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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중편] 저녁 바다와 빨강 나비 - 1

니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4.30 19:05:37
조회 1119 추천 30 댓글 18
														

* * *


이른 봄의 꽃샘추위는 상상 이상으로 강렬하다.

하지만, 빨강 나비는 가장 먼저 날개를 펴기로 한다.


빨강 나비는 누구보다도 먼저 세상의 빛을 보고 싶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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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


[...그래서, 미안해. 당분간은 잠깐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미야미즈 미츠하가]


종이쪽지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둔 뒤 펜을 펜꽂이에 도로 꽂았다. 그리고 준비해 둔 여행가방을 들고 타키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 집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열자 늦여름의 때 늦은 열기가 얼굴을 훅 스치고 지나갔다.


* * *


2.


덜컹거리는 차 안의 불편한 감촉 때문에 자연스럽게 잠에서 깼다. 의식이 완전히 깨긴 했지만 앞을 바라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눈을 꼭 감고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미츠하랑 타치바나 씨는 평생 그럴 일 없을 것 같았는데 말이지. 결국 남자랑 여자는 어쩔 수 없다니까..."


조수석에 앉은 사야가 가벼운 어조로 농담을 던졌다. 아직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소리 내서 대꾸하는 대신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빠르게 이동하는 공기의 흐름이 차 안을 헤집고 지나갔다. 사야는 "언제 일어났어?"하며 조금 당황하더니 머쓱하다는 듯이 나를 따라 창문을 쭉 열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음, 바람이라도 부니까 좀 낫네.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미츠하네는 정말 이상할 정도로 싸우는 일이 없었잖아. 살면서 그런 닭살 커플은 처음 봤지. 약간 부럽기도 했고."


"싸우는 건 고사하고 말다툼 같은 것도 아예 안 하더만."


"그건 그런데... 못 본 사이에 사람이 달라졌나. 모르겠다."


"살다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냐."


한숨을 쉬는 텟시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끝까지 열린 창문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지랑이 같은 무언가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아른거려 약간의 멀미 기운을 만들어냈다. 방금 전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힘들여 정리해 놓은 머릿결을 흐트러지게 했다.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져서 창문을 다시 닫아 버렸다.


다행히도 불행히도 차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핸드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열두 시 삼십 분, 늦잠을 자주 자는 타키라고 해도 일어났을 법할 시간이다.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도망쳐 나온 주제에 연락을 기다리다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황당했다. 괜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연락... 안 오는데."


"기대한 것도 아니잖아. 어디 간다고 말은 해 놨어?"


"아니. 그냥 잠깐 나가 있는다고 종이쪽지에 써 놓긴 했는데 정확하게 어디 갈 거라고는 한 적 없어. 사실 나도 처음엔 어디를 가겠다, 그런 생각 없이 무작정 뛰쳐나온 거라 그렇게 쓸 수도 없었지."


"하아... 난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어서도 여전히 네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니까. 남자는 보통 자기 여자친구가 갑자기 사라지면 정말 불안해하니까 너무 걱정시키지는 말고. 엄마와 떨어져 있는 남자애 같지."


다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내뱉는 사야의 말을 실없는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운 말투였다. 조용히 운전대를 잡고 있다가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은 텟시는 발끈해서 긴 반박을 늘어놓았다. 사야의 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에는 닫힌 창문 너머로 넓게 펼쳐진 하늘과 높게 솟아오른 산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의 20대를 함께 한 도쿄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 하얀 구름은 마치 처음부터 하늘의 일부였던 것처럼 어색함 없이 떠다니고 있고 나무들의 초록빛 색채는 푸른 하늘의 빛깔와 대비되어 더욱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풍경을 아름답다고 느낀 자신에게 이유도 없는 화가 치밀었다.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어제는 타키와 처음으로 말싸움을 벌였다. 사야의 말마따나, 그 계단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이래로 우리는 한 번도 말싸움 같은 것을 벌여본 적이 없었다. 일상 속의 작은 부분부터 큰 부분까지 우리는 놀랄 만큼 서로와 닮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단 한 가지 부분에서만큼은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한 번 싸우자마자 우리에게는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겼고 서로를 상처입혔다. 나는 길고 길었던 어젯밤을 죄책감과 야속함이 섞인 눈물 속에서 보냈다. 그 일 이후 타키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아침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하지만 특별히 갈 곳도 없었던 탓에 정처 없이 공원을 거닐거나 편의점에서 대강 한 끼를 해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사야네 집을 찾았다. 사실 갈 곳이 없었다기보다는 누구라도 마음을 터놓고 말할 사람이 필요했다. 실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사야와 텟시는 그런 나에게 같이 여름 휴가라도 가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둘이 짜 놓은 여행 계획에 폐를 끼칠 것 같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오히려 사야와 텟시 쪽이 부탁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덕에 얼떨결에 그 제안을 수락해 버렸다.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곳이라면 질색이었지만 다행히 목적지는 조용하고 고요한, 말 그대로의 휴양지였다. 오히려 바닷새 소리와 파도 치는 소리만이 들리는 그 장소에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에 막연한 기대감마저 가지게 되었다.


