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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드맨 단편] 그을린 왕의 노래를 들어라-01

냉동고등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10.16 23: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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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왕의 노래를 들어라-01


오래된 짐승은 전쟁을 기억한다. 

흉포한 눈이 되살아난 시체들의 부서진 뼛가루가 휘날리는 사막을 기억한다. 땅을 박차는 다리가 그 아래에서 으깨지는 초록색 흉물들의 감촉을 기억한다. 흉터투성이의 피부는 바람을 기억한다. 사막의 모래 섞인 바람을, 진눈깨비가 달라붙는 겨울의 폭풍을, 피비린내가 섞인 습기가 가득한 파도의 포효를. 이 세상 모든 전장의 바람을 기억한다.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다. 전장의 소리를 품고 하염없이 세상을 가로질러온 오래된 바람.


휘-휘-휘-.


두꺼워진 가죽 아래 감춰진 귀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왔다. 발톱과 이빨이 적을 찢고 으깨는 소리를 들어왔다. 화살이 자신의 강철 같은 몸에 부딪쳐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적을 물어뜯어 목구멍으로 넘길 때 마다 격렬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들었다. 그 모든 소리를 사랑하는 짐승은 왕이다. 짐승은 실로 대지의 왕이다. 모든 정글과 늪지가 그의 울음소리에 몸을 떨고 눈을 내리깐다. 


휘-휘-휘-.


오래된 왕은 등 뒤에 올려온 영광의 무게를 기억한다.

왕의 등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주인뿐이다. 그렇다. 왕에게도 주인은 있었다. 그 주인은 황금갑옷을 몸에 두르고 흑요석 창을 휘두르며 적의 목숨을 수확하고 다니는 전사다. 왕처럼 주인 또한 위대한 전사였다. 실로 그는 가장 위대한 전사였다. 왕을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짐승은 위대한 전사를 사랑했다. 자신의 등 위에 올리는 영광의 무게를 사랑한다. 주인이 자신의 등에 올라타면, 자신이 주인을 태우면, 짐승은 대지를 지배한다. 네 개의 눈과 두 개의 심장과 네 개의 다리를 가진 죽음이 된다. 

남쪽 대륙의 모든 위대한 사원도시가 그 발 위에 건설되었고, 뜨거운 피의 족속들이 그 발아래 밟혀 사라졌다. 


휘-휘-휘-.


주인이 부른다면, 주인이 달래준다면, 주인이 원한다면, 짐승은 그를 태우고 달릴 것이다. 이를 드러낸 무수한 창날, 화살의 비, 총알의 폭우를 향해 달린다. 공포를 향해서, 죽음을 향해서. 설령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이 불을 뿜는 용일지라도 멈추지 않았다.


휘-휘….


불길이 날아든다. 새파란 불길이다. 왕의 비늘로도 막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마지막 전장에서 왕은 온혈족의 군세와 만났다. 섬에서 온 오만한 것들로 용을 부리는 족속들이다. 용은 가장 오래된 적 중 하나였다. 왕의 혈족들이 고대의 밀림을 지배할 동안 그들은 하늘을 날았다. 오만한 온혈족들이 동굴 안에서 꺼내온 용들이 하늘을 날며 왕의 혈족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불길에 맞았을 때 왕의 몸은 불타버렸고, 어떤 초록 피부도 뚫지 못했던 피부가 갈라지며 진물이 쏟아졌다. 얼굴의 절반이 타버린 왕은 분노로 돌격한다. 날개달린 불과 죽음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포효하며.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입안에 가득 용의 살점과 뼈를 넣고 씹고 있었다. 왕은 축 늘어진 용의 시체 위에 서있다. 왕은 만족감 대신 난생 처음 느껴보는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더 이상 등 뒤의 무게가 느껴지질 않았다. 왕은 의아하다. 주인은 어딜 갔을까. 

왕은 땅에 떨어진, 불타버린 전사의 뼛조각을 본다. 주인은 죽었다. 용과 싸우는 동안 불타고 먼지가 되어.

왕은 그 순간 미쳐버렸다.

쉴 새 없이 화살을 토해내는 노포와 사자가 끄는 전차가 날뛰는 전장을 달렸다. 왕의 튼튼한 심장에도 화살이 파고든다. 불굴의 무릎이 비틀거린다. 창날이 비늘 사이를 파고든다. 고통스럽다. 그러나 꺾이지는 않는다. 무엇도 주인을 잃은 고통보다 더 할 수는 없다.

