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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아네모네 이야기

마리엔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2.27 01:09:39
조회 1129 추천 42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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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어렵사리 차린 꽃집에 가끔씩 들러 화분을 사 가던 그녀.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렇게 친하던 것도 아니었는데.


만날 때마다 이토모리에서의 생활 따위의 주제로 짧은 대화를 주고받다가 어느 날은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제법 분위기가 잡힌 레스토랑이었다. 꽃집에서 여러 번 마주치며 많이 친해진 탓에 서로 부담없이 지낼 수 있었다. 좋은 여자구나, 그렇게 느꼈다. 고등학교 때 친해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하던 신사의 일이 너무나 싫었다고 투정을 부릴 때는 어린 여동생같기도 했지만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은 연상의 여인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늘 누군가를 찾고 있어.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만날 때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으면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찾아왔다. 레스토랑에서 헤어진 뒤 그녀는 한동안 꽃집에 찾아오지 않았고 들려오는 소식도 없었다.


몇 달이 지나고 그녀와 있었던 일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할 무렵에 그녀가 오랜만에 가게에 모습을 보였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해서 가게 문을 닫으려는 참에,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하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그리고 그녀에게서 '그동안 찾고 있던 사람과 드디어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


"오랫동안 찾아다니더니... 축하해."


진심을 담아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다음 날 그녀는 어떤 남자의 손을 이끌고 가게를 다시 방문했다.


"여기, 말해줬던 그 사람."


"타치바나 타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둘은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몇 년간 함께 지내온 연인처럼 잘 어울렸다. 나는 저번에 그녀에게 받은 호의도 갚을 겸 두 사람에게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 때 그 둘을 보며 솔로의 질투심을 느꼈다는 건 비밀이다. 어쨌든 그 뒤에도 두 사람과 여러 번 만남을 가지며 타치바나와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며칠 뒤에는 아침 거리를 걷다가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함께 거리를 걸으며 잡담을 나누다가 그녀의 제안에 따라 근처의 카페로 찾아갔다. 아침의 카페는 한적했고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어째서 아침부터 혼자 거리를 걷고 있던 거냐고 질문하자 그녀는 알 것 없다며, 화제를 돌려 어느새 남자친구가 된 타치바나에 대한 소소한 불만들을 내 앞에서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타치바나가 선물한 것들을 자랑하거나 두 명이 함께할 미래에 대해 조잘거리는 모습은 역시 천생연분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고 나긋나긋해 보이면서도 감정 표현은 확실히 하는, 말하자면 말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눈치도 제법 빠르다. 이성이지만 서로 마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얼마나 있겠는가.


"어쨌든, 정말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야.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타키 앞에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어도 괜찮아."


그녀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표현하는 타치바나는 그녀를 사랑해 주지만 섬세함은 조금 부족한 사람이었다. 역시 요즘 남자와 여자인가.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말은 하더라도 타치바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잖아.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고마워, 하지만 너무 과분한 칭찬 같은데. 그녀는 수줍게 대답했다.


"너랑은 참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타키와 만나기 전이라면, 어쩌면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웃으면서 농담하지 말라고 받아쳤다.


"진심이야. 성별이 다른데도 마음이 잘 맞는 사람, 요즘에는 찾기 힘들다구.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역시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구나. 그 말이 맞았다. 그녀와 타치바나는 정말로 잘 어울렸고 나는 그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랜 시간동안 기다린 만큼 더욱 각별한 사랑이 되겠지. 더구나 나는 그녀에게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은 맹세코 없다.


두 시간쯤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커피잔이 전부 비워진 뒤에도 잔을 기울여 마시는 척을 하다가 그녀에게 지적을 받았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라며. 정말 바보같은 짓이었다. 점심 때가 되어서 타치바나가 카페로 들어왔다. 우리는 자기 놔두고 바람 피우는 거 아니냐는 야유를 들어야 했다. 이제 비켜줄 차례겠지, 가게 일을 핑계로 카페에서 나왔다.


