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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REMAKE/ 운전교육 -43-

화로불판구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1 02:44:03
조회 255 추천 19 댓글 7



그녀의 걸음은 참 빨랐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나는 거리를 두며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열심히 쫒아갔다. 내가 뒤따라 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 학교가 있는 동네로 돌아가지 않고. 작은 골목들이 만들어낸 큼지막한 미로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허름한 상점, 낡은 아스팔트 길. 문 닫은 시장골목. 하수구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어디로 가는건지 짐작도 하지 못하며 눈을 쫒아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었을 때. 지하상가처럼 달빛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버린 그녀를 실수로 놓쳐버렸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내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눈 안에는 살면서 처음 보는 풍경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슬럼가. 술집들의 네온사인 빛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런것도 없이 저 멀리 희미하게 비추는 가로등 빛만이 아른거렸고. 빨간 벽돌담으로 둘러쌓인 골목을 빠져나오자 작은 광장과도 같은 공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벤치는 모두 부숴져 앉을수가 없었고, 가로등은 고장난 채로 방치되어있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갈피도 잡지 못했기에 당황하며 핸드폰을 들어 지도를 열어보았고. 그때 핸드폰 빛을 보았던 건지 멀리서 하이에나 같은 몇 명의 사람들이 그림자를 일렁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뭐야 이 쥐새끼는.”


“여기가 어디인줄 알고 와? 썩 안꺼져?!”



세 명. 그 남자들은 펑퍼짐한 힙스터같은 청바지를 입고 찢어진 와이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입었다는게 아닌 잠깐 몸 위에 두르고 있다고 하는게 더 알맞을 정도로 구멍이 숭숭 뚫린 비위생적인 복색을 가졌다. 그들은 으레 내게 고함을 지르며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나는 빛을 발하던 핸드폰을 집어 넣고 그 남자들이 한걸음씩 걸어올때마다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젠장, 조심했어야 하는건데.



“형님, 이 년 미모를 보아하니 어디 써먹을데가 있지 않을까요?”


“아서라, 딱 봐도 학생같은데..이봐 학생~ 여기는 함부로 오는곳이 아니에요~ 어서 집 가세요~”



다행이 나를 위협하려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볼일은 없겠지. 손을 휘적거리며 흐리멍텅한 눈을 날리는 그들을 보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내리깔며 남자들을 지나쳐 광장을 가로지르려 할 때. 남자들 중 한 명이 내 손을 낚아챘다.



난 떨리는 눈동자를 보이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는 그들의 눈빛을 맞서 바라봤다.



“내 친구 찾으러 왔는데요”


“여기 니 친구들 없어요~ 가세요~ 좋은말로 할 때..”



아니, 분명 이길로 지나갔을 꺼야. 왜 나는 못 가게 막는거야. 손목은 얼얼하니 당겨왔고, 그들에게 잡힌 손목을 풀기위해 팔에 힘을 주고 잡아당길수록 그들은 내가 돌아가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점점 더 강하게 자신들 쪽으로 끌어갔다.



그래도 돈을 뺏어가거나 때리려는 시늉은 하지 않는걸 보니 나름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인 듯 했다. 아니면 내 모습이 겉으로 보아도 비루하게 짝이없어서 별 관심을 끌지 못한것이겠지.


“가라고 했다”


“아저씨. 비키세요”


“뭐? 아저씨?! 누가 아저씨래!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때리게요?”



어차피 이렇게 된거 한번 객기를 부려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미친년인줄 알고 보내주겠지. 마치 라푼젤처럼.



“...이거 안되겠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남자들 중 가장 힘이 세 보이던 남성이 팔을 걷으며 우악스런 팔뚝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 팔은 허공을 가르고 하늘 위로 뻗어올라갔고, 나에게 내리쳐 질 주먹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고 얇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려야했다.



“야! 건들지마!!”


“..아..예..”



남자의 주먹이 내 얼굴 앞에서 멈췄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라푼젤의 목소리. 그리고 학교에서는 단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거칠고 허스키한 저음의 톤.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조심스럽게 서서히 뜬 뒤 눈앞에 보이는 풍경. 남자들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라푼젤의 실루엣을 보며 뒤통수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내 집에서 밖을 나섰던 그 모습 그대로. 라푼젤은 가방을 매고 또각또각, 내가 서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매일 보았던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



“안녕 라푼젤.”



난 얼빠진 얼굴이 되어선 미소를 띄며 날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그녀도 어이가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이 있지않을까 확인했다. 그리곤 짤막한 인사를 건넨 내 말을 무시해버리고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너도 이게 무슨 일인지는 이해했을 꺼야,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을께. 라고 나에게 말해오는것만 같았다. 아니,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는걸. 너는 왜 이곳에 있고, 이 남자들은 왜 너의 말을 듣는거지?.



