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달릴 때 맞는 바람은 언제여도 기분이 좋다. 그게 좋은 소식으로 말을 타든, 나쁜 소식으로 말을 타든...
"그런데 무슨 일이죠?"
"제가 감히 설명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그 기계교 미친년이 이상한 거라도 팔았나..."
이 행성의 임금님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다른 행성들이 우주선을 만들어서 별과 별 사이를 항해할 때. 이 행성은 여전히 칼, 창, 활로 전쟁을 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저 바깥 세상과 접촉할 때가 있었는데. 그건 정기적으로 오는 기계교들이었다.
사실 기계교가 이 행성에 올 일은 없다. 멋진 광산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치들이 늘 뻔질나게 말하는 STC가 묻혀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행성을 전 제국인들이 모여서 땅을 파도 고대의 과학기술은커녕 간단한 화승총도 안 나오겠지만..
그런데 부득불 그 친구들이 오는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방랑하는 검'이란 이름을 가진 나이트 팔라딘 요거 하나 때문이었다.
왜 'STC덩어리'(기계교는 팔라딘을 이렇게 불렀다.)가 이 촌구석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이걸 몰던 내 전임자도 그 이유를 몰랐으니까. 그분은 그냥 방랑하는 검이니까 이름값을 하는 거지.. 라고 얼버부리곤 했다.
보통 나이트들은 다 자기 따까리들이 있어서 기계교의 도움이 없어도 알아서 자급자족한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이 '방랑하는 검'은 원래 있던 가문에서 허겁지겁 도망쳤는지 전용 '성구 관리인'도 없었다. 여기까지 봤을 땐 사실 방랑하는 검이 아니라 '도망가는 검'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거 같기도 하지만..
여하튼 이 '방랑하는 검'은 워낙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부품들로 꽉꽉차있다보니, 누가 지속적으로 점검해주지 않으면 기계령이 고통속에 슬퍼하다가 주인을 증오해 마지막엔 배신할 꺼라고 기계교 사제가 주장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왔다갔다 하느니 기계교 사제 몇몇을 아예 이 행성에다 고정해 놓으라고 했더니, 자신들은 이 성스러운 유물을 제외한 가장 복잡한 기계가 우물 두레박인 행성에 계속 있다가는 미쳐서 자기 스스로를 분해/조립을 할지도 모른다고 거절했다.
여하튼 기계교들은 3개월에 한번씩 왔다. 그런데 이 '방랑하는 검'이 그 작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는지. 가끔 새로운 얼굴들이 우글우글 몰려왔었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알 수 없는 기계어로 찬송인지 비명인지 분간이 안되는 말을 지껄이는 사제들도 있었다. 딱 하나 안 바뀌는 얼굴 있다면 여기에서 제일 가까운(이라고 해도 10광년이다.) 포지월드에서 오는 전담정비사 Vax-375erD라는 여자였다. 사실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붉은 로브의 몸매가 여성스럽기도 하고, 지말로 여자라고 주장하긴 했는데... 얼굴부터 팔,다리까지 살점은 하나도 없는 기계덩어리를 여자라고 볼 수 있을련지? 게다가 이 여자는 자부심이 강한 건지 아니면 잘난척이 심한 건지, 은근히 여기 행성사람들을 무시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 씨발놈의 '포지월드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라고 지껄여대는 건 그나마 참을만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여자'가 '방랑하는 검'을 고치고 사람들한테 잘난척하는 것뿐만 아니라 임금님을 속여서 물건을 팔아먹는 거였다.
사실 우리 임금님이 뭘 알겠는가. 아마 임금님의 딸을 카메라로 찍고 사진을 보여주면서 '공주는 이 마~법감옥에 갖혔으니 돈 내놔!'라고 하면 아마 바로 내놓을 사람이었다.
