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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꼭두각시의 칼 03~04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4 22:19:46
조회 506 추천 21 댓글 5



기반 썰.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nowpiercer2013&no=911059




01~02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nowpiercer2013&no=917570







5.


안나는 고아원의 바래진 연녹색의 지붕 위에서 매티어스가 말한 식량 자루를 옆구리부터 어깨까지 감아 묶고 있었다. 간만에 내리쬐는 햇살은 바람과 함께 습한 린든의 공기를 말려주었다. 안나의 눈에는 풀이라곤 전혀 없는, 벽돌과 굴뚝으로 이루어진 지붕의 숲이 있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보이는 항구에는 정박 중인 포경선에서 인부들이 갓 잡아 피를 바다에 물감처럼 흘리는 거대한 고래 한 마리를 끌어내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이 린든의 위에 깔려 있어도, 린든이 가지고 있는 탁한 모습까진 바꾸지 못했다. 린든과 하늘은 위치가 뒤바뀐 기름과 물 같은 관계였다. 오직 비구름만이 비누처럼 둘을 섞이게 만들었다. 요상한 감상을 마친 안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저 멀리, 높이가 거의 비슷한 지붕들 사이로 2층 정도의 높이로 유독 튀어나와있는, 폐건물과, 쥐 죽은 듯 연기도 나지 않는 굴뚝을 가진 넝마 할멈의 오두막이 보였다.



"오케이, 죽지 말고... 미끄러지지 말고... 가자!"



심호흡을 마친 안나는 냅다 지붕의 끝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끝에 다다르자, 안나는 무릎을 크게 굽힌 다음, 다음 지붕을 향해 뛰어올랐다. 몸이 공중에 뜬 고양감을 느끼며, 안나는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 사이를 고양이처럼 빠져나간 다음 한번 공중제비를 돌아 다음 지붕에 착지했다. 순간, 안나의 몸이 미끄러져 뒤로 넘어질 뻔 했지만, 가까스로 허리를 굽혀 추락을 면할 수 있었다. 안나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처럼 쿵쾅거리며 뛰었지만, 안나는 그런 위험에 도전하는 성격이었고, 그 흥분은 이루어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저저저... 저것 좀 봐. 고아원 여우가 또 지붕을 타고 있어."



보이지 않는 지붕의 밑에서, 린든 주민들이 안나를 의식하는 말을 외쳤다. 린든에서 지붕을 거쳐 뛰어다니는 사람들은 '검은 고양이' 도적단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 햇살보다 더 강렬한 스트로베리 블론드의 안나가 있었다. 주민들은 안나의 넉살과 잽싼 행동들을 보면서 입을 모아 '여우 같은 아이'라고 칭했고, 안나는 주민들 사이에서 '고아원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안나! 얘! 이따 이 편지좀 전해 줄 수 있겠니? 우체국에만 전해주면 돼!"


"금방 갈게요! 아저씨가 일을 시켜서요!"


"안나! 지난 번에 깡패들 쫓아내 준 거 고마워! 일 끝나면 우리 집으로 와! 계란 떡 좀 싸줄게!"


"어어어! 내가 지금 급해서! 이따 말해, 이따가!"



안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외치며 눈 앞에 나타난 높다란 지붕을 마주했다. 안나에게 또다시 통증이 찾아왔고, 안나의 눈앞의 매끄러운 벽에는, 겨우 발 끝만 딛을 수 있는 틈새들이 촛불을 가져간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벌써 12번째였다. 어느 순간 찾아온 두통은 안나에게 이상한, 그리고 정확한 환상을 보여주었다. 안나는 처음에 미래를 내다볼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으로 두통을 반기었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벽을 탈 때, 그리고 대련을 할 때 상대방의 칼이 어디서 치고 들어오는지에 대한 것만 보여줄 뿐이었다. 안나는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누르며 벽을 향해 달려들어 틈새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손가락 끝에 모든 힘을 집중시켜 틈새들에 후벼넣은다음, 거미의 다리를 가진 개구리처럼 벽을 능숙하게 올랐다.


'뭐... 청부엔 도움이 되겠지.'


안나는 굳이 지붕으로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청부'라는 것 자체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더러운 일이라고 매티어스 아저씨가 어느날 안나에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매티어스는 안나에게 후드를 쓴 악마들에 대해 얘기해 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이고, 그들의 길은 땅으로만 국한되지 않았기에, 제국의 눈 아래에서 자신들의 범죄를 손쉽게 이룩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나는 후드의 악마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지붕 위로 뛰어다니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아찔한 순간이 몇 있었지만, 덩달아 벽을 타는 연습도 수반되었기에, 안나의 팔에는 벽에 긁힌 상처를 동반한 잔근육이 눈에 띄게 붙었고,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복근마저 뚜렷이 나타날 정도였다. 청부를 해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군에 들어가기 위해 안나는 고단수를 택했다.









