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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꼭두각시의 칼 09~10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0.04 23: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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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16.




"천천히... 제 손 잡고..."


밤을 비추는 거리의 가로등은 이제 켜 있는 때보다 꺼져 있는 때가 길어졌다. 그나마 불이 남아있는 가로등들은 마치 떠내려간 징검다리, 아니면 늙은 노인의 빠진 누런 치아처럼 불규칙적으로 거리를 두며 남은 수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것과 비슷한 밝기를 가진 고래기름 랜턴을 허리춤에 건 안나는 지붕 위에 먼저 올라갔고, 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가 잠시 그친 린든의 밤하늘은 다른 도시처럼 맑았다. 비가 오고 나면서 생선, 비듬, 그리고 죽은 이의 내장과 오물들의 비린내가 올라왔다.


"절대 놓으면, 안돼요."


다락방 난간에 겨우 서 있는 한나는 밑을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보면 안 돼, 보면 안 돼...'



한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가 그친 직후 남아있는 구름들이 달을 비추었건만, 남아있는 빛 부스러기는 안나의 한쪽 얼굴을 비추기에 충분했다. 안나가 한나의 손을 덥썩 잡고, 힘을 들이지 않는 듯 가볍게 지붕위로 올려주었다. 진통제를 발라 멍해진 다리, 그리고 남은 한 손에 쥐어진 목발까지 아슬아슬하게 처마에 걸쳐 있었고, 한나는 몸을 안쪽으로 굴렀다.


"꼭 까마귀를 불러야 하나, 그냥 음성 기록 재생기 쓰면 안 돼요?"


"음성 기록 재생기는 도청될 위험이 있어서..."


한나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한나는 안나의 말이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곳곳에 있는 작은 전파탑을 매개로 정보가 담긴 전파를 디스크가 인식하면, 곧바로 녹음과 함께 글이 적힌 금속 판을 사출하는 신기하면서도 편리한 도구였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밤인데, 까마귀도 잠들 것 같은데... 걔네들도 밤이란 게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안나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린든의 거리를 훑어보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한 점도 없었다. 무엇인가 부서지는, 고함이 질러진, 살아있는, 혹은 이미 죽어있는, 어쩌면 울고 있는 세상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의 가로등은 이따금 수십 마리의 쥐 떼가 지나는 것을 비추어 주었고, 그것은 마치 더러움의 고름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의심했다. 새들은 역병에 감염이 되지 않나? 만약 그렇다면 한나의 까마귀로도 위험할지도 모른다, 쥐 떼야 잽싸게 피하면 되지만, 새는 하늘을 장악할 수도 있다. 안나는 자신의 가설이 틀리길 바랬다. 만약 그랬다가는 단순히 몸만 사린다고 충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저흰 까마귀를 부를 때 특유의 울음소리를 외치거든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일단 들으면, 바로 찾아와요."


'검은 비둘기같은데...'


안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농담을 다시 집어넣었다. 한나의 주장이 맞다면, 며칠 뒤 주시자들의 물건이 오려면 음식이 고갈될 며칠 동안은 사무소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역병이 심화되는 것 만큼, 외출도 최대한 자제해야 했다.


"그럼... 불러 봐요."


"잠시만요. 통 좀 꺼낼게요."


한나가 바짓주머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토큰이 매달린 줄로 묶인 작은 종이 두루마기가 든, 겨우 손가락만한 통을 끄집어낸 한나는, 이내 까깍! 하고 기이한 동물의 울음소리를 냈다. 토끼의 울음소리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불규칙적을 섞은 음성에, 안나는 왠지 모를 불쾌함을 느꼈다. 다시 생각하니, 술에 취해 밤거리를 오가다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은 어느 이름모를 난동꾼의 마지막 유언과도 비슷한 탓이었다.


"안 오는데요?"


안나가 한나에게 묻자, 한나는 기다리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잠시 뒤, 퍼덕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이내 제복을 입고 있는 한나의 팔 위로 하얀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옳지, 착하지. 구구...."


한나가 까마귀의 머리를 쓰다듬자, 까마귀는 한나의 손바닥에 부리를 부비었다. 어지간히 친한 듯 까마귀가 한나의 팔을 성큼성큼 걸어가 어깨에 떡하니 앉았다.


"이름이 뭐예요?"


괜스레 이름이 궁금해진 안나였다. 안나는 한나의 대답을 기다리며 흔치 않은 하얀 까마귀의 이름을 생각해보았다. 비비?, 너무 식상해. 구구? 그건 비둘기잖아. 엘사? 아니아니, 그 분은 공주님이시잖아, 사형당할 일 있어? 안나는 갑자기 이 나라의 공주가 왜 떠올랐는지 스스로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 공주님의 어디가 하얀 거지? 머리카락? 아니면 피부일 수도 있겠다.