“하아..다음부터 여기 절대 오지 마. 알았어?”


“으응..알았어..”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내가 몰래 그녀를 뒤 따라 왔다는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을 곁에 두며 자신이 갈 길을 걸어가버렸고, 나는 어떤 반박이나 이 상황에 대한 궁금증도 묻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다음날, 라푼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원래 없던 학생이었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셨다. 반 아이들도, 급식실 아주머니도. 라푼젤은 원래 자주 학교에 나오지 않던 학생이 아닌가. 하는 당연한 것 같은 정의를 내리고는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난 그녀가 내 눈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걱정되었다. 그리고 싫었다.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우악스런 몸을 가진 남자들을 단 한마디로 멈추게 할 수 있는걸까. 왜, 나에게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해주지 않은걸까. 아직도, 나는 사람을 사귈만한 준비가 안될걸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진심으로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고민이 고민을 낳고, 습관처럼 우정이라는 것을 하루종일 정의하고 있을 때. 이미 나는 밤이 된 하늘을 바라보며 어제의 그곳. 라푼젤을 만났던 광장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다 보면 라푼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멍청한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여기 맞는 것 같은데..”



삼십여분쯤을 기다렸을까. 당연하게도 라푼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어두운 밤 서늘한 봄바람을 잔뜩 맞아가던 나는 얇게 입고 나온 옷을 후회하며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참으로 미련하네 엘사 아렌델. 오늘로서 멍청한 일 베스트 파이브 안에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어.



그렇게 차가운 핸드폰을 손난로 마냥 꼬옥 쥐고는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길바닥의 돌멩이를 톡톡, 치고 있었을 때. 광장의 입구, 저 멀리서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정확히는 사람들이었다. 수십명의 사람들. 비슷한 복색을 하고 각목, 야구배트등 무기들을 하나씩 집은 남성 무리들. 나는 어디선가 비추어오는 가로등 빛과 달빛에 반사되어 땅 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 그림자들이 수십개로 늘어나는 것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날 발견하지 못했을 꺼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돌아 도망치려 했을 때. 내 눈 앞에는 다른 무리의 남성들이 줄지어 광장으로 밀려들어왔다. 젠장. 오늘 참 멍청한 일들을 자주 하네.


그들은 처음 광장으로 들어온 남자 무리들과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야! 새끼들아 오늘 끝장내줄께!”


“들어와~ 들어와 버리지들아!!”



그리고 두 무리는 서로를 많이 싫어하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두 무리의 남성들 사이에 낀 나는 어둠 속으로 빠져나와 도망치려했다. 하지만 그들이 던진 화염병에 광장은 더 없이 밝아졌고, 그들은 내가 사이에 있다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일순 피어난 불꽃 때문인지, 각자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는것처럼 보였다. 내 얄팍한 몸은 보이지 않는거겠지.



“개새끼들.. 다 죽여!!”



양쪽 무리들 중. 누군가 비명처럼 외친 고함과 함께. 기름과 물이 광장이라는 큰 통에 들이치듯,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위협적이게 내지르며 나를 사이에 두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그들이 달려오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쓰나미를 눈 앞에 두고 얼어버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래도 본능은 살아 있는지. 눈 앞에 커다란 각목이 다가왔을 때. 나도 모르게 몸을 숙이곤 동그랗게 말아 팔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서로는 서로를 죽일 듯이 두드려패고, 발로 걷어차며, 무기를 휘둘렀다. 다른 색깔을 가진 물감이 섞이면 결국 검은색이 되버리듯이. 두 무리들은 크게 부딫히고는 자연스럽게 누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옆 사람이 자신의 동료라는것만을 믿으며 눈 앞에 있는 것이 머리가 달린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피가 튀어가는 그 사이에. 나 역시도 어디서 날아왔을지 모르는 주먹과 발길질에 치여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 끌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몸을 버둥거리고 있는 사이 날아온 각목을 피하지도 못하고 맞아버렸다. 순간 세상이 핑 돌았다. 잠깐의 기절, 정신이 돌아왔을때는 이미 중심을 잃고 광장 바닥으로 기울어져 가는 내 몸을 느낄수 있었다.



이대로 죽는걸까.


넘어져가는 몸과 풀려버린 다리. 점점 가까워지는 시멘트 바닥.



그때, 누군가 나를 감싸안았다.



“이야~ 이거 완전 돌머리네..괜찮아??”



그토록 보고싶었던 그녀. 라푼젤 피츠허버트였다.



“으응..”


“어?..야! 너 피나!!”


“..아...”