6.




똑 똑도 똑똑, 다섯 번의 노크가 폐건물 위 오두막의 문에 두드려진다.


"할머니, 계세요?"


안나는 있어도 무방한 열쇠구멍에 입을 가져다대고 넝마 할멈에게 말을 걸었다. 안에선 곡조를 모르는 콧노래가 흥얼거렸다. 넝마 할멈이 있다는 소리였다.


"저예요, 안나!"


타박, 타박. 마치 깃털보다도 가벼운 발소리가 안나가 서 있는 문을 향해 가까워졌다.


"붉은 여우가 왔구나, 탐스러운 털을 가진 여우가."


"털이 아니라 머리카락인데... 매티어스 아저씨가 먹을 것을 전해 드리랬어요. 문 좀 열어 주실래요?"


문고리의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안에서 나온 사람은 두 눈이 탁한 회색빛으로 띄고 있는, 장발의 머리를 송곳으로 고정시킨 '넝마 차림'과 다를 바 없는 옷을 입은 노파가 나타났다. 넝마 할멈이 덜덜 떠는 손으로 안나의 볼을 더듬으며, 이내 안나의 양갈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여우가 맞구나. 이리 들어오렴."



안나는 넝마 할멈의 말에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난로는 꺼져 있었고, 고장난 벽시계는 유리판에 금이 가 있었다. 한쪽 벽을 차지한 책장에는 안나가 모르는 언어들이 쓰여진 책들이 먼지를 덮고 잠에 들어 있었다. 그 옆의 작은 탁자에는, 황동색 동전 몇 개, 그리고 흰색 쥐 한마리가 안나를 반기려는 듯이 앞 다리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안녕, 크림스프."


크림스프라 불린 쥐는 안나에게 이름을 듣고는 탁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안나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머리 위로 올라가 연신 찍찍거리며 울었다.


"우리 고양이가 널 만나서 반갑다는구나."


'쥔데요...'


안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짧은 반박을 겨우 밀어넣었다. 


"자루는 여기에 놓아두고 갈게요. 아우..."


"왜 그러니, 새끼 여우야?"


넝마 할멈이 잠시 비틀거리는 안나를 비쩍마른 손으로 잡아세웠다. 안나의 눈에는 과장 섞어서 백골과도 다름 없는 몸인데도, 이 노파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있었다.


"아뇨, 요즘 두통이 자주 일어나서 그래요. 금방 괜찮아져요."


"오오, 이 여우의 아픔을 어찌 할꼬. 잠시만 기다려 주려무나."


"장구벌레 즙은 싫은데요..."


안나는 몸서리를 쳤지만, 넝마 할멈은 이미 몸을 돌려 구석의 서랍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든 약들은 하나같이 맛이 없었고, 내용물을 알 수도 없지만 효능 하나는 탁월했다. 하지만 안나는 아직 16살에 불과했고, 쓴 것보단 단 것을 더 좋아하는 소녀였다. 문득 안나는 탁자의 옆에 세워진, 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한 제단을 발견했다. 제단은 탁자와 비슷했지만, 위에는 둥글면서도 뾰족한 문양이 새겨진, 손바닥 두 개 넓이의 뼛조각이 네 방향의 철조각에 꽂혀 놓여있었다. 그 위로 은은한 검은 연기와 약간의 흰 가루같은 빛 입자들이 스멀스멀 퍼져있었다.




넝마 할멈은 그것이 '룬'이라고만 말해주고는, 아무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었다. 룬의 뒤에는 철사로 묶여 부자연스럽게 세워지고 쌓여진, 안나의 팔뚝 굵기의 붉은 나뭇기둥들이 있었다. 넝마 할멈은 일전에 안나의 앞에서 이 아웃사이더의 제단을 향해 기도한 적이 있었다. 이단이라고도 불리었기에 안나는 과격하고, 기괴한 기도 방식을 생각했었다. 주시자들이 이단으로 규정하는덴 이런 이유였으리라 생각했지만, 기도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아웃사이더를 외치는 것밖에 없었다.


"다 되었단다. 아기 여우야. 이건 할미의 선물이란다."


서랍에서 원하는 것을 찾은 모양인지, 넝마 할멈이 안나에게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제단 위에 있던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푸른 빛이 감도는 룬이었다.


