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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리뷰> 지호에게는 있고 기석이에게는 없는 그것.

greenearth24(98.228) 2019.06.24 17:00:01
조회 4414 추천 117 댓글 56

"되게 바보 같아요."

"개성이 강하지. 그게 내가 너한테 반한 부분이기도 하고."


정인이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두 남자가 상반된 표현을 쓴다. 지호는 정인이가 바보 같다고 하는 반면 기석이는 정인이의 똑 부러진 면을 언급한다. 두 남자의 상반된 시각만큼이나 정인이를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지호가 정인이를 바보 같다고 말하는 건 정인이가 사람 자체만 보고, 사람에 대해 아무 계산을 안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해서 계산한다면 애초에 지호를 좋아할 수 없다. 그래서 지호는 정인이가 어떤 사람이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나를 처음으로 유지호로만 봐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내 전화번호 줄까요?"

지호는 순간 당황했을 것이다. 방금 지호가 건네준 고무줄로 대충 묶은 머리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 맑은 눈동자, 그 청순한 얼굴을 하고는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젊은 남자한테 전화번호를 주겠다 하면 내가 누군 줄 알고, 그 번호로 뭘 할 줄 알고 저렇게 해맑게 쳐다보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호는 전화번호를 따는 대신 자기 전화번호를 불러준다. 사실 지호가 번호를 따는 대신 자기 번호를 준 건 미혼부인 지호의 처지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지호는 정인이에게 뭘 채 하기도 전부터 아이가 있다고 고백할 만큼 자신의 처지에 대해 세상이 하는 계산을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기석이와 다르다. 기석이가 계산하는 이유가 인간관계에 있어 자신의 힘과 통제력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면 지호가 계산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도망갈 기회를 주는 거다.


정인이 마음을 다 알았어도, 쥐고 흔들면 얼마든지 흔들릴 마음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어도 지호는 멈추려고 했다. 또한 정인이에게 기석이와 끝내라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정인이를 생각해서였다. 기석이가 하는 계산을 지호도 했다. 정인이가 아깝다고. 과분한 사람이기 때문에 붙잡고 매달리는 게 아니라 놔주려고 했다. 기석이가 자신을 정인이에게 과분한 상대로 여겨 헤어지자는 말도 함부로 내뱉고 아버지의 반대는 오랫동안 묵인한 채 결혼에 대한 결정권은 자기가 쥐고 있는 양 굴었던 것과 확연히 비교가 된다


지호도 기석이가 가진 배경을 알고 사회적인 통념상 어느 쪽이 정인이에게 더 편안한 인생인지 다 이해하기 때문에 순리를 깨지 않으려 얼마나 기를 썼는지 안다면 기석이는 지호 앞에서 그렇게 자기 바닥을 보여서는 안 됐었다. 기석이는 지호 앞에서 아주아주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다. 세상 누구보다 정인이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하지만 기석이는 사랑을 보여주는 대신 허세만 보여줬다.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게 통제권을 넘겨준 것처럼 보일까 무덤덤한 척 굴었고 오랜 연애가 훈장이라도 되는 듯이 지호 앞에서 별문제 없으면 그냥 만나는 거라는 둥, 여자친구가 배신하면 한풀이는 꼭 할 거라는 둥, 그것도 지호를 어느 정도까지 의심하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호 앞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짓만 골라서 했다. 본인 입장에서야 그렇게 여유를 보이는 게 일종의 힘 과시였겠지만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 지호가 누구와 통화를 하고 누구에게 그렇게 급하게 달려갔는지 생각한다면 참담하기 그지없을 순간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헤어질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정인이 조건에 감히 어떻게 나랑 헤어질 생각 따윌 하겠냐는 뜻이었다. 관계에 대한 통제권을 자기가 쥐고 있다는 착각은 결혼에 대한 근거 없는 안일함을 만들고 본심은 은연중에 흘러나와 정인이에게 상처를 주고 현수의 시선에도 걸려들어서 결국 지호의 귀까지 들어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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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인이는 기석이와의 결혼에 대해 지호가 제대로 등판하기 훨씬 전부터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그게 단순히 결혼 앞둔 여자의 불안한 심리 정도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게 있다는 걸 기석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재인이가 집에 있으니 오지 말라는 정인이의 거짓말을 알고 그래서 누군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으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더 파고들질 않았다. 심지어 정인이 기석이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며 구차하고 치사한 기분까지 무릅쓰고 어째서 이 결혼이 문제인지 원포인트 레슨까지 해주었건만 기석이는 언니네 부부와 만나지 않겠다는 정인이 의사를 또 무시한 채 남서방과 만날 날짜를 얘기하며 정인이 그토록 바라던 인정과 존중을 간단히 무시했다. 어쩌면 정인이에게 있을지 모를 그 누군가가 지호라는 걸 의심스러워했음에도 기석이의 세계관으로는 지호를 위험군으로 분류하지 못했다. 관계에 있어 서열을 매기는 시선은 정인이가 계속해서 흘렸던 그 모든 이별의 단서들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단서는커녕 아예 정인이의 이별 통보조차 무시하게 만든다. 사람을 똑바로 볼 줄 알았다면 지호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알아봤을 거고 자기 여자를 똑바로 알았다면 지호 같은 사람을 사랑하고도 남을 거라는 걸 알았을 텐데 왜곡된 시선은 결국 기석이가 겪게 될 비극의 단초가 된다.