왕은 다시 포효하고, 걷어차고, 물어뜯으며, 계속해서 달린다. 발아래에서 오만한 온혈족들의 갈비뼈가 부러지고 심장이 터진다.


휘….

  

왕은 어느 불탄 정글에서 멈춰 선다. 왕은 헐떡거리며 속도를 늦추다, 눈을 감는다. 심장이 뜨겁다. 독 묻은 화살 때문이 아니다. 이제 왕에게 주인은 없다. 주인이 없는 왕은 한낱 짐승으로 돌아간다. 불타버린 짐승이 마지막으로 그리워한 것은 주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였다.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휘…. 


시대는 지나갈 것이다. 세계의 주인도 바뀔 것이다. 대지의 주인도 바뀔 것이다. 거대한 파충류들이 질서를 구현하던 시대는 끝났다. 세상은 이제 뜨거운 피를 가진 것들에게 주어졌다. 돌도끼를 청동기가 대체하듯, 청동기를 철기가 대체하듯, 그리고 철기가 화승총으로 바뀌듯, 세상의 주인 또한 바뀔 것이다.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냉혈족이 더 이상 이 대지에 남게 되지 않을 지라도, 불에 탄 짐승은 영광의 무게를 기억할 것이다. 다시 태울 주인을 만난다면, 왕은 총탄과 화염과 죽음이 대지를 덮어도. 한발자국도 내딛기 전에 벌집이 되어 쓰러질 지라도 달릴 것이다. 


바람이 오래된 화상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타버린 짐승은 남부의 별을 올려다보며 주인을 기억한다. 


***


지그마력 2515년, 상어 해협, 사우스랜드 근해.


사우스랜드의 정수리 즈음에서 출렁거리는 상어 해협은 거친 바다다. 언덕만한 파도가 허구한 날 들썩거리고 밤만 되면 익사자 유령들이 갑판 위로 흐느끼며 날아다닌다. 덧붙여 지금 그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브레토니아 갈레온은 객관적으로 그다지 안락한 여행수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갈레온은 여객선이 아니라 전투함이며, 거길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은 안락한 침대가 아니라 대포요, 친절한 승무원이 아니라 땀 대신 명예욕을 흘리고 다닐 것 같은 기사들이다. 항해 동무로써 그만큼 최악인 작자들도 드물다. 24시간 하루 종일 성배, 명예, 전공, 전쟁 타령. 차라리 숲고블린과 이야기해도 그보다는 더 위트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마리엔부르크 출신의 박복한 하녀 마르셀은, 그런 사소한 악조건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꼈다. 그런 사소한 것들보다 새벽부터 하녀를 두들겨 깨우고 갑판으로 끌고나온 고용주가 훨씬 더 악랄하다. 간신히 파도가 가라앉아 숙면을 취할 수 있던 새벽녘, 마르셀은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거칠게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일어나, 마르셀!”


“…아가씨, 지금 새벽입니다만.”


“시간 알려줘서 고마워, 마르셀. 그런데 나 장님 아니거든. 나도 알아.”


실바니아 흡혈귀들도 이 빌어먹을 고용주에 비하면 신사적이리라. 마르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대 위에 올라온 은발의 처녀를 노려보았다. 저쪽도 침대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하늘거리는 잠옷 차림이지만 눈에는 졸린 기가 없다. 푸른 눈동자 속에서 춤추는 것은 끝없는 악의와 장난끼뿐이다.


왜 하필 이딴 년이 내 고용주인거지? 세상 모든 피고용인이 생각하게 되는 고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마르셀은 쏘아붙인다.


“제 말은 왜 새벽에 사람을 두들겨 깨우는지 묻는 겁니다. 보통 사람은 새벽엔 다들 자는 법이에요, 아가씨. 잠옷 차림으로 갑판을 돌아다니는 대신요. 그리고 전 보통 사람입니다.”


“아, 그래? 그런데 난 보통 사람이 아닌데. 일어나!”


정말이다. 처녀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담셀, 호수의 레이디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존재니까. 마르셀은 베개로 담셀를 두들겨 패 죽이면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기에(브레토니아 갈레온에서 시체를 은닉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잠시 후 마르셀은 결국 눈을 비비며 담셀과 함께 갑판으로 나갔다.


밤바다가 새까맣게 웃으며 두 여자들을 맞아주었다.