"전 이런 거 안 받는데요. 아웃사이더도 안 믿어요."


종교를 가지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안나는 넝마 할멈이 건네는 룬을 거절하려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그날 안나의 부모님을 살리려 했겠지만, 그저 몇 몇 늙은이들만 기억해 사라질 이야기로만 남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룬은 약이 아니라 종교에서 쓰는 일종의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되려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것이고, 안나가 이단으로 몰릴 가능성도 높아진다. 매티어스는 모든 사람을 돕고 살기 위해 안나를 시켜 넝마 할멈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심부름과 벌을 내렸지만, 그조차도 아웃사이더에 대해선 경계하는 눈치였다.



'이런걸 가지고 간다면 알몸으로 쫓겨날지도 몰라.'


안나는 한사코 거절하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에도 넝마 할멈은 안나의 손에 룬을 얹어 주었다.



"여우야. 네가 믿지 않아도, 아웃사이더께서 널 지켜보실 거란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너에게 찾아오는 아픔이 조금은 가실 게야."


"아니 그래도 괜찮은...."



그 때, 안나의 머릿속을 휘저었던 두통이 사라졌다.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닌, 고통을 잘라 떼어낸 듯한 갑작스러운 위화감에, 안나는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것 같긴 한데요. 할머니, 대체 저 룬은 어디서 가져오시는 거예요?"


호기심이 생긴 안나가 묻자, 넝마 할멈은 평소에는 듣지 못하는 웃음을 홀홀 내뱉었다.


"룬이 궁금한가 보구나. 이 표식이 보이느냐."


넝마 할멈의 왼손은 붕대로 엮은 듯이 묶여 있었다. 넝마 할멈이 붕대를 풀자, 왼손의 손등에는 룬에 새겨진 동일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웃사이더님과 공허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순수한 유희를 추구하기 위해 나에게 이 표식을 내려 줬단다. 이 표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이 내려주신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 강한 힘을 원하거나, 어디로든 바람처럼 달릴 수 있다거나, 때로는....시간을 멈출 수 있었지."



안나는 넝마 할멈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넝마 할멈이 말한대로 아웃사이더의 표식을 통해 능력을 쓸 수 있다면, 안나가 굳이 넝마 할멈의 오두막까지 찾아오지 않아도 할멈 스스로가 도둑질을 해서라도 식량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흥을 안겨드려도, 그분을 믿지 못하면 모두 허상이기 마련이야. 그 분은 나에게 능력을 계속 유지할 방법을 알려주셨어. 그건 바로 제단을 세워 찬양을 하면 되는 것이었지. 이 룬은 그분을 기리기 위해 내가 찾아내고, 만들어낸 것들이란다. 여우야. 그 분을 당장 믿지 않아도 된단다. 하지만, 언젠가 그분께선 너에게 선택을 내리실 거란다."



어느새 안나는 넝마 할멈이 건낸 룬을 품에 안고 있었다. 안나는 룬을 흘끔 내려다보고는, 자루를 열어 나온 과일 봉투, 말린 고기들과 신선한 물병을 올려 놓고, 텅 빈 자루에 룬 조각을 넣어 허리에 묶었다. 두통으로 나타난 환상은 안나에게 유익했지만, 고통을 통해서 얕은 이득을 얻고 싶진 않았다. 고아원 내 안나의 잠자리에 꽁꽁 숨겨놓는다면 적어도 잘 때만큼은 두통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웃사이더건 인사이더건, 믿지만 않으면 그만이었기에, 안나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콧방귀를 뀌었다.



"전 이만 가 볼게요. 할머니, 다음엔 고아원에 들러주세요. 아이들이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성화예요."


"그래, 그래. 조만간 한 번 들를 테니, 너는 룬을 잘 간직하고 있어 주려무나."


안나는 고개를 푹 숙여 넝마 할멈에게 인사를 한 다음, 열려 있던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지만, 바다 끝의 수평선에서 먹구름이 서서히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안나의 위로는 대여섯 마리의 까마귀들이 울부짖으며 날고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안나는 순간 룬을 받은 것 때문에 까마귀들이 맴돌고 있는 거라고 의심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의 불안을 일깨운 까마귀들은 아직은 맑은, 앞으로 흐려질 남쪽 하늘로 검은 깃털 몇 조각을 흩날리며 무리지어 날아갔다.









7.



빗소리는 저녁 식사의 늦은 손님으로 찾아와 린든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안나는, 누런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불이 꺼진 방안의 2층 침대, 그 중 1층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안 와."


