어느날 학교를 자퇴하듯 나가지 않았다는 것도 몰랐을거다.

엘사가 위탁 가정을 나올 땐 아무런 배경도 인맥도 없이 덩그러니였다.

엘사의 인생은 딱 위탁가정의 명암중 암의 극치였으니까.


"억지로 뭔가에 미치는 사람이 좋아서 그렇게 한다는 말은 안 믿어. 좋아서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실은 무언가 인생의 큰 오점을 남겼기 때문에 고장나버린 인간일게 분명하니까. 사람은 절대 한 분야에 미치지 못해. 그 말은 그 사람이 평범하지 못하게 나사가 풀렸다는거야. 너한테 이것저것 다 맡기고 부탁했던 주제 또 이런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제가...그런 사람이란 뜻인가요? 고장났다고? 나사 풀린 인간? 제 어디가 어때서요!"


아그나르는 조금 격해진 엘사에게 놀랬다.

인상을 찌푸리고 언성이 살짝 높아져 있었다.

아그나르는 자식이 있다면 지금 엘사가 사춘기 같은 모습일거라 생각했다.


"너무 격하게 반응하는구나. 비난하는 말은 아니란다."


"전 항상 최선의 결과만 내요. 그리고 다 잘했어요! 저는 한 번도 실망시킨적 없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지. 너는 기괴할 정도로 잘하기만 하니까 문제야."


"그게 어떤데요! 잘하면 좋은거 아니에요?"


"후우, 이제보니까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너한테 너무 일만 시켰다는 내 생각이 맞았어."


아그나르는 이제 그만하라는듯 손바닥을 들어 제지했다.

엘사도 소리 높여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조금 머리가 복잡해졌는지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짐나.


"단편적으로만 이해하지 말렴. 옆에서 지켜보면 알지. 단순히 열심인게 아니라 여기서 눈 돌리면 들어오는 현실이 비참하니까 그렇다는걸. 적어도 너랑 한참을 부대낀 나는 알거 같다. 나도 널 만나기까지 지난 평생을 그랬기도 했으니 더더욱 잘 알아."


엘사는 손을 부들댔다.

안나가 고래고래 소리지른 그 말을 또 듣다니.

아그나르의 말에 의도는 없었지만 엘사의 마음을 푹푹 찌르고 있었다.

이런때면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엘사에게 부모님이란 경험이 없지만 있다면 분명 이럴거라 생각한다.

엘사의 진실을 아는 몇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다가 크게 사고도 나보고 멈췄어. 나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졌다. 충분히 만족스러워. 네 덕에 이만한 회사도 만들었고. 능력 없는 나 때문에 아내도 충분히 고생시켰어. 남은건 내 아내한테 최대한 뒷바라지 해주는 일이지. 자식도 없으니 너로 대리만족하면서."


"......나사 풀린 자식이겠네요."


"이해를 위해 한 말이니까 마음에 두지 마렴. 마지막으로 내 삶을 찾기 전에 너도 네 삶을 찾으면 좋겠다. 의외로 일에서 손을 떼면 다른게 들어올거야."


"제 삶이 뭔데요?"


"그건 앞으로 네가 찾는거지. 아끼고 사랑할 인연을 만들어도 좋고, 혼자 실컷 여행이라도 다녀봐도 좋고. 아무튼 고리타분한 일만 빼고 뭐든."


아그나르는 이사회의 만장일치 의결서를 내밀었다.

의결 내용은 엘사의 CEO선정에 동의하는 건이었다.

실질적으로 이미 서류상에서는 엘사가 CEO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건 네 휴가."


"휴가라고요? 당장 내일이요? 누구 마음대로 휴가에요! 연차도 빡빡하게 돌아가는 회사에...!"


"사장 마음대로지. 그 빡빡한 회사에 휴가 반납까지 하던 정신나간 사람은 한 명 뿐이라 충분히 여유로워."


휴가 계획서에는 이미 승인 사인이 되어 있었다.

날짜는 한 달에 달했고.

빈 자리에는 엘사의 사인만 남겨놓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인하고 오늘 퇴근하면 내일부터 휴가 기간 동안 출근하지마."