휙, 하고 새하얀 잠옷이 떠오른다. 처녀는 몹시도 즐거운 눈치로 갑판을 나아가고 있었다. 새파랄 정도로 밝은 상어 해협의 달빛 아래서 춤추는 그녀를 본다면 기사 중 몇 명쯤은 호수의 레이디가 왜 바다 위에 오셨는지 궁금해 할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녀가 양손 가득 들고 있는 기름통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마르셀은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왜 기름통을 들고 나오셨죠?”


“갑판에 뿌리려고.”


마시려고 그랬다는 대답은 아니라 다행이다. 마르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런데 왜 저까지 데리고 나오셨죠?”


야수사냥꾼 기사단의 담셀 델린느 드 아일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좀 무겁거든. 들어, 마르셀.”


질질 흐르는 기름통들을 받아든 마르셀은 후회했다. 역시 아까 때려죽여야 했다. 망할 년 같으니. 


바닷바람이 그대로 몰아치는 갑판은 소름돋을 정도로 추웠다. 그 추운 갑판에서 마르셀은 델린느 드 아일의 지시에 따라 갑판에 기름을 뿌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벽부터 하녀가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마르셀의 의견에 따르면 담셀 델린느 드 아일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악한 고용주다. 그리고 첫 번째 자리가 비어있는 이유는 그 자리에 내일의 델린느 드 아일을 위해 비워놓아야 해서다. 이년의 악덕은 하루 단위로 측정해야 할 정도로 빨리 올라가는데다가 언제 꺾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세계 첫 번째의 자리론 비좁아 차석에까지 몸을 걸친 그 거대한 악랄함의 주인공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메인마스트에 기대어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바닥에 기름을 뿌리던 마르셀은 제발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는 습관이 그녀의 안구를 빨리 파괴하길 기원했다. 세 번째 통이 비자 담셀은 고개를 들더니 너무도 즐거운 어조로 명령했다.


“아, 잘했어. 그런데 거기는 좀 더 뿌려. 더 미끄럽게.”


“…왜 미끄러워야 하는데요?”


“마리엔부르크 사람들은 다 바보야? 당연히 미끄러워야 더 잘 넘어지니까 그렇지.”


“왜 잘 넘어져야 하는데요?”


“그쪽이 더 웃기잖아! 이제 뿌려.”


마르셀은 한숨을 쉬곤 네 번째 기름통을 비웠다. 기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순찰하곤 하는 상갑판이 기름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이런 곳을 지나간다면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허리가 박살나는 건 아닐까? 

이 고약한 담셀의 악행은 하녀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찌된 것인지, 기사단을 보조하는 담셀이면서도 그녀는 지독하게 기사들을 싫어했다. 중노동 끝에 간신히 휴식을 얻은 마르셀은 삐뚜름한 자세로 서서 고용주를 노려보았다.


“한밤중에 일어나서 하녀까지 깨워서 하고 싶으신 일이 성실한 기사들에게 장난치는 거였나요?”


담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의 충직한 공범이여.”


“만약 들킨다면 저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모두 아가씨가 한 짓이라고 불어버릴 건데요.”


“맘대로 해. 나는 네가 한 일이라고 할 거니까. 브레토니아 양철통들이 누구 말을 믿어줄까?”

 

마르셀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작달막한 처녀는 키득거리곤 읽고 있던 책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낡은 파충류 가죽 책자에는 제국어로 ‘즐라틀란을 향한 탐험’이라는 제목이 쓰여있었다. 마르셀이 기억하기로는 정신나간 아라비 탐험가 이븐 젤라바의 여정기였다. 담셀은 청아한 목소리로 낡은 책자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그 짐승의 키는 2층 높이까지 자라며, 이빨은 단검만한 길이로, 턱 전체에 빼곡하게 나 있다. 피부는 다섯 겹을 겹친 갑옷만큼이나 두껍고 검이나 할버드로도 뚫을 수 없다.”


“…인상적이네요. 그래서 왜….”


델린느는 휙휙 책자를 넘기더니 또 다른 부분을 짚어 읽어내려갔다. 정말로 즐거운 눈치다.


“오로지 알 사우림 최고의 전사들만이 이 위대한 짐승을 탈 수 있다. 걸어 다니는 재앙이요, 이빨달린 죽음이다.”


“네, 네. 아주 인상적이네요. 그런데 그걸 꼭 지금 읽으셔야겠어요?”