넝마 할멈이 준 룬은 안나의 두통을 죽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후로 찾아온, 커피를 마신 듯한 각성 효과는 안나의 잠을 방해했다. 룬을 어딘가에 숨겨놓고 싶어도, 눈치가 빠른 매티어스가 금방 찾아내 안나에게 따질 것 같았으며, 무엇보다 아이들이 쏘다니는 고아원 내에선 나름 은밀하게 행동한다 자신하는 안나마저 숨길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베개 밑에 룬을 숨겼지만, 뭉그러진 베개의 이질감 또한 안나를 괴롭혔다.


"넝마 할머니한테 뭐 잘못 얻어먹었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책상 위 촛불에 의존하며 조각도로 나무토막을 깎는, 도수 없는 안경을 차고 있는 메가라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빗소리로 가득찬 침실 속에서도 사각사각, 조각도는 나뭇결에 머리를 비집으며 조금씩 울어댔다.


"아니, 오늘 몸을 많이 써서 그런가. 아니아니, 이러면 잠이 와야 하는데, 도통 눈이 안 감겨."



"양은 세 봤고?"



"3천마리까지 셌어."


"체조 안 했지?"



"공중제비 네 바퀴 돌았어. 아아아..."



안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두통이냐, 이단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와 맞닿아 있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거리는 몇 안 되는 가스등이 어둠을 겨우 걷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원초적인 공포를 마주한 것 같아 안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창문을 닫았다.


"언니."


"왜."


메가라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안나의 부름에 답했다.


"나 재워주라."


"나 일 해야 해."


"아직 시간 많잖아. 나 좀 재워줘. 아니면 아무 이야기라도 해 줘."



메가라는 적어도 이 나무를 깎아 가면의 형태까지 만들고 자려 했다.  하지만 점점 집중이 흐트러졌고, 원인은 침대에 누워 자신을 말똥말똥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거는 안나에게 있었다. 안나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다르게 매일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삶을 사는 메가라에게 집중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얘기하면 바로 잘 거지?"


"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력해볼게. 마침 심심하기도 했고."


안나가 몸을 메가라를 향해 돌리며 말했다. 메가라는 잠시 조각도와 가면 토막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작은 유리갓을 초 위에 고정시켰다. 이내 책상 부근에만 주어졌던 빛은 유리에 반사되어 방의 천장을 밝혔다. 안나는 조금 밝아진 방을 보며 누근한 요람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았고,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이불이 덮힌 다리를 휘저었다. 이불은 구겨지면서 안나의 다리를 완전히 감쌌다. 메가라는 2층 침대의 위로 향하는 사다리를 올랐고, 이내 시트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천장을 한 번 걸러 안나의 귀로 전해졌다.


"어디서 들은 건데, 제국의 왕실에서 마법이 나타났었나봐."


"마법? 마녀를 말하는 거야? 그리고, 무슨 마법?"


안나가 천장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얼음...마법이였대나. 송곳같이 날카로운 얼음들이 공주님의 침실로 향하는 문고리와 문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수십마리 고슴도치가 붙어있는 것 같았대더라."


"그래서 공주님은 어떻게 됐어?"


"뒷이야기는 나도 몰라. 너무 와전되있는 것 같기도 한데...솔직히 이 세상에 마법이 어디 있겠어. 과학이 모든 걸 증명하고 있는데."


메가라는 창 밖의 잠들어 있는 린든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메가라는 누가 마법을 쓰던, 누가 마법으로 해를 입든 상관하지 않았다. 설령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결국 린든의 복지는 매티어스의 고아원으로 겨우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마법보다 중요한 건 돈이었다. 메가라는 주머니에 남아있는 동전 하나를 들어 천장에 묻은 빛에 비추어 보았다. 앞면에는 크로커스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10이라는 숫자와 함께 짤막하게 크로네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도 마법이 있다면 하루하루가 즐거워질 것 같아."


안나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안나는 넝마 할멈의 오두막에서 나온 뒤 심부름을 하면서 할멈이 해준 말을 되새겼다. 안나는 넝마 할멈이 진짜 초능력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두통이 나아지는 것은 룬에다가 약초를 으깬 즙을 발라 안나가 맡아 나아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날아다니고 힘이 강해진다는 것은 그만한 매력이 있었다. 적절히 마법을 쓴다면, 앞날이 비극으로 점쳐지기보단 희극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역시 넝마 할머니가 너한테 이상한 말로 꼬드꼈나 보구나."


"아니야, 그냥 한 말이거든."


"알았으면 어서 자. 이 정도 얘기면 됐지?"



