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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단편] 우연과 운명 사이의 거리는

프란체스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3.13 00: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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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짜잔! 타키 군~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


방금 전까지 타키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몸을 틀어 나를 쳐다보았다. 카페에는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 *


"쇼타, 오늘도 일찍 왔네. 늘 늦어서 미안~"


"..."


방금 전에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여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카페에는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


2.


"그게...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나봐요."


뒷모습은 비슷하게 느껴졌는데 앞모습을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타키보다 날카로운 인상에 키도 조금 더 컸고 머리 색깔도 타키보다 진했다. 얼굴이 저절로 확 달아올랐다. 앞에 있는 남자는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표정을 정확히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그저 이 황당한 상황에 조금 당황한 거겠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평소에는 나름대로 차분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요."


통하지도 않을 변명을 했지만 남자는 괜찮다며 싱글거렸다.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테이블 위에 살짝 쏟아진 커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데 남자는 상관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커피도 많이 흘린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입에 그렇게 맞는 것도 아니라서 상관없어요. 그나저나 평소에 차분하신 분께서 이렇게 들뜨신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반쯤 놀리는 듯한,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 말을 웅얼거리며 핸드백에서 티슈를 찾아 테이블을 깨끗하게 닦았다. 전부 닦아낸 뒤 쓰레기통에 티슈를 던져넣고 나서야 테이블 위에 뽑아 쓰는 티슈 한 박스가 이미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다는 사람 앞에서 혼자 안절부절하지 못한 것 같아 괜히 민망해졌다. 남자는 그 박스에서 티슈 한 장을 뽑아 자기 손에 묻은 커피를 닦았다.


"혹시 남자친구?"


"네... 약속 시간은 3시였는데 조금 늦어버려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네요."


"음, 사실 저도 똑같아요. 3시에 카페에서 여자친구랑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여자친구. 이 사람도 여자친구를 기다리는구나. 제법 미남에 성격도 좋으니 애인이 없을 리가 없겠지.


"괜찮으면 내기라도 할까요? 늦게 오는 쪽이 디저트라도 쏘는 걸로."


무슨 자신감인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앞에 앉은 남자는 피식 웃긴 했지만 다행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래서야 바보같은 여자로 보일 게 분명했다.


* * * * *


"...누구세요?"


빨간색 뿔테 안경을 낀 여자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이다.


"글쎄요. 그렇게 물어야 할 쪽은 제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쿠라하시 미호, 보통은 미호쨩이라고 불리곤 함. 나이 비밀, 키 비밀, 체중 비밀. 오늘은 남자친구를 만나러 카페에 왔다가 사람을 착각해서 난처한 처지가 되어 버림. 이 정도면 충분하죠?"


그 정도면 물론 충분하지만 들을 가치가 있는 건 마지막 정보 뿐이었다. 게다가 비밀인 정보가 너무 많아서 안 듣는 것만 못했다. 나이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큐트한 스타일의 안경에 앳된 목소리 탓에 고등학생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키는 미츠하보다는 조금 작고, 체중은... 추측하는 것 자체가 실례겠지. 커피를 홀짝이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꽤나 들뜨신 모양이네요."


"남자친구를 만나는 여자의 마음이란 언제나 그런 법이잖아요. 그 쪽도 여자친구가 있다면 잘 알 텐데."


상당히 제멋대로인 성격의 여자였다. 좋게 말하면 활기차고, 나쁘게 말하면 정신 사납고.


"그래도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렇게 설득력이 있는 말은 아니네요."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쪽도 들뜬 것 같은데, 혹시 여자친구와 데이트?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겨우 불러낸 곳이 카페에요? 별로 재밌지는 않은데."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건 맞지만, 그거 말고는 딱히 그 쪽이 상관할 일은 아니거든요. 나이도 어리신 것 같은데 남의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 가지는 건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에요."