나는 이 말을 뒤로하고는 온몸에 힘이 빠져버려서 눈만 뜬 채로 비틀비틀 거렸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은 깨어있었지만 목 아래로는 내 몸이 아닌것만 같았다. 세상은 뱅글뱅글 돌았고, 구토가 올라오는걸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라푼젤은 그런 나를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식간에 내 얄팍한 몸을 들쳐업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왜 여기있니. 왜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거야. 왜 무기를 들고있어. 왜 그런 옷을 입고있는 거야.



가슴이 저려오던 질문들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라푼젤의 비명과도 같은 고함 덕분에.



“이씨!.. 야! 막아! 못 뚫게 막아!! 너 따라와!”



그녀는 자신과 같은 하얀색 스즈키복을 입은 남성 하나를 잡아 당기고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폭력의 현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옷 이곳저곳에는 무언가 묻어있다. 아마도 핏물이겠지. 나를 업은 라푼젤과 그녀를 돕는 남자들. 우리들은 순식간에 다른 무리들의 남성들에게 둘러쌓였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검은색과 반짝이는 야구배트들이 가득했다.



“이새끼들..뚫어!!”



라푼젤은 잘 싸웠다. 무거울 것 같은 나를 업고도 자유롭게 발길질을 남자들에게 먹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에게 각목이 날아오면 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고개를 황급히 돌리며 탈출구가 없을 것 같은 지옥 속에서 빠른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피하기 바빴다.



“야!! 숨쉬어! 쓰러지지마!”



난 라푼젤의 악바리같은 거친 고함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뜨기 전까지 난 행복한 꿈을 꾸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포근한 따듯함이 온 몸을 감싸안았고, 접혀있던 기억속을 떠올렸다. 하늘이 맑던 좋은 날 책을 읽고있던 어린날의 엘사 아렌델. 옆에는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신다. 그리고 멀리서 라푼젤이 손을 흔든다. 왜, 너가 여기있는거야. 왜, 가슴이 따듯해지는거야. 왜,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감정들을 뒤흔드는 거야.



넌 도대체 누구야.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장이 날 반겼다. 내 체향이 남아있는 배게와 이불. 그리고 단단하게 꽉 조이는 이마. 심장은 뛰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방안의 풍경속에는 눈물이 일렁거리는 라푼젤과 방금 있었던 지옥 속에서 보았던 남자 한명이 있었다. 형광등 빛 아래에서 또렷한 그녀의 얼굴. 그리고 하얀 스즈키복에 잔뜩 묻어있는 빨간 핏자국. 머리맡에는 내 주머니에 있던 집 열쇠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래도 이런부분에서는 똑똑하네.



“미안하다.. 병원으로 가면 잡힐지도 몰라서..”



그렇구나. 잡힐지도 모르는구나. 병원에는 분명 경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겠지. 오늘 병원에는 피묻은 하얀 스즈키복을 입은 채 아파하는 사람들이 참 많을텐데.



“아니..그런게 있어..뭐 중요한건 아니고..우선은 정신 차렸으니까..이거 내 그..부, 부하가 사온 약인데.. 이거먹고..”



그녀는 횡설수설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참 너답지 않은 모습이네. 처음이야.


“...”



라푼젤은 나에게 약봉지 하나를 건넸다. 조심스레 뻗은 팔 안에 담긴 진통제와 항생제. 잠시동안 내 얼굴에 그것들을 들이밀던 그녀는 아차, 하며 집 열쇠가 올려진 탁상위에 고이 올려두었다.



“그런눈으로 보지마라..아무튼 몸 조심하고..”


“....”



궁금한게 정말 많은데. 입이 안떨어지네. 어디서부터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야 얘 괜찮은거 맞아? 벙어리 된거 아니야?”


“..뭐, 괜찮지 않겠습니까. 눈도 잘뜬거같은데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남자에게 일갈하는 라푼젤. 이마에 둘둘 말아진 붕대는 저 남자가 덧덴 것이라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과자봉지를 뜯어서는 와작와작 씹고있었다. 그거 내껀데. 아껴먹으려고 남겨둔건데.



“내 친구야 임마. 말 좋게해”


“..죄송합니다.”


“야 말좀해봐...진짜 문제있는거 아냐?”


“..어..왜..”



끔뻑끔뻑, 눈동자만 굴리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아, 나 말 할수 있구나.



라푼젤은 내 목소리를 듣자 침대에 쓰러지듯이 주저 앉았다. 내 손을 붙잡고 신께 감사를 비는 듯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언제라도 눈물방울이 흘러내릴것만 같은 눈동자를 하고선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하아아..다행이다..사람 놀래키고 있어! 난 또 머리맞아서 어디 문제생긴줄 알았네..”


“..괜찮아..”


