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 지호네 자취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난 뒤, 이들의 마음은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한 녹음처럼 더욱 짙어졌다. 평일 오후 도서관, 형선이 야외 휴게실에 앉아서 정인을 기다린다.
정인: (형선을 보고 미소 띠며 다가간다.) 나 점심 먹었는데?
형선: (곁에 앉는 정인의 손을 잡는다.) 난 집에 가서 먹으면 돼. 바빠?
정인: 불러 놓고 바뻐야. 왜, 뭐 할 거 있어?
형선: 아니... 저, 네가 얘기했던 사람 있잖아. 아빠가 좀 보재.
정인: (의외다.) 왜?
형선: 나도 모르겠어. 말로는 네 의견 존중하겠대.
정인: (갑자기 왜?) 혹시, 기석 오빠한테 뭐 들었대?
형선: (고개 저으며) 아니 그런 거 같진 않던데? (눈이 커지며 정인을 본다.) 뭘 들어?
정인: (아차 싶다. 형선의 시선을 피해 고개 숙인다.)
형선: (정인을 빤히 보다가 한숨 쉬며) 서인이 재인이가 맘 단단히 먹어야 한다 눈치줬어. 말 나온 김에 듣자. 뭔데~ 뭔데 이렇게 겁부터 주는 거야?
정인: (어쩌지...)
-> 지난 주말, 정인은 영주를 만나려는 기석에게 전화해서 자기가 집에 다 말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홧김에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그녀를 보고 지호는 부모님께 털어놔봤자 그녀만 힘들어질 뿐 기석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말렸다. 우리가 무슨 죄를 졌다고 숨어만 있어야 하는 건지 답답한 그녀지만, 막상 형선을 마주하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형선: 각오하고 있다니까? 얘기해봐~
정인: (형선의 눈을 피해서 겨우 입을 뗀다.) 사실은... 그... 아이가 있어.
형선: (못 알아듣는다.) 누가?
정인: (형선을 보며) 그 사람이... (죄송한 맘에 울컥해서 목소리가 잠긴다.) 엄마, 미안해...
형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정인: 엄마...
형선: (겨우 입을 떼며) 아, 얘... 정인아, 이거는...
정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안 그럴려고 했어. 나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훌쩍이며) 근데... 너무 좋아서... 내가 너무 좋아해서 엄마... 죄송해요. (울음이 터진다.)
-> 석달 전, 기석의 농구 동호회에 구경갔다가 지호와 우연히 재회한 뒤 노래방에서 갑자기 사라진 그가 궁금해진 정인은 약국까지 찾아가 그에게 친구하자고 졸랐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그를 이렇게나 좋아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거다. 오랜 연인인 기석과 달리 따뜻함이 담긴 지호의 눈빛과 목소리, 배려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과 행동이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그를 향해 펄럭이게 만들었다.
술집 앞 건널목에서 그에게 넘어오지 말라며 선을 그을 때만 해도 멈출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었다. 지호와 기석, 둘이 동시에 도서관에 나타난 날, 지호는 친구란 이름 뒤에 숨는 그녀의 거짓말에 화를 내며 떠났고, 기석의 차에 탄 그녀의 마음은 지호를 따라가버렸다.
자신의 행복 하나만 생각하라는 서인의 말에 펑펑 울던 그녀는 그를 마음 속에서 밀어내려하면 할수록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입맛도 없다. 결국 약을 핑계로 그의 약국으로 달려가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그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그동안 회피해왔던 기석과의 갈등을 터뜨리고 관계를 정리하기로 맘 먹는다.
그렇게 지호를 향한 마음을 따르기로 한 그녀지만 다시 찾은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밀어낸다. 무작정 가다보면 그녀가 더 힘들거고 자신에게 너무 아깝다며 그녀를 부담스러워하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기적이고 못된(이라 쓰고 솔직하다고 읽는다) 그녀이기에 결국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돌이켜 정리해보니 정인이 진짜 힘들었겠다. 근데 산 넘어 산이네.