한 방 먹였다. 여자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뒤로 세 걸음 정도 물러서나 싶더니 다시 쪼르르 달려와서 재잘거렸다. 마치 일어나기 싫은 월요일 아침에 들리는 자명종 소리 같았다. 귀찮게 되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신나서, 무례해져 버렸네."


조금 반성한다는 듯이 여자가 고개를 푹 떨궜다.


"그치만 27살이니까 어린 나이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봐주시니 기분은 좋네요, 후후."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었다. 27살이라니, 나보다 세 살이나 많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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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네. 대학 합격 발표 때 정말 우연히 만났어요. 미호가 키가 작은 편이어서, 합격자 명단에 자기 이름이 있는지 보려고 점프하다가 실수로 제 발을 밟아 버렸는데 그 때 처음 보게 됐죠. 가끔 우연이 이런 식으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우연이라, 제 경우는 우연이라기보단 정말 오래 기다려 온 운명 같은 상황인데."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전에 아침에 일어나면 꼭 누군가를 찾는 버릇이 있었어요. 타키와 만나자마자 찾던 게 바로 이 사람이구나, 그런 걸 느꼈고.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기껏해야 몇 달 전에 만난 거니까. 그래도 서로가 운명이었던 건지 서로 마음을 확인하기까지는 얼마 안 걸렸죠."


"재미있네요.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운명이라... 흠."


남자와 수다를 떨며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지만 타키가 오기는커녕 카페 문이 열리지조차 않았다. 타키가 약속을 까먹었을 리는 없고, 이상했다. 남자도 낌새를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늦네요."


"저도... 평소에 약속에 늦거나 하는 사람이 아닌데."


"카페에서 만나자고 분명히 연락했었는데... 음."


남자는 허공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렇지만 원하는 걸 찾지 못했는지 금방 난감하다는 얼굴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두고 왔나? 이래서야 연락할 수가 없는데. 아무튼 한 시간이나 늦으니까 걱정되네요. 중간에 사고를 당했다든가 하면 정말 곤란한데. 날짜는 오늘이 확실하고, 장소는 카페..."


남자가 갑자기 박수를 딱 쳤다.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울려서 귀가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맞다. 그냥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나자고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자주 다니던 카페가 하나 더 있네요."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그 카페인가요."


"아시나 보네요? 아마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핸드폰이 없으니..."


...역시 직접 가 보는 쪽이겠지. 사실 나도 타키와 약속을 할 때에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나자고만 했을 뿐, 정확히 어디인지 콕 집어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타키가 생각한 자주 가던 카페가 이 곳이 아니라면, 타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장소는 그 카페가 맞을 것이다.


커피잔을 한 번에 비워버린 다음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다행히 놓고 오지는 않았네. 무음 설정이 되어 있어서 알림음을 못 들었겠거니 싶었지만 사실은 그냥 타키가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여자친구가 오지 않는다면 걱정되어서라도 문자를 보내보는 게 정상 아니야?


[타키 군, 자주 다니는 카페라고만 말하니까 엇갈려 버린 것 같아. 지금 그쪽 카페로 찾아갈게.]


메시지를 전송하면서 계산을 마치고 짐을 정리했다. 타키를 만나면 남자가 왜 그렇게 배려심이 없냐고 따질 생각이었다. 혹시 일이 잘못되어 버린 건 아니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남자는 이미 입구 근처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기는 결국 무승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 * * * *


"그 쪽 여자친구, 안 오네요? 한 시간은 넘게 기다린 것 같은데."


"그 쪽 남자친구도요."


"연락이라도 해보는 게 좋잖아요? 이 쪽은 문자를 보내든 전화를 하든 안 받지만요."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해 보는 게 맞겠죠."


그러는 동안에도 시계의 초침은 쉴새없이 째깍거렸고 손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불쾌하게 미끈거렸다. 정말로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연락을 하려고 바지 주머니를 뒤졌지만 손에 무언가 닿는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두고 나왔네요."


