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 이 얼마나 심오한 개념이란 말인가. 나의 그대여, 나는 셀 수 없는 세월을 나 자신이 이해도 못한 개념을 입에 올리는데 허비했소. 나는 황제를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제국을 사랑한다 지껄여댔지. 그건 사실이 아니었소. 나의 아름다운 그대여, 지금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소. 그리고 거짓으로 점철된 내 인생에서 이것만큼은 유일한 진실이라 보장하오.
-
마치 짜여진 관과 같은 형태의 X92호 우주 잔해가 발견된 것은 순전히 모 함대의 공이었다. 부숴진 제국 소속 상선의 잔해로 이루어진 이 일종의 유령선은 일반적인 항로에 벗어난 성계의 어두운 부분에 위치해 있었고, 주변 행성에 의한 이상 중력반응으로 소형 선박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어 발견이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우연히도 항로를 실수로 벗어난 모 함대의 순찰대가 이상 중력장 반응을 우연히도 감지하게 되어 잔해는 비로소 다시 한번 빛을 보는 듯 하였다. 그러나 혹시나 모를 카오스 오염의 확인을 마친 순찰대가 다시 먼 길을 떠나자, 별 다른 특이 사항이 발견되지 않은 잔해는 인양의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어두운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인퀴지터 콜릭이 그런 무의미한 장소로 향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도달시간을 예측하라, 서비터. “
“ 정확히 30분 전 입니다. 인퀴지터님. “
황제에 대한 강한 충성과 악마적 비의에 강한 저항력을 자랑거리로 삼는 어느 챕터, 유난히도 금욕적인 삶과 그를 증명하는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이 챕터의 채 다섯이 안되는 배반자 마린 중 하나의 흔적이 이 잔해에서 발견되었다. 지독히도 영리한 놈이었다. 흔적을 숨기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듯 했다. 거기에 강운이라도 붙었는지 놈을 추적하던 인퀴지터 대부분이 모종의 사고로 실종되었다. 그것도 여기까지다. 콜릭이 기대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카오스 오염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만큼, 물론 이곳이 놈의 은신처는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에 경호 겸 조사용 서비터 십 수 기 정도만 대동하고 온 그였다. 그래도 그 조심스러운 놈이 흔적을 흘린 곳답게 분명 모종의 단서가 있으리라.
“ 이상 중력 반응 감지. 위험도 낮습니다. “
“ 계속 항행하라. “
공전 주기 상 중력 반응이 나타날 기간이 아닌데 ? 콜릭이 생각했다. 아마 감지장치에 착오가 있었으리라. 배신자 마린의 관련자료를 검토하던 콜릭이 한 숨을 쉬며 이마를 양손으로 짚었다. 순결성과 충성심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챕터답게, 이 배신자 마린, 그것도 일개 중대의 캡틴이었던 자와 관련하여 콜릭이 챕터에게 받는 기대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챕터의 타락이 외부로 새어나는 것에는 극히 배타적이라 정보적인 협조는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몇 가지, 중대 캡틴이던 배신자 마린이 미미한 사이킥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탈주 직전 카오스 오염이 초기 진행 중이던 행성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 밖에는. 갑자기 선체가 강하게 흔들려, 콜릭이 상념 에서 깨어난다.
“ 경고, 중력 이상 반응이 강해집니다. 위험도 매우 높음. “
“ 그럴리가 ?! 이렇게 빠른 속도로 중력반응이 강해지다니, 게다가 주기상 중력 반응이 일어날 기간이 아닐텐데 ? “
“ 중력 반응이 급속도로 강해집니다. 탈출 장치 가동을 강하게 권고합니다. “
“ 제, 젠장 ! “
서비터 중 일부가 콜릭의 몸을 일으켜 측면의 탈출포드로 향했다. 선체가 흔들리는 정도가 급격하게 강해져서 몸을 가누기 힘든 정도였다. 명멸하는 비상등과 귀를 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선내를 뒤흔들었다. 콜릭이 붉은 버튼을 누르자 탈출포드의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탈출 포드의 현창 너머로 찌그러지는 선내의 모습이 보였다. 입술을 물어 뜯던 콜릭이 탈출 포드 내부의 버튼을 강하게 내리쳤다. 푸슝, 하는 소리와 함께 선내의 모습이 멀어졌다. 현창 너머로 탈출 포드에 탑승하지 못한 서비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감정 없는 무표정이었다.