"비탈리..인데...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진 마세요. 얘가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한나가 안나의 눈을 피해 비탈리를 다시 팔 위로 움직이게끔  팔 위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비탈리는 꾸꾹, 고개를 기울이며 팔 위로 발을 옮겼다.


"이제 통 묶어서 보내면 되겠네. 아, 먹을 거, 먹을 거 챙겨줘야지."


안나가 랜턴의 옆에 묶어둔 주머니에서 병아리콩 한 줌을 쥐어 비탈리의 부리에 가져갔다. 비탈리는 자신의 주인과는 다른 인상을 가진 사람의 손길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저했지만, 이내 희미하게 피어나는 병아리콩의 단내를 참지 못했다. 콕콕 찌르듯 비탈리는 콩을 쪼아먹는동안 슬며시 안나의 어깨위로 올라탔다. 한나는 그동안 비탈리의 다리에 두루마리 통을 매달았다. 사실 한나는 지원물품 말고도 자신이 반란 모의 의심장소에 체류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안나라는 사람의 검술 실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적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벨이 옆에서 알게 모르게 감시하고 있었고, 반란 모의지 에 관련한 내용은 종이에 써내지 못했다. 당장 급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느긋이 쓸 여유 또한 없었다. 한나는 벨 몰래 따로 써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안나의 실력을 적었다. 비록 더러운 린든 출신이어도, 안나의 성품과 실력이라면 주시자 정도의 직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다 매달았어요. 비탈리에게 물 좀 줄게요."


한나가 뒷바지춤에서 작은 수통을 끌러 뚜껑을 열었다. 맑은 물 냄새에 비탈리가 큼큼거리며 다시 한나의 어깨에 앉아 부리를 수통에 처박고 짝짝거리며 목을 축였다.


"비둘...아니 까마귀는 역병에 안걸리나봐요?"


"일반 새들은 역병에 걸리지만, 저희 주시자에서 기르는 까마귀는 어릴적부터 온갖 약재를 먹여가며 키우거든요. 그리고 얘네들이 땅에서 뭘 주워먹진 않아요. 특히...여기선..."


거짓이 아니지만, 불편한 진실이었다. 안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콩은 깨끗했지만, 비탈리는 결과적으로 주인이 곁에 있었기에 먹은 것이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죄송하긴요. 이곳의 고질적인 문제이고, 여기로 당신을 보낸 그 위쪽 주시자 잘못이죠. 아무렴 어때요. 당분간 당신 덕분에 먹을 걱정은 없는데."


안나는 너스레를 떨며 비탈리의 날개를 가볍게 쿡쿡 찔렀다. 비탈리는 안나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제보니 앵무새의 모습도 희미하게 떠올려졌다.


"대부분 통조림일지도 모르는데..."


"장어 젤리만 아니면 돼요. 그건 엄청...차라리 하수구 물에다 쥐 시체를 넣고 끓여먹고 말지."


안나가 몸서리치면서 장어 젤리를 부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어 젤리는 한나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장어 젤리를 빼달라는 추신을 달아둘까 싶었지만, 두 사람은 펜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미 비탈리는 한나의 팔을 떠나 어두운 구름 밑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분간이 될 법한 하얀 깃털은 어둠이 배어져 카멜레온처럼 사라졌다.


"이제 내려가요.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은 건 아니니까."


안나가 텅 비어진 주머니를 가슴께의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한나는 어둠 속에서 달랑거리는 안나의 랜턴을 쫓는 날벌레처럼 조심스럽게 난간을 통해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다락방에는 저녁식사를 한 뒤 벨이 가져다 놓은 최소한의 가구만이 놓여져 있었다. 침대, 등불, 그리고 서랍, 특히 한나가 소지한 주시자용 스키아보나가 칠이 반쯤 벗겨진 붉은색 3층 서랍의 옆면에 기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작은 초콜릿이 몇 개 놓여있는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많이 피곤할 텐데, 오늘은 푹 쉬어요. 여기서 당신이 할 일은 선교밖에 없겠지만, 어쩌면 하루만에 바..바탈리온?"


안나는 순간 한나의 까마귀의 이름을 까먹었다. b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비탈리요. 비탈리..."


"아, 그래요. 비탈리, 그 애가 돌아오면 바로 물품을 찾으러 떠날 거예요. 감당할 수 있죠?"


안나가 한나의 다친 다리를 보며 말했다. 최소한의 수술 비슷한 처방을 받으려면 린든의 유일한 의사인 크리스토프에게 가야 했다. 안나는 비탈리의 귀소 시기를 3일 가량으로 잡았다. 3일 안에 한나의 다리를 어떻게든 걸어갈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했다. 한나의 말대로 주시자들이 숲과 바다가 마주보는 곳으로 물품을 실은 배를 보내겠다지만, 린든의 사람들은 굶주린 주구와도 같았다. 무엇이든 먹기 위해서 어디든지 뛰어다니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 숲에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더군다나 안나는 아주 오래 전, 고아원에 있을 때 이따금 밤을 틈 타 숲을 찾아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는...


