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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팬대] 날개 없는 나비

조각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4.18 22: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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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호수의 물결과 푸른 잎사귀들을 밝게 비췄다. 봉오리였던 꽃들은 피어나고 곤충이 완전히 성충으로 자라나는 계절에 자연의 생명력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졌다. 보통의 인요들에겐 다소 무더운 날씨일 수도 있지만, 자연의 상징인 요정들이 활개 치고 다니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라~바~”


“치~르노~”

한여름의 열기에 신이 난 두 요정은 서로를 마주하자마자 이름을 부르며 달려들었다. 사계이변이 끝나고 요정들의 폭주도 멈추었지만 아직 그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날씨와 함께 여전히 들뜬 두 요정은 만나기만 한 것만으로도 이미 놀 생각이 한가득이었다.


“오늘은 뭘 하고 놀까? 숨바꼭질? 술래잡기? 개구리 얼리기?”


치르노는 신이 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치르노와 달리 그 말을 들은 라바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에이~ 그런 건 너무 평범하잖아.”


“그래? 그럼 라바는 뭘 하면서 놀고 싶은데?”


치르노의 물음에 라바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그보다, 그보다, 그때의 일은 어떻게 됐어?”


라바는 치르노를 향해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라바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치르노는 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일전의 사계이변때 우연히 들어가게 된 후호의 나라, 라바는 틈만 나면 치르노에게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곤 했다. 어떤 적이 있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지, 혹은 그곳의 적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치르노가 그곳에 갔다 온 이후로 라바는 유독 그 일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어떤 곳인지 더 듣고 싶어.”


라바는 치르노에게 얼굴을 더 바짝 들이대며 말했다. 하지만 치르노는 그런 라바의 기대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라바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머리를 긁적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뭐야, 설마 아직도 기억 안 나는 거야?”


“음...”


치르노는 팔짱을 끼곤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르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다 한들 그 결과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이 몸이 이겼어.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아...”


치르노의 대답에 라바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기다리면 곧 생각이 날거라길래 며칠을 기다렸는데...”


라바는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치르노는 그런 라바의 아쉬움을 어떻게든 풀어주고 싶었지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시 갈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치르노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이제는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등 뒤의 문이라면 아직 남아있지 않아?”


라바는 자신의 어깨 너머의 등 쪽을 치르노에게 슬쩍 보이며 물었다. 치르노도 뒤를 돌아 라바에게 자신의 등을 보여주었다. 라바의 말대로 두 사람의 등엔 아직도 사계이변때의 문이 남아있었다.


“그치만 이거 봐.”


치르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아무리 열어보려고 해도 열리지 않는다구.”


“정말이네.”


“다른 요정들 뒤에 있는 문들도 마찬가지야. 전처럼 이미 열려있는 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나 봐.”


라바와 만나기 전에도 치르노는 이미 여러 요정들과 만나며 서로 등 뒤의 문을 열어보려고 애써보았다. 하지만 문은 모두 닫혀 있었으며 그중에 누구도 문을 여는 데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그렇기에 치르노는 진작에 문을 여는 것은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근데...”


자신의 문을 이리저리 손으로 더듬고 있던 치르노에게 라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그 문 열어본 적 있는데?”


“어? 정말?”


“정말이고 자시고... 전에 한 번 더 들어가겠다고 할 때 내가 열어줬잖아. 기억 안 나?”


치르노는 동그랗게 뜬 두 눈을 깜빡거리며 예전 일은 곰곰이 떠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때의 생각이 난 듯 주먹으로 손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그랬던것 같기도!”


“나 참...”


겨우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치르노는 되려 궁금해졌다. 그토록 이나 문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라바가 왜 한 번도 문 너머로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궁금하면 직접 가보면 된다는 것 쯤은 치르노의 머리로도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치르노는 라바의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라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뭐?”


“궁금하면 직접 가보면 되잖아.”


“그치만... 난 그냥 치르노가 거기서 싸웠던 일들을 듣고 싶을 뿐이지, 직접 가볼 생각은 없었는데. 게다가 문은 이제 안 열린다며.”


라바의 걱정 어린 말에 치르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니, 열 수 있어. 드디어 이 문의 비밀을 알아냈거든.”


“비밀?”


“응! 분명 그 문은 라바만 열 수 있는 거야!”


치르노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만 열 수 있다고? 그럴 리가.”