메가라가 침대에서 일어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더 누워있다간, 해야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이불을 눈 밑까지 올리고 메가라를 빤히 쳐다봤다.


"아직 안 졸린데..."



"그럼 내가 가면 만드는 거 도와줄 거야? 저거 깎을 수 있겠어?"


메가라는 엄지를 치켜들고 등 뒤 책상에 놓여진 나무토막들과 조각도를 가리켰다.


"깎다 보면 저절로 잠이 오게 될 거야."


"아아아, 아니아니아니. 그냥 잘게. 미안!"


안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리고 인위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를 내었다. 메가라는 피식 웃으며 안나의 이불의 배 부근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고는 의자로 돌아가 조각도랑 미처 깎지못한 나무토막을 집어 작업을 재개했다.





그것은 안나의 행복했던 청소년기의 어느 밤이었다.








8.



따따딱, 두 목검이 허공에서 매섭게 서로의 몸을 부딪혔다. 안나는 몸을 빼 매티어스의 목검을 자신의 것과 떼어냈고, 이내 몸을 비틀어 매티어스의 복부를 향해 오른손에 쥔 목검을 힘껏 찔렀다. 하지만 매티어스의 튜닉에 닿기도 전에, 그는 목검을 안나의 목검에 내리쳤고, 안나의 검은 방향을 크게 잃어 밑으로 빗겨나갔다. 덩달아 안나도 목검의 무게, 그리고 매티어스의 충격에 중심을 잃어 그의 앞으로 넘어지려 했다.


"안나, 오늘 대련은 여기까.."



매티어스가 대련 종료를 알렸지만, 안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손에서 검을 놓은 안나는 그대로 풀밭에 몸을 반 바퀴 구르고는 다리를 펴 매티어스의 복부에 명중시켰다. 뻑, 단순한 충격이 아닌, 안나의 힘과 무게를 실어 직격해 난 소리는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안나의 발차기에 맞은 매티어스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때요, 제가 이겼죠? 아저씰 제압했잖아요."


안나가 뒤로 한번 굴렀고,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매티어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지껏 자신에게 대련을 신청한 아이들 중에서 유효적인 공격을 성공한 아이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티어스의 앞에 의기양양하게 양손을 허리에 잡고 우쭐해 있는 안나는, 검이 아닌 발을 이용해 이를 성공시켰다.


"이런, 한 방 먹었구나. 발차기로 날 공격하다니 생각도 못했어."


"아저씨가 가르치는 검술은 너무 딱딱해서 나름 돌파구를 찾았죠."


"딱딱하다고?"


안나는 볼에 손가락을 가져가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고민했다. 매티어스가 가르치는 검술은 확실히 상대방을 제압하는 데엔 효과적이었다. 안나는 이것을 다른 아이들과의 대련에서 확실히 실감했다. 하지만 매티어스같은, 군에 직접 몸담은 베테랑을 이기기 위한 실력이 부족했다. 청부를 통해 부모님을 죽인 사람들을 알아내려면 분명 싸워야 할 때가 있을 게 분명했고, 무조건 안나보다 싸움 실력이 나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몇날 며칠을 룬에 머리를 맞대며 생각해낸 것이 막싸움이었다. 린든은 주먹싸움이 자주 오가는 진흙탕의 거리였기에, 안나는 종종 심부름과 벌을 받으러 고아원 밖을 돌아다니며 싸움판을 지켜보았다. 술꾼과 깡패들의 싸움에는 발과 주먹이 주를 이뤘고, 종종 예측할 수 없는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안나는 매티어스의 검술에 막싸움에서 본 동작의 일부를 접목시켜 보았고, 눈 앞의 큰 벽과 같은 매티어스를 대련으로 이겨 자신의 가설을 입증시키는데 성공했다.



"너무 칼만 쓰는 것 같아요. 몸싸움도 어깨로 밀치는 것의 파생형밖에 없고."


"체술이 부족하단 말이니?"


"네, 무작정 칼로만 맞서지 말고 손과 발을 써서 제압하는 것도 좋은 거 같은데요? 제가 방금 아저씨를 제압한 것처럼요."


매티어스는 안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꼼수로 보일 수 있지만, 싸움에서 예절을 찾는 것은 왕족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고, 유흥을 돋구기 위해 호위기사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 외엔 전무할 터였다. 매티어스는 안나의 의견에 내심 동감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안나에게 건네주었다.


"네 말이 맞아. 살기 위해선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 법이지, 그것이 불명예스러울지라도 말이야."


"이제 전 오늘로써 대련이 모두 끝난 거죠? 으아아, 이젠 좀 쉴 수 있겠다."