“처음에는 진동이 느껴진다. 다음엔 멀리서 파괴의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으로 대학살이 벌어진다다. 행운을 빈다.”


“아가씨, 일부러 그런 문단만 골라 읽는 거죠?”


“아니? 서술 전체가 이런 식인데.”


담셀은 싱긋 웃곤 책을 덮어 무릎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별을 보던 그녀는 잠시 후 마르셀에게 대답했다.


“이븐 젤라바 씨가 과장을 좋아하는게 아니라면 이 동물은 정말 재미있을 거 같아. 그렇지 않아?”


마르셀은 자신의 주인을 뚱한 얼굴로 내려다보다가 낡은 책자로 시선을 옮겼다. 


“미개척지를 돌아다니다 정신이 어떻게 된 아라비 남자가 쓴 낙서잖아요. 그런 생물이 진짜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무슨 소리야, 마르셀. 지금 이 배에는 그걸 잡으러 가는 양철통들이 가득한데.”


담셀은 히죽 웃었다. 기우뚱거리는 선체의 흔들림에 리듬을 맞춰가며, 그녀의 손가락들이 ‘즐라틀란을 향한 모험’ 가볍게 두들겼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잘 수 있겠어? 마르셀. 이제 곧 사우스랜드에 도착하는데.”


철썩, 철썩, 뱃전을 물어뜯는 파도가 신경 쓰인다. 마르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뱃전 너머를 바라보았다.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별과 달이 밝았지만 그래도 수평선 너머로 땅덩이가 따로 보이진 않았다. 허나 담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우스랜드는 이제 지척이다. 모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돌아다니고 밀림 속에는 원시적인 맹수들이 가득한 대륙.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끌려왔을까, 마르셀은 후회가 극심했다. 마리엔부르크에서 아무 어부나 골라잡아 결혼해버릴걸. 돈에 혹해서 브레토니아 깡촌에 끌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계 각지의 맹수들을 때려잡으며 명성을 드높인다는 기사단인지 서커스인지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델린느 드 아일에게 고용되는 것만이라도 피했다면.


“아, 온다. 숨어!”


마르셀의 귀에도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찰하는 기사들인 모양이다. 뒤를 돌아보니 나무통 뒤로 사라지는 흰색 옷자락이 보인다. 벌써 자신만 남겨두고 담셀은 내뺀 모양이다. 저 망할 년이. 마르셀은 황급히 몸을 날려 그녀를 따라 나무통 뒤로 몸을 숨긴다. 상갑판 위로 너댓명의 기사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이 야밤중에 누가 본다고, 갑옷에 눈부신 광까지 냈다.


철컥, 철컥, 철컥.


좁은 곳에 숨죽이고 쪼그려 앉아 있으니 옆에서 담셀이 말을 걸었다. 목소리를 낮추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자, 이제 넘어질 거야. 놓치지 말고 잘 봐. 무지 재미있을걸!”


“…아가씨! 들키고 싶어요?”


철컥, 철컥, 철컥.


“응? 걱정하지 마. 저 양철통 뒤집어쓰고 있으면 철컥대는 소리 빼고 아무것도 안 들려. 이틀 전에 기사단장 방에 들어가서 한 번 써봐서 알아.”


도대체 호수의 레이디는 이 담셀에게 뭘 가르쳤던 것일까? 극심한 의문을 느끼고 있자니, 잠시 후 휙, 하고 뭔가 공중을 나는 소리와 철컹! 하는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기름을 밟고 미끄러진 것이다. 첫 번째 기사가 미끄러져 두 번째 기사에게 충돌하고, 두 번째 기사가 하늘을 날더니 세 번째 기사에게 충돌하며 발로는 첫 번째 기사의 뒤통수를 차올렸다. 낑낑대며 일어나려던 세 번째 기사는 도로 쓰러지는 첫 번째 기사에게 깔렸다. 이내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습격이다! 습격!”


“여신이여, 가호를!”


기사들이 처절하게 허우적대기 시작했을 때 담셀과 하녀는 킬킬대며 객실로 향하는 하갑판을 달리고 있었다.(킥킥대는 쪽은 담셀 하나뿐이었지만.)


“어때? 엄청 웃겼지?”


“전혀요. 들켰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나 해봤나요?”


“호수의 레이디께서 내 꿈에 나타나 기름으로 점을 치라 명하셨다고 하면 돼. 양철통들은 믿고도 남을걸.”