치르노의 단순 명쾌한 해결법에 라바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변이 해결되었으니까 닫힌 거겠지. 아마 이젠 나도 열 수 없을 거야.”


라바는 두 손을 내저어 치르노를 막아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미 의욕이 하늘 끝까지 솟은 치르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문을 열어보자 라바! 그리고 이번엔 같이 들어가 보는 거야!”


치르노는 들뜬 몸짓으로 라바를 재촉했다. 치르노의 재촉에 라바는 걱정이 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기대감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무엇보다 정말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치르노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다른 세계의 모습 또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라바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등 뒤에 있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성공이다! 역시 이 몸은 천재야!”


“열렸어... 정말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등 뒤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치르노는 오자마자 환호성을 내질렀고, 라바는 문을 열 때의 감각이 이상하게 느껴진 듯 손을 쥐락펴락했다.


“어때? 신기하지? 라바의 등 뒤는 이렇게 넓다구.”


치르노는 라바의 앞에서 이리저리 날뛰며 눈앞의 새로운 광경을 소개했다. 하지만 마냥 신나하는 치르노와 달리 라바는 그토록 궁금해하던 곳에 와본 것 치곤 별로 기뻐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말... 엄청 넓네.”


라바는 뒤늦게 낯선 세계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 사방에 둥둥 떠다니는 셀 수 없이 많은 문, 문 외에 아무것도 없는 끝없이 펼쳐진 공간. 누가 봐도 이상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라바에게는 그것이 별로 낯설지 않게 보였다.


“왜 그래 라바? 기쁘지 않아?”


“나, 여기 와본 것 같아.”


라바는 침착한 듯 조금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얘기해 줬잖아. 엄청 넓고 문밖에 없다고. 내가 말한 그대로지?”


“응... 정말 그렇네.”


“자, 모처럼 왔는데 더 멀리 가봐야지.”


라바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치르노는 끝없는 어둠 속의 더욱 깊은 곳을 향해 쌩 하고 날아갔다.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겨우 그런 이유를 댄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치르노가 아니었다. 때문에 라바도 어쩔 수 없이 치르노의 뒤를 따라 날개를 퍼덕였다.


“길 안내라면 나한테 맡겨. 이 몸은 벌써 세 번째로 오는 거니까.”


“으, 으응.”


치르노는 엄지를 세워 자신을 가리키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세 번째라... 겨우 세 번 정도가 아니었다. 라바에게 이곳은 이미 수십번이나 와본 것 같은 익숙한 광경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공기도, 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아니면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울 정도의 어둠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치르노와 라바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갈 때마다 주변의 문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옆을 스칠 때마다 그 문들은 잡아먹을 듯 입을 벌리는 괴물처럼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며 두 사람을 위협했다. 하지만 라바에게는 사방에 둥둥 떠다니는 기괴한 문들보다 그런 것들을 보고도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익숙한 기분이 더욱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가도 문, 문, 문만... 이러면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는데.”


한참을 날아다녀도 계속 같은 풍경만 보이자 치르노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길 안내는 맡기라고 하지 않았어?”


“그치만... 으, 으음...”


치르노는 잠시 기억을 가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아무렇게나 가도 누군가 나타났던 거 같았는데 말이야.”


치르노는 머리를 싸매며 이전의 왔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집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엇 하나 떠오를만한 건 없었다. 그저 누군가와 싸웠다는 것만이 치르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대체 누구와 싸웠으며 누구와 만났던가. 한참을 머리를 굴리던 도중, 그런 치르노의 기억을 떠올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낯선 세계 전체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온 건가? 질리지도 않나 보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위쪽이었다. 라바와 치르노는 동시에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옷깃을 휘날리는 그 존재는 마치 위에서부터 가라앉듯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저 녀석은 그때의..!”


치르노는 모습을 보자마자 단번에 그 존재를 떠올렸다. 후호의 나라의 주인인 마타라 오키나. 이변 때에 마주한 적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비신. 그 강함을 기억하고 있는 치르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비상한 기운을 느낀 라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번엔 뭘 하러 온 거지?”


오키나가 두 요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무거우며 치르노가 앞서 만났던 때와 달리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번엔 싸우러 온 게 아냐. 지난번 싸움에서 이 몸이 이겼어. 승부는 이미 결정 났다구.”


“...”


