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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팬픽] Whiskey Bonbon -4

ㅇㅇ(14.32) 2020.08.23 22:14:40
조회 358 추천 31 댓글 11



출근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엘사는 집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방금 전 경악스러운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 오늘 또 온대.’ 엘사는 눈을 내리깐 채 간절히 호소했다.


“우리 당장 가게 문 닫자.”
“소용없어, 주먹으로 뚫고 들어올 걸.”


이제 엘사의 심박수는 분당 100회를 돌파했다. 그러게 어쩌다 그런 약속을 해선...... 그녀를 애처롭다는 듯 주시하며 올라프가 혀를 찼다.


“네가 강하게 나오는 여자에게 꼼짝도 못 하는 병이 있는 건 알지만, 이번 기회에 내가 알려준 ‘위기상황에서 침착하기’를 활용해 봐.”
“그 위로, 정말 하나도 도움이 안 돼.”


분만실 앞을 서성이는 남편처럼, 엄지 손톱을 깨문 채 쉬지 않고 카운터 안쪽을 왕복하는 엘사에겐 분명 다른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다행히 어제 얘기를 해보니까, 어느 정도 소통은 되는 편이더라고.”
“다행? 잘 구슬려서 더는 오지 않게 했어야 다행이지!”
“그렇게까지 잘 통하는 수준은 아니야.”
“그럼 대체 무슨 얘기를 했는데?”


올라프가 머릿속으로 어제의 참사를 떠올렸다.



*



안나가 들이닥치기 직전까지의 바는 아주 평화로웠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어제의 그 손님’이 카운터를 향해 성큼성큼 직진하는 것을 목격한 손님들은 담소를 멈추고 언제라도 도망갈 채비를 했다. 흠흠, 오늘의 유일한 바텐더인 올라프가 용기 있게 나섰다.


“오늘도 오셨네요?”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안나가 말했다.


“순순히 여자 바텐더를 내놓는 게 좋을 거다.”


물론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그녀는 “여기 여자 바텐더도 있죠?”라고 물었다만, 적어도 그가 듣기로는 저렇게 느껴졌다. 아, 이 사람도 결국 극성팬이 되고만 건가? 올라프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친구는 오늘 휴무예요.”
“......왜요?”


‘왜요’라니, 불쌍한 내 친구는 얼굴이 잘났다는 죄로 휴일도 없이 일해야 해? 그녀의 당돌한 질문에 올라프는 카운터를 짚은 채로 얼어버렸다. 그러자 곧 실수임을 깨달았는지 안나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제 말은, 오늘이 원래 쉬는 날이냐고 묻고 싶었던 거예요.”
“아, 처음 오셔서 잘 모르시겠네요. 요즘은 격일로 나오는 편이에요.”


그렇단 말이지? 입수한 정보는 두 개였다. 하나는 자신과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내일은 만날 수 있다는 점. 그러나 호기심을 얻는 대신 참을성을 뭐랑 바꿔먹은 안나에게 있어 내일까지 기다리기란 더없이 못 해먹을 짓이었다. 결국 판도라는 상자를 열고야 말았다.


“어제 저, 저랑 그 바텐더 사이에 있던 일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그럼요, 알다마다요. 올라프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다행히 극성팬은 아닌 듯 하나 아무래도 엘사가 바라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저렇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니, 그녀에겐 분명 어제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엘사가 맡긴 마지막 카드를 꺼내기로 했다.


“그쪽에게 충분히 만족했다고 전해 달랬죠.”


쾅! 갑작스런 굉음에 올라프는 재빨리 아래로 피신했다가, 폭탄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이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으으, 그녀는 주먹을 감싸 쥔 채 괴로와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잘못했길래 남의 가게 카운터를 부셔먹으려고 하는 거지? 슈니발렌의 심정을 이해한 그는 망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신히 여쭈었다.


“뭐, 뭔가 문제가 있나요?”
“시작부터 끝까지요.”


그녀의 주먹이 또다시 슬금슬금 올라갔다. 두 번째엔 진짜 박살날지도 몰라! 올라프가 서둘러 입을 놀렸다.


“걔도 나름 노력했어요! 부디 아량을 베푸셔서 각자의 취향이란 게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 사람 취향이 아니다, 이거예요? 지금? 이제 와서?”
“네, 원래라면 거들떠도 안 보는데 손님이 하도 애처롭게 울길래 승낙한 거라니까요?”


뭐야, 이번엔 지진인가? 손님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거짓말이란 양념을 살짝 보태기로 했다.