"일단 제 다리가 나아져야 할 텐데... 어쩌면 안나 씨 혼자 가야할 지도 모르겠어요."


한나가 다리를 감싼 부목을 손가락으로 무신경하게 툭툭 건드렸다. 안나의 실처럼 가느다랗게 이어지려 했던 생각들은 한나의 말로 단칼에 베어졌다.


"비탈리의 답장을 확인하면... 안 될 거야 없죠. 그럼, 이만 잘 자요."


안나가 바지 뒤춤에 매달은 랜턴을 손에 들며 사무소의 3층과 이어진 계단식 사다리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 문 잘 잠궈요.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불은 금방 끄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덧붙인 안나는 몸을 다시 돌려 천천히 사다리를 내려갔다. 이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나가 내려간 뒤 남은 사다리는 조금씩 위로 들려지면서 평평하게 접혔고, 이내 입구는 나무바닥으로 메꾸어졌다. 한나는 나무바닥 옆 기둥에 밧줄로 조밀하게 설계된 크랭크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만약 안나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을 물건이었다. 다리를 다친 사람을 가두고 억지로 까마귀를 불러 지속적으로 주시자의 물품을 빼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러지 않았다.


"정말 이상해."



한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산드라가 말했던 내용을 잊을리가 없었다. 다른 이름으로 '미로'라고도 불리우는 린든으로 걸어들어가는 순간, 한나의 인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요, 낡은 밧줄로 고정된 길로틴이었다. 벨, 그리고 [종의 해결 사무소]. 착각이라고 매듭지을 수가 없는 사람과 장소였다. 도저히 반란 모의지, 그리고 모의자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역병으로 인해 사람들은 거의 외출을 꺼리며, 대낮에 사람을 윤간하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성을 기본적으로 탑재한 사람들이었다. 뭉칠래야 뭉칠 수 없는, 메마른 진흙덩이들이 어떻게? 한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다, 접시 위에 놓인 초콜릿 하나를 집어 약을 먹듯 입에 털어넣었다. 달지 않은 초콜릿이 혀끝에 씁쓸함만을 남겨 사라졌다.








17.




"쪽지는 어떻게 됐니?"


다락방을 내려온 안나는 방에 들어가려다 복도에서 벨과 마주쳤다. 벨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나에게 말했다.


"비탈리라는 비둘...아니 까마귀에게 성공적으로 전했어요. 못해도 3일 안에 주시자 측에서 숲의 바다에 물건을 실어 보낼 거 같아요."


"한나 씨가 이상한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


벨이 의심하듯 물었다. 벨의 입장에선 주시자가 그렇게 반가운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린든에서 드물게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 중에는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 혹은 제국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경비대의 칼과 총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세를 확장하려는 깡패 조직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벨만큼 억울하게 린든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죽어가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주시자들의 구원을 기다렸지만, 찾아온 주시자들은 거리낌없이 벨의 사랑을 찢어놓았다. 섬뜩한 하얀 가면을 쓰며, 감청색 제복을 입는 주시자들, 그날의 주시자들 중에서 한나가 있을리는 없었다. 이미 십년도 넘게 지난 일일 뿐더러, 한나의 모습은 이제 막 스물에 접어드는 안나의 또래와도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견습 주시자로 참관을 했다면 모를까.


"별 다른 특이점은 없었어요. 굳이 다른 게 있다면 다리 때문에 물품을 같이 받으러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불안한가봐요."


"하기야, 숲의 바다로 흔적없이 나가려면 하수구를 가로질러 나가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숲의 바다에 갔던 직원의 말로는, 강 조개들이 부쩍 많이 생겼다고 하는데 조심하렴."


강 조개는 드센 고래들을 잡아내는 린든의 어부, 그리고 타국보다 더 많은 함대와 병사를 보유하고 있는 제국의 해군들도 처리하지 못한 바다의 바퀴벌레같은 존재였다. 말은 강 조개지만, 몇년 전부턴 바닷가에서 서식하는 것으로도 확인되었다. 일반 조개라면 문제가 생기지 않고, 강 조개의 진주를 내다 팔면 적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강 조개가 내뿜는 젤리같은 산성 덩어리에 닿으면 화상으로 끝나는 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기름 좀 챙겨가겠니?"


걱정하는 벨을 보며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름을 적당히 흘려보내 하수구 내부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지만, 강 조개의 껍데기는 불과 얼음에도 능히 견디는 내구성을 자랑했다.


"적당히 피해가야죠. 아, 등불은 필요하겠어요. 걔네들이 어느 방향으로 쏘는지 알아야 하니까."


"마음껏 챙겨가렴. 어머,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내가 주책맞게..."


벨은 안나가 내일이라도 당장 숲의 바다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안나가 너무 확고히 말한 탓에, 절로 생겨난 착각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방 문고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제 할 얘기는 거의 끝난 듯 두 사람의 입은 거의 동시에 다물어지고 말았다.