치르노의 나름 활기찬 목소리에도 오키나는 적개심을 놓지 않았다. 오키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해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라바는 그 시선이 어쩐지 자신을 향해 있다고 느꼈다.

“모습을 바꿨군.”

“바꾸다니 뭘? 아, 피부색 말이야? 어째서인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어. 봐.”


치르노는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하얀 팔을 오키나에게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오키나는 그런 치르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키나의 시선은 한곳에 단단하게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네 옆의 그 녀석은 일전의 재미있는 요정이 아니더냐. 그때도 네가 꾸민 일이란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만, 설마 둘이 같이 올 줄이야.”


기분 탓이 아니었다. 오키나의 말과 눈빛은 분명 치르노가 아닌 라바를 향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변 때의 사건으로 면식이 있는 치르노라면 모를까, 이곳에 처음 오는 자신에게 말을 걸 리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걸 눈치챈 라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를... 알아?”


“음?”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라바의 표정에 오키나는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찌푸린 눈으로 라바와 치르노를 한 번씩 천천히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상황파악을 마친 듯 오키나는 금세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렇군. 완벽한 연기를 위해 겉모습은 물론 자신의 기억까지 바꿔놓은 건가.”


오키나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이번엔 라바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나비 요정이라니... 너에게 딱 어울리는 모습을 골랐구나. 화려한 날개로 벌레의 모습을 감추는 꼴이니 말이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과 아주 잘 어울려.”


“이봐 너, 라바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오키나의 알 수 없는 말에 치르노가 끼어들며 말했다. 오키나는 치르노 쪽으로 시선을 힐끗 쳐다봤다.


“라바는 오늘 여기 처음 오는 거야. 전에 말했던 내 친구, 호랑나비 요정이라구!”


치르노는 오키나를 향해 당당히 소리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오키나는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날개의 겉모습에 속고 있군. 그 녀석은 요정이 아니다. 네 친구는 더더욱 아니지. 너를 이용해 날 공격하기 위해 친구인 척 속이고 있는 거다.”


“뭐?”


“전에 말해주지 않았던가. 호랑나비 요정이 아니라 토코요노카미라고. 나와 적대 관계인 신이자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사악한 녀석. 너는 그 녀석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오키나가 손가락 끝을 날처럼 세워 라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끝을 마주한 라바는 그저 당황하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치르노와 오키나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본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낯선 세계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생전 처음 보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에 라바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왜 네 말을 믿어야 되는데?”


치르노는 오키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 태도에 오키나는 불편해하기는커녕, 되려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불길하게 웃음 지었다.


“보여주면 믿을 텐가?”


“보여주다니 뭘?”


“저 녀석의 정체 말이다. 못 믿겠다면 직접 보여주지.”


오키나는 한 손을 살며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그 모습을 본 라바는 움찔하며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스쳐 지나갔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며 마치 천적을 마주한 벌레처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 걸음이 미처 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오키나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손가락을 튕겼다.


“윽, 으윽...!”


“라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라바는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통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라바가 고통에 주저앉아 몸을 떠는 사이 라바의 몸은 마치 껍질이 벗겨지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피부가 흘러내리고 떨어져 내렸다. 벗겨진 피부로부터 썩은 속살을 하나둘씩 드러냈다. 그리고, 떠올렸다. 자신이 왜 그토록 이곳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를, 자신이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왜 그래 라바? 괜찮아?”


“안돼! 보지 마!”


라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치르노로부터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가려진 팔과 손 틈 사이로 보이는 얼굴의 일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은 더 이상 이전에 알던 라바의 얼굴이 아니었다. 보기 흉측할 정도로 녹아내린 얼굴. 꾸물거리는 유충처럼 뒤틀리며 주름진 번데기처럼 구겨진 얼굴.

순식간에 변해버린 친구를 눈앞에 두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치르노는 그 치솟는 분노를 오키나에게로 향했다.


“이 녀석, 무슨 짓이야! 라바를 원래대로 돌려놔!”


“원래대로? 단어 선택을 잘못했구나 요정이여. 그게 그 녀석의 ‘원래’ 모습이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선 친구조차 속이는 추악한 본성 그대로의 모습이지.”