ㅠㅠㅠㅠ
형선: (뭐라고 말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아니, 죄송하고가 아니라... 어머 얘. 나, 말이 안 나오네.
정인: (복합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북받힌 그녀, 울음이 터진다.) 엄마, 이제 그 사람 없으면 안 돼. 못살아.
-> 그녀가 살면서 지금처럼 자신의 마음 하나만 생각하며 따른 일이 있었을까? 정인이 지금껏 옳다고 생각한 일을 절대 굽히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소신껏 살면 된다는 형선의 지지 덕분이었다. 근데 기석과 헤어지고 지호를 선택한 건 옳고 그름으로 결정한 게 아니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지호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여기까지 온 거다. 그동안 자신을 믿어주던 형선에게 이번 일로 실망을 안겨드리게 되어 죄송하고, 그녀마저 자신에게 등 돌릴까봐 두렵다.
형선: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어, 어떻게 이걸...
-> 그 사람 없으면 못산다니, 정인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이야...
정인: (엄마 손을 잡고 울며) 미안, 미안해 엄마. 나 도와줘요. 엄마... (오열하며 형선의 무릎에 눕는다.)
형선: 어우 얘, 이걸 어떡하면 좋아... (정인의 등을 쓰다듬으며 같이 운다.) 어떡하면 좋아...
정인: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미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동안 정인이 형선에게 속마음을 내비친 장면들을 모아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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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정인: 엄마.. 결혼은 어떤 사람이랑 해야 돼?
형선: 왜? 기석이하고는, 영 아닌거야?
정인: (입만 삐죽)
형선: 싸우다 든 정이 더 무섭다 너~ 쉽게 못 끊어네..
정인: 에이, 누가 헤어진대..
형선: 어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사람 맘이다.
-> 자기자신의 맘도 그렇고 다른 사람 맘까지도 마음대로 안 된다. 미혼부이자 남친의 후배인 지호를 좋아하게 된 정인도 선배 여친인 정인을 좋아하게 된 지호도, 그녀가 6회에서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16회까지 나온 기석도 모두 뜻대로 안 되는 마음 때문이다.
6회.
정인은 도서관에서 캘리그래피 수업을 받고 나온 엄마를 만난다. 이사장이 아빠에게 퇴임 후 재단에 자리 하나 주려고 한다며, 그런 속이 있으니까 아빠를 좀 이해해달라고 부탁하는 엄마다. 정인은 그런 엄마에게 속얘기를 꺼내기 힘들다.
정인: 엄마~ 잠깐만.. (지갑에서 5만원권 2장을 엄마에게 건네며) 반찬값.
형선: (안 받으려고 돌아선다.)
정인: (엄마 외투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며) 아이, 사실은 뇌물. 언니 때처럼 나 배신하지 말라고.
형선: 어 야, 말은 바로하자. 내가 서인이때...
정인: 더 내 편 되달라는 거야.
형선: 무슨 뜻이야? 일 저지를 작정하고 있는 것처럼..
정인: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나 좀 많이 이해해달라고...
형선: (정인이 준 5만원권 1장을 꺼내 도로 쥐어준다.)
정인: 뭐야?
형선: 너도 엄마 배신하지마. 니 언니처럼 다 괜찮은 척, 끝까지 감추지 말라고.
정인: 안될걸? 내가 엄마 속 뒤집는 건 전문이라..
형선: 알긴 아네. (가다가 뒤돌아 손짓하며) 들어가. 일해~
정인: (손 흔들며) 가~
엄마를 배웅하는 그녀는 애써 웃어보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하다. 그녀의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에게 걱정끼치고 싶지는 않은데, 그녀 마음의 저울은 이미 지호에게 기울어져 버렸다.
9회.