-
선체로부터 방출된 탈출 포드는 다행히 중력의 그물에 붙잡히지 않을 정도의 출력의 엔진을 내장하고 있었으므로, 콜릭과 그의 두 서비터는 안전하게 X92호 우주 잔해의 내부로 도달할 수 있었다. 콜릭이 무릎을 털며 포드에서 내렸다. 인상적인 장소군, 그가 생각했다.
유령선의 내부는 오랜 기간 방치된 흔적이 역력했다. 유기된 발전장치와 내부 환경 조절장치가 제 역할을 하고 있어 호흡에는 지장이 없었다. 천장에는 부숴진 형광등의 잔해가 흐드러진 수목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벽에 놓인 식량 자판기는 쓰러져 그 내용물을 토해낸 상태였다. 신기할 정도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상한 점은 단 한가지, 사이킥 농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 서비터, 주변을 조사하라. 생체 반응, 오염 흔적,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
“ 알겠습니다. 인퀴지터님. “
콜릭이 탈출포드에 부착되있는 신호장치를 조작했다. 주변의 함선에 구조신호를 보내놓을 작정이었다. 계속해서 신호를 방출시켜봤지만, 무언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젠장, 콜릭이 가볍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편한 방법으로 여기서 나가기는 그른 모양이었다. 잔해 내부에 남아있는 연료와 식량을 활용해 탈출 포드를 재사용하는 수 밖에는. 딱히 별 수가 보이지 않았다.
“ 인퀴지터님, 시각 센서상 전방 복도 모퉁이에 인간 형태의 생물체가 확인됩니다. “
콜릭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 머리의 무언가가 분명 복도 끝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독히도 어두워 시계확보가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 실루엣으로 봐선, 분명 인간 여성이었다.
“ 멈춰라 ! 나, 인퀴지터 콜릭은 신성한 옥좌를 대신하여 이곳에 왔노라. 제국의 신민이라면 나와 얼굴을 보여라 ! “
실루엣은 소리치는 콜릭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콜릭이 손짓하자, 서비터가 안면에 부착된 장치를 조작했다. 내장된 전등이 밝게 빛을 발해, 어둠으로 몸을 감싼 실루엣을 비춘다.
그것은 충격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금발의 긴 머리로 하얀 피부의 나신을 가린 여신이었다. 나긋나긋한 눈매는 부끄러운 듯 살짝 감겨있었고, 붉은 입술은 나지막히 미소를 띄고 있었다. 넋을 놓은 콜릭과 눈을 마주치며, 그것은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 반응이 없습니다, 인퀴지터님. 생물체를 쫓을까요 ? “
홀린 듯 그녀를 멍하게 쳐다보던 콜릭이 서비터의 말에 고개를 휘젓는다. 다시 냉철한 표정으로 돌아온 인퀴지터가 허리춤의 볼트 피스톨을 꺼내 실루엣을 겨누었다. 여인이 장난스런 미소를 짓더니,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버린다.
