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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문 스포 번역) 크리스와 플레이어에 대한 가설

ㅇㅇ(222.97) 2021.09.26 04:24:31
조회 19118 추천 182 댓글 29
														



(브금으로 듣기 좋은 랄세이성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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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딧에 올라온 영어 원문 -> [클릭]


결론부터 말하자면 델타룬에서의 크리스는 언더테일의 플라위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그릇'일 지도 모름.


이하는 레딧 게시글 번역




언더테일에서 처음 언급된 "vessel(그릇)"은 영혼을 담도록 설계된 보관함임. 아스고어 휘하의 왕실 과학자 알피스는 인간 영혼의 힘을 활용해 지하에서 괴물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찾고자 했었는데, 괴물은 다른 괴물의 영혼을 흡수할 수 없으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인간의 영혼 역시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혼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걸 담을 수 있는 대체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음. 그리고 알피스는 아스리엘이 지상에서 귀환해 먼지로 흩어졌던 장소에 자라난 황금색 꽃을 그릇 제작을 위한 첫 실험 대상으로 삼았음.


그렇게 '의지'가 주입된 황금 꽃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나 언더테일의 메인 악역 플라위가 됨. 부활 당시의 플라위는 영혼이 없는 상태여서 타인에게 어떤 긍정적인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고, 그런 자신에 대한 비관과 좌절 끝에 자살했지만, 육체(꽃)에 주입된 고농도의 '의지' 덕분에 SAVE 능력을 깨우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기 전의 때와 장소로 돌아갈 수 있었음. 그렇게 지하 최강의 생물이 된 이 그릇은, 사람들의 삶을 자기가 적합하다고 여기는 형태로 마음껏 주물러 보고 실행취소 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함.




델타룬에서 챕터 1을 시작할 때, 누군지 알 수 없는 인물이 플레이어에게 "그릇"을 만들라고 지시함.


여기서 플레이어는 그릇의 외모, 취향, 성격을 선택하고, 선물을 쥐어주고, 이름까지 정해줄 수 있음. 이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우린 그걸 ...이라 하기로 결정했다." 라고 말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미지의 인물이 함께 당신(플레이어)를 위한 그릇을 막 만든 참이거나, 만들고자 했음을 알 수 있음.


설문이 끝나면 그릇이 아닌 창조자(플레이어)의 이름 또한 물어보는데, 이름을 알려주고 나면 델타룬의 세계에서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선택할 자유가 없으며 앞서 플레이어가 선택한 것들은 폐기하기로 했고, 당신의 이름은 크리스라고 말해준다.


크리스에 대해서는 곧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일단 플레이어의 선택이 버려지는 파트에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음. 영어판에서는 우리에게 선택을 제시하는 목소리와 선택을 폐기하는 목소리가 다른 인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데, 일어판에서는 앞의 두 목소리의 대화 패턴이 하나는 가스터의 것을, 다른 하나는 차라의 것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인물이 정말 차라이고 가스터인지는 일단 미뤄두고, 진짜 중요한 건 플레이어에게 그릇을 만들어주는 인물과 플레이어에게 선택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인물이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임.




크리스는 괴물로 가득한 평화로운 마을에 사는 유일한 인간임. 드리무어 가(家)에 입양되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챕터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가족과는 정상적이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마을의 이웃들과도 잘 지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작중에서 묘사되는 크리스의 어린 시절은 장난끼로 가득하고, 형제 및 옆집 이웃과의 좋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으며, 버터스카치 파이와 초콜릿과 같은 음식을 즐기고, 즐겨 쓰는 샴푸는 사과향에, 아이스-E의 쿨 보이즈 바디 스프레이(존나 매운 피자향)을 싫어하고, 피아노 연주를 즐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평범하게 보이는 어린 시절은 우리가 게임을 시작할 때 마주하게 되는 크리스의 상태와는 그닥 일치하지 않음. 머리카락은 얼굴을 덮고, 자기 방의 색이 바랜 면에는 개인 물품이나 흥미로운 어떤 것도 놓여있지 않고, 늦잠을 자고, 조용하고 내성적인데다, 학교에서는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는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친구와 마을 사람들은 크리스의 친절한 모습을 본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언급함.