“아냐, 진짜 좋아했어! 너무 좋아해서 가게도 찾아가려고 했고, 외투도 안 입고 그 쪽을 잡으러, 아니 따라갔다니까!”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 그만 좀 해요!”
“계산도 다 걔가 했는걸!”


올라프는 마음속으로 한 달 치 아이스크림 비용과 작별을 고했다. 그래, 수리비랑 견줬을 때 이 편이 더 수지타산이 맞겠어. 그러나 특단의 조치에도 그녀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나보다.


“계산- 계산은 또 뭔데!”
“웰컴드링크부터 그 쪽이 어제 마신 칵테일 값이요.”
“그걸 왜 그 사람이 낸 건데요?”
“저, 저도 모르겠네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방금까진 별 걸 다 말했으면서!”


그야 조금 전에 내가 지어냈으니까 모르지! 금방이라도 멱살을 틀어잡을 기세에 그는 주눅이 들었다. 안 되겠다, 친구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진 것 같아.


“그러지 말고 직접 얘기해보는 건 어때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 인간 어디에 있어요?”
“아니, 지금 말고! 쉬는 날에 골치 아파지는 건 질색이라고 말했는데, 안 돼, 요놈의 주둥이가 또!”
“골치? 내가 골칫거리란 말이에요?”
“그, 그 쪽 보고 그런 게 아니라 걔 성격이 그런 거예요, 휴식시간을 방해받기 싫어하는 그런 타입!” 
“아까랑 다를 게 뭐예요? 결국 내가 방해된단 소리잖아!”


오늘의 거짓말 허용량을 전부 소모한 올라프는 카운터에 머리를 박았다. 아무래도 이 허여멀건한 남자에게선 더 이상의 정보를 기대하기란 어려워보였다. 그래, 소란 피우다 괜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떡하겠어. 2보 전진을 위해선 지금이 물러날 때였다. 결심을 마친 안나는 비장한 목소리로 전언을 남겼다.


“소원대로 내일 다시 올 테니,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해요.”


그녀가 다시 바를 떠날 때에도, 가련한 바텐더의 머리는 여전히 카운터 위에 올려져있었다.



**



올라프는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노라고 결심했다. 엘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남은 시간동안 사과 연습이라도 더 하는 게 어때? 표정이라든가.”
“내가 죄라도 지었어? 까짓 초콜릿 때문에 이렇게까지 벌벌 떨어야 해?”
“초콜릿이라구요?”


마법의 단어로 인해 미스 초콜릿이 소환되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설마 내가 한 말을 전부 들은 건 아니겠지? 엘사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매, 매일 오시네요.”


그 순간, 안나는 벌어지려고 하는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생각보다 완전 멀쩡한 사람인데? 아니, 멀쩡한 수준이 아니잖아! 잠시 말을 잃은 안나의 눈치를 살피며, 엘사는 회담을 위해 초콜릿측 대표를 테이블 자리로 안내했다.


“혹시 마실 것도 준비해드릴까요?”
“아, 아뇨, 고맙지만 괜찮아요, 아니다, 역시 그냥 물 한 잔만 주세요, 차갑게요.”


마시고 정신 좀 차리게! 그녀가 물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안나는 제 손으로 양뺨을 찰싹 찰싹 두드렸다.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얼빠’라는 본인의 천성이, ‘금사빠’라는 새로운 시련을 끌어들이려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내가 지금 이틀 연속 뭣 때문에 여길 왔는지 생각해 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잖아!


‘여태 성별의 문턱을 넘본 적은 없었는데!’


어라, 그러고보니 이미 넘어버린 거 아닌가? 혼란스러운 와중,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다 준 그녀가 냉수를 채운 글라스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다 눈이 마주치자, 안나는 깨질세라 테이블 위에 잔을 내리꽂았다. 설마 내가 했던 말을 듣고 화가 난 건가? 바짝 움츠러든 엘사가 자동적으로 사과 멘트를 뱉어냈다.


“제, 제가 기분을 망쳤다면 사과드릴게요.” 


망쳤다고? 아, 그래. 그제야 안나의 정신이 에덴의 꿈동산에서 현실로 복귀했다.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겠다? 다시금 어제의 분노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앞으로 어쩔 노릇이시죠?”


어쩔거냐니? 엘사는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긍정적으로 말했다간 꼼짝없이 당뇨에 걸릴 것이고, 부정적으로 말했을 땐...... 안 봐도 뻔했다.


“무, 무슨 뜻인지 잘......”


엘사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쥐어짜보려 했으나, 이미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한 안나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역효과였다. 뭐야, 지금 발뺌하는 거야? 그녀의 눈썹 끝이 점점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고 온 줄 알아요? 어제 다 전해 들었어요, 바로 저 사람한테!”