라바의 몸은 계속해서 뒤틀리고 꿈틀거리며 형태를 변형시켜갔다. 라바는 알고 있었다. 오키나의 말에 거짓 따윈 없다는 것을. 자신이 처음부터 기억과 모습을 바꾸고 친구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것을. 라바는 친구를 속였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추한 모습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저 한없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며 한없이 움츠러들 뿐이었다.


“꽤나 머리를 쓴 모양이다만, 겨우 그 정도다. 넌 날 이기지 못해.”


오키나는 무너져가는 라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오키나는 조용히 치르노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요정은 이제 필요 없겠지. 마침 잘된 일이다. 내가 받아 가도록 하지.”


오키나는 자신을 노려보며 두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는 치르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이리로 오거라. 그 녀석의 정체를 밝혀낸 것으로 최종 테스트는 합격이다. 비록 내가 알려준거긴 하지만... 별 상관없겠지. 내 부하가 되기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싫어! 누가 네 부하가 된다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어가는 오키나를 보며 치르노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오키나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다.


“거부권은 없다고 말했을 텐데.”


오키나는 치르노를 향해 손을 뻗은 손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펼쳐진 손에선 순식간에 강한 힘이 뻗어 나와 치르노의 몸을 잡아 끌어당겼다. 치르노는 온몸에 힘을 주며 저항했지만 그 강대한 힘 앞에선 무의미한 짓이었다. 치르노는 그대로 오키나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고, 오키나는 끌려온 치르노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읏! 놔! 이거 놔! 이...”


치르노는 자신을 잡은 오키나의 팔을 때리고 허공에 마구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멱살을 꽉 잡고 있는 그 손에서 벗어나기엔 턱없이 부족한 힘이었다.


“라바를 괴롭힌 나쁜 녀석. 용서 못 해.”


“아직도 그 녀석을 감싸고 든단 말이냐. 녀석은 너를 속였거늘.”


오키나는 안간힘을 쓰며 라바를 위해 발버둥 치는 치르노의 모습을 보곤 비웃으며 말했다.


“하긴, 본래 지능이 낮은 자는 사물과 그 본질을 구별하지 못하지. 애초에 요정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무리겠다만, 네가 사랑한 건 나비가 아니라 나비의 날개였단 말이다. 정체가 탄로 난 지금 녀석은 화려한 날개 없이 땅을 기는 해충이나 다름없지.”


치르노는 계속해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짜내 봐야 오키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라바는 내 친구야!”


“본모습은 흉측한 꼴을 한 벌레다. 친구인 척 널 속이고 있었을 뿐.”


“아냐... 라바는...”


“그만 인정하거라. 날개 없는 나비를 누가 사랑한단 말이냐.”


오키나는 치르노의 멱살을 자신에게로 바짝 잡아당겼다. 그리곤 다른 쪽 팔을 들어 치르노의 눈앞에서 잡아먹을 듯이 손을 확 폈다.

오키나의 손이 치르노의 얼굴을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마치 줄에 걸린 나비를 향해 다가가는 거미처럼. 그 위협적인 손을 눈앞에 마주한 치르노는 더욱더 격하게 발버둥을 쳤다.


“내 힘을 받으면 너는 더 이상 네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생명엔 지장이 없을 테니. 그저 모든 기억을 잃고 나를 위해 일하는 충실한 부하가 되는 것뿐이다.”


치르노는 더 이상 소리치며 화내지 않았다. 눈앞에 점점 다가오는 손을 보며 느껴지는 것은 분노가 아닌 공포였다. 저 손에 닿아선 안 된다. 닿으면 모든 게 끝나버린다. 치르노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치르노는 더욱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모습을 보며 오키나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 지었다.


“환영한다. 새로운 동자여.”


치르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손이 완전히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그 손이 닿기 전, 바로 그 직전이었다.


“멈춰!”


오키나의 손이 멈추고, 치르노와 오키나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엔 라바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었다. 변해버린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형태를 온전히 유지할 수 조차 없는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도 두 다리만은 꿋꿋이 펴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벌레와도 같은 뒤틀린 눈으로 오키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 건 어찌됬든 오키나에겐 상관없었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났다. 기껏 속여온 요정에게 모든 게 들통난 이 시점에서 달리 무슨 수를 쓰겠다는 건가. 오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는 이길 수 없다고. 너는 또다시 내게 패배할 뿐이라고. 하지만 오키나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말을 내뱉기도 전에, 라바는 손으로 자신의 날개를 잡았다. 그리고는,


“라바?”