"내일 아침은 뭐로 할 거니?"


오늘은 벨이 아침을 만들었으니, 내일은 안나가 만들어야 했다. 안나가 벨에게 신세를 지면서 부담을 덜게 하려고 시작한 요리는 몇 달 사이에 일상처럼 녹아들었다. 안나는 저녁을 만들고 남은 식료품들의 종류와 양을 가늠했다. 간단하게 장어 살을 발라내 우유를 넣어 끓인 스튜와 밋밋한 샐러드를 내야겠다고 안나는 계획했다.


"장어 스튜량 샐러드? 그리고 빵도 조금 내놓을 거예요."


"그래도 먹을 게 남아서 다행이다. 앞으로 점점 거리에 먹을 게 부족해질 거야. 고아원과 크리스토프의 의원이 무료 배식을 하고는 있지만... 고아원은 황실의 지원이 얼마 전 잠정 중단이 된 상태라... 걱정이구나. 크리스토프도 고아원의 잉여물자로 살고 있지 않니?"


"뭐... 그 오빠가 말 하나는 철썩같이 지키니까요. 할아버지가 그랬다면서요. [절대로 돈 받고 진찰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의 봉사를 실천하라.]"


안나의 유년기를 지켜보고, 안나가 16살이 되었을 무렵, 린든의 유일한 의사인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할아버지의 밑에서 의술을 배우기 시작한, 안나보다 8살 위인 크리스토프는 린든의 환자들의 유일무이한 의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역병이 서서히 린든을 전염시키면서, 그 누구보다도 역병에 노출될 의원이었고, 크리스토프는 그 의원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는 사람이었다.


"이건 아직 생각만 해둔건데... 만약 주시자들의 물품이 와서 좀 남는다 싶으면 고아원이랑 오빠한테 조달할까 싶어요.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한나 씨가 있는 이상 굶을 걱정은 없을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맘구나. 내일 크리스토프에게 가면 안부 좀 전해주렴. 그리고 안나, 그 애가 하는 부탁은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들어주렴. 과욕은 금물이란다."


짖궂은 장난꾸러기를 타이르듯 벨이 걱정하자, 안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한나의 다리를 진찰, 그리고 치료를 받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할 터였다. 무엇보다도 매티어스의 말에 따르면, 매티어스가 누디아와 안나를 의원으로 데려갈 때, 크리스토프가 이제 막 린든에 입주한 매티어스를 위해 의원까지 길 안내를 해주었다고 들었다. 결과적으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기에, 어느 정도의 일손을 들어줄 의향도 있었다.


"내일 점심은 혼자 드셔야겠어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식재료 막 낭비하면 안돼요?"


벨이 알았다는 듯 벽에 기댄 안나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것은 어서 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지 않으면 배고픔이 일찍 찾아오니까, 불필요한 허기는 줄여야 했다. 벨이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자, 안나는 문을 열고 잠자리 위로 뛰어들었다. 장롱 속에 꽁꽁 숨겨둔 방관자의 룬과 어머니의 유품인 목걸이를 의식하면서, 안나는 하루빨리 역병이 사라져 안나의 복수 과정을 재개할 수 있기를 바랬다.










18.

안나는 린든의 거리에 서 있었지만, 거리는 군데군데 조각나 있고, 서로 떨어져 있는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푸른 연무가 하늘에도, 틈새에도, 그리고 안나가 마시는 공기 속에 깔려있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마치 물에 빠진 듯한 이질감을 주었고, 그걸 반증하듯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하늘에 고래 한 마리가 경직된 채 떠 있었다. 안나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언젠가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래서 조각난 거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이따금 고래의 울음소리, 어쩌면 아기강아지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울림이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안나가 거리의 끝 낭떠러지에 서 있게 되자, 어디선가 날아온 벽돌들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법한 계단을 드르륵 거리며 만들어냈다. 깰 수는 있겠지? 안나는 이 꿈이 자각몽이 아니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나는 기억하고 있는 린든의 새 거리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군데군데 갈라진 벽돌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밑을 내려다보지 않고, 눈 앞의 계단에 집중했다. 계단은 안나가 새로운 거리를 밟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새로운 거리는 바닥에 머금은 빗방울이 하늘로 치솟는, 기이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의 푸른 색채가 감돌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 안나는 쓰러져 있는 한 여인, 포대기에 감싸여진 한 아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린든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안나의 기억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안나는 천천히 인파를 뚫고 여인과 아이를 살펴보았다. 청회색의 눈동자, 그리고 볼에 진흙이 조금 묻어있었지만, 왠지 모를 그리운 인상을 가진 미형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안에 있는 아기의 목걸이는, 안나가 차고 있던 목걸이와 똑같았다. 그럼 이 사람은...


"엄마."