가리킨 손가락의 끝엔 올라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양 손바닥을 위로 내민 채 그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저 입방정이 결국! 엘사가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려던 차, 눈앞의 분위기가 더더욱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뉘우침 모드로 돌아갔다.


“죄송해요, 마- 많이 취하셔서 기억을 못 하실 줄 알았어요.”
“취한 건 나고, 당신은 멀쩡했을 거 아니냐구요! 그리고 기억이 안 나면 그대로 없던 일로 할 생각이었던 것처럼 들리는데, 맞아요?”


엘사는 “당연하죠!”라고 말하려 했지만, 연신 손날으로 목을 긋는 올라프의 혼신이 담긴 수신호를 인지하고 서둘러 방향을 수정했다.


“당...... 연히 아니죠.”
“그래요? 그러면 왜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던 건데요?”


이름도 번호도 가게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연락하라고, 텔레파시?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엘사가 항변했다.


“저, 저도 처음엔 노력했어요! 가게라도 검색해보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아니, 유명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정말 단서가 없었어요!”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 한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배려에 감사드려요.”


이 쪼끄만한 동네에 초콜릿 전문점이라곤 한 곳뿐인데, 그마저도 알려지지 않았단 말야? 그래도 좋게 보자니 나름 시도라는 걸 했다는 점이 제법 가상했다. 안나는 지갑을 열어 가게의 명함을 다짜고짜 건넸다.


“제 가게예요.”
 
이건 또 뭐람? 엘사는 얼떨결에 손을 뻗었으나,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고신호로 인해 끄트머리를 잡은 채로 굳어버렸다. 이걸 받았다간 나는 영영 초콜릿 운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런 고뇌를 알 리 없는 안나는 엘사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판단할 따름이었다.


“혹시 부담스러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답이었다. 엘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이... 뻔뻔한......! 안나는 명함을 도로 뺏으려 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힘주어 잡던 엘사마저 주욱 딸려왔다. 졸지에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엘사는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저기, 조금 가까운 것 같은데요...... 그러나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던 안나는 개의치 않고 모든 음절에 분노를 꽉꽉 담아 이 한량을 다그쳤다.


“지금, 내가, 하는, 이 행동이, 부담스럽다고요?”


그러면 달리 뭐라고 표현하겠어요? 엘사는 목놓아 항복을 외친 후 냅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도 이 여자에게 휘말릴 거란 강렬한 예감이 뇌리에 스쳤다. 그래, 내 가게는 내가 지킨다! 각오를 마친 엘사가 으르렁거렸다. 그럼요! 이어서 바로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이번에는 안나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익... 안나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점점 높아지는 언성에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건만, 이미 흥분하기 시작한 엘사에겐 ‘백 스페이스’란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금 줄다리기를 시작하며 엘사가 맞받아쳤다.


“당신에게 맞춰주려고 한 말이죠, 정확히는! 솔직히 말하자면 제 취향은 아니에요!”
“뭐야? 그러면 대체 왜 한 건데! 그 쪽도 생각이 어느 정도는 있었을 거 아니야!”
“당신이 팁이랍시고 떠넘겼잖아요!”
“떠넘겨? 너도 만족했다며! 흥분, 아니, 충분하다며!”
“잘 아시네요, 충분하다는 해석만 빼놓곤!”
“설마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뜻인가요? 이제 질렸다, 이거죠?”
“그래요!”


하, 잘난 것들은 얼굴 값한다더니 역시! 더 이상 못 들어주겠는지 안나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놓으면 어떡해! 의자로 나가떨어진 엘사가 곧장 따지려 들었으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흐린 눈빛에 냉큼 꼬리를 내렸다.


“제, 제가 처음에는 분명 흥미가 있긴 했거든요, 그러니까.......”
“지껄일 말 더 있어요?”
“......양쪽 다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서로 없던 일로 해요! 엘사는 ‘내가 마법의 숲의 정령들을 깨웠어’ 표정을 지어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 하. 안나가 뻣뻣하게 웃었다. 하하. 엘사도 무심코 따라 웃었다.


“좋아요, 인정해 드릴게요.”


참, 눈 좀 감아보실래요? 안나가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네. 엘사는 고분고분 지시를 따랐다.


“......쓰레기로 말이죠!”


곧, 겨울바다보다 차가운 물이 엘사의 얼굴로 쏟아졌다.



***



엘사는 어느새 몰려들어 구경하던 인파를 헤치고, 어안이 벙벙한 채 굳어진 친구의 앞에 우뚝 섰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나 퇴근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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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부터는 2-3일에 한 편씩 올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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