찌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라바의 날개가 찢어졌다. 라바는 자기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의 날개를 잡아 찢었다.


“라바!? 무슨 짓이야!”


치르노는 붙잡힌 몸을 비틀며 라바를 향해 소리쳤다. 발버둥을 치고 라바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하지만 그런 치르노의 반응이 무색할 정도로 덤덤하게 라바는 다른 손으로 반대쪽 날개를 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격하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라바의 날개가 떨어져 나갔다.

치르노는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뻗은 팔조차도 라바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건 다름 아닌 오키나였다. 그 모습을 본 오키나는 말 한마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굳어버린 듯 멈춰 버렸다.


오키나는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토코요노카미에게 있어서 날개는 성장의 결정체나 다름없었다. 한낱 벌레에 불과하던 녀석이 신이 되기 위해 평생을 모아온 힘이었다. 그 날개를 버리는 것은 곧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버리는 것, 신이 되기를 포기하고 다시 한낱 벌레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것이 과연 그동안 자신이 알던 녀석의 모습이 맞는 건가. 수백 년간 쌓아 올린 자신의 모든 힘을 겨우 이런 요정 하나를 위해 버리겠다는 건가. 오키나는 한동안 벙찐 듯이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오키나는 날개를 떼어낸 라바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고, 동시에 치르노를 붙잡은 팔의 힘이 서서히 느슨해져 갔다.


그리고, 치르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키나의 팔에 힘이 약해지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치르노는 재빨리 대기의 공기를 얼려 작은 얼음 결정들을 만들어냈다. 얼음 결정들은 순식간에 치르노의 손에 모여들었고 그 하나하나가 눈이 부실 정도로 정교하고 날카로운 형태를 띄었다. 치르노는 팔에 힘을 잔뜩 주었고, 얼음의 파편들을 오키나의 눈을 향해 힘껏 뿌렸다.


“에잇!”


“읏...”


날카로운 얼음 가루들을 얼굴 정면으로 뒤집어쓴 오키나는 본능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기세를 몰아붙여 치르노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오키나의 손에 냉기를 불어넣었다. 냉기는 손끝을 타고 흘러가 순식간에 오키나의 팔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얼어버린 손은 벌어지며 틈을 만들어냈고 치르노는 그 틈 사이로 몸을 빼 오키나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왔다. 오키나에게서 벗어난 치르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라바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라바~!!”


“치르노!”


손을 뻗으며 날아오는 치르노의 손이 라바의 팔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멈추지 않고 날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키나로부터 달아났다.


“도망쳐야 해!”


치르노는 날개가 없는 라바를 품에 안고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날았다. 평소보다 몇 배는 빨리, 전력을 다해 끝없는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치르노는 문들이 가득 늘어선 어둠 속을 날아다녔다. 치르노의 날갯짓이 빨라질수록 주변의 문들은 더욱더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머뭇거릴 시간 따윈 없었다. 그런 짓을 해버렸으니 곧 그 강력한 비신이 눈에 불을 켜고 두 사람을 쫓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든 비신으로부터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문, 문밖에 없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치르노는 다급한 목소리로 라바에게 물었다.


“이 안에 있는 이상 가망이 없어.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해.”


“그치만 어디로?”


라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작은 문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확인했다. 문의 생김새, 문의 색깔.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라바는 자신의 기억을 모두 동원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발견한 듯 라바는 치르노를 멈춰 세우며 외쳤다.


“저기! 저 문이야!”


라바가 손가락으로 위쪽의 커다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문을 넋을 잃고 올려다보는 것도 잠시, 치르노는 있는 힘껏 날갯짓에 힘을 더해 문을 향해 솟아올랐다. 수없이 많은 문을 헤쳐 지나며 이윽고 두 사람은 자신의 키보다 몇 배는 큰 문을 눈앞에 마주했다. 라바는 문을 향해 손을 뻗어 그 손잡이를 손에 움켜쥐었다.


“이것만 열면...”


라바는 숨을 크게 고르고 양손으로 잡은 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몇 번을 당겨보아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문은 마타라 오키나의 문이다. 비신의 힘을 직접 사용하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비신에게 대적할 정도의 힘은 가진 자만이 열 수 있는 문이다. 그렇기에 신의 힘을 가진 라바만이 그 문을 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라바는 날개와 함께 모든 힘을 잃었다.