누디아, 매티어스와 몇몇 린든 주민들이 들었던, 그리고 신원 미상의 괴한들이 안나에게서 죽음으로 빼앗아간 어머니였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안나는 신기했고, 놀라워하다, 이내 슬픔을 띄웠다. 꿈에서조자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에게 향긋한 미소 한 점 안겨주지 못했다. 안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어머니를 안아들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무게에, 안나는 놀라움을 표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안나는, 그 상태에서 천천히 린든의 사람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고아원에 있을 때 이따금 안나에게 자랑한, 왕이 하사한 라이플을 들고 인파를 막 헤쳐나온 매티어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걱정과 당황이 드러난, 어린 크리스토프의 모습이 보였다. 꿈이라기엔 너무 선명했다. 마치 수많은 조각들을 이어 맞춘 퍼즐처럼 부분적인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사실같았다. 안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축축한 옷을 입고 축 늘어진 자신의 어미를 부둥켜 안을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꿈 속의 공기에 익숙해져 갈 무렵, 거리에 깔린 안개는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안개는 린든의 사람들까지 포함해 안나의 시야를 온통 푸른색으로 채웠다. 어느 순간, 안고 있던 엄마의 감촉도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안나의 팔과 손에서 사라졌다. 또렷했던 정신도 차차 몽롱해졌다. 꿈에서 깨려는 것일수도 있었다. 안나는 무의식의 흐름에 정신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고개가 천천히 뒤로 기울어졌고, 안나는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니, 부딪혀야 했다.




하지만 물과 비슷한 느낌의 액체가 안나의 몸을 감쌌다. 고래의 울음소리는 액체를 지나 희석되어 더욱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이름모를 악기를 망가뜨릴 때 나는 단말마의 느낌이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액체 속에서 안나의 정신은 서서히 잠식되어갔다.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안나의 눈에 갈색 자켓과 빛바랜 청색 바지를 입은, 검은 눈을 가진 사내가 들어왔다. 팔짱을 낀 채로 약간 찡그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겨우 서른 살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남자는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검고 반짝거리는 연기들을 몸에 두른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안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울려퍼진 고래의 울음소리가 안나의 정신을 잠식시켰다.









19.



다행스럽게도, 비가 오는 아침은 열리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한나는 미세한 구린내를 맡으며, 역시 비슷한 마스크를 쓴 안나의 등에 업혀 빠르게 지나가는 린든의 지붕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직후, 한나는 의지 3할, 권유 2할, 그리고 강제 5할의 마음을 가지며 주시자의 제복이 아닌 헤진 셔츠와 붉은 조끼, 그리고 약간 헐렁한 바지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유일한 무기인 스키아보나는 안나의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크리스토프의 의원을 향해 지붕 위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나는 이제 안나가 지붕 위를 건너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린든으로 들어오기 위한 목적의 중심부에서 생활하게 된 데다가, 그 이전에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진 않은 시민, 아니 깡패들에게 겁탈을 당할뻔도 했다. 근 이틀 사이에 한나의 머리 끝까지 찰랑거렸던 겁은 이제 귀끝의 높이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하물며 안나의 질주도 별로 무섭지 않게 됐다. 다 생각이 있어서겠지, 한나는 안나의 등과 목 사이에 볼을 묻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벨의 눈에 들어온 이상 다른 곳으로 몸을 옮기면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기 힘들 것이며, 지금은 비탈리의 답장, 그리고 다리의 치료가 중요했다.



"안나, 무슨 일 있어요?"


두 사람에게는 안나의 발소리, 스치는 바람소리, 그리고 스키아보나의 덜걱거리는 소리만이 전부였다. 아침을 먹을 때부터 안나는 별 말이 없었다. 절제된 움직임으로 스튜를 떠먹고 빵을 칼로 천천히 자르는 한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벨도 안나를 의식할 정도였다. 안나는 벨과 한나의 걱정에도 대답하는둥 마는둥 소극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지금 한나가 말을 건 것도, 아침식사 이후 처음이었다.


"안나?"


한나가 잠시 팔을 움직여 안나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안나는 그제서야 어느 지붕 위에 우뚝 멈춰섰다. 한나는 갑작스러운 급정지에 놀라면서, 멀리서 보였던 탑 같은 건물이 조금은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저 곳엔 누가 사는 거지? 안나를 걱정하는 마음의 수면 위로 새로운 호기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때 무슨 일 있었어요? 악몽이라도 꾼 거예요?"


한나가 걱정하며 물었다. 안나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다와 접해져 있어 습한 린든의 기후 속에서도, 안나의 등에 배어지기 시작한 땀의 축축함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네, 잠자리가... 좀 뒤숭숭했어요."


"무슨 꿈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한나의 말에, 대답은 없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들춰내기 싫은 비밀이어서 그런 것일까. 만난지 겨우 하루가 지난 한나로썬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아뇨, 아니아니... 나중에 말해 드릴게요. 지금은 때가 아닌 거 같아요."