“ 이런 곳에 민간인이 있을리가 없다 ! 필시 외계의 기술이거나 더러운 카오스의 수하일터 ! 저 자를 쫓아라 ! “
콜릭이 외치며 그 뒤를 쫓았다. 서비터들도 신체에 내장된 볼터들을 꺼내며 그를 뒤따랐다. 콜릭이 추적하며 사이킥 에너지를 집중해봤지만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싸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워프에너지가 이렇게 높은데도 오염 반응이 전혀 없다는건 오히려 더 어색한 일이다. 마치 무언가가 커다란 장막에 쌓여 있는 느낌이었다. 터무니 없는 것이 장막 안에 숨어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퉁이를 돌자, 다시 어둠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복도였다. 콜릭이 신경질적으로 야시경 장치를 외투 안주머니에서 찾았다. 복도 끝에서, 무언가 붉은 점이 보였다. 눈을 찌푸리며 그것을 확인하려던 콜릭이 포기하고 장치를 꺼냈다
“ 인퀴지터님. “
서비터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콜릭은 달리면서 야시경 장치를 머리에 쓰고 있었으므로, 그 부름에 대답하지 못했다. 야시경 장치를 장착한 콜릭이 고개를 드는 순간, 총성이 복도를 울렸다. 장치 너머로 보이는 복도 끝에, 붉은색 안광의 아스타르테스 하나가 볼터를 들고 그곳을 조준하고 있었다. 서비터 하나가 콜릭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볼터의 탄환이 그의 가슴을 반쯤 관통해 등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 젠장 ! 엄폐 후 사격 ! “
볼터에 맞아 주저앉은 서비터를 엄폐로 삼으며, 콜릭이 볼트 피스톨로 응사했다. 아스타르테스가 벽에 기대어 볼터를 사격하는 남은 서비터 하나를 조준하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마치 허공의 무언가를 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손에서 붉은 섬광이 뻗어나와, 서비터를 강타한다. 콜릭이 갑작스런 섬광에 감았던 눈을 뜨자, 머리가 다 구워진 서비터의 시체가 보였다. 볼터의 방아쇠를 당기던 도중에 머리가 날아가버린 그것이 총알이 다 할때까지 볼터를 허공을 향해 발사하고 있었다
아스타르테스는 더 이상 엄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콜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사이킥 에너지가 그의 주변을 일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콜릭은 사이킥 반응을 느낄 수 없었다. 콜릭의 불길한 직감이 적중한 것이었다. 무언가가 이 곳의 사이킥 흐름을 왜곡해 반응을 감지할 수 없게끔 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미약한 사이킥 능력자라고 들은 배신자 마린은 손짓 한번으로 전투용 서비터를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콜릭이 낭패감에 이를 악물었다. 콜릭의 총에서 발사된 탄환을 사이킥으로 튕겨버리면서,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마린이, 콜릭의 이마에 총구를 대었다.
“ 무장을 해제하고 바닥에 엎드려라, 무너져가는 제국의 종복아. “
“ 신성한 옥좌를 배반한 더러운 놈, 내 무릎이 바닥에 닿는 꼴을 보려거든 지금 죽이는게 나을거다. “
“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네 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
“ 오직 폐하의 사랑만이 참되나니, 그 안에서만 나는 복종하노라. “
“ 하 ! 사랑이라. “
배신자 마린이 냉소를 지으며 콜릭의 말에 대답했다.
“ 그것은 극히 고차원적인 개념이지. 네 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직접 팔다리를 부숴서 끌고가주마. “
마린의 오른손이 다시 한번 붉은색으로 빛났다. 콜릭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콜릭을 향해 겨누어졌다. 붉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기 직전, 갑작스러운 볼터의 총성이 복도를 울렸고 그와 동시에 붉은 빛도 사그라들었다. 콜릭이 엄폐로 삼던 서비터였다. 볼터에 피격당한 그 서비터가, 동작을 정지하기 직전 마지막 힘을 모아 볼터를 배신자에게 발사한 것 이었다. 마린이 허리춤을 움켜쥐며 균형을 잃었다. 파워아머에 막히긴 했지만 근거리의 사격이니만큼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다. 콜릭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볼트 피스톨을 뽑아 몸을 숙인 마린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마린이 쓰러지자 뒷목의 파워아머 틈을 피스톨로 겨누며 콜릭이 소리쳤다.