“제발! 제발...!”


당기고 또 당겨 보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확신만이 들 뿐이었다. 그 문은 열 수 없다고. 두 사람은 이곳에 갇힌 채 영영 달아날 수 없을 거고, 곧 뒤쫓아올 비신에게 모두 당하고 말 것이다.

문을 열 수 없다. 더 이상 도망칠 방법 또한 없다. 그렇게 생각한 라바는 온몸에 힘이 풀리며 좌절하듯 문 앞에 주저앉았다.


“안돼...”


“뭐 하는 거야 라바!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고!”


치르노는 주저앉은 라바의 앞에 서며 가로채듯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라바 대신 문을 잡은 치르노는 양팔에 온 힘을 주어 힘껏 잡아당겼다. 물론 그래 봐야 소용없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치르노는 평범한 요정에 불과했다. 한낱 요정의 힘 따위로 비신의 문을 아무리 당겨봐야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래야 했을 것이다.


“됐다!”


치르노의 환호와 함께 끼이익 하는 묵직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소리와 함께 틈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들어와 라바의 얼굴을 비췄다. 라바의 예상과 다르게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거대한 문의 틈은 점점 벌어져 양쪽이 활짝 펼쳐지고 문 너머 저편의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라바! 가자!”


“엇... 어어?”


치르노는 보채듯이 라바를 잡아당겼다. 문 너머 아래엔 처음 이곳으로 오기 전의 푸른 들판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몸을 날려 문밖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후, 문은 저절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버렸다.






후호의 나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혼자 남은 오키나가 얼어붙은 자신의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은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빈틈없이 꽁꽁 얼어있었다. 얼음 결정들도 눈이 부시게 정밀하고 단시간에 얼린 거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냉기 또한 훌륭했다. 아무리 얼음의 요정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확실히 능력은 뛰어난 요정이었다. 부하로 삼는다면 다른 덜떨어진 요정들과는 달리 착실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키나에게 있어서 치르노는 확실히 부하로 삼기 좋은 요정이었다.

얼음 요정의 능력을 충분히 확인한 오키나는 얼어붙은 자신의 팔을 탈탈 털어냈다. 그와 동시에 팔을 감싸고 있던 얼음은 산산조각이 나 너무나도 무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오키나는 몸을 뒤로 눕히고 자신의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오키나는 동자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후계자에 적합한 인물을 지금 막 찾아냈다. 하지만 오키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가는 요정들을 붙잡지도, 쫓아가지도 않았다. 그저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바닥에 떨어진 날개 한 쌍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 추악한 신이 스스로 모든 힘을 버리게 만들다니. 과연 그 요정은 재미있는 요정이었다.


“저... 스승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오키나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샌가 의자 뒤에서 튀어나온 마이가 오키나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오키나는 인상을 쓰기만 할 뿐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 둘이 도망친 문... 왜 굳이 열어주신 건지?”


“맞아요. 얼음 요정은 부하로 삼는다고 하셨잖아요.”


또다시 의자 뒤에서 튀어나온 사토노가 마이의 반대편 옆으로 오며 물었다. 이번에도 오키나는 입을 꾹 다물고 두 동자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 스승님?”


오키나는 두 동자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이 앉고 있는 의자를 공중으로 붕 떠올렸다. 두 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문이 한가득 펼쳐진 곳을 향해 날아갔다.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제법 떨어진 오키나는 주변에 떠다니는 문들을 지나치며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수많은 문들을 지나고 치르노와 라바가 도망친 문 또한 지나쳤다. 그렇게 문들을 하나씩 눈여겨보기를 한참, 오키나는 드디어 마음에 드는 문을 찾았는지 근처의 작은 창문 정도의 크기의 문으로 다가가 그 옆에 몸을 기댔다. 오키나는 손끝으로 문을 살짝 건드렸고, 손이 닿은 문은 활짝 열리며 그 밖의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콜록. 웩. 우웩.”


공터 한가운데에 떨어진 두 사람은 다소 격한 기침 소리와 함께 입에 들어간 흙먼지를 토해냈다. 문밖으로 다급하게 뛰어든 이후 제대로 날갯짓을 해보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 버렸기에 치르노와 라바는 온몸이 흙먼지투성이로 뒤덮여 있었다.


“으아~ 고생해버렸네.”