안나는 자신의 과거를 들춰내기엔 아직 한나와의 관계가 막 친해진 게 아니어서, 털어놓기엔 이르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당분간 이곳에 체류할 한나이기에, 적어도 숨을 돌리고 나면 얘기할 시간이 생길 수도 있었다.


"혹시 방관자에 관련된 것은 아니죠?"


안나는 한나의 물음에 동요하지 않았다. 방관자라는 이교도의 신은 이름만 들어보았고, 그 신의 선택을 받은 넝마 할멈과의 관계는 그저 매티어스 아저씨의 심부름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꿈이 보여준 과거가 방관자의 짓이라는 명확한 증거 또한 없었다.


"제가 방관잔지 바깥인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안나는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조금이라도 아는 투를 내비쳤다간 집요하게 파고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나는 일단 선교를 하기 위해 들어온 주시자였고, 주시자는 방관자의 흔적과 이교도들을 처리하는 종교집단의 일원이었다. 지금 상태로썬 안나가 한나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만, 한나가 제압당함으로써 들이닥칠 수십, 어쩌면 수백 명에 달하는 주시자들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정말 아니죠?"


"아아아아,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제 조용히 해 줘요. 지붕 뛰는데 집중해야 하니까..."


안나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충분히 쉬었다는 듯, 곧바로 발을 힘차게 굴러 도약했다. 한나는 갑작스러운 안나의 움직임에 등에 몸을 찰싹 붙인 다음, 제발 떨어지지 않고 무사히 의원에 도착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야 했다. 안나의 발걸음이 이전보다 더 거칠어져서였다.








20.



"어, 안나! 여기야, 여기."


안나는 능숙하게 난간과 기둥을 짚으며 고양이처럼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흰 마스크를 쓰고, 누런 와이셔츠 위로 청색 자켓을 입은 크리스토프는 막 아침 배식을 마치고 난 후였다. 그는 작은 수레 위에 남은 수프가 들어있는 고래기름 통을 놓고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무슨 일이야? 뒤에 업힌 사람은 누구고?"


크리스토프가 수프 한 그릇 하겠냐고 남은 그릇 중 하나를 들며 물었다.


"오빠, 이 사람 다리 좀 봐줘. 내가 보기엔 삔 거 같은데... 나 알잖아. 의술보다 검술을 더 잘 알아서..."


안나가 업힌 한나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크리스토프가 자켓 속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 한나의 앞에 몸을 숙였다.


"부목까지 한거야?"


"삔 건지 부러진 건지 모르니까, 일단 기름 진통제는 발라줬어."


크리스토프는 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나의 팔을 부축했다. 심하게 다친 건가? 안나는 크리스토프의 태도에 의문을 가졌다.


"안나, 그 수레좀 끌고 안으로 들어와줘. 조심히 들여놔야 해."


"알았어, 또 시킬 건?"


"지금 당장은 없고, 어서 들어와. 온 김에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얘기? 안나는 크리스토프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매티어스의 고아원에서 남은 잉여물자로 생활하며, 이따금 배식 활동을 하니까, 매티어스에게서 안나가 들어야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겨우 추측해낼 뿐이었다.


크리스토프와 안나를 선두로 들어간 의원의 내부는 바깥의 퀴퀴한 공기와는 다른, [화학적이다]라는 느낌의 냄새가 가득했다. 콧속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강제적인 상쾌함에, 안나는 무심코 코를 킁킁거리며 마스크 고쳐 썼다.


"일단 여기 누워 계세요. 잠시 약을 가져와야 하니까, 안나, 그 사람 부목 풀어드려."


크리스토프가 안나에게 부탁하며 진료실 뒤쪽으로 사라지자, 안나는 단단히 묶어둔 부목의 끈을 스키아보나로 조심스럽게 끊어냈다.


"저 사람, 몸집이 엄청 크네요. 의사가 아니라 사형 집행인 같아요."


한나가 안나의 귀에 가져가 크리스토프의 인상을 속삭였다. 안나는 한나의 말에 절반 정도만 동의했다. 덩치는 크지만, 나름 의사의 일도 하고 있으며 무료배식도 진행하고, 무엇보다 매티어스와도 친분이 있었다. 문맹인이 많은 린든의 사람들과 크리스토프를 비교하자면, 그냥 옷을 두껍게 입는 목수 같았다.


"덩치는 저래도 의술 하나는 끝내주니까 걱정하지 마요."


"걱정한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요."


누워서 고개를 조금씩 돌려 내부를 살펴보며 한나가 말을 마쳤다. 그녀에겐 낙후된 의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처음일 수도 있었다. 주시자들의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이곳처럼 더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손에 들고 있던 스키아보나를 다시 침대에 기대어 놓았다. 잠시 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토프가 약품이 들어있는 양철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안나가 근처에 있던, 붉은 시트가 벌어져 솜이 삐져나온 스툴을 크리스토프에게 가져온 다음, 문 바로 옆 벽에 기대어 섰다.


