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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도박죄] 카페인 - 4

불멸에관하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6.18 1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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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신기하게도 더 이상 아무런 짜증과 불만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친근했다. 


  예전에 어디서 봤던 사람인가? 하고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저렇게 빛나는 얼굴을 가진 사람은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걸까?


  혹시 나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나? 하고 생각해 봐도 그럴 리가 없었다. 비루하고, 싸가지 없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서 뭘 바란다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여기 커피 내 왔어요. 입에 맞는지 한번 드셔 보세요.”


  어느새 가게 주인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고 등 뒤에 서 있었다. 바와 같이 긴 테이블 위에 커피잔과 더 가져온 초콜릿을 놓고선 카운터 뒤로 돌아가 자신과 마주 보았다. 


  “한번 드셔 보세요! 입맛에 딱 맞을 거에요.”


  가게 주인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겠지? 조금은 껄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찻잔도 참 아기자기하면서 예쁘네. 달콤 쌉싸름한 향기가 코를 잔뜩 자극했다. 


  꼴깍- 씁쓸함이 입 안을 감돌고, 따뜻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와 허전하던 속을 조금 채워주었다. 조용히 초콜릿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혀 끝에서 사르르 녹아내린 초콜릿이 주는 달콤함이 커피와 만나 감미로운 조화를 이루었다. 아. 조그맣게 벌려진 입 사이로 반사적으로 짧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 모금, 바싹 말라 있던 마음에 이상한 감정이 차오른다. 신경을 자극하는 감정은 이질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은 감정이었다.


  텅- 테이블 위에 텅 빈 찻잔이 놓였다. 


  “우와, 순식간에 다 드셨네요. 어때요?”


  “...”


  평소 같았다면 머릿속에 떠오른 오만 가지 감탄사 중 하나를 반사적으로 내뱉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많은 감탄사 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간질거리는 이 자극은 뭘까, 알 수가 없었다. 


  “저기, 괜찮아요?”


  천천히 두 눈을 감자 빛 하나 없이 어두운 공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온기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공간 속에 자신이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얼어붙기라도 할 듯이 옷자락에는 서리가 잔뜩 끼어 있었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주위로 퍼져나간 서리 속에서 거대한 얼음 결정이 피어오른다. 바깥과 격리하듯이 자신을 완전히 감싸버린 얼음 결정은 귓속에 절망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야, 너 미쳤냐? 우리가 오냐오냐 잘해 줬으면 감사합니다~ 해야지, 주인을 물어? 어디서 5급짜리가 3급한테 개겨?


  어휴, 저 여자 잘 나간다고 어깨에 힘 들어간 거 봐. 통제부 들어갔다고 해서 자기가 4급이라도 된 줄 아나?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아무 의미 없이, 진정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추워… 


  주변의 한기가 자신의 몸을 뒤덮는다. 천천히 얼어붙어가는 몸과 함께 의식이 멀어져 간다. 더 이상 남은 희망도, 열정도,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자신을 격리시킨 얼음 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쩌적-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얼음이 녹아내리고 등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불꽃보다도 더 따스한 빛이 자신을 감싸자 그제야 마음을 간질거리던 이 감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눈을 뜨자 가게 주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혼란스러운 감정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손으로 방금까지 커피가 담겨 있던 찻잔을 감쌌다. 잔에 남아 있던 따스한 온기가 차갑던 손을 덥혔다. 식어가는 찻잔이 아쉽다는 듯이 잔을 만지작거렸다. 


  “아, 잠시만 기다려요.”


  자신이 눈을 뜨고 잔을 아쉽다는 듯이 만지작거리자 그제야 안도한 가게 주인은 빈 잔과 그릇을 뺏다시피 낚아채고는 테이블 뒤편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리자 주인은 커피와 초콜릿을 새로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조심스럽게 잔을 잡자 가게 주인은 어서 마셔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와는 다른 씁쓸함이 미미하게 풍겼다. 목구멍으로 따스함이 다시 한번 넘어간다. 


  “고마워요.”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누르며 말했다. 따스하지만 이질감이 가득한 감정을 무시하고 떨리는 손을 숨겼다. 생소한 감정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마음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이 감정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려웠다. 자신의 인생을 가득 채운 고난과 시련이 자신의 귓속에 속삭였다.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결국 고통받게 될 것이라고. 


  “잠시만요!”


  여성의 목소리가 등을 돌려 가게를 나서려는 자신을 붙잡았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카페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이었다. 


  도망쳐, 안나. 또 멍청하게 속아 넘어갈 거야?


  세 발짝 도망친다. 여성은 네 발짝 걸어 다가온다. 이제 네 걸음. 


  숨겨. 느끼지 마. 보이지 마. 


  두 발짝 도망친다. 여성은 다시 네 발짝 다가온다. 이제 고작 두 걸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감정이 자신을 머뭇거리도록 만들고 있었다. 


  제발, 말을 들으라고!