“ 이제 끝장이다 ! 배신자 ! “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새하얗고 고운 손가락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이 콜릭을 뒤에서 꼭 껴안았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듯 했다. 귓가에 천상의 음악 소리가,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등을 통해 그녀의 육체가 자아내는 곡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보드라운 볼이 콜릭의 수염이 정리되지 않아 지저분한 볼에 닿자, 아득한 향기가 코를 강렬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자극했다. 콜릭은 처음에 그것을 뿌리치려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혀를 아무리 씹어대도 혼미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향기로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콜릭의 의식이 멀어져간다…
-
눈을 뜨자 어느 방이었다. 콜릭이 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복도와 대조되는 밝은 곳이었다. 조명은 잘 손질되고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방의 내부 역시 그러했다. 아니, 이것은 관리되어있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느 하이브시티나 테라의 호화로운 가정집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동화책이나 소설책에서나 나올법한 아기자기한 모습의 집이었다. 선반 위에는 조화가 꽂혀있는 꽃병이 놓여져 있었고, 그 옆에는 마린도 넉넉히 이용할 수 있을 크기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벽에는 아름다운 전경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콜릭의 시선이, 구석의 책상 앞에 앉아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 일어났구나, 시체 황제의 종복아. “
긴 금발에 옆 모습이 가려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콜릭이 대답했다.
“ 네 놈은 … 누구냐 ? “
“ 가엾은 필멸자, 내 이름을 들려준다면 아마 미쳐버리고 말겠지. “
“ 네 놈이 누군지 물었다 ! “
콜릭이 거센 노호로 일갈했다. 인퀴지터로써 잔뼈가 굵은 그였다. 놈이 어디서 굴러먹던 악만지는 몰라도, 죽기전에 최소한 제국의 인퀴지터가 굴복시킬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은 알게 해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나는 영겁을 살아온 자다. 위대한 왕자님의 수족이자 쾌락의 전도자, 너희들이 칭하는 워프의 악마지. “
악마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금발을 넘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얼굴이 드러난다. 콜릭의 심장이 다시 한번 뛰기 시작했다. 침을 꿀꺽, 삼키는 콜릭을 비웃으며 악마가 말했다.
“ 저런, 불경한 생각을 하고 있군. 어때, 너도 저 시체황제의 천사처럼 지고의 쾌락을 얻고싶지 않아 ? “
“ … 내가 원하는 건 네놈의 사지를 찢고 그 반역자와 함께 현실세계에서 지워버리는 것 뿐이다. 망할 놈아. “
“ 후후후, 역시 훌륭하군. 훌륭한 정신력이야, 감탄스러워. “
악마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그도 너와 똑같은 소리를 하던 때가 있었지. 궁금하지 않아? 그가 어떻게 철저하게 나의 노예가 되어버렸는지. “
콜릭이 입술을 깨물었다. 놈의 말 대로라면 콜릭이 추적하던 챕터의 배신자는 처음부터 이곳에 숨어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악마의 도움을 받아서. 정보대로라면 미미한 수준이어야 할 사이킥 능력이 예상 외로 강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악마의 힘을 빌렸다면 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폐허를 사이킥 장막으로 가리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이상한 점은 쓰러지기 전 놈이 지껄이던 이상한 소리와, 이 악마가 굳이 변장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 더러운 악마야, 네가 무슨 사술로 놈을 타락시켰는지는 몰라도, 이 몸은 타락하기보다 죽음을 선택하겠다. “
“ 너희의 강점이자 약점은 바로 그것이지, 헌신. “
따분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악마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 모든 것은 오랜 세월 전에서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 전투, 그 패배의 순간에 나는 다짐했지, 나에게 패배를 안겨준 그 황제의 천사 놈, 그 놈부터 시작해서 그 형제와 후손, 더 나아가 천사 놈들 모두를 내 발 밑으로 기어 다니게 끔 만들어주겠다고, 위대한 왕자의 이름에 걸고 맹세했어. 그리고 다시 영겁의 세월을 복수의 때를 기다리며 이를 갈아왔다.