"잠깐만 바지 좀 걷을게요. 혹시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크리스토프가 한나의 바지 소매를 걷어올리며 물었다. 무면허지만, 크리스토프는 린든에서 거의 유일한 의사였고, 환자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 한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크리스토프에게 보냈지만, 그의 시선은 한나가 아닌 부어오른 발목을 향해 있었다.


"시트라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안나의 눈썹이 살짝 기울어졌다. 거짓말을 하는 건가? 왜? 안나는 일단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한나가 잠시 안나를 흘끔 쳐다봤지만, 안나는 물때가 자욱한 창문과 삐걱거리는 천장 사이의 어딘가에 시선을 흘렸다.


"시트라? 음, 여기 사람은 아닌가 보네요? 이곳은 린든에서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시트라는... 처음 듣고, 이국적이예요. 혹시 외지 사람인가요? 지금 바깥..."



"오빠, 이 사람, 밖에서 사람을 죽였어. 한 세 명 정도. 도박빚을 지고 도망친 거지자식들의 목을 따고 경비대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은 걸 내가 발견했어."


안나는 한나의 거짓말에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기로 했다. 거짓말로 시작된 대화에 진실을 넣으면, 한나가 린든에 머무르기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프의 말대로 의원은 린든의 모든 환자들이 찾는 곳이고, 원하든 원치 않든, 홀로 의원을 운영하는 크리스토프로썬 저절로 린든 사람들의 가정사까지 듣기 마련이었다. 한 때는 이 점을 노린 벨이 크리스토프를 섭외하려 했지만, 크리스토프는 '정보를 전하면 누군가가 죽고, 그건 내 일에 안 맞는 거 같다. 하지만 직원들이 다친다면 왕진을 해 주겠다.'라고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거절했다. 


"어우, 정말 살벌한 분이시네. 그래서, 어떻게 여기서 먹고 살 수는 있겠어요?"


크리스토프가 약병에 주사기 바늘을 찔렀고, 이내 피스톤을 잡아올렸다. 초록색의 액체가 통 안에 차올랐고, 한나는 대답을 생각하면서도, 저것이 실제로 검증된 약물인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을 맞이했다.


"당분간 벨 아줌마 사무실에서 머물기로 했어. 뭐...잡일을 좀 하겠지만. 알잖아, 서류 정리라거나, 요리라거나, 장비들 손질이라거나..."


안나는 한나를 대신해 크리스토프의 의심을 사지 않게끔 대충 둘러댔다. 크리스토프도 이후로 토를 달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눈 앞의 시트라가 저지른 몇 건의 살인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최대한 모나지 않으면서 린든에서 살아가려면 자세하게 파고들어 캐묻지 않는 '예의' 또한 존재했다.


"뭐, 잘 해보세요. 정 힘들다면, 여기서 제 보조 좀 맞춰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요. 최근에 역병 때문에 독미나리 진통제, 그리고 마취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거든."


"진통제는 그런다 치는데, 마취제는 왜?"


안나의 질문에, 쉿 하고 나지막이 말한 크리스토프는 한나의 발목 속에 있는 혈관을 손으로 몇번 두드려 찾아냈고, 혀를 끌끌거리며 주삿바늘을 혈관에 꽂아넣었다. 아아, 주삿바늘이 조금 두꺼운 나머지 고통에 차 내뱉은 한나의 신음은, 이내 찾아온 시원함에 멎어들었다.



"조금씩 먹을 게 없어지니까, 사람들이 깨어 있는 것보다 잠에 들어있는 걸 택하고 있어. 깨어 있으면 허기를 느끼니까, 차라리 잠이라도 자서 식량을 최대한 아끼려고 하는 거지. 지금 고아원 쪽도 상황이 조금 안 좋아졌고. 통증은 어때요?"



크리스토프는 안나에게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한나에게 물었다. 한나는 이름모를 약물의 두드러지는 효과에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목의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었다. 한나의 눈이 취해야 할 잠을 발목이 대신하는 것 같았다.


"아픈게 덜해졌어요. 무슨 약을 넣으신 거예요?"


"방금 말한 독미나리 진통제예요. 독미나리 풀을 뜯어서 찧어서 낸 즙을 적은 물에 넣고 졸이고 졸여서 만든 거죠. 제가 지금 보니까, 인대가 좀 늘어나서 그런 것 같아요. 가령 갑작스럽게 뛰어야 했다던가, 아니면 발을 갑자기 많이 써야한다거나 할 때면 가끔 나타나곤 하죠."


크리스토프가 이번엔 하얀 내용물이 들어있는 약통을 꺼냈다. 그가 뚜껑을 비틀어 열자, 약초, 하지만 의원 내부를 가득찬 공기보단 좀 더 향긋한 냄새가 통 속에서 퍼져나왔다.