“그래 그럼..나 이만 가볼게..”



벌써 간다고. 저녁밥이라도 먹고가지. 아니, 내 물음에 답은 해주고 가지.



뒤 돌아 방을 나서는 그녀. 그때 직감으로 알았다. 지금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영영 인생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중에 한명이 되버릴 것 같다고.



“라푼젤”


지끈거리는 두통. 세상이 도는것처럼 구역질이 올라오는 정신에 어떤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 목소리에 나가던것도 멈춘 채 뒤를 돌아본 그녀. 어떻게든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지만이 그녀를 진정한 친구로서 인정할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헤어져버리면 너무나도 아쉬웠으니까.



“너..뭐야”


“..응? 그게 무슨말이..”


“뭐하는 사람이야.”



떨리는 목소리. 그 속에 나만의 결연함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꿈을 꾸었을 때. 손을 흔들고 있던 라푼젤의 모습속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지금 피묻은 스즈키복을 입은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행복도 담겨있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만나오며 수 없이 많은 얼굴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웃는얼굴, 지루한얼굴, 피곤한얼굴, 햇빛을 맞을때의 행복한 얼굴, 그리고 지금. 슬픈 얼굴.



그리고 떠올렸다. 낡은 그녀의 가방과 구멍이 뚫려있던 구닥다리 운동화가. 그게 내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야 나가있어.”


“예? 그냥 가시는게..”


“나가있으라고”



남성은 먹던 과자봉지를 들고는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현관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집안에 나와 라푼젤 두명의 인기척만이 남아있는걸 확인한 그녀는 침대 앞에 털석 주저앉아서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 체념한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둘 뿐이네.”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힘없는 영혼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나와는 다른 눈을 하고 있다. 생기넘치는 새싹의 열정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봐.”


“방금 물어봤잖아. 뭐하는 사람이냐고.”



그녀는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스즈키복의 지퍼를 내려서 옷을 반쯤 벗었다. 내 눈안에는 검은색 브레지어가 있었다. 탄탄한 근육들이 잘 갖추어진 몸이 있었다. 갈라진 복근이 있었다. 그리고, 온 몸을 수놓은 문신들이 있었다. 이레즈미. 한그루의 벚꽃나무와 그 밑에 잠들어 있는 고양이. 용솟음치는 물줄기. 그리고 여우가면.


“어때, 무슨생각이 들어?”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



내 말에 라푼젤은 표정을 찡그렸다. 처음보는 얼굴. 반쯤은 후회속에 담겨있다. 나머지 반은 깊은 고민이 피어나고 있다. 인생을 담은 고민. 평소의 나처럼 자잘한 고민이 아닌 정말 목숨걸고 지켜내야하는 것들에 대한 고민.



“DOA 갱단이라던가..야쿠자라던가..들어봤어?”


“..뉴스에서는..”


“거기 대빵이 우리 아빠야.”


그녀는 나에게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이야기했다.



고아로 세상에 눈을 뜬 아이. 아무것도 모를 갓난아이였던 그녀는 지금의 아빠의 손에 입양되어 길러졌고, 라푼젤 이라는 이름은 그때 당시에 유행하던 동화 속 공주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조직폭력배의 중역을 맡고 있었고, 숱한 싸움들 끝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오게 되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라푼젤의 인생은 그녀의 아버지를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온몸에 새겨진 문신을 거울 너머로 보며 눈물을 흘리던 자신이 있었다고.



친모와 친부의 생사도, 이름도 모른다. 그저 죽음 끝으로 자신을 몰아내는 남자를 아버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뿐. 그렇기에 강해져야 했다. 어느새 자신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조직안에서 누군가의 인사를 받으며 살아가고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때는 이미 그들은 자신을 그들처럼 같은 조직원으로 바라볼뿐. 누구도 학생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라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뭐야,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네”


“..힘들겠다.”


“..풉, 걱정해줘서 고맙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모두 들려준 그녀는 이제 볼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었다. 벚나무와 고양이는 빨간 핏물이 묻은 하얀 스즈키복 속으로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닫혀있던 방문의 손잡이를 잡은 그녀. 난 그녀에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말을 던졌다.



“맨날 싸우러 다니는거야?”


“뭐 그렇지...세상에 안보이는 곳에서도 여러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니까.”



“하고 싶어서 하는거야?”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그건 왜 물어봐”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거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



그녀는 뒤 돌아 나를 노려봤다.



“...이제부터 아는 채 하지마. 너무 많은걸 보여줘버린 것 같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얼굴을 구겼다.



“..쪽팔리게..”



그리고 처음으로. 스스로를 부끄러워 했다.


나가버린 라푼젤과 방안에 남겨진 메아리. 난 그렇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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