문제가 하나 있었지, 이 놈들은 둔하기 짝이 없어서, 쾌락을 돌 보듯이 하고, 무감각한 눈으로 지고의 아름다움과 열락을 공허하게 응시하며 칼을 휘두를 뿐이거든. “
악마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콜릭을 응시한다. 콜릭은 그녀의 말에 알 수 없는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외면하고 있었다. 훈련을 받은 인퀴지터로써 그러한 작업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 패배하고 돌아와 분노에 찬 교성을 질러대는 자매들을 보며, 나는 어떻게 하면 그 높은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때묻지 않은 새하얀, 그러나 극도로 차가워 모든 것을 얼리는 눈 밭을 더럽힐 수 있을까 고민 했어. 타락이야 말로 인류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 방법을 깨닫게 된거야. “
악마가 흥분한 표정이 되었다. 어느새 콜릭은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위해 많은 힘을 버려야 했지만, 감수할만한 희생이었지. 나는 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네가 쫓던 전사, 로비오를 우연을 가장해서 만났어. 무수히 많은 낮과 밤을 그와 보내며,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어. 그건 나로써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단다, 필멸자. 그럼에도 결실은 달콤했어.
아아, 넌 방금 황제의 천사, 나의 사랑하는 로비오를 배신자라고 불렀지?
틀렸어, 인퀴지터. 그는 황제를 배신한 것도, 인류를 배신한 것도 아니라, 나를 사랑하게 된거야! 이 나를, 가장 증오 해야 할 적이자 무수히 많은 그의 형제를 죽이고 조상을 죽여온 나를! “
악마가 흥분을 참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손을 과장되게 벌렸다. 마치 커튼콜에 박수를 받는 여배우 같은 모습이었다. 환희에 젖어가며, 쾌락에 물들어가는 얼굴의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콜릭의 얼굴은 점점 경악이 가득차고 있었다.
“ 이해가 돼, 인퀴지터? 어떠한 쾌락으로도 그들을 수족으로 만들 순 없지, 그들은 황제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거든. 그래서 자매들과 나는 실패했던 거야.
나는 로비오를 수족으로 만든게 아니야. 로비오는 자발적인 의지로, 사랑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 형제들을 배신했다. 결과인 쾌락에 저항하면서도 그 과정, 사랑놀음 따위에 넘어오다니, 참으로 낭만적인 나약함이지, 어떤 악마도 미처 생각치 못한 인류의 귀여운 점이기도 하고. “
말문이 막혀있는 콜릭을 보며, 악마가 허리를 뒤로 젖힌 상태로 깔깔대며 웃었다. 콜릭이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말했다.
“ … 어떻게 그런 … 그럼 네 년이 꾸미고 있는 건 … “
“ 너를 제외한 5명의 인퀴지터는 내가 귀띔해준 의식의 제물로 쓰였어. 로비오는 이 의식이 우리의 행복한 ‘신혼집’을 현실 너머 아무도 올 수 없는 곳에 숨겨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이마테리움의 그림자를 찢어 자매들과 카오스의 악마들을 은하로 퍼트리기 위한 것이지. 이 주술만 끝나고 나면 내 사랑하는 남편 로비오와 작별인사를 한 뒤 또 다른 신랑을 찾아야겠지, 우선은 그 빌어먹을 챕터부터 무너뜨려주지. “
의기양양한 표정의 악마가 말을 이었다.
“ 자, 이제 내 계획을 들었으니 곧 의식의 준비를 마치고 들이닥칠 로비오에게 다 불어 보렴. 그리고 내 완벽한 소꿉장난에 완전히 심취해버린 그의 모습을 보고 절망해, 너의 절망은 내 쾌락이 되고 갈 곳 잃은 영혼은 유희거리로 써줄 테니. “
마녀의 웃음소리가 콜릭의 귓전을 계속해서 때렸다. 로비오라는 마린, 강경한 신념과 헌신, 쾌락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력, 그리고 그것을 무너뜨린, 악마의 사악한 장난.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로비오, 그 마린이 저 악마의 말처럼 단순히 속고 있는 것이라면 콜릭이 이 마녀의 계획을 말해줌으로써 그의 마음 속에 일말의 의심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거짓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거짓 사랑임을 당사자가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으므로.
