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픽] 레코드 03

ㅇㅇ(222.110) 2021.12.18 22:50:59
조회 291 추천 16 댓글 5


Record 03. 세 번째 편지



꿈을 꿨어. 봄이 끝나갈 무렵, 커다란 나무 아래서 내가 너에게 고백하는 꿈.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네게 들릴까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네가 좋았어.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웃는 네가 너무 따뜻해 보여서, 나도 그 곁으로 가고 싶었어. 그냥 옆에 있고 싶었어. 그래서 그걸로 만족했어. 너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충분했어. 그런데 계절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살다 보니 나도 지쳤었나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네게 고백했을 때 당황스러워하던 너의 모습이 생생해.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대답으로 내 고백을 거절했지.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 애초에 네가 받아 줄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었으니까.

그런데 내 손을 잡고 가까이 다가온 네가 했던 말은 뜻밖이었어.


..미안해. 고백은...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지금이라도 내가 하게 해 줄래?..’


있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기분이었어. 커다란 나무 아래 오직 너와 나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서로의 모습을 담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았어. 뜨거워진 내 얼굴과 땀으로 축축해진 너의 손이 우리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지. 쿵쿵대는 심장 소리와 작은 숨소리마저 황홀했던 날.

그런 꿈을 꿨어, 안나. 우리가 함께했던 그 날.









엘사와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운동장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푸른 잎과 커다란 가지들은 학생들의 쉼터였고 봄이 되면 꽃잎이 흩날려 장관을 이루는 유명한 장소였다. 그리고 엘사와 내가 서로에게 고백한 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이라 가지는 앙상했고 예전과 같은 위엄은 없었다. 나는 곧장 엘사가 말한 틈을 살폈다. 종이에 쌓인 작은 물체가 보였고 나는 손을 뻗어 종이를 폈다.

예상대로 엘사가 남긴 usb가 있었다. 3이라고 쓰인 숫자와 함께.

나는 주저 없이 곧장 노트북을 열었다. 망설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더 이상의 미련은 원치 않았다. 너의 말을 듣고 싶었다.

이번 영상은 카페였다. 너는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삼분이 넘어서야 커피와 함께 나타났다. 항상 웃는 얼굴로 시작하던 너는 웬일인지 웃지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로 한참을 커피만 마시던 너는 마침내 화면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안녕, 안나. 이제 날씨가 제법 추워졌네.”


네 말처럼 사람들은 긴 팔과 겉옷을 입고 돌아다녔고 너 역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 것을 보니 한동안 영상을 찍지 못한 것 같았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너랑 싸웠거든..., 이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한데 이해해줘. 이걸 보고 있는 건 미래의 안나니까.”


우리가 사귄 뒤로 싸운 날은 많았다. 사소한 것부터 서로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까지. 엘사가 떠나기 직전에는 거의 매일 싸우곤 했다. 나도, 엘사도 서로의 감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엘사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행동했고 그 이유를 몰랐던 나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불안해했다. 끝까지 입을 다문 엘사에게 화가 났고 엘사는 조금의 시간도 줄 수 없는 거냐면서 나에게 화를 냈다.


홧김에 나오긴 했는데...결국 들어가야겠지..하아, 그래도 그렇지. 내가 나가는데 잡지도 않더라? 나 진짜 섭섭했어, 안나.”


엘사가 집을 나갔던 날.

이날은 기억한다. 시작은 청소였다. 외출 후 돌아온 엘사가 집이 더럽다며 청소를 하자고 했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너에게 맞선 내가 원인이었다. 그동안 싸워도 절대 집을 나간 적은 없었는데 엘사는 겉옷을 챙겨 순식간에 집을 떠났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꼴에 자존심이 있다고 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물론 그 뒤로 엘사를 찾으러 온 동네를 돌아다녔었지만.


후우...그래도 이건 미래의 안나가 보는거니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할게. 내 말투가 이래도 이해해줘...., 이걸 본다는건 나무 아래에서 세 번째 편지를 봤단 거겠지?”


너는 턱에 손을 괸 채로 퉁명스럽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내게 화가 났다는 티를 내면서.


거기 우리가 고백한 장소였잖아. 서로한테.....근데...잠시만. 아니, 그래도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집이 더러운데 청소하는건 당연한거 아냐? 거기다 오늘 청소 당번은 너였어! 가뜩이나 오늘 병원도 다녀와서 힘들었는데....”


분한 듯이 팔짱을 끼는 네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병원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너는 한참 동안 창밖을 보며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젠 진짜 준비해야 하나 봐.....병원에서 입원하는 게 좋을 것 같대. 본격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이걸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사실대로 말하면...너는 분명 옆에 있겠다고 할테니까. 그리고 병원비도 만만치 않을거야. 그런데 안나, 나는 그걸 원치 않아. 나 때문에 네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턱 막혀온다. 너의 존재가 내 삶의 이유였어.

아프다는 이유로 나를 떠난 거라면 너무 잔인하잖아, 나에게.


...나로 인해 네가 망가진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 이게...내가 널 떠나는 두 번째 이유야.”