최대 고도로 떠오른 태양이 내보내는 햇빛을 맞으며 가능한 한 천천히 걸었다. 그녀에게 절대로 이끌리지 않아야 한다. 그녀는 이미 운명의 상대를 찾았고 그 사이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계속해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채찍질했다. 특별히 이상형인 것도 아니고 단지 마음이 맞는 친구일 뿐이잖아.


이후 몇 달동안 꽃집에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그녀와 타치바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주제로 고정되었다. 보통 둘은 함께 가게로 찾아오곤 했지만 일요일에는 이따금 그녀 혼자 가게를 방문할 때도 있었다.


"아, 궁금한 거 있는데, 너는 여자친구 만날 생각 없어?"


매번 자기 얘기만 하려니 미안한지 그녀는 어느 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없는 거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에이, 거짓말. 너 성격도 좋고, 배려심도 많은데. 여자들이 싫어할 리가 없어. 그냥 만들 생각이 없는 거 아냐?"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너만큼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말했다가는 타치바나에게 얻어맞겠지.


"어라, 이 꽃 예쁘다. 이름이 뭐야?"


"아네모네. 겉모습은 에쁘지만 꽃말은 조금 슬퍼."


사랑의 괴로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에 그런 꽃말이 붙게 되었을까. 그녀가 떠난 뒤에 아네모네 화분을 노려보았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 * * * * * * * * * * *


그 날 밤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타치바나는 친구들과 함께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모처럼만의 일요일 저녁을 타치바나와 함께 즐기지 못해서 조금 심술이 난 것 같았다.


[타키가 전화를 안 받아. 집에 혼자 있기 싫은데 만나자.]


[알았어. 지금 나갈게.]


나도 그녀도 저녁 식사를 마쳤기 때문에 약속 장소는 칵테일 바로 정해졌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라 바 같은 장소에 가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어둡게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그녀와 마주앉았다.


"요즘 타키와 결혼 이야기를 하고 있어."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 특유의 정적이고 진정된 분위기 때문에 목이 빠르게 타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 솔직히 하고 싶어. 타키와 결혼해서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그럴 수 있다면 행복할 테니까. 조금 긴장된다거나 겁나는 건 사실이지만, 괜찮아. 타키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그녀는 살짝 취기가 도는지 말이 빠르고 거침없어졌다.


"타키가 없었다면 아마 너랑 만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너만큼 마음이 맞는 사람이 또 없어. 가끔은 타키보다도 더 편한 사람이니까. 아, 타키에게는 비밀."


평소에 받아치던 대로 웃으며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평소에는 즐거운 웃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쓴웃음이 지어졌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칵테일의 맛도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치바나가 없었다면 나도 너랑 만나지 않았을까. 음... 미안해. 못 들은 걸로 해줘. 이런 말 하면 타치바나에게 죽도록 맞을 테니까. 진심이야."


바보.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나를 가볍게 놀렸다. 친구랑 술 마시러 오는 게 뭐가 어때서. 의외로 고지식하네.


"남자친구도 있는 사람이 다른 남자랑 밤에 바에 오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앗, 그런가? 뭐 어때, 친구인데. 그 말대로 나와 그녀는 친구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뭐... 그렇지만. 걱정해줘서 고맙네. 하하. 타키에게는 적당히 얘기해둘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는 옆 자리에도 들릴 만큼 제법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바 안의 몇몇 사람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 잘 어울리는데?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커플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렸다.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래, 그녀와 나의 관계는 친한 친구 정도면 되는 것이다. 외롭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자정 즈음이 되어서 타치바나의 연락을 받은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바에 앉아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녀를 바래다 줄까 싶었지만 타치바나가 바 쪽으로 마중을 나오고 있다고 해서 굳이 나갈 필요는 없었다. 우리를 보고 수군대던 커플이 여자친구 분은 어디 가신 거냐고 물었다. 웬 오지랖이냐고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마음을 진정시킨 뒤 여자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구와 마시러 온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커플은 재미없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갔다.