천천히,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콜릭이 다급하게 문을 쳐다보았다. 나무처럼 도장된, 귀여운 곰인형이 걸려있는 문짝이 천천히 열리며, 로비오, 타락한 스페이스 마린이 투구 너머 누구보다 행복한 목소리로 외치며 들어온다.
“ 내 사랑, 아름다운 나의 줄리에타. “
“ 아아, 로비오. 드디어 왔군요. 그대가 붙잡은 이 포획물을 보세요. 시종일관 더러운 입으로 저를 악마라고 매도하고 있군요. 그대에 대한 사랑이 이 미천한 종놈에 대한 분노보다 강하기 때문에 저는 참을 수 있었답니다. “
악마와 타락자의 연극적으로 과장된 몸부림에 콜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무슨 빌어먹을 장난인가 ! 아스타르테스, 악마가 그대의 눈을 가렸구려. 총명함은 거짓 쾌락에 묻혀버렸고 굳센 심장은 워프의 불꽃에 녹아버렸으니 ! “
“ 닥쳐라, 사냥개 놈아. 보나마나 마녀라는 실체 없는 죄목으로 줄리에타를 해하려 왔겠지. 그녀보다도 안전한 사이커는 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도 말이야. “
마녀가 근엄한 목소리로 외치는 마린의 뒤에서 기다란 혀를 날름거리며 콜릭을 비웃었다. 콜릭은 낭패감을 느꼈다.
“ 제발 ! 내 말을 들으시오, 그대의 실수는 속죄 받을 수 있소. 저 악마놈의 사술에서 깨어나시오! ”
“ 사내로 태어나 그런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제국의 인퀴지터. 당신이 먼저 우리를 해하려 했으니 우리의 행동은 정당합니다. 자아, 로비오. 어서 의식을 수행하도록 해요. “
악마의 깔깔대는 소리가 사이킥을 통해 콜릭의 머릿 속에 울려 퍼졌다. 꼴 좋구나, 필멸자. 절망에 찬 콜릭을 향해 로비오가 다가간다.
“ 의식을 거행하겠소. 이제 우리는 제국의 추적으로부터 자유요. “
로비오가 오른 손을 콜릭의 이마에 올리고, 한 손으로는 어떤 책을 들고 무언가 악마적인 언어를 읊어댔다. 차원이 진동하고, 워프가 울부짖었다. 콜릭은 가볍게 몸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다가, 이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콜릭의 비명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머릿 속에서는 계속해서 악마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로비오의 주문이 그쳤고, 콜릭의 고통도 사그라들었다. 숨을 고르는 인퀴지터를 향해 아스타르테스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들고 다가간다.
“ 로비오 ! 찔러 버려요 ! 영원한 사랑의 도피를 위해 ! “
아니, 거짓말이야. 콜릭의 머릿속의 사이킥 목소리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으나, 절망한 콜릭은 그것에 반응할 수 없었다. 로비오가 단검을 머리위로 높게 든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멈춘다.
“ 로비오 ? “
악마도 콜릭도, 그의 예상치 못한 모습을 주목하게 된다.
“ 사랑하는 줄리에타 … 아니. “
로비오가 뒤를, 여인을 돌아보며 약간은 슬픔에, 번뇌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연다.
“ Si’zsra tskariss “
로비오의 입에서 나온 악마의 진명에, 아름다운 여인의 몸이 활처럼 휘더니 그 사악하고 뒤틀린 형상이 껍데기를 벗고 드러난다. 악마의 비명이 콜릭의 신음을 대신해 방을 채운다.