변명이야, 엘사. 너는 그저 나를 위한다는 핑계로 네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거야.


안나, 이걸 보는 미래의 너는 아마 화도 나고 내가 미울지도 몰라. 모든 원망은...내가 다 낫고 돌아오면 그때 받을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줘. ...다음 영상은 어쩌면 병원에서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그랬어.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내가 그것도 이해 못 해 줄까 봐? 내가 네 말처럼 모든 걸 포기했을까봐

최소한 나한테 미리 언질은 줄 수 있었잖아. 나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줬으면 좋았잖아.


사실 의미 있는 곳에서 찍고 싶었는데 오늘은 홧김에 나온거라 어쩔 수 없네. 다음 편지는 집에 숨겨놓을게. 어차피 청소도 잘 안 하는데 뭐! 어디가 좋을까?..., 우리 사진 액자 뒤가 좋겠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사진 알지? 이사하고 나서 처음 찍은 사진...그때 참 좋았는...? 안나?”


그 순간 화면이 흔들리고 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창밖의 나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 다급하게 옷을 집어 들더니 화면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이 바보야 이렇게 추운데 왜 반팔로 돌아다녀?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지금 나 찾으러..? 전화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화면이 어두워졌다. 영상은 그게 전부였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은 별것 없었다. 전화를 받고 카페에서 나온 엘사가 반팔만 입은 나를 보며 잔소리를 하고 결국 내가 사과하면서 엘사의 가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어느 날, 해프닝으로 끝난 평범한 기억. 나는 여전히 우리가 함께 했던 꿈을 꾼다

너의 잔소리와 미소가 함께 했던 날의 꿈.


나는 가끔씩 네 꿈을 꾼다.




추천 비추천

16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비난 여론에도 뻔뻔하게 잘 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03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60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0 3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10:24 11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10:18 7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1] ㅇㅇ(115.138) 07:23 43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2 16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9]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31 49 8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65 10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37 0
1123670 프로즌 ost는 언제 들어도 좋아 [2] 설갤러(118.43) 06.06 13 0
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17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0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5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3 0
1123665 이럴 때 정신놓으면 갓반인 된다 [2] ㅇㅇ(223.62) 06.06 25 0
1123664 말라간다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4 0
1123663 단편이나 떡밥 내놔!!! ㅇㅇ(211.234) 06.06 13 0
1123662 점심때되니 [1] ㅇㅇ(211.234) 06.06 16 0
1123661 오늘 갓생사는척 함 ㅇㅇ(211.234) 06.06 11 0
1123660 그르릉 ㅇㅇ(110.47) 06.06 10 0
1123659 69날이 다가온다 ㅇㅇ(223.62) 06.06 16 0
1123658 안돼 오늘은 휴일인데 일찍 깨버림 ㅇㅇ(223.62) 06.06 11 0
1123657 첫글 [1] ㅇㅇ(115.138) 06.06 19 0
1123656 엘둘기 [2] ㅇㅇ(110.47) 06.05 32 0
1123655 아까 낮잠자면서 엘산나 생각했는데 [1] ㅇㅇ(223.62) 06.05 23 0
1123654 설설설설쥬미미 ㅇㅇ(223.62) 06.05 15 0
1123652 털복숭이들아 [1] ㅇㅇ(106.101) 06.05 21 0
1123651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5 15 0
1123650 마법의 단어 [1] ㅇㅇ(223.62) 06.05 26 0
1123649 디씨 짤 다 터져서 나와 [1] ㅇㅇ(110.47) 06.05 28 0
1123648 안나는 마냥 해맑지anna [1] ㅇㅇ(223.62) 06.04 25 0
1123647 갤죽..... [2] 마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4 24 0
1123646 부히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4 17 0
1123645 오늘도 살아남았다 ㅇㅇ(223.62) 06.04 15 0
1123644 쥬흐흣 ㅇㅇ(110.47) 06.04 13 0
1123643 숨 좀 돌리자 ㅇㅇ(223.62) 06.04 17 0
1123642 화요일이잖아 ㅇㅇ(112.157) 06.04 18 0
1123641 프2 그립다 [1] ㅇㅇ(112.157) 06.04 26 0
1123640 [1] ㅇㅇ(112.157) 06.04 18 0
1123639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4 19 0
1123638 벌써 6시 ㅇㅇ(223.33) 06.04 18 0
1123637 새벽 4시 ㅇㅇ(115.138) 06.04 17 0
1123636 벌써3시 설갤러(118.43) 06.04 16 0
1123635 쥬미들아 나 픽 하나만 찾아줘ㅠㅠㅠㅜㅜㅠㅠ [3] 설갤러(211.59) 06.04 71 0
1123634 설하 [1] ㅇㅇ(110.47) 06.03 22 0
1123633 회로는 돌아가는데 글이 안나오네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3 22 0
1123632 대표가 진상이라던 후기 [2] ㅇㅇ(112.157) 06.03 72 6
1123631 ㅅㅂ [2] ㅇㅇ(112.157) 06.03 32 0
1123630 엘산나 티비 시리즈 나올것 ㅇㅇ(223.38) 06.03 2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