치르노가 먼저 몸을 벌떡 일으켜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어때? 라바는 괜찮아?”


“...”


평소와 다름없이 활기찬 치르노와 달리 라바는 조용히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들을 털어냈다. 먼지들을 털어내며 라바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장소는 처음과 같은 곳으로 돌아왔지만 라바의 몸은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날개를 잃고 땅을 기는 나비처럼 흉측한 몸. 라바의 몸은 그렇게 변해 있었다. 아니, 변해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이 라바 자신의 원래 모습이었다.


“라바? 괜찮은 거야?”


치르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라바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얼굴을 바라봤다. 치르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순수한 눈을 반짝이며 라바에게 다가갔다. 그 순수함에 더욱 가슴이 조여왔다. 이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라바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속여서 미안해.”


라바는 치르노에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속였다니, 뭘?”


“거기서 들었던 말이 다 맞아. 내가 널 이용하기 위해 속였어.”


라바는 먼지를 털어내는 척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두 팔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치르노의 앞에서 자신의 몸을 훤히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이게 내 원래 모습이야. 날개도 없고, 보기 흉측한 모습.”


“...”


치르노는 라바의 몸을 빤히 쳐다보았다. 머리의 더듬이부터 벌레의 다리 같은 발끝까지, 이전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추악한 모습을 전부.


“그러게. 나도 라바가 갑자기 모습이 변했을 땐 깜짝 놀랐어.”


“우린 이제 함께할 수 없어...”


라바는 치르노로부터 눈을 돌려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치르노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며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냐니..? 아까 말했잖아? 난 요정이 아니라고! 널 속여서 위험에 빠뜨린 사악한 신이라고! 그런데도 나랑 같이 있겠다는 거야?”


라바는 치르노를 향해 거의 울먹이듯 소리쳤다. 이 멍청한 요정이 아무리 지능이 낮다 해도 마지막까지 숨기고 싶은 사실을 전부 소리쳐 말해줘야 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치르노는 그 모든 말을 듣고도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뭐 어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치르노를 향해 라바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난 이런 모습이라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라바는 라바야! 그럼 됐잖아?”


“그치만...”


라바는 떨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라바의 입에서 또 다른 말이 나오기도 전에, 치르노는 라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 이번엔 뭘 하고 놀까? 숨바꼭질? 술래잡기? 개구리 얼리기?”


치르노는 라바의 손을 잡고 재촉하듯 잡아끌었다. 라바의 정체를 알기 전처럼 늘 그랬듯이.

라바는 말을 꺼내려고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어버렸다. 그 바보 같고 제멋대로인 모습에 라바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늘 그랬던 것처럼, 치르노의 손에 이끌려 그 뒤를 따라갔다.


“뭐야 라바. 빨리 좀 따라와 봐.”


라바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원래 얼굴을 감추려는 것이 아니었다. 눈으로부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라바는 가려진 얼굴 밑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쁘게 웃음 지었다.


“이 바보가...”


그리고는 언제나와 같이 치르노의 곁을 바짝 따라갔다.


두 요정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라바와 치르노는 평소와 같이 손을 잡고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 않은 채 마음껏 풀밭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저 멀리 열려진 문 너머로 오키나가 바라보고 있었다. 열어젖힌 창문 가까이 얼굴을 대어 그곳에 턱을 괴고 요정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며, 오키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저 요정을 놓아줬냐고..?”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두 요정을 밝게 비췄다. 언제나의 여름과 같이, 저 멀리 들려오는 요정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오키나의 입꼬리도 같이 올라갔다.


“글쎄... 아마 나도 마음에 들었던 거겠지. 내 부하로서 일할 누군가가 아닌, 저 요정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오키나는 창문에서 몸을 떼고 다시 문 안쪽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오키나가 떠나간 문은 서서히 닫히고 이내 점점 투명해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날 이후, 후호의 나라에는 한껏 평화가 찾아왔다. 자신의 성장만을 쫓는 사악한 신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오키나가 그 사악한 신을 쫓아 퇴치하러 다니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더위가 내리쬐는 여름의 문에도, 찬바람이 기승을 떨치는 겨울의 문에도, 수 없이 널려 있는 후호의 나라의 문들 중 어느 것을 열어보아도, 그곳엔 날개가 없어도 사랑받는 한 마리의 나비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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