"이건 진통제는 아닌데, 인대 쪽을 치료해주는 연고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크리스토프가 손가락으로 연고를 조금 덜어내 부어오른 부위에 조심스럽게 펴발랐다. 감각이 둔해진 발목은 시원함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당분간은 격하게 움직이진 말아요. 그러다 인대가 끊어질 수도 있거든요. 또 부목은 다시 묶어두는 편이 좋겠어요. 바닥을 잘못 짚다간 인대 뿐만이 아니라 관절까지 무리가 갈 수도 있으니까요."


크리스토프가 길고 가느다란 청색 천을 자켓 주머니에서 꺼내 끈이 떨어진 부목에 다시 묶었다. 매듭까지 지은 그는 스툴에서 일어났다.



"진통제의 효과가 풀리려면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해요. 그 때까지 누워 있어요. 전 안나랑 할 얘기가 있어... 잠깐, 저 사람들 지금 뭐하는 거지?"


크리스토프는 안경을 벗으며, 창문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나는 누워 있어서 보지 못하였고, 대신 안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눈을 의심했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고기를 자르는 칼, 하지만 장검처럼 긴 날을 가진 흉기를 들고 성난 표정으로 밖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나! 당장 나와!"


그들 중 한 사람이 안나의 이름을 외쳤다.


"안나, 혹시 뭔 사고 쳤어?"


"아니, 안 쳤는데..."



안나는 그들의 걷어올려진 셔츠의 소매 부근을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동그란 원 안에 있는 엄니 모양의 문신, 안나가 아는 한, 그것은 벌린턱 갱단의 심볼이었다. 안나는 어제 오후에 있었던 해체장의 일을 떠올렸다. 굳이 벌린턱이 안나를 찾는다면, 그 일에 관련된 것 말곤 없었다.


"당장 나오라고! 이 씨발련아!"


고함이 멈추고, 의원의 창문이 유리를 흩뿌리며 요란스럽게 깨졌고, 긴 칼이 굴러들어왔다.


"이봐요! 여긴 의원입니다! 당신들도 여긴 건들면 안돼잖습니까!"


크리스토프가 언성을 높이며 깨진 창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분노는 정당했다. 이따금 벌린턱의 갱단원들이 의원을 찾아와 크리스토프의 치료를 받고 돌아가곤 했기 때문이었고, 린든에서 건들지 말아야 할 장소들 중에는 의원이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일종의 선을 넘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그년만 우리한테 넘겨주쇼! 그년이 우리 형제들에게 칼을 댔어!"


"이유가 있었겠죠! 당신들이 린든에서 벌인 구린 짓이 한 두갭니까?"


크리스토프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줍고 깨진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던졌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땡그랑 하고 칼이 바닥에 부닥친 소리가 들렸다.


"네 의원만 멀쩡하면 되지 않나? 어서 나와! 이 의원을 불태워버리기 전에!"


두 손에 칼이 없는, 칼을 던진 듯한 사내가 셔츠 속에서 심지가 꽂힌 술병을 하나, 그리고 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저들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안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스키아보나를 들었다.


"안나, 위험해요. 나가지 마요."


한나의 손이 뛰쳐나가려는 안나의 손을 잡았다. 바깥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한나에게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안나의 싸움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린든에 아는 사람이 안나와 벨 뿐인데다가, 안나가 잘못 되기라도 하면 벨이 자신을 가만 놔두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안나가 살았으면 하는 진심 반, 그리고 벨의 의심을 피할 가식 반이 한나의 마음을 각각 차지하고 있었다.


"안나, 섣불리 나서려 하지마. 그러다 다칠 수 있어. 그러니까..."


안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나의 손을 살짝 풀러낸 그녀는 양철 상자에서 남은 독미나리 진통제를 꺼내 스키아보나의 칼날에 흘려 발랐다.


"그럼 살짝만 긁어 놓을게. 그 정도면 되지?"


안나는 두 사람의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한나가 허우적대며 일어나려 했지만, 크리스토프가 한나를 만류했다.


"이, 이것 좀 놔봐요! 저러다 안나 죽어요!"


"나도 알아요! 안다고요. 근데 지금은 이게 최선이예요. 안나가 벌린턱의 눈에 들어온 이상, 어떻게든 잡으려고 할 겁니다. 매티어스 씨가 개입한다고 해도, 그놈들의 엄니는 안나를 놓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저렇게 나서는게 우리를 위한 겁니다. 여기가 불탄다면...린든은 그날부로 끝장이예요."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자책했다. 안나를 따라 뭐든 챙겨 같이 맞서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라는 본분이 있고, 고아원에서 행해지는 고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한 그에게는 의술만이 전부였다. 크리스토프는 조금이라도 일찍 매티어스에게 부탁해서 검술의  기본기라도 배워둘 걸 하고, 지금 이순간 탄식과 함께 후회했다.



크리스토프가 후회하고 한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은 채로 떨고 있는 동안에, 안나는 얇은 세검 한자루를 들고 벌린턱의 갱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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