허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는 안나를 본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언니 오늘 졸업이잖아!"


"누난 내일부터 더 바빠질지도 모른다고!"


안나의 동생들이 안나에게 외쳤다. 맞는 말이었다. 안나는 오늘, 6월 21일을 기점으로 고아원을 졸업할 예정이었다. 이미 졸업했던 메가라가 찾아와 안나와 같이 사진을 찍어주기로 했고, 안나는 매티어스 아저씨를 이겼다며 메가라에게 어떻게 자랑할지 들뜬 마음으로 고민했다. 그런 모습이 눈에 밟혔는지, 아이들을 해산시킨 매티어스가 다가와 안나의 어깨를 잡았다.


"안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니?"



매티어스는 이미 안나가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매티어스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원더 영감이 말했던 것처럼, 안나가 그저 과거가 아닌, 미래만 바라보고 나아가길 원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군에서 익히 겪어온 그였기에, 안나가 그저 자신이 가르친 기술로 군에 입대해 먹고 살아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아이들이 모두 사라진 대련장에는 매티어스와 안나만이 남았다.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제가 뭘 할지."


어디선가 불어온 잔바람이 안나의 이마와 목에 맺힌 땀을 식혀 지나갔고, 덩달아 안나의 붉은 갈래도 조금 흔들렸다. 대련으로 격하게 뛰는 심장과는 달리, 안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려고 배워온 거예요. 메가라 언니처럼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저한테는 이게 급선무고요."



"옛날 같았으면 너를 어떻게든 말렸을 텐데, 지금은 널 검으로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어디 흥신소가 널 받아준다고 했니?"



"항구의 '종달새 정보상'에서 절 뽑아준대요."


"벨 씨가? 그거 참 의외야. 그 사람이 사람을 뽑는 일은 아주 드물다고 들었는데."


매티어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안나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저번에 아저씨가 넝마 할머니 심부름 좀 해달라고 하셨을 때, 린든 가에서 활동하던 벨 아줌마네 청부업자가 깡패랑 실랑이 벌이는 걸 해결해 줬거든요."


안나가 목검과 주먹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매티어스는 안나의 '대화 방식'에 씁쓸히 웃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안나에게 내밀었다.


"손 내밀어 보렴."


"오, 돈이예요? 애들 사탕 좀 사주시지."


"돈이 아니니까 어서."



매티어스의 말에 안나는 무심코 쫙 핀 왼손을 매티어스의 주먹진 손 밑으로 갖다 댔다. 매티어스가 손을 폈고, 안나의 손으로 내려온 것은 은빛을 잃은 둥근 삼각형 펜던트가 달려있는 회색 목걸이였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넌 이걸 목에 걸고 있었단다. 아마도... 내 생각이지만, 너희 어머니께서 너를 위해 남기신 유품이라 추측하는데..."


안나는 목걸이의 모양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마치 둥근 빵을 가운데부터 자른 듯한, 삼각형과 반원이 섞여 있고 선을 따라 아주 작은 눈 결정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메가라 정도의 가면사가 할 수 있을 법한, 고난이도의 공예를 안나는 내심 놀라워하며, 목걸이를 목에 걸어보았다. 목줄마냥 짧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여타 다른 목걸이들과 비슷하게 펜던트는 안나의 가슴 윗부분까지 내려왔다.



"안나, 난 이걸 유품으로써 너에게 준 거란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그 목걸이를 밖에 드러내고 다니지 말아주었으면 한단다."


"네? 왜요?"


매티어스가 펜던트를 집어 안나의 옷 속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약간의 간지러움과 함께, 펜던트는 안나의 가슴 사이로 떨어졌다.


"내가 군에 있을 때,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 펜던트와 비슷한 문양을 섬기며 제국 내에서 범죄를 일으킨다는 집단을 들어본 적이 있었어. 이렇게 말하긴 섣부른 판단이지만, 너희 어머니께서... 그 집단에 몸을 담은 것 같다."


"그게 어때서요."


"뭐?"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안나를 보고 매티어스의 눈썹이 조금 일그러졌다.


"전 오로지 제가 추구하는 길만 갈 거예요. 우리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든, 날 살리려고 노력하시다 돌아가셨어요. 난 엄마의 딸이니까, 그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일이 될 지도 몰라. 죽을 수도 있어."


안나는 매티어스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나는 만약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매티어스 같은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매티어스를 양아버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 죽는다면, 저승에서 엄마를 볼 낯은 있겠네요. 적어도 딸이 노력은 보였으니까."