어떤 장소일까, 바닷가의 모래 위에 누워 넓은 하늘을 끌어안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소금기 섞인 신선한 바닷공기는 기도를 통해 내 몸 안에 들어와 나를 바다에 물들이고 저녁이 되면 푸른 바다는 노을빛으로 모습을 바꾸겠지.


"무슨 생각 해?"


앞에서 들려오는 사야의 말이 나를 둘러싼 공상의 벽을 깼다. 나 대신 텟시가 아주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미츠하 지금 기분이 안 좋다잖아. 자꾸 말 걸지 마."


"친구잖아! 친구 걱정해주는 게 뭐가 문제인데?"


"다른 사람 기분 안 좋을 때 계속 끼어들면 오히려 기분 나빠지잖아. 당연한 걸 묻고 앉아 있냐."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지! 여자의 문제는 여자가 상담하는 게 최고니까 남자는 잠깐 입 닫고 있어 줄래?"


"또 남자는..."


후끈거리는 날씨 때문인지 깬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다시 눈꺼풀이 덮이며 졸음이 몰려왔다. 앞 자리에서 불평하는 텟시의 목소리가 꿈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고 느낄 때쯤 나는 재차 잠에 빠져들었다.


* * *


3.


"일어나, 미츠하. 도착이야."


잔잔한 물의 내음과 사야의 목소리가 나의 의식을 다시 깨게 했다. 장시간의 여행길 때문인지 사야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비틀거리며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찌르는 듯한 더위는 조금 물러간 듯 했지만 그래도 아직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공기에 상당히 습한 기운이 어려 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가 보았던 휴양지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여기는 바다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잠깐 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던 탓인지 짐을 나르던 사야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아이는 언제나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려는 것 같다.


"음... 내가 오래 잤나?"


"제법. 두 시간은 넘게 잤을 거야. 아직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뭐 도와줄 일이라도 있어?"


"딱히... 아, 아니다. 저기 있는 가방 하나만 들고 와 주면 고맙겠네. 칫솔이나 치약이나 화장품 같은 걸 넣어 놨으니까 무겁진 않을 거야. 텟시는 먼저 갔어."


사야는 검지손가락으로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검은색 가방을 가리켰다. 사야를 따라 걷는 도중에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바닷가의 정경을 감상했다. 가까이 보이는 바다, 그 반대편에 무리지어 서 있는 나무들. 별장처럼 보이는 건물 한 채를 빼고는 아무 건물도 없었다. 마치 내가 몇 시간 전까지 있었던 곳과는 완벽히 단절되어 있는 또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었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청량한 노랫소리와 향기롭고 깨끗한 바람은 깜짝 놀랄 만큼 상쾌했다. 사야가 발견한다면 놀림받지는 않을까, 약간의 걱정을 품고 슬쩍 미소를 지어 보았다. 나는 단박에 이 장소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게 기분 좋은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바다 쪽에서 사람의 시선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기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느낌이 워낙 강렬해서 잠깐 동안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발소리가 끊기는 것을 들었는지 사야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야. 그냥 이상한 낌새 같은 게 느껴져서..."


"자세히 말해 봐."


"바닷가 쪽에서 누가 나를 계속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되나, 그런 게 있어서."


"기분 탓이겠지. 우리 말고 여기 머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들었으니까. 성수기도 끝났고 해서 더 이상 방문객이 없다나 봐. 셋이서만 여기서 쉬다 가는 거니까 안심해."


역시 기분 탓이려나. 애매한 말로 대화를 끝맺고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잔디를 짧게 깎아 흙이 드러나게 해 놓은 오솔길을 따라 3분 정도 걸으니 그 별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얀색 페인트로 칠한 외벽이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을 주었다.