바에 꽤 오래 혼자 있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자세히 몇 시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바에서 나와 걷던 도중 그녀의 문자를 받았다.


[오늘 고마웠어. 너무 오래 깨어있지 말고, 일직 자.]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어머니 같은 말투였다.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그런 말 너랑 안 어울려.]


[에이, 평소에는 상냥하면서 괜히 심술내기는.]


평소에는 상냥하면서... 그렇게 보일 수 있어서 다행이네. 입력해 놓은 문자를 전송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도로 삭제했다. 그 날은 답장을 하지 못했다. 달빛은 내 앞을 환하게 비출 만큼 밝지 못해서 귀가길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야 했다. 중간에 발견한 편의점에서는 캔 맥주를 구입해 마셨다. 새벽에 지나치게 과음한 탓인지 다음 하루는 숙취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다.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우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유 모를 두통이 찾아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뒤에도 그녀와 가끔 바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타치바나는 가끔씩 나에게 질투 아닌 질투가 담긴 말을 던졌고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둘이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혼이라, 그건 두 사람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절차가 되겠지. 그녀는 분명히 타치바나에게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을 거야. 그건 과장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진심이었다. 밀어냈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오는 그녀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내가 왜 골치아파하는지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 날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나는 30대가 되었고 꽃집은 더 큰 건물로 이전했다. 그녀는 점차 나보다는 타치바나와 보내는 시간을 늘려갔고 그래서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도 마음이 잘 맞는 것은 변함없어서, 그 장소가 레스토랑이든 카페든 바든 상관없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가끔은 타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게 있잖아. 너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니까, 당연하잖아. '친구'라는 단어에 강세를 넣어 말했다. 그녀는 웃음으로 그 말을 흘려보내고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리고... 오늘 부른 이유 말인데, 우리 곧 결혼하거든. 여기 청첩장, 와 주면 고맙겠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표정 변화 없이 청첩장을 받아들이는데 그녀가 나를 질타했다.


"어라? 보통 이럴 때는 정말?! 결혼하는 거야?!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하지 않아? 너무 덤덤하잖아."


"그동안 왜 결혼 안 하나 생각밖에 안 들었으니까 그렇지. 만날 때마다 결혼 얘기 하는데 이제 와서 놀랄 일이 뭐가 있어?"


"하, 그런가? 근데 이런 말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생각인지 눈치챘다.


이제는 언제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을 만큼의 과거이지만,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도 이제는 시간의 흐름에 묻혀 자연스레 사라졌다. 가볍게 만나는 인연은 그만큼 가볍게 깨지는 법이다. 그 사실을 나는 너무 일찍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뭐, 이제는 혼자 지내는 것도 익숙하니까. 스스로를 속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음색이 바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선율이 어쩐지 슬프게 느껴졌다.


"아마도 앞으로 평생 혼자 살지 않을까."


자조적으로 농담을 던졌는데 그녀가 웃지 않았다. 혹시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무안해져서 남아있는 칵테일을 끝까지 쭈욱 마셨다.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너 정말 아까운 사람이야. 내 말도 잘 들어주고, 친절하고. 남자이지만, 그냥 똑같은 여자랑 대화하는 감각으로 대화해도 위화감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니까."


"그렇게 보일 수 있어서 다행이네."


언젠가 보내지 못했던 문자의 내용이었지. 몇 년이 지나서야 그녀에게 그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역시 좋은 여자야. 바에서 거의 밤을 새다시피하고 있어서 벌써 새벽 5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그럼 나도 솔직하게 말해볼까. 나도 너처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좋지만, 너 말고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없어. 그게 내가 혼자 지내는 이유... 뭐 그런 거지."


너무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해서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를 정말 친구로만 생각해주고 있구나, 왠지 그녀에 대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건 나의 진심이었다.