한결같은 안나의 대답에, 매티어스는 하늘 위를 깍깍거리며 날아다니는 세 마리의 까마귀를 올려보았다. 뭘 말하든, 안나의 심지를 꺾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저씨 말대로, 이 목걸이는 잘 숨기고 있을게요. 그리고, 복수만 이루고 나면... 군에 들어가거나, 메가라 언니 일을 보조하려고 해요."


2년 전, 메가라가 고아원을 졸업하면서 남기고 간 조각도와 나무토막들은 안나의 눈썰미를 키우는 데에 일조했다. 틈틈히 검술 연습과 파쿠르 연습을 하면서 가면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 했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안나는 조각도의 나무손잡이가 갈라져 부서졌을 즈음이 되서야, 가면 구실을 할 수 있는 장식 없는 가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래. 네 계획을 꺾지 못하겠고, 이건 네가 해야 할 일이니 더는 말리지 않으마. 하지만.. 네가 정해 놓은 복수만 끝내길 아저씨는 바라고 있단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정량을 지키렴."


매티어스가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네가 할 일을 대비해서, 이전 졸업생들보다 조금 더 많이 넣었단다. 어딜 가든 굶진 말으렴."


두 손으로 매티어스의 주머니를 받아들은 안나는 거의 90도가 되도록 매티어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안에 들어가 있으렴, 메가라가 슬슬 도착했을 거야. 오늘 아니면 사진 찍을 날은 없으니까 서둘러."



"네, 아저씨, 고마워요!"


안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쳤고, 그러다 문의 옆 벽에 뒤통수를 부딛혔다.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매만지는 안나는 이내 헤헤 웃으며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안나는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구운 닭고기 냄새를 맡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넝마 할멈에게 받았던 룬을 포함해 짐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벨의 사무소에 마련된 작은 방에 미리 옮겨 두었지만, 18년간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겪어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삐그덕, 세월이 흘러 녹슨 경칩이 짖어대는 비명을 들으며 문이 열렸다.


"얘, 좀 늦었다?"


"메그 언니!"


항상 새벽이면 의자에 앉아 조각도로 가면을 깎던 자세 그대로, 하지만 다리는 꼰 상태로 메가라는 앉아서 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가라는 오프숄더와 다단 프릴이 어우러진 우윳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적당히 태워진, 건강미 넘치는 메가라의 목선과 어깨, 그리고 조금 크게 영글어진 메가라의 가슴께가 안나의 눈에 들어왔다. 좋은 의미로, 색기가 있다고 안나는 생각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향해 시선을 떨구었다.



"나 보고 싶었지?"


메가라가 다가와 안나의 양갈래 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응, 아참, 깜짝 놀랄 만한 사실 하나 알려줄까? 나 오늘, 드디어 아저씨를 이겼어!"


"아저씨의 신경을 건들어서 이긴 거 아니야?"


안나는 밖을 쏘다니면서, 아주 가끔 메가라와 마주친 적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메가라에게 '졸업식 때까지 매티어스 아저씨를 대련으로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메가라는 안나가 능력이 있다지만, 너무 자만하는 것 같아 믿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메가라는 안나가 땡땡이를 제외하곤 다른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왔음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니거든. 뭐, 꼼수가 있었지만 이기면 장땡 아니야?"


"그건 맞지."


메가라는 책상 위에 놓여진, 상자 하나를 들어 안나에게 내밀었다.


"오늘따라 나한테 돈을 주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거지?"


"돈 아니고 가면이니까 잠자코 열어봐."


안나는 장난스럽게 혀를 빼꼼 내밀며 메가라가 내민, 장식없는 나무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흰색과 푸른색, 정확히는 눈의 색이 깃들어진, 눈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가면이 있었다.



"귀여운데? 왠일이야? 언니가 이런 스타일을 소화할 줄은 몰랐는데."


안나는 메가라가 극사실주의 컨셉의 가면을 주로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나도 복수 이후로 하게 될 지 모르는 메가라의 가면 작업을 보조하기 위해, 도서관의 책들을 꾸역꾸역 읽으며 조각도를 놀린 적이 있었다.



"기분 전환으로 딱 하나만 만들었어, 그러니까... 안나 네가 가지게 될 이 가면은 부르는 게 값이 되는, 메가라 위트니의 역작이란 소리지. 봐, 내 고유 마크도 있잖아."



메가라는 손가락으로 눈사람 가면의 눈가를 톡 톡 두드렸다. 손가락의 끝에는 마치 사진을 가져다 붙인 듯한, 극한의 사실주의로 그려진 검은 유리잔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이름은 '올라프'야. 그 가면도 둥글고, 올라프란 이름도 둥글고. 어때?"