도서관 로비에서 세상을 다 잃은 듯 울고 있는 정인이, 미안하다며 방금 도서관을 빠져나간 누군가를 쫓아가는 듯한 정인이, 그 사람을 못 만나서 절망한 듯 고개 숙인 정인이의 뒷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나서야 기석이는 느끼고는 있었지만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한다. 어떻게, 어떻게 지호일 수가 있을까. 기석이의 세계관으로는 정인이가 자신을 떠난다는 사실보다 그게 지호라는 게 더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말 애잔했던 건 그렇게 뼈아픈 진실을 확인한 후 다음 날 기석이가 찾아간 곳이 예전에 함께했던 밴드가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 장면은 지호가 은우를 보러 본가에 가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지호는 정인이를 처음 만났던 날 밤, 집에서 정인이의 톡을 들여다보다 예정에 없이 은우를 보러 본가로 달려간다. 정인이에게 온 톡을 씹고, 다시 말해 정인이를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노력이나 생각 자체를 아예 안 하고 있던 새로운 만남에 대해 처음 생각이란 걸 하고 나서, 지호는 갑자기 은우를 찾는다. 또한 정인이에게 가는 기석이를 당당하게 잡을 수 없었던 그 술자리, 술집 앞 구석에 쪼그려 앉아 울면서 웃으면서 아들과 통화하는 지호의 모습도 겹쳐 보였다. 사람이라는 게 삶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혹은 다가올 일이 두렵거나 불안할 때 절대적으로 위안이 되는 무언가를 찾는다. 지호에게는 그게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자신감', 은우일 것이고 기석이에게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음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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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그만둔 일과 정인이와의 연애가 어떤 상관관계였는지 모르지만 기석이는 분명 음악만큼 정인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했던 이유는 사람을 평가하는 왜곡된 시선 때문이었고 변명을 해 주자면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장은 강자와 약자를 파악하고 위세를 부리되, 정인이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꿨듯이, 적어도 사람 볼 줄은 알았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한다. 기석이가 유별난 게 아니다. 하지만 기석이는 힘의 논리로만 사람을 파악했다. 사회생활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그랬다는 게 기석이의 패착이다. 누가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인지만을 본건 지호와 정인이고 그래서 기석이는 정인이를 잃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된 후에도 기석이는 자신이 갇혀있는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정인이의 인간관계 속 강자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서인이에게는 이미 갔었고 다음은 정인의 부모가 될 것이다.


지호가 기석이에게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서슬 퍼런 경고를 하고 멱살잡이까지 했지만 그 와중에도 지호는 기석이의 다친 마음까지 생각했다. 당혹스러웠을거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할 거다. 많이 힘들 거다. 헤어진 시기 때문이 아니라 유지호라서 존심 상하는 걸 것이다. 현수는 승자의 오만이냐고 했지만 그건 오만이 아니라 이해력인 거다. 지호에게 있고 기석이에게 없는 그것. 사람에 대한 이해력, 그게 기석이가 정인이를 잃고 지호가 정인이를 얻은 결정적인 이유다.

https://blog.naver.com/greenearth24





출처: 봄밤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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