"거절한다면요?"


"말리지는 않는단다. 그렇다면 스스로 인정하는 거라고 여기마. 삶을 포기한채 억지로 일을 붙잡아야 사는 일 마약 중독자라고. 일에 치이고 치이고 치이고 종국에는 할 일을 못 찾고 해매다가 매말라가겠지."


아그나르의 마지막은 끔직한 독설이었다.

평소의 엘사라면 어떻게든 반박했겠지만 입술만 씹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엘사는 아그나르가 똑딱하고 건넨 볼펜을 쉽게 받지 못했다.

손이 나갈듯 말듯 움직이지가 않는다.


"얼른 잡으렴. 팔 떨어지겠다. 그리고 이건 개인 의견이지만 제발 좀 쉬기를 바란다. 무슨 회사가 일개 팀장 눈치 보여서 사장이 못 쉬어? 아내랑 동부 여행을 즐기면서 너 없을 때 쉬고 올려고 하니까 빨리 사인해. 이제는 놀기만 하다 은퇴 좀 하자구나."


아그나르는 장난기 있게 말하며 손을 떠는 시늉을했다.

엘사는 결국 마지못해 볼펜을 집어 사인했다.

사인을 하고서도 엘사는 좋아하는게 아니라 눈이 쾡 하고 비었다.

갑자기 몰려드는 허무한 공허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혹시나라도 휴가 기간 이후에도 더 쉬고 싶으면 마음껏 쉬어도 괜찮단다. 돌아오면 내가 쓰던 자리 옆에 사무실도 따로 마련될거고 다 정상적이게 돌아가고 있을거니까."


"네."


"엘사, 걱정되니."


엘사는 커피를 쭉 삼켜버렸다.

바닥까지 한 번에.

아그나르는 차분히 기다렸다.


"이것도 일이라고 생각해보렴. 프로젝트 기한은 한 달. 목표 기획안은 일과 업무라는 마약에서 해결. 그러기 위한 방안, 사교 모임, 여행, 취미 개발, 기타 등등등."


"그런 기획안 올리면 바로 짤려요. 사장님이 부도를 맞은 이유를 알거 같네요."


"그럼 새로운 CEO님은 어떨지 직접 보여주시지요. 학벌도 배경도 아무것도 없는채 실력만 잔뜩 있으신 분이니까. 휴가가 끝나면 대단하겠지?"


"......"


"이제 다 정리된거 같으니까 먼저 일어나마."


아그나르는 휴가 계획서와 의결서를 다시 챙겼다.


"엘사, 잘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일을 찾으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최선인거 같구나."


"제가 못하는 일이요?"


"너는 못하는 일이 없다고 자신하겠지만 말이다. 그 자존심부터 포기하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르겠다."


아그나르는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엘사는 아그나르가 나서서 회사로 돌아가는 모습을 창가로 지켜봤다.

회사 건물은 뜨거운 점심의 태양이 반사된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엘사는 힘들게 거기서 눈을 돌렸다.


그러고선 한참이나 이마를 부여잡고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당장 내일부터 뭘 해야 하지?

대체 뭐가 결점이라는거지?

못하는 일을 굳이 왜 해야하고 그런게 뭐가 있지?

자존심? 그게 자랑스러운 훈장 같은거였는데?

엘사에게는 이해를 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엘사 앞에 놓여진 커피 잔의 얼음까지 다 녹을 때까지.

엘사는 카페 안에서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엘사?'


팀원들과 호탕한 점심 시간을 보낸 안나는 회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는 창가 자리에 엘사가 있었다.

무언가 심각하게 고뇌하고 있는 모습으로.


"안나 뭐해요? 신호 바뀌었어요!"


"크리스토프, 이제 매니저님이라 붙여서 불러."


안나는 엘사에게 가볼까 말까 망설이다 포기했다.

관계는 최악이기도 했고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면서 팀원들이 부르고 있었다.


"가요!"


안나는 횡단보도를 건너고서 다시 한 번 카페를 쳐다봤다.

엘사 취향도 아닌 곳.

거기서 보는 매우 낯설어 이질적이기까지 한 모습의 엘사.

안나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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