누군가는 이런 점을 두고 크리스가 그냥 아스리엘을 많이 그리워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음. 하지만 그것만으론 크리스의 방이 이상하리만치 공허한 점이나 크리스가 어릴적부터 노엘과 거리를 두려고 했던 점을 설명하지 못함.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생각은 노엘의 친언니 디스에게 일어난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크리스에게 너무 큰 영향을 줘서 지금처럼 변했다는 건데, 이건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임. 애초에 디스는 노엘의 자매이고, 히든 루트에서 밝혀지기로는 디스에게 발생한 모든 일은 노엘의 잘못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노엘은 디스의 일과 관련해서 약간의 PTSD가 있었지만 대부분 극복한 것으로 보이고, 지금은 지적이고 친절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됐음. 크리스가 친동생인 노엘보다도 디스와 더 가까웠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서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위의 두 가지 가설은 크리스의 우울한 상태에 기여하는 요인이 될 지는 몰라도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함.


이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다시 다룰 것.




이 다음 부분에서는 델타룬에서 자유와 제약, 운명과 자유의지, 선택의 부재가 언급되는 경우를 그냥 나열하고, 나중에 결론지어볼 거임.


앞서 언급했듯이 델타룬 챕터1의 시작 부분에 있는 두 번째 목소리는 플레이어에게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언급함.


수지가 복도에서 크리스를 위협하는 장면에서, 수지가 자신의 과제까지 크리스에게 떠넘기곤 의견을 물어보는데, 여기서 플레이어는 어떤 응답도 할 수 없고 곧바로 수지가 "아직 감이 안 잡히시는가 본데... 네 결정은 아무 의미도 없어." 라고 말함.


랄세이는 주인공 일당에게 세계의 운명을 묘사하는 여러 전설들과 "빛의 영웅"들이 실행하기로 정해져 있는 예언들을 들려줌.


미지의 존재와 접촉한 제빌은 광기에 빠져 세상을 게임으로, 모든 이들을 그 게임의 장기말로 보게 됨. 이 때문에 카드의 왕들은 제빌을 감옥에 유폐해버렸지만, 제빌은 이를 묘사하길-


제빌: "놈들은 벌로 이 몸을 가두려고 했어. 허나 난 빠르지, 재빨라, 영특해, 영특하지. 놈들은 끝내 패배했고, 이 세상 주위로 창살을 쳐 온 백성을 가두어 버렸네. 이제 오직 나만이 진정 자유로운 몸이구나."


랄세이: "자유? 철창 안에 있는 건 분명 그쪽 같은데..."


제빌: "여기선 그렇게 보이지 않는구나, 라이트너여!"


제빌은 감옥문 열쇠 찾기를 거절하면 "어찌 거부할 수 있나, 그대들은 이미 놀이에 함께하고 있는데!" 라고 말하며, 전투 중에는 "혼돈" 과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라는 말을 반복함. 제빌은 전투 끝에 말하기를-


"즐겁구나!! 이제 지쳤어!! 너희들 덕분에 아주 진이 빠지는군!! 이제 이 몸은 또 100년 간 잠에 들겠지. 안됐지만, 그 행복한 꿈은 너희 꼬마들 것이 아니야. 지금부터 네 가슴 속에 악몽이 피어날 것이다. 기사의 손아귀로 드리워진 그림자로부터... 라이트너여, 그걸 멈출 수 있겠나? 위히히! 어찌됐든, 장난은 장난이고, 혼돈은 혼돈! 라이트너들이여! 너희들 안의 작은 감옥 속에서!! 이걸 받고 최선을 다해보아라---!"


제빌을 처치한 다음 샴에게 가보면 샴이 말하기를-

"녀석을 무찔렀다고!? 정말로 녀석을 무찌른 게야!? 그렇구만... 자네들 셋은 진정으로 '영웅'일 지도 모르겠어. 허나 제빌은 앞으로 자네들이 마주하게 될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네. 언젠가는 곧... 자네들 또한 스스로의 행동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알게 될 터이니. 하하하... 그 때가 오면, 얼마든 다시 이곳에 들러주게. 어디 같이 차나 한 잔 하자고... 세상의 멸망 아래서 말일세!"