현관문을 열자 차임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며 별장 안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반듯한 인상의 넓은 거실, 그 거실과 연결된 작은 부엌, 침실로 보이는 안방 두 곳과 화장실. 휴양지라기보다는 일반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거실 창문 밖으로는 파도 치는 바다가 내다 보였다. 하늘보다 조금 짙은 색의 푸른빛 바다는 해안 근처에서 하얀 파도가 되어 산산히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먼저 별장에 가 있다던 텟시는 뒷주머니에 왼손을 찔러 넣은 채 편지 같은 것을 읽고 있다가 우리가 온 것을 눈치채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주인 할머니의 메시지야.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마을이 있고 식자재 같은 게 떨어지면 거기서 구입하면 된다네. 근처에 사는 사람은 할머니랑 손녀 한 명밖에 없다는 것 같고. 쓰레기 같은 건 잘 처리해줬으면 좋겠다... 뻔한 얘기지. 아무튼."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공간이네."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 말이 나왔다. 네 개의 눈동자가 모두 나에게로 쏠리자 당혹감이 들어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아니, 별로 신경쓸 만한 말은 아니야. 그냥 도쿄의 풍경이랑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같이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시끌벅적한 곳보다는 최대한 조용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있다 가면 돼. 방은 저 쪽 방 쓰면 될 거고. 침실이 두 군데라서 다행이네."


"고마워. 그럼 먼저 가서 좀 누워 있어도 되겠지? 머리가 좀 지끈거려서..."


"괜찮다며. 많이 아파지면 말해. 간단한 약 정도는 챙겨 왔어. 그것도 아니라면 주인 할머니에게 부탁해도 된다고 했고."


"알았어. 그래도 약 먹을 정도는 아냐."


사야는 눈물점이 있는 쪽 눈을 찡긋했다. 친구들이 거실 벽에 함께 기대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사야가 가리킨 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문득 내가 있는 방에서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4.


벽에 걸린 시계는 마지막 기억이 남겨진 시점보다 1시간 뒤의 시각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핸드폰 LED는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가 있음을 알리는 초록색 불빛을 내보내고 있다. 스팸 메일인가 싶었지만 확인해 보니 사야에게 온 메시지였다.


[깨우기 미안해서 문자로 알릴게. 바닷가에 나가 있을 테니까 일어나면 따라와. 안 와도 괜찮고.]


열어 놓은 창문 밖의 하늘에는 오렌지빛 기운이 감돌았고 배가 조금 고파왔다. 벌써 저녁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대충 빗고 거실로 나갔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아서 별장 안의 공기가 바깥 공기에 동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새 짐 정리가 끝난 건지 어질러져 있던 거실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거실에서 달리 할 일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스쳐가듯이 별장을 빠져나왔다.


바닷가로 향하는 길은 산책로처럼 꾸며져 있었다. 대학생 시절에 혼자 공원을 걸었던 기억이 나서 잠깐 추억에 젖어들었다. 공원과 이 장소는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비슷했다. 두 종류의 푸른 빛, 상쾌한 기분, 굳이 추가하자면 내가 혼자 걷고 있다는 점까지. 타키는 이 곳에 없다.


또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도쿄의 거리를 걷는 동안, 그리고 차를 타고 이 곳으로 오는 동안 되도록 타키에 대한 것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분노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렇게 부르고 싶은 감정 때문이었다.


타키는 과거의 기억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만나기만 한다면 되살아날 줄 알았던 기억은 만난 뒤에도 잃어버린 퍼즐 조각처럼 영영 사라져 버렸고 조각난 기억의 청사진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대로 잊고 싶지 않아서, 잊혀지고 싶지 않아서, 나는 사라진 기억을 억지로 붙들어 왔다.


타키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사라진 기억보다는 지금의 서로를 바라보자는 말이 나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건 단순한 고집이었다. 그것도 우리의 기억처럼 이미 사라져 버린 무언가를 좇는 고집.


...그만 떠올리자. 언제나 이런 식이었지만 이런 푸념은 나에게 결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경험으로 체득한 지 오래이다. 그런 생각으로 결국 모든 생각의 종착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해 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아직도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으니까.


애써 머리를 비우고 산책하듯이 가벼운 발걸음을 가장해 다시 걸었다.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동안 하늘은 점점 더 선명한 노을빛을 띠었고 바다는 물방울의 윤기를 담아 그 빛깔을 반사했다.