"남자들은 언제나 그런 건가요? 뭐, 핸드폰 없이도 만날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연락할 수단이 없으면 답답하고 걱정될 텐데, 남자들은 이상하게 핸드폰 들고 다니는 걸 자주 까먹는 것 같아요."


"당연히 걱정되죠. 하지만 사람이란 건 빈틈이 워낙 많아서... 그게..."


"하아... 생각보다 피곤한 타입이시네요."


여자를 살짝 째려보았다. 저 여자는 신경쓰지 말고서라도 일단 미츠하를 찾아 만나야 했다. 몇 시간 전 문자 메시지를 나누었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날짜는 오늘이 맞고, 오후 세 시, 장소는 카페... 앗.


그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미츠하에게는 그냥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나자고만 했었는데, 그런 곳이 여기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을 꼽자면, 나는 이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미츠하는 다른 장소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짚이는 곳이 하나 있었다.


"방금 생각난 가설이 있는데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던 여자는 갑자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친구가 늦든 말든 별로 상관없다는 소리를 하더니, 실제로는 여간 걱정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기 자신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정작 자신의 표정은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보기엔 저 여자 쪽이 더 살기 피곤한 타입 같았다.


"흐음, 뭘까요."


"아까 만나자고 약속할 때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나자고만 해서 서로 엇갈렸을 거라는 가설인데."


"적어도 사고나 납치를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심되는 얘기네요. 사실 저도 똑같이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나자고만 말했는데, 아마 비슷한 이유로 엇갈렸겠죠?"


대꾸하지 않고 남아 있는 커피를 전부 마셔버린 다음 짐을 꾸렸다. 여자도 그런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핸드백의 지퍼를 닫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지 잠작 가는 곳은 있고요?"


"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두 군데라서, 여기가 아니라면 반대쪽이겠죠."


"매번 바이올린 음악 틀어주는 그 카페라면, 같이 가 드릴 수 있는데."


이 사람도 어딘지 대충 눈치챈 것 같다. 누군지도 모르던 사람과 같은 시간에 같은 약속을 해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정말 지독할 정도로 기막힌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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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내에서 벗어나 바깥 공기를 마시니 조금이나마 상쾌했다. 타키가 계속 답장을 하지 않아서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반대쪽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남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두 카페 사이의 거리는 걸어서 10분 정도로 아주 가깝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 * * * *


"..."


"아마 쇼타랑 그 쪽 여자친구도, 만약 이 카페에 있었다면, 우리랑 똑같이 생각한 게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믿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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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아..."


겨우 10분밖에 걷지 않았지만 마라톤을 하고 온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확실히 없네요. 아무리 찾아도."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카페 안을 한 바퀴 돌고 온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갖고 있었던 일말의 기대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타키는 여전히 답장을 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혹시 내 앞에 있는 이 남자처럼 핸드폰을 집에 두고 온 건 아닐까.


"...나갈까요?"

"아뇨, 지쳤어요. 그냥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라... 조금만 쉬다 가요."


남자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나지만, 이 사람이 기다리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잖아. 나보다도 더 걱정하고 있겠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앉아 널브러졌다. 그 상태로 몇십 초 정도를 꼼짝 않고 보냈다.


"우연이란 건 가끔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나 보네요. 별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타키..."


"그렇게 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우연이니까요. 누군지도 모르던 사람과 같은 시간에 같은 약속을 해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 거잖아요. 저와 여자친구가 만나게 된 계기는 운명 같은 게 아니라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렵네요...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도 분위기를 읽은 듯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도쿄의 주말 거리는 언제나와 같이 혼잡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리를 걷는 군중 속에서 타키를 찾아볼까도 했지만 의미 없는 일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 * * * *


"일단 조금 쉴까 싶은데."