다크 월드로부터 귀환한 뒤 병원에 가보면 레일을 따라 구슬을 굴리는 어린이용 장난감이 있는데, 이를 조사하면 크리스가 묘사하길 "구슬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으스스하게 행진하고 있다." 라고 함. 챕터 2에서는 어떤 루트를 탔느냐에 따라 구슬에 대한 묘사가 조금 달라지는데, 일반 루트일 경우 "구슬들의 행진은 계속된다.", 히든 루트의 경우 "푸른색 구슬 하나가 뜯어진 채 망가져 있다."


히든 루트는 공식 스크립트상 Weird Route (이상한 루트)로 명명되어있는데, 이 루트가 숨겨진(hidden), 대체(alternate), 몰살(genocide) 등의 단어가 아니라 '이상한'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는 점에서 해당 전개는 '올바르지 않'으며 본래 일어났어야 하는 일에 위배됨을 시사한다고 봄.


또한 챕터 2에서는 "쓰레기 같은 소음"으로 말하는 수수께끼의 인물과 통화한 후 갑자기 떴다가 갑자기 몰락한 뒤 미쳐버린 스팸 메일 로봇, 스팸톤 G 스팸톤을 만나게 됨. 크리스와 스팸톤은 인적 없는 골목에서의 전투 끝에 어떤 '거래'를 하는데, 이 거래 중 나오는 단어들에 대한 분석은 다른 레딧 게시글로 이어져서 일단 생략하고


전투중 스팸톤은 거래 내용에 대해 계속 언급하는데


"믿거나 말 !! 저도 한 때는 거물이었습니다. 왕 중의 왕 거물 !! 하지만 이제... 저도 약간의 [[관용]]이 필요하죠"


"바로 그거지 저는 [[돈]]을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저는 세일즈맨입니다 , 돈 따위를 바란 게 아니란 말씀!!!"


"제가 바라는 건 오직 [자유]에요. 당신만의 [딜] 당신만의 [말]을 하고 가끔은 아침에, 약간의 [하이퍼링크 차단됨]. 끝내주는 얘기 아니니? 꼬마야?"


그리고 스팸톤이 스팸톤 NEO가 됐을 때,


"(감탄사) 끝내줘 ... 바로 이거야!! 크리스!! (대충 이게야스지 하는 내용) 하 하 하... 바로 이 힘이 자유다. 난 이제 더 이상 꼭두각시 따위가 아니야!!!! ... 라고... 전... 생각했는데요. 이 끈들은 대체 뭐죠!? 왜 아직도 충분히 [크지] 못한겁니까!? 아직 어두워요... 너무 어두워!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크리스. 그래. 너. 네가 필요해. 커지자. 나와 함께. 너무 너무 커져서 어둠을 뚫고 서 저 너머 구름 속에 머리가 들어가도록 우뚝 서 천 국 을 보는 거야 네가 가진 그 작은 [[영혼]]이 필요해\"


"네가 할 일은 [커]지는 것 뿐이야. 바로 그렇게 우리가 [콜]을 외치는 쪽이 되는 거지, 크리스!"


"크리스!!! 딜을 받아들여!!! 어서!!! 평생을 [사슬]이 칭칭감긴 [심장]으로 살 거야!?"


"내... 내 [와이어]... 거의 다 [끊어졌어]!? 크리스... 당신... 당신이 내게 [자유]를 [선물]해 주시는 건가요?! 크리스... 제가 당신에게 한 일을 겪고도...!? 저의 [잊을 수 없는 거ㄹH] [공짜 KROMER] 를 받으시고 마침내 저의 [관용]에 보답하시는 건가요!? 크리스!!! 드디어 알겠어요!! 세상 가장 위대한 딜 중의 딜!!! [우정]!!! 크리스!!! 제 [긴 코 인형]으로서의 삶은 끝났어요!!! 그 [와이어]를 끊어 저를 [진짜 소년]으로 만들어 주세요!!"