"잘 모르겠는데...."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안나가 고심하는 눈으로 가면을 바라보자, 메가라가 올라프를 들어 안나에게 씌우고, 뒤로 이어진 가면의 끈을 고정시켰다.


"나쁘지 않아. 광대 같다는 점만 빼면."


"광대 춤은 배운 적도 없는데."


안나가 창가에 비춰진, 가면을 쓴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돈이 아닐지라도, 피가 섞이지 않은 평생의 인연이 전해준 가면이었기에, 안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서리 하나 모나지 않게 아껴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안나, 잘 곳은 있어?"


아직 메가라는 안나가 청부 일을 시작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메가라는 졸업 이후 2년간 가면사 일을 진행하며, 귀족들 사이에서 나름 이름을 날렸고, 가면의 값과 귀족들의 값비싼 선물들을 팔아 치워 에버튼 가에 개인 작업실, 그리고 두 개의 화장실을 설치한 세 채의 집을 지은 뒤였다. 여차하면 그 중 하나를 안나에게 줄 용의도 있었다. 인연은 돈으로 엮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안나를 위해서라면 아깝지 않다고 메가라는 생각했다.


"없으면 우리 집에서 머무르지 않을래?"


하지만 메가라의 바람과는 다르게,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종달새 정보상의 벨 아줌마가 날 고용했어. 사무실 안쪽 방도 내주셨고, 여기보다 더 좁긴 하겠지만... 뭐 어때, 이 길이 불편할 테니까, 불편함에 익숙해져야지."



"오, 네 입에서 꾸며진 말이 나오는 건 6년 만인거 같은데?"




메가라의 칭찬에 안나는 괜스레 우쭐해져 큼큼 헛기침을 했다.


"언니가 없을 동안 가면 제작 연습도 하면서 책들을 좀 읽어 두었...잠시만."



말을 마치지 못하고, 안나는 메가라가 칭찬을 한 게 아니라 장난을 친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 바보 아니거든!"




"진짜? 연구원이나 주시자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건 아니고오!"


안나는 아직 올라프 가면을 벗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화를 삭이고 있는 그 모습은 퍽 귀여워 보였다.


"알았어, 알았어. 너 똑똑해졌어. 인정할게. 오케이."



메가라가 안나를 폭 안으며 머리를 톡톡 두드리자, 안나는 팡 소리가 날 정도로 메가라의 등을 감싸안았다.



"...도대체 이런 힘은 어디서 나는 거야?"


"언니가 나 못 놀리게 운동을 좀 해뒀지. 뭐... 3층 난간에 매달려서 팔근육을 엄청 단련시켰거든. 참고로 이거 언니는 못 풀지도 몰라."


안나는 메가라의 어깨에 턱을 괴고 속삭였고, 메가라는 졌다는 듯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놔 줘. 가면 망가질라."



메가라가 안나의 등을 톡톡 두드렸고, 안나는 그제서야 메가라에서 감았던 팔을 풀었다. 뻐근한 허리를 우두둑 소리내며 핀 메가라는 남아있는 등의 통증에 주먹을 쥐어 탁탁 두드렸다.




"일 끝나면, 나한테 올 거지?"



"글쎄, 군으로 갈 수도 있고... 복수가 끝나면 생각해 보려고."



"안나, 하지만 미리 생각해 두는 것도 좋을 거야. 군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들어가서 일하는 것도 벅차고, 가면사도 연습에 기간을 두면 말짱 도루묵이거든."



안나는 메가라의 현실성 있는 충고에 귀를 기울였고, 잠시 고민해 보기로 했다. 매티어스의 기술을 가지고 군에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메가라를 보조하며 가면을 만들 것이냐, 하지만 그 고민도 얼마 가지 않았다. 매티어스는 어디까지나 안나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진로를 가지길 원했으니, 가면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언니 말대로 가면사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내 성격으로 군에 들어가면 분명 사고만 칠 것 같잖아?"



"그건 깔끔하게 인정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아는 공작들에게 널 경호원으로 추천할 수도 있으니까."


"추천해준다면야 나야 땡큐지."



안나가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고, 메가라를 향해 한쪽 눈을 감아 윙크를 보냈다. 메가라는 경멸의 시선을 안나에게 보냈고, 안나는 재치있게 웃어넘겼다. 언젠간 끊길 웃음이지만, 최대한 지속되기를 안나는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안나의 자그마한 바람은 3일 뒤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말았다.



쥐를 매개로 한 괴질이, 제국의 곳곳에 창궐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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