"그게 좋겠죠. 사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앉아 있어요. 한 바퀴 돌고 올 테니까."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지는 카페 안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쓰러지듯이 앉았다. 온 몸의 힘이 전부 어딘가로 새어나간 것 같았다. 혹시 모른다는 심정으로 바지 주머니에 다시 손을 찔러넣었지만 없던 핸드폰이 갑자기 생길 리도 없었다.


여자는 잠시 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여자가 이전에 짓고 있던 여유로운 표정은 싹 가셨다.


"아까 그 카페에서, 그 쪽이랑 그 쪽 여자친구는 운명으로 이어진 사이 같다고 했었죠?"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서로 처음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같이 있을 때도 몇 달 전에 만난 사람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던 친구 같은 느낌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건데."


"음, 그렇군요. 내가 남자친구를 어떻게 만났는지는 말했었나?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학 합격 발표 때였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 지금보다 키가 더 작았는데,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합격자 명단을 보려고 제자리에서 점프하다가 누군가의 발을 밟아버리고 말았고, 그 누군가가 지금은 남자친구가 되어 있다, 뭐 이런 얘기네요."


"그건 정말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네요."


그렇지, 하고 여자는 자연스럽게 마침표를 찍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진지한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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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커피잔을 받아든 다음에도 가시 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몸이 편안하지 않았다. 나도 남자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가끔씩 잔을 기울이기만 했다. 정적을 깬 것은 남자 쪽이었다.


"우연과 운명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해요?"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지만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아마도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가 아닐까요. 어떤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는 거랑 운명적인 일이랑은 확실히 다르잖아요. 그 쪽이라면 합격 발표에서 우연히 만났을 지 몰라도, 이 쪽은 정말 운명이라는 느낌이었으니까, 뭐 그래요."


"글쎄요... 동전의 양면이라."


남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째서인지 기쁨이란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우연과 운명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어째서죠?"


"저와 미호가 우연히 만났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우리는 새롭게 운명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운명은 꼭 정해져있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런가요... 솔직히 어려운 이야기라, 잘 모르겠어요."


* * * * *


"우연과 운명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하나요?"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지만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뭐, 굳이 따져보자면 서로 반대인 개념이겠죠. 우연히 일어난 일은 보통 운명이라고 치부되지는 않고, 운명적인 일에는 누구도 우연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 않으니까."


"정말로요?"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등을 곧게 세우고 여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있잖아요, 우연과 운명이란 건 그 쪽 생각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에요. 처음에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우연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 결국엔 운명이 될 수도 있죠."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솔직히 말해서 좀 난해하네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예라도 들어볼까요? 음... 뭐가 좋으려나."


여자는 잠깐 천장을 쳐다보더니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갑자기 박수를 딱 쳤다.


"아까 전엔 저와 쇼타가 만나게 된 게 우연한 일이었다고 했잖아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도."


"그게 단지 우연한 일이기만 했다면, 다시 말해서 우연으로 끝날 일이었다면, 지금의 쇼타와 저는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을 거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함께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우연의 연속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건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운명이지."


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아직도 어렵나요? 그 쪽의 경우라면 우연 없이 운명이 시작된 경우일지도 모르니까 단언할 수는 없네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건 당신의 몫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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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카페를 나와 타키와 자주 가던 공원 쪽으로 걸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 이 남자도 여자친구와 만난 뒤에는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이렇게 또 다른 우연과 운명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여기에서라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공원의 동쪽 입구 쪽으로 들어섰다. 개찰구를 통과하자 녹색으로 가득 찬 정갈한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그 쪽도 남자친구와 같이 공원에 자주 오시나 보네요?"


"네. 공원 중앙에 있는 정자에 앉아 같이 시간을 보내거나 하면 즐겁잖아요. 볼 거리도 많고, 공기도 상쾌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곳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두 커플이 전부 공원을 좋아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우연이네요."


"확실히 이 곳은 그런 매력이 있죠. 그렇지만 우연과 운명은 동전의 양면이라면서요?"