이제는 여신까지 팔고 있다. 마르셀은 기가 막혔다. 정말 담셀이 맞기나 한 것일까?


“할 일이 끝나신 거 같으니 저는 그만 돌아가 자겠어요. 이런 이유 없는 장난에 어울려주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에요!”


담셀 델린느는 흥, 하고 웃더니 길게 미소를 지었다.


“이유가 없진 않은데. 난 기사들이 싫어. 특히 여기 야수사냥대 기사단은 더욱.”


그건 이해할 수 있다. 브레토니아 기사들은 정말 상대하기 싫은 유형이니까. 하지만 마르셀은 고용주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게 그 누군가의 골통을 깨도 된다는 뜻이 되진 않아요.”


“갑옷 입고 있잖아. 그 정도로 머리가 깨질 갑옷이면 다음부턴 입고 다니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겠지.”


“도대체 왜 그렇게 기사들을 싫어하세요?”


담셀의 미소가 조금 어둡게 바뀌었다. 그녀의 손이 하갑판의 복도를 스쳐지나가다, 벽면을 가리켰다. 생기 없는 황소의 눈이 그 손가락을 비추었다. 황소의 머리 하나가 벽면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박제였다. 아래에는 ‘카르카손의 야수, 70년.’이라는 명패가 딸려있었다. 황소 옆에는 미덴하임에서 잡아온 늑대가, 그 옆에는 배드랜드의 트롤이, 더 옆에는 카오스 황무지의 스폰이 걸려있었다. 하갑판의 복도는 박제된 동물들의 전시장이었다. 그 머리통들의 유리눈알을 하나씩 바라보며 담셀이 으스스하게 웃었다.


“말도 못하는 짐승들 잡아다가, 머리를 잘라놓곤, 항상 이렇게 말하지. 악을 멸했으니 오늘도 명예롭도다! 무슨 악취미인지. 호수의 레이디가 잘린 대가리 따윌 원하진 않을걸.”


델린느 드 아일은 숲속에서 짐승들을 불러내 부리는 야수학파의 담셀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호수의 여인으로부터 직접 받았다. 마르셀은 거기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민을 위협하는 짐승을 소탕하는 건 영예로운 일일 텐데요.”


“아, 물론 그래. 하지만 저 늑대는 평생 미덴란트에만 있었지 브레토니아 근처에도 와 본 적 없을걸. 도대체 왜 이 멀리까지 찾아가 동물들 모가지를 따오는데 혈안이 된 건지 모르겠어.” 


“기사들의 명예란거겠죠.”


담셀이 픽 웃었다.


“그 명예가 뭔진 몰라도 브레토니아가 뭔지도 모르는 밀림 속의 짐승을 잡아서 박제로 만들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차라리 그 시간에 농노들이나 괴롭히는 고블린을 잡고 다니는게 낫지 않을까?”


괴상하게도 납득이 갈 것 같은 말이라 마르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델린느는 이제야 졸린 듯 하품을 하며 말을 맺었다.


“이제는 사우스랜드까지. 러스트리아를 빼면 올드월드에서 가장 브레토니아랑 관련 없는 곳까지 쳐들어가고 있어. 고작 인상적인 짐승 한 마리 잡아오겠다고. 한심하지 않아? 그래서 장난 좀 쳐준 거야. 여기 박제된 아이들도 고소해할걸.”


마르셀은 한숨을 쉬곤 등을 돌렸다.


“이만 들어가 보겠어요. 별로 더 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잘 자, 마르셀.”


등을 완전히 돌리기 전, 담셀은 옆구리에 낡은 책자를 도로 끼고 있었다. 마르셀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기로 했다.


“그런데, 아까 읽으신 부분, 그 짐승의 이름이 뭐죠?”


“응? 잠깐만.”


마르셀과 마찬가지로 객실로 돌아가던 델린느는 책자를 펴 들더니, 손가락으로 양피지를 짚어내려갔다. 철썩거리는 파도가 함체의 옆구리를 친 것인지 복도가 조금 흔들거렸다. 벽에 붙은 조명이 흔들리자 박제된 동물들의 유리눈알이 반짝거렸다. 겁이라도 내는 것처럼.


담셀의 입술이 열려 짐승의 이름을 읊었다.


“카르노사우루스.” 


***





오랜만의 단편. 비늘박이 담셀이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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