이년이 그걸 알고 포지월드에서 싸구려로 처분되는 물건을 가져와서 비싸게 팔아먹기 시작했다. 하이브월드의 불쌍한 노동자들 최저시급인 0.1쓰론 짜리 '홀로그램 동화책'을 진주 하나랑 바꿔먹는 건 약과였다. 저번엔 씨발 그냥 싸구려 카페에서도 공짜로 뿌리는 라이터를 가져와서 기계교 대사제께서 인류들에게 친히 만들어 주신 '빛'이라면서 다이아몬드 하나랑 바꿨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건 해도해도 너무했었다.
"벡스 씨 나랑 잠깐 얘기좀 해요."
Vax-375erD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등짝에 붙어있는 기계팔들로 다이아몬드를 만지작 거리면서 대꾸했다.
"왜요? 정비에 문제라도 있나요?"
"너무 비싸게 팔아먹는 거 아니에요?"
"뭘요?"
"라이터말이에요."
"어머, 그건 위대한 포지월드 대사제께서 만든 걸작 중 하나라구요. 다이아몬드 한 개는 진짜 거저 준 거라구요."
솔직히 평소의 나였다면 말로 풀었겠지만, 하필 그때 '방랑하는 검'의 콕핏에서 조정작업을 하고 있던 게 문제였다.
참 이상도 하다. 콕핏 안에만 타면 화가 치밀어오르니... 전임자는 그게 선조들과의 정신적 감응이라고 했다. 그나마도 옛날에 비하면 엄청 약해진 거라고 했다.
그래도 분노는 정말 강했다. 어휴 죄다 분노조절장애인밖에 없었으니 자기 가문에서 도망쳤겠지.
어느새 난 그 철없는 기계교 사제에게 '방랑하는 검'의 멜타캐논을 풀파워로 충전하고 조준했다.
"이 개같은 년이 누굴 호구로 아나! 내가 아는 게 이 염병할 나이트밖에 없는 테크노 바바리안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런데 생각보다 그 여자는 담력이 쥐뿔만했나보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지글거리는 멜타캐논을 보더니 부들부들거리며 회색 연기를 내더니 픽 쓰러져버렸다.
그녀가 재부팅된 건 한시간 뒤였고, 나도 간신히 화를 추스린 것도 한시간 뒤였다. 난 임금님한테 그냥 다 말했다. 그러자 임금님은 옆에 서있는 기계팔을 힘없이 축 늘어뜨린 Vax를 보곤.
"동생이 여섯명이나 있고, 그 하이브시티인가 뭔가에서 일하다가 불구된 부모님도 계신다면서? 게다가 쥐뿔도 안되는 사제 월급가지고 먼 미개한 행성까지 와서 얼마나 힘들겠노. 지금까지 속였던 건... 그냥 내가 수고비로 동생이랑 부모님들 약값으로 줬다고 치라. 그냥 앞으로는 안 그러면 된다잉."
캬~ 내가 임금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기억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으시다는 거였다. 가끔 저 기계교 사제년이 가끔 혼자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투덜거리긴 했는데 그걸 다 기억하다니!
Vax는 펑펑 울면서 임금님께 절을 올리곤 우주선으로 돌아갔다. 눈물샘도 없는 게 어떻게 펑펑 울었냐고 묻겠지만 왕궁 대리석에 검은 기름방울 몇 개가 떨어져있는 걸 봐선... 눈물이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년이 또 다시 못된 버릇이 나왔단 말인가. 이번에도 그렇다면 진짜 멜타캐논으로 녹여버릴 것이다.
어느새 눈 앞에 궁궐이 보였다. 그런데 궁궐문 앞에 늘 보이던 문지기가 안보이고 이상한 갑옷있는 사람이 서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는 우리에게 정지를 외치며 창이 아닌 무식하게 생긴 볼트건을 겨눴다. 주황색깔인 무식하게 큰 갑옷에 화가난 듯한 투구, 그리고 갑옷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황제말씀을 적은 종이쪼가리들... 스페이스 마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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