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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단편] 비 내리는 날의 보라 우산

니나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7.05.07 23:39:24
조회 1345 추천 24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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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타키와 한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편 내용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이런 소재가 불쾌하신 분은 뒤로가기를...)


* * *


창 밖에는 슬픈 비가 내리고 있다. 가늘게 내리는 가랑비도,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도 아니다. 그저 하늘을 가득 뒤덮은 먹구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물방울들이 우울한 마음을 안고 땅으로 추적추적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먹구름을 따라 회색으로 물들어 버린 무채색의 거리에는 우산을 받쳐 쓴 사람들이 빗방울처럼 차갑게 걸어다니고 있다.


토요일 아침 여섯 시 반, 어쩌면 최근 몇 년간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않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해가 완전히 가려진 탓에 방 안은 새벽녘의 어둑어둑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베개에서 머리를 떼고 상반신을 일으키자 아직 잠들어 있는 미츠하가 잠깐 뒤척거리더니 몸을 틀어 나에게 등을 보인 채로 고쳐 누웠다.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나는 침대 위에서 가만히 내리는 비를 지켜보았다.


'...그 사람은 지금 잘 있을까.'


아직 미츠하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다시는 바꿀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데다 이런 이야기는 꺼내 보았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우리 둘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집착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녀 속에도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결코 아름답지 못한 기억들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몇 년 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던 것 같다. 토요일 아침부터 내리는 비와 특유의 가라앉은 분위기. 비는 그 때나 지금이나 색조 잃은 거리에 떨어지며 길을 거니는 사람들의 우산을 적셨고 짙게 낀 먹구름은 햇빛을 완전히 가린 뒤 세상의 생기를 앗아갔다. 하지만 그 때 내 옆에는 미츠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잠들어 있었다.


* * *


고등학교 2학년 때 히다 시를 방문했던 이래로는 아침이 그다지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놓은 알람 소리를 듣고도 눈을 떠 현실을 마주하는 일이 두려워져서 한참 동안 이불에서 뒤척거리곤 했다. 무엇보다도 기분나빴던 것은 정체 모를 상실감이었다. 어디서 생겨났는지도, 왜 나에게 찾아왔는지도 모를 그 괴상한 감정은 아침마다 나를 찾온 뒤 지독하게 옭아맸다. 그래서 나는 아침이 싫었다.


그것은 입시 시험을 치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뒤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사라지기는 커녕 애절해지기까지 하며 나를 괴롭혔다. 내가 언제나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점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3년이 넘게 지나도록 그 누군가와 맞닥뜨릴 수는 없었다.


주변 친구들에게서 들려오는 연애 소식 따위의 정보들은 나를 이상한 방향으로 자극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의미 없이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스물두 번째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기 하루 전 날, 그녀와 처음 만났다.


애인 대행 업체를 통해 소개받은 그녀와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겼다. 과도한 스킨십은 금지, 영업 시간은 새벽 한 시까지. 아침 일찍 그녀와 만나 같이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내내 거리를 쏘다녔다. 함께 영화를 보거나 군것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자주 웃었다. 이것도 영업의 일환이겠거니, 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녀의 연기는 꽤 자연스러웠기에 나는 이런 어이없는 일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은근히 질책하면서도 그녀와의 시간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녀는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별로 없었고 내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아이처럼 웃는 것으로 반응하기만 했다. 만약 돈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면, 그녀는 드물게 마음이 잘 맞는 여자였다.


그 날따라 하루는 확실히 빠르게 흘러갔다. 날은 금방 저물고 동쪽 하늘에서 밤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영업 종료인가요."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이 눈을 따갑게 찌르는 호텔 간판들이 즐비한 거리였다. 아쉬움을 감춘 채 일부러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그런 말을 건넸다. 나와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는 팔을 풀어 몸을 빼내더니 대답했다.


"핸드폰 번호 알려주세요."


그러고는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몇 번 터치스크린 소리가 들린 뒤에 돌려받은 핸드폰에는 그녀의 연락처가 적힌 메모가 저장되어 있었다. 별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 그녀의 핸드폰에 착신 이력을 남겼다. 아마도 영업용 핸드폰일 것이다. 연락처 교환을 한 이유는 고객 관리 때문이겠지. 그녀에게 천 엔 지폐들을 건네자 그녀는 다음에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밤 거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낯뜨거운 애정 행각을 나누며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커플들 사이에 끼어 나는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면 금방이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러지 않았다. 사람의 온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다리가 풀렸다. 결국엔 다시 혼자 남은 것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라벤더'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연락처 하나뿐이었다.


* * *


크리스마스와 신년이 차례