"동전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으니까요."


목적지는 공원 중앙의 정자였다. 싱그러운 초록빛은 공기를 정화시켜 쾌적하게 만들었고 하늘은 다른 것들에 비할 데 없이 푸르렀다. 태양은 너무 따갑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한 광량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직 약간의 긴장감과 불안함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공원의 이런 모습은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이야기 고마워요. 우연과 운명이라. 솔직히 조금 어렵지만, 좋은 이야기네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운명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고 그 쪽의 사례처럼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이제부터... 만들어 나가면 되니까."


"...고마워요. 그 쪽도 그 우연에서 이어진 운명, 잘 가꾸어 나가면 좋겠네요."


공원의 깊은 곳에 도착하자 나뭇잎 사이로 정자가 살짝 보였다. 남자는 갑자기 멈춰섰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와 같이 걷고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여기부턴 따로 가기로 하죠. 그 사람과 만나지 못했으면 다시 돌아오세요. 그렇지 않다면 저도 5분 뒤에 따라가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감사해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정자를 향해 걸었다.


* * * * *


카페를 미츠하와 자주 가던 공원 쪽으로 걸었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을 수도 없었고 어쩐지 미츠하도 공원으로 올 거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까. 이 여자도 남자친구와 공원에 자주 온 적이 있다고 해서 여자도 내 뒤를 따랐다. 그럴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는데.


"자주 오던 곳이에요. 웬만하면 동쪽 입구 쪽으로 들어가는데, 이 쪽 입구는 처음 이용해보네요."


서쪽 입구의 개찰구를 통과하자 녹색으로 가득 찬 정갈한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옆의 여자는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도 여기 자주 왔었는데. 설마 그 쪽까지 공원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여기는 공기도 좋고, 보기도 좋고,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힘 같은 것도 있잖아요. 도시 가운데에 있지만 빌딩들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니까. 뭐, 이것도 나름대로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우연은 운명이랑은 그다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미츠하와 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공원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꼭 붙어 앉아 공원을 감상하며 대화에 젖다 보면 행복에 둘러싸일 수 있었다.


"아까 우연과 운명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라면서요."


"...그러게요. 제 말에 내가 당해버렸네요?"


"뭐, 괜찮아요. 대충 이해는 했으니."


공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물 흐르는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타박거리며 신발이 지면에 닫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마음 속으로 미츠하도 이 소리를 함께 듣고 있기를 소망했다. 어쩌면 이 공원에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지.


"아무튼,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아들었다는 게 더 신기한데. 저도 마음 내키는 대로 막 말한 거라, 제가 들어도 유사과학같이 신빙성 없는 소리로 느껴지는데요. 그렇지만 정말 들어 주었다면... 조금 기쁘네요. 고마워요."

"그 쪽도 우연에서 이어진 운명, 잘 만들어나갔으면 좋겠네요."


"그 쪽도. 우연 단계는 생략됐지만, 어쨌든 지금부터의 운명은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 사람을 찾아온 거잖아요. 그 타고난 운명 잘 활용하시라구요."


공원의 깊은 곳에 도착하자 나뭇가지 사이로 정자가 살짝 보였다. 여자는 갑자기 멈춰섰다.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데 누군지도 모를 여자랑 붙어있을 수는 없잖아요. 먼저 가세요."


"아, 네. 그럼 미츠하랑 만나지 못하면 다시 돌아올 테니까 조금 기다려주세요."


"5분 뒤에 따라갈게요. 꼭 만나길 바라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정자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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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쪽 입구와 통하는 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곧장 그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타키!"


* * * * *


동쪽 입구와 통하는 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곧장 그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미츠하!"


* * * * *

* * * * *


우리의 이 우연한 만남은 단순한 우연보다도, 과거의 운명보다도 가치있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나갈 운명의 시작이 되겠지.


-----------------


끝입니다. 부족한 문장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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