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최진언 시점 스핀오프 00 _ 생활과 법률

대학생, 사실 나는 그 단어가 딱히 긴장되거나 설레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무난하게 살아왔다.

나를 질투하는 누나가 있었고, 첩 소리를 들으며 비난받았던 엄마도 있었지만

나름 부족함 없이 그래도 평범하게 잘 살아왔다.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암기력이 좋은 탓에 별탈없이 약대에 진학했다.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 사업에 욕심이 있어 약대에 진학 한 줄 알고 있었지만

어릴 때 병원 봉사활동을 갔다가 희귀병에 걸린 아이를 만났고

그 때부터 그런 아이들을 위해 약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매일 예쁜 옷 입고 집에 안들어 오는 누나 때문에 대학생활에 환상이 조금은 있었는데

생각보다 그 곳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말 많은 고현우라는 놈이 계속 말을 걸길래 친구를 하긴 했는데 너무 시끄러웠다.

그 친구가 꼭 같이 수업을 듣자고 해서 생활과 법률이라는 영 관심없는 수업을 듣게 됐는데

그 수업이 내 대학생활을, 내 인생을 뒤바꾸는 수업이 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여학생이 많아 꼭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라고 하면서 끌고와서 오긴 했는데

큰 강의실에 1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죄다 남자였다.

아무리 별 기대가 없었지만 이런 남탕들의 수업이라니..

그래도 옆에서 나보다 더 좌절하는 현우를 보며 조금 위안이 되기도 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코스프레 하느라 무려 30분이나 먼저 와서 앞자리를 사수하더니

어쩐지 조금은 통쾌한 기분도 들었던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이 곳에 있는 남학생들 모두가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때, 갑자기 교실이 웅성웅성이기 시작했다.

똘망똘망한 눈, 긴 생머리, 백팩을 메고 드디어 이 교실에도 여학우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심장이 왜이렇게 빨리 뛰는 걸까.

나도 모르게 자꾸 그 아이의 걸음 걸이에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어? 어? 자꾸만 거리가 가까워 지기 시작하더니 그 아이가 내 앞에 서있다.

"여기 앉아도 되니?"

그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네?.. 네.."

책상에 올려놓은 가방을 부랴부랴 치우며 바보처럼 대답을 했다.

모르긴 몰라도 부러워 하는 남학생들의 따가운 눈초리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 건 느낄 세도 없었다.

그녀가 내 앞에 있다. 그리고 내 옆에 앉겠다고 한다.

"고마워"

그 아이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옆을 돌려서 보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 지 모르겠다.

수업이 끝나면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하나 계속해서 그 생각만이 맴돌았다.

'안녕, 난 최진언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안녕? 넌 이름이 뭐니?'

'안녕하세요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내 옆에 앉았지?

혹시 이 아이도 내가 마음에 드는건가?

"야 최진언 뭐해?"

그런데 그 때, 현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수업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당황해서 옆을 봤지만 그 아이는 이미 가고 없었다.

"아까 그 여자 얘 봤어? 완전 예쁘던데 ....."

현우가 하는 말도 무시하고

급하게 강의실을 빠져나왔지만 이미 그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에 창밖을 보니 어딘가로 바쁘게 뛰어가고 있었다.

생활과 법률,

이 수업이 어쩐지 기대된다.

다음 번에는 그 아이의 이름부터 기억해야지.

이 수업을 듣게 해 준 현우 이 녀석과는 평생 친구를 해야겠다.

또 보자, 계속 보자, 오래오래 보자.

생활과 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