“ 키야아아악 ! “
“ 사랑하는 나의 여인, 나의 반쪽, 나의 영원한 죄. “
로비오가 내뱉는 말에 맞춰 사이킥 사슬이 하나하나 악마를 포박한다. 워프의 불길이 악마의 눈과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지독한 고통과 진명의 여파로 인한 격렬한 충격에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악마였지만, 그것의 표정에서 강력한 의문이 엿보였다.
“ 그대가 악마라는 사실도, 그대의 사랑이 한낱 장난에 불과했다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그대로부터 떠나게 할 순 없었어. 아름답고 사악한 나의 반쪽이여, 나에게 사랑을 알려준 것은 악마인 그대였고, 장난이었던 그대의 사랑이니까. “
“ 아, 아스타르테스 … “
콜릭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간절하게 아스타르테스의 친절한 설명을 바라는 것 뿐. 악마도 별 다를 건 없어 보였다.
“ 의식이 끝나면 그대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대의 바람대로 워프의 악마들을 이 세상에 풀어놓고 나면, 그대가 나를 떠나지는 않을까, 그런 고민에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 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어. “
“ 으그그그 ! .. 무슨 .. “
악마가 고통스러운 속박 중에도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투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콜릭은 로비오가 약간은 서글프게 웃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 의식의 에너지를 뒤틀어, 이마테리움과 현실 너머 얼어붙은 시공간의 세계로 떠날거야. 우리의 영혼도, 육신도 멈춰버린 채 영원히 반복되는 꿈 속으로. ‘사랑의 도피’. 우리의 결혼식이지. 인퀴지터, 그대가 우리 결합의 증인이다. 빌어먹을 황제가 되었건 슬라네쉬 놈이건, 우리 앞을 축복하길. “
엄청난 양의 사이킥 파동이 마린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가 천천히 구속된 악마의 곁으로 다가간다. 악마는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어대며 속박에 저항하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이킥 사슬의 무게는 무거워져만 갔다. 천천히, 마린이 악마의 뺨에 손을 대자, 그것의 얼굴의 일부가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마린이 조용히 읊조린다.
“ 걱정하지마, 내 사랑. 그대도 나를 사랑하게 될거야. “
“ 키야아아아악 !! “
강렬한 섬광이 마린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그 강렬한 충격은 워프 마저 흔들어 놓을 정도였기 때문에, 콜릭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정신과 사이킥의 파장으로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콜릭의 머리 속에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매력적인 남성의 결혼식이 환영으로 보여졌다. 남자는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여인은 수줍게 미소짓고 있었으며, 콜릭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들의 언약에 증인으로써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환상은 그 후로도 한참을 콜릭의 머리 속에서 재생되었다.
-
“ 중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인퀴지터, 어째서 타락자는 악마의 계획과 진명을 다 알고 있었던 겁니까. “
“ 악마에 의해 사이킥 능력이 증폭되는 과정에, 둘의 의식이 잠깐이나마 연결되었던 것이겠지. 그의 특이할 정도로 막대한 잠재 사이킥 능력으로 알았을 수도 있고 … 또 이건 가설인데, 서비터. “
“ 어떤 가설인지? “
“ 사랑에 빠져서 그런게 아닐까? … 여기까지, 기록에서 현 시간을 기점으로 20분 전후의 기록을 삭제하라. “
“ 삭제 완료. 항해를 계속합니다. “
수 많은 낮과 밤이 지났다. 콜릭은 그 날의 기억을 서비터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날에 대한 감상을 생각으로 정리하자면, 약간의 공포와 일종의 애틋함이 머리를 어지럽혀 되도록이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로비오가 소속했던 챕터의 약간의 불평불만과 이따금 꾸게 되는 결혼식 꿈, 그리고 항해마다 서비터에게 그 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괴상한 버릇이 생긴 것만 제외하면 콜릭의 일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적어도 콜릭은 그렇게 믿고자 하였다.
햄갤 문학들 보면서 꼭 보고싶었던 슬라네쉬 악마 좆되는 소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