스팸톤 NEO와의 전투 이후,


"결국에는 저도 단순한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나 보군요. 하지만 여러분... 당신들은 강해요. 그런 힘과 함께라면...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의 줄을 끊어낼 수 있을 겁니다."


또 스팸톤 NEO는 히든 루트에서 이런 대사를 함


"네 [사이드 칙]으로 [냉동 치킨]을 만들면 그 입에 [달콤하고, 달콤한] [프리덤 쏘스]가 굴러들어 올 거라고 생각했나? 글쎄, [$!$!]까는 소리!"


샴에게 섀도우 크리스탈 두 개를 건네고 나면 샴이 이런 말을 함: "운명이 다가오고 있네... 보아하니 자네 편은 아니구먼."




여러 단서를 종합해봤을 때, 크리스는 '그릇'일 거라는 생각이 듦. 비록 우리(플레이어)가 만든 그릇은 아니지만.


드리무어 가족의 일원이 되기 전 크리스의 기원은 매우 불분명함. 델타룬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딱히 희소한 종족이 아니고, 인류에게 어떤 크나큰 위협이 닥쳤다는 암시도 없음. (챕터2 도서관 2층에 '괴물로서 인간을 키우는 방법' 같은 책도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마을의 유일한 인간이자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며, 크리스가 없어진다면 마을의 어느 누구도 인간과 상호작용할 일이 없을 것 같음. 이게 더욱 더 크리스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점임.


게다가, 크리스는 도서관 2층에서 책 안의 다른 인간들의 사진을 보고는 불쾌하거나 공포에 질린 것처럼 책을 확 덮어버림. 크리스가 수지와 함께 마을 남쪽 벙커에 갔을 때 벙커 문 앞에 서있는 스노위와 키드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크리스는 벙커 너머에 뭐가 있는 지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너머를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함. 확실한 건, 벙커의 존재, 그리고 크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인류의 행방에 대해 생각해보면 크리스의 과거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


이게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나는 위의 두 가지 이유로 크리스가 그 벙커 안에서 누군가(챕터1 시작 부분 첫 번째 목소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이리라고 믿음. 첫 번째 목소리가 우리의 취향을 물어본 점, 크리스의 외형이 우리가 만들려고 했던 그릇과 닮았다는 점, 차라처럼 말하는 두 번째 목소리가 그릇의 제작 과정에 끼어든 점 때문에 더. 결과적으로, 크리스는 차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으니까.


하지만, 크리스가 정말로 그릇이라면 그는 왜 플라위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까? 플라위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새디스트였는데, 그에 반해 우리가 보아온 크리스는 일단 조금 비뚤어졌을지언정 멀쩡하게 행동하는 평범한 십대 청년처럼 보임.


그에 대한 답은 간단함. 크리스는 영혼을 가지고 있음. 크리스는 아주 분명하게 챕터 1의 시작부터 영혼을 가지고 다니며, 크리스의 평소 행동과 이전에도 '빙의'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음을 암시하는 단서(크리스 방의 새장 옆 바닥에 난 얼룩, 그리고 수지와 토리엘이 파이를 만들다가 화장실에 간 크리스가 돌아오지 않자 수지가 크리스를 찾는데 토리엘은 "크리스는 어... 가끔 그런단다." 하고 맒.)를 감안할 때 크리스의 영혼의 역사는 생각보다 더 오래됐을 수도 있음. 애초에 영혼이 없었으면 챕터1의 막바지에 그렇게 뽑아내지도 못했겠지.


크리스의 빙의 현상이 괴상하기는 해도 왜 영혼을 가진 평범한 십대가 '그릇' 일거라고 단정하느냐?


그건 다시 크리스를 플라위와 비교함으로써 설명 할 수 있음.