  한 발짝 도망치고, 두 발짝 다가온다. 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단 한 걸음, 한 걸음만 가면 되었다. 하지만 다리가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갈피를 못 잡고 짧게 혼란에 빠진 사이 여성은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성은 자신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자신은 여성을 고개 푹 숙이고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짧은 침묵이 유지되었다. 


  “수고했어요.”


  여성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에 맺힌 이슬방울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따스한 손길이 눈을, 그리고 볼을 매만졌다. 고개가 들리고, 여성의 모습이 눈 앞에 환하게 비쳤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스한 손길에 온몸의 맥이 한 번에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자신을 여성이 꼭 품에 안아주었다.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한다. 여성이 입고 있던 제복의 어깨춤이 자신의 눈물로 젖어갔다. 여성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울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치 마음속에 쌓였던 울분을 전부 토해내기라도 하는 듯이 눈물은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마음을 조금 추스를 수 있게 되었다. 


  “못 볼 꼴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펑펑 운 덕인지 목은 잔뜩 쉬어 있었다. 


  “마음은 좀 편안해졌어요?”


  “네, 덕분에요.”


  다행이다. 여성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 안나 도, 예요. 그냥 안나라고 부르시면 돼요.”


  “성이 도?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음… 신원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나요?”


  “네, 맞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럴 리가 없는데… 여성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시선을 느낀 듯 정신을 차렸다. 


  “앗, 미안해요. 잠시 뭣 좀 생각하느라.”


  배시시 웃는 여성의 모습을 보며 찻잔을 들었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잔은 여전히 따스했다. 


  “... 그래서, 그쪽은요?”


  커피를 홀짝이고 초콜릿을 집으며 물었다. 


  “네?”


  “이름 말이에요.”


  아… 맞다. 여성은 실실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엘사, 엘사라고 불러주세요.”


  엘사.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듣자마자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된 듯이 잊히지를 않았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쿵쿵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왜일까, 그저 이름일 뿐인데 마음은 왜 이렇게 미쳐 날뛰는 걸까. 


  “예쁜 이름이네요.”


  “히, 고마워요. 하지만 제겐 안나 이름이 더 예뻐 보이는걸요!”


 예뻐 보인다고?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그리고 어색한 단어였다. 저런 말을 빈말로라도 들어 본 적이 있었을까, 기억을 되짚어 본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들은 온갖 비아냥과 욕설을 들어가며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던,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던 과거의 기억들 뿐이었다. 


  “... 고마워요.”


  다시 텅 비어버린 잔을 탁자 위에 올렸다.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이미 받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걸요.”


  “부족하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엘사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텅 빈 거리는 어느새 슬금슬금 기어 나온 부랑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매캐한 연기 사이로 지독한 쓰레기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그런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카페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한기가 손을 파고들어 오른손을 시리게 만들었다. 


  “언제든지 들러주세요!”


  그리고 뒤에서 엘사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네? 얼마든지요.”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초콜릿이 가득 담긴 봉투를 쥔 오른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궁금해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가 절로 끄덕였다. 그런 자신의 반응을 지켜보던 엘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 오면 알려줄게요!”


  피식 싱겁게 웃으며 카페를 나섰다. 고마워요. 아직까지는 무언가가 어색한 듯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카페 문을 닫고 나갔다. 멀리서 봐도 수북해 보이는 초콜릿 봉투를 품에 꼭 안은 채 달렸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지나 낡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곰팡이 냄새가 자신을 반겨주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품에 소중하게 꼬옥 안고 있던 봉투를 꺼냈다. 혹시나 어디 눌린 곳은 없을까, 오면서 흘리진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낡아빠지고 텅 빈 냉장고의 문을 열고 초콜릿을 조심히 쌓았다. 아무리 냉장고가 작다고 해도 카페 주인이 얼마나 많이 챙겨줬던지, 초콜릿은 냉장고를 뒤덮고도 한 뭉텅이가 남아 있었다. 


  “아 씨… 녹으면 안 되는데.”


  아직도 봉투 속에는 초콜릿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에라, 안 녹겠지. 모르겠다- 냉장고 문을 쾅 닫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얇은 이불 사이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한기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머릿속에 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사.


  생각할수록 참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내일 다시 한번 가 봐야겠어.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평소 자신을 괴롭혀 오던 불면증이 오늘은 쥐 죽은 듯 잠잠했다. 마음을 간질이는 감촉을 느끼며 아주 오랜만, 아니, 처음으로 얼굴에 작은 미소를 드리우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엘사는 그런 안나를 창문 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다닥 뛰어가는 안나의 모습을 보고 엘사는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안나. 그리고... 미안해, 안나.”




22/81

안나의 성은 존 도/제인 도에서 따옴.

갈기갈기 난도질당한 안나의 마음을, 그리고 그런 안나의 마음을 엘사가 보듬어주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이게 잘 됐을지는 모르겠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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