기석은 영국에게 정인과 올해 안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영국은 태학에게 정인이를 칭찬하며 둘이 잘 알아서 할테니 지켜보자고 한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태학은 주말에 정인이를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진다. 형선은 정인에게 주말에 집에 들르라는 태학의 말을 전하면서 기석과의 관계를 묻는다.
형선: (조심스레) 둘이 다시 좋아진거야?
정인: (고개 숙이며) 아니.
형선: 어.. (정인의 손을 토닥여준다.)
정인: (머뭇거리다가) 엄마.
형선: 어?
정인: (망설이다가 겨우 말한다.) 나 엄마 실망시킬지도 몰라.
형선: (정인 손을 꼭 잡고) 아휴, 무슨 소리야~
정인: (벌써 미안하다.) 그럴지도 모른다구..
형선: 소신껏만 살면, 엄마 실망 안해.
정인: 진짜?
형선: 아이구? 아주 작정하구 큰일 저지를건가 보네? (미소 띠며) 나는~ 니들한테 바라는 거 없어~ 자기 인생 포기 안하는거, 그거 하나면 돼.
(서로 눈 맞추며 웃는다.)
-> 자식에게 소신껏만 살면 된다고, 자기 인생 포기 안 하면 그걸로 족하다는 어머님, 당신께서는 세 따님이 소신을 가지고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바르게 키우셨습니다. 진심을 담아 존경합니다.
시훈을 통해 재인의 귀국 소식을 뒤늦게 접한 태학은 형선에게 전화해서 재인을 당장 데려다 놓으라고 불호령을 내린다. 형선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은 정인은 재인을 데리고 저녁에 집에 가겠다고 한다.
형선: (걱정이 가득해서) 아빠 너한테 기분 좋았는데, 이 일로 산통 깨지면 어떡하니~~
정인: 기석오빠하고 헤어졌어.
형선: 어머나! 아우 얘, 아무리 바빠도 잠깐 얘기 좀 하자. 가만있어.
정인의 손을 끌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정인과 형선, 야외 휴게실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형선: (오늘은 알아야겠다.) 뭐냐니까, 응? 저번부터 실망시킬지도 모른대니 뭐니 하는 게 수상했어. 뭔데, 응? 기석이랑 헤어진 거, 그거 다 아니지?
정인: (더는 숨기지 않겠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형선: (이게 무슨..) 뭐?
정인: 지금은 이거 말곤 다른 얘기 못해..
형선: (놀라서) 이게 무슨 소리야 다~? 그것 때문에 기석이랑 깨진거야?
정인: (고개를 저으며) 아니, 정리 중이었어. 그러는 사이 그 사람이 나타난거야. 한눈 팔았다고해도 상관없어.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형선: 그 사정까지는 알 바 아니고.. 그래서 누군데? 그 사람이 누군데?
-> 형선은 뭐가 중한지 잘 아는 사람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질 필요가 없다.
정인: 아직은 말 못해요.
형선: (한숨)
정인: 엄마, 내가.. 최대한 노력하고 말씀드릴게요. (형선 손 잡으며) 나 믿고 기다려줘요.
형선: (그래도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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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정문 앞, 정인이 고개 숙인 채 형선을 배웅한다.
형선: (뒤돌아 정인을 보며) 들어가 일해. 전화하자. (돌아서 걸어간다.)
정인: (너무 울어서 기운이 없다.) 엄마... (형선에게 다가와 서서) 있잖아... (눈물이 또 그렁한다.)
형선: (정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후, 울긴 왜 이렇게 울어.
정인: (형선을 보며) 엄마가 지호씨 한 번만 만나봐 줘. 좋은 사람이야.
형선: 물론 좋은 사람이니까 마음이 가겠지. 근데 엄마가 왜 만나야 돼?
정인: (말없이 엄마를 애절하게 바라본다.)
형선: (정인의 눈빛에 놀라서) 너, 설마...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
정인: (말없이 형선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형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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