"거짓말.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나보다 좋은 사람이잖아. 그냥 연애할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동안 웃으면서 이런 대화를 해온 탓일까, 그녀는 이번에도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지도 모르지."


"역시 거짓말이었네. 앞으로는 정직해지는 게 좋을 거야."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가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우리가 바에서 나왔을 때 바깥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우산을 빌려주고 코트의 모자를 덮어쓴 채로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뭐 그럴 것까지 있냐며 그냥 같이 쓰고 가자고 말했다. 바에서 그녀의 집까지는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눈 때문인지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아, 말하는 걸 까먹었네. 결혼... 축하해."


기쁘다는 듯이 고마워, 하고 짧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가 부딪힐 때마다 그녀는 '타키가 알면 화낼 것 같아' 같은 농담을 던졌다. 우산을 들고 있어서 한 쪽 손이 시렸다.


"손 시렵지 않아?"


"괜찮아. 계속 손을 바꾸면서 들면 되니까."


우리는 조용히 거리를 걸었다. 얇게 쌓인 눈이 구두에 밟히며 특유의 소리를 냈고 가끔은 미끄러질 뻔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조심하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녀를 바래다 주고 돌아가려는데 그녀가 연립 주택의 꼭대기 층에서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새벽에 뭐 하는 짓이야, 실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주변은 우리가 걷는 소리 말고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잔잔한 고요가 아닌 불쾌한 고요였다.


이후 집까지 가면서는 우산을 펴지 않고 눈을 맞으며 걸었다. 그녀는 단지 친구로서 나를 좋아해주고 있는 것뿐이다. 처음부터 연애감정 같은 것도 없었고, 이제는 결혼 약속까지 했잖아. 이제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편의점에서 캔 맥주를 살까 했지만 편의점의 불빛마저도 기분 나쁘게 느껴져서 가지 않았다. 깊은 새벽이라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 가만히 눈을 맞으며 걷고 있다. 바지가 젖는 것을 무시하고 눈으로 덮인 벤치 위에 잠깐 앉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동시에 칠흑같이 어두웠다.


다른 사람의 애인을 빼앗는 건 남자로서 실격인 행동이다. 더구나 그 다른 사람이 나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면 더더욱. 당연하잖아. 깊게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의 한심함을 자책했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구나. 눈이 어깨 위에 쌓여 코트 위에 하얀색 수를 놓았지만 털어낼 생각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미야미즈..."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 보았다.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그 목소리는 금방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 마음 속의 어떤 생각도 이렇게 쉽게 날려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간 감각이 날아간 것인지 잠깐 앉아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해가 동쪽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고 있었다. 열두 시간 동안 하늘을 지배하던 밤이 물러가고 새로운 아침이 날개를 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니 갑자기 아네모네 꽃이 떠올랐다. 사랑의 괴로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제 와서 아네모네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어째서 아네모네를 생각하고 있을까.


벤치에서 일어나 집을 향해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다음 주가 되면 미야미즈와 타치바나가 결혼식을 치른다. 둘은 운명으로 맺어진 사이이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나는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어쩌면 나는 마지막까지 상대를 찾지 못한 채 혼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만큼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가볍게 만난 사람과 가볍게 헤어지는 법이다,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그 말도 이제는 단순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외로움이 나를 덮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흔들려서는 안 될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 때마다 마음을 굳게 다잡고 이렇게 말해 본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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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브가 된 글이 있었는데(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말고) 아마 보자마자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링크를 못 찾아서 원작은 못 올리겠음. 미안. 도대체 이걸 어떻게 써야 하나 난감한 부분이 많아서 이야기가 이리저리 꼬이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동안 생각해뒀던 소재들을 거의 다 써버려서 앞으로 단편을 더 적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마지막 단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모르지 뭐... 3월 되면 볼 사람도 없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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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팬픽 정리글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yourname&no=41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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