이윽고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 절벽에 다다랐다. 산책로는 이 곳에서 끊기는 것 같았고 그 뒤로는 돌 계단을 통해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절벽 위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바람이 조금 더 강하게 불었다. 절벽 끝에는 바다 방향으로 앉도록 만들어져 있는 벤치가 있었는데 손으로 직접 만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벤치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까맣고 긴 것으로 보아 사야는 아니다. 그 여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고 나는 그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얼굴에는 앳된 기운이 서려 있어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기도 했지만 흑구슬 같은 눈동자에서는 약간의 쓸쓸함과 어른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문득 텟시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근처에 사는 사람은 별장을 관리하는 주인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손녀밖에 없다고 했었지.


여자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을 걸었다.


"별장에 오신다고 한 분인가요."


"아, 네. 며칠 간 신세 지게 됐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음,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별장을 관리하는 게 저희 할머니에요. 전 평소에는 도시에서 지내다가 방학에는 이 곳에서 지내고요... 말은 놓으셔도 괜찮아요. 아직 고등학생이거든요."


고등학생. 이 아이는 고등학생이구나. 그 말을 듣고 이토모리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되새겨 보았다. 즐길거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시골, 그곳에서 나는 따분함으로 하루하루를 지새워야 했다. 사야와 텟시를 불러 노는 것도 어릴 때는 즐거웠지만 교복을 입을 나이가 되고 난 뒤에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져서 이토모리가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조용한 시골에 대해서 썩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방학 때마다 이런 곳에서 지낸다는 말이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여기... 조용해서 좋긴 하지만 아무것도 없잖아. 재미있어서 오는 건 아닐 텐데."


"설명하자면 좀 길어질 텐데... 나중에 또 만난다면 그 때 설명해 드릴게요."


"알았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두 분이 바닷가로 내려가시던데."


"친구들이야.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 맞지?"


"네. 기다리고 계실 텐데 빨리 내려가봐야 하지 않나요."


"그래... 그럼 이만 가 볼게. 나중에 보자."


손녀는 "네" 하고 들릴 듯 말 듯 대답을 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이 아이와는 어쩐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바닷가로 향하는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에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찰랑이는 물결의 일정한 리듬을 멍하니 응시했다. 동쪽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서쪽 하늘의 옅은 불빛만이 방금 전까지 여름 해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먼발치에서는 사야와 텟시가 꼭 붙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있는 쪽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결코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아담한 규모의 바닷가 너머에서 두 사람의 담소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왔다.


돌계단의 가장 아래 단에서 발을 모아 뛰었다. 두 발이 동시에 모래 위에 닿자 고운 입자를 가진 모래들이 탁 튀어오르더니 신발 안의 빈 공간으로 들어갔다. 까칠까칠했다. 그 상태에서 더 걷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서쪽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늘을 따라 물들어 가는 새털구름이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주황빛 태양은 이대로 달에게 지기는 싫다는 듯이 산꼭대기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 때 얕은 바다 안에서 어떤 사람의 형상 같은 것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 눈을 대여섯 번 깜빡거렸다. 분명히 남자의 모습 같은 것이 앞에 나타나 있다. 파도는 그 사람 앞에서 갈라지고 부서졌다. 이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나와 사야와 텟시, 주인 할머니, 그리고 위에서 보았던 그 손녀밖에 없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 남자의 뒷모습은 본 적도 없는 타키의 고등학생 시절 모습과 아주 닮아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고등학생 타키의 모습이 왜 떠올랐는지, 눈 앞의 형상을 그 타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이미 그 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신발이 계속해서 모래에 덮여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지만 최대한 빨리 뛰어 타키에게 닿고 싶었다. 눈 앞에 있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쫓아 왔던 타키와의 과거의 기억 그 자체였다. 눈 앞의 타키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렇지만 바다 바로 앞에 다다른 순간 타키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하아..."


결국 밀려오는 파도가 발에 닿도록 가만히 서서 망연자실하게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파도는 나의 발끝까지 미치지도 못했고 어떤 파도는 신발 위의 발목까지 적시기도 했다. 신발에 들어가고 빠져나가는 바닷물이 발가락을 살살 간지럽혔다. 이름 모를 바닷새의 상쾌한 노랫소리는 어느새 나를 질책하는 듯한 소리로 바뀌었다. 기울어가던 해는 마침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건너편에서 사야가 나를 발견했는지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나는 물에 젖은 신발을 벗어 버리고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었다. 그러면서도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 여름 콘테스트용으로 써 뒀던 건데 폭파됐다길래 그냥 한 편씩 올려보려고 합니다. 연재가 느릴 거라서 어쩌면 진짜 늦여름에 끝나버릴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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