언더테일에서 플라위는 영혼들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만들어졌고, 영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SAVE를 통해 죽음을 거스를 수 있을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 SAVE의 힘에 막 눈떴을 때는 적어도 겉으로 평범해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반복되는 리셋에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끝없이 사람들을 인형처럼 갖고 노는 과정에서 플라위의 성격은 점점 비뚤어지다가 더 이상 처음 부활했을 때의 성격이 남지 않을 만큼 왜곡됐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더 강력한 의지를 가진 존재가 나타나서 SAVE의 힘을 빼앗고 운명을 통제할 자유를 빼앗아 갔지. 바로 우리(플레이어).


델타룬에서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우울해보이고 고립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건 누굴까. 한때 좋아했던 것들에 관심을 잃어버린 것 같고 한때 친했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서 멀어진 건?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것 마냥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지?


바로 크리스!


비록 인게임 필드에서 크리스의 움직임을 조작하고 메뉴에서 버튼을 선택하는 건 우리들이지만, 그 선택지를 제공하는 건 우리 플레이어들이 아니며, 선택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건 크리스임. 예를 들어 버들리의 편을 든다는 결정을 내리면 크리스는 (플레이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의문스럽다는 듯이) 엄청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하고, 스팸톤의 상점과 퀸의 성 지하실에 입장할 때 플레이어의 뜻을 묻지 않고 수지와 랄세이를 외부에 대기시키며, 스팸톤 NEO와의 전투 이후 괜찮냐는 질문에 '응'을 선택하면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아니'를 선택하면 고함을 지름 (아마 그게 크리스 본인의 심정이기 때문에). 또 플레이어가 뭔가를 조사할 때 나오는 묘사 및 설명들 역시 플레이어가 주체가 아님. 그 묘사와 설명들에는 플레이어는 몰랐을 디테일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건 전부 크리스 또는 크리스의 마음 속 누군가가 그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


따라서 크리스가 우리의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이고 크리스의 개인적인 생각이 곧 우리가 보는 설명 텍스트들의 근간이라면, 크리스는 우리가 게임을 하며 보게 되는 이런 저런 설명에 어느 정도 간섭할 수 있는 거임. 예를 들면 현실세계 크리스 방의 서랍을 조사했을 때 나오는 엄청나게 짧고 따분한 설명, 병원에 있는 장난감을 조사할 때 나오는 미묘하게 부정적인 설명, 그리고 특히 챕터 2 초반에 세면대를 조사하면 나오는 불길한 문구 (아직은 손을 씻을 때가 아니다.). 이 컨셉은 언더테일의 설명 텍스트들이 차라의 시점에서 묘사된 것이라는 가설과도 일맥상통함.


크리스가 그릇이든 아니든, 플라위처럼 SAVE의 힘을 가지고 몇 번이고 인생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존재라고 가정하면, 델타룬에서 언다인과 알피스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크리스가 언다인 보고 알피스에 대해 물어보는 선택지가 있는 것도 납득할 수 있고, 샌즈가 이제 막 새로 입주해 처음 보는 시점인데도 크리스가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는 선택지가 있는 것도 납득할 수 있음. 게다가 크리스는 플레이어가 챕터1에서 샌즈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더라도, 챕터2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샌즈에게 동생(파피루스)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 할 수 있음. 샌즈는 너한테 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한 적 없다고 말하지. 우리 플레이어들은 이미 언더테일에서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저런 선택지들이 이상해 보이지 않지만, 그 선택지를 제공하는게 우리가 아니라 크리스임을 되새겨보면 뭔가 이상함을 느낄 거임. 그리고 저 선택지들에 대해 크리스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크리스의 행동 역시 자연스러운 것을 알 수 있음. 마치 이미 해본 것처럼. 델타룬의 요소들이 언더테일을 해본 플레이어에게 친숙한 만큼, 크리스 역시 이 세계에 익숙한 것.


크리스가 여러 번의 '런'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있을 거라는 가설이 어떤 점에서 더 그럴싸하냐면, 크리스가 SAVE를 할 수 있다는 증거가 있음. 델타룬을 해본 적 없는 컴퓨터에서 챕터1을 시작하고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저장을 하려고 하면 보게 되는 게 뭔지 앎? 크리스의 세이브 파일임. 사실 크리스는 세이브 포인트와 상호작용할 때 그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고 그걸 설명까지 함. "이따금, 깜빡이는 것을 본다. 당신만이 볼 수 있는 빛. 본능적인 감각에 따라, 손을 뻗으면, ... ". 다시 말하지만 이 텍스트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플레이어의 입력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는 크리스임. 세이브 포인트를 전에도 본 적 있는 사람은 크리스이고, 크리스는 그걸 직접 사용해본 적도 있기 때문에 본능(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제 2의 천성)적으로 손을 뻗는 것.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음을 가정할 때 크리스의 행동이 이상한 것은 분명함. 크리스가 이전에 이 모든 일들을 여러 번 겪었다면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 알 테고, 알아선 안될 사람도 알 것이며, 실패한 모험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 또한 알고 있을 것임. 대파괴, 하늘을 뒤덮는 어둠의 샘, 석상으로 변해버린 다크너들, 영원한 밤 속에 갇힌 라이트너들. 크리스에겐 자신의 SAVE 파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자신의 친구들이 속수무책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보며 세상이 끝나는 경험을 반복해야만 한다면 누구라도 희망을 잃지 않겠음? 무엇을 이루려고 하든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냐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해가 떠도 일어나지 않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괴물 일진이 얼굴을 물어뜯으려 들어도 일말의 반응조차 하지 않고, 주변에서 어떤 환상적인 현상이 일어나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게다가 이제는 웬 적대적인 무언가가 신체의 통제권까지 빼앗아가려고 하는데...


샴, 제빌, 스팸톤, 크리스 모두 희망 없는 미래를 묘사하고, 어떤 강력한 힘 없이 예정된 끔찍한 운명에 맞서려는 시도는 완전히 쓸모없다고 믿음. 샴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파티의 순박함을 비꼬듯 냉소적으로 웃고, 제빌은 삶에서 가치를 찾지 못해 마지막까지 죽음과 혼돈을 일으키고 싶어함. 그런데 스팸톤은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신으로서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자유를 얻고 싶어했고. 그 때문에 크리스는 스팸톤 NEO와의 전투를 겪으며 충격을 받았음. 스팸톤이 크리스를 "끈 달린 하트"라고 불렀을 때 크리스는 비유적으로나 말 그대로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겁을 먹은 것. 운명에 끌려다니는 껍데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에 빙의된 몸, 파괴될 세상과 끝없이 반복되는 광경. 크리스 입장에서 수지와 랄세이가 스팸톤을 몰랐으면 하는 것도 당연함.


하지만 이번 '런'에서는 뭔가 다름. 전에 본 적 없는 누군가가 크리스의 영혼에 끼어들어 함께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 플레이어임. 플라위처럼, 크리스는 자신보다 강력한 의지를 가진 플레이어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SAVE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음. 플라위처럼, 크리스는 똑같은 사건 똑같은 결과를 끝도 없이 경험한 탓에 희망을 잃고 무감각해졌음. 그리고 플라위처럼, 플레이어가 이 고리를 끊을 열쇠로서 등장한 거임.


샴은 주인공 일당이 제빌을 쓰러뜨리고 나면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섀도우 크리스탈을 수집하기로 결정함. 제빌 역시 우리들의 힘을 경험하고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비교적 최근의 사례로는 스팸톤이 주인공 삼인방의 힘을 보고 운명의 끈을 잘라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함. 스팸톤의 거래가 뭐였는지 기억함? 크리스의 영혼 안에 내재된 플레이어의 힘이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열쇠임. 게임 사운드트랙 중 YOUR POWER 가 어둠의 샘을 봉인할 때만 재생되는 거 알지? 여기저기 떠도는 다른 가설들 하곤 달리 나는 플레이어가 크리스를 도와 Roaring(델타룬의 세계 멸망)을 피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개입하는 거라고 믿음.


물론 이 중 어느 것도 절대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플라위와 크리스의 비교가 매우 신빙성 있게 다가와서 공유하고 싶었음.

당연히 아주 틀렸을 수도 있으니, 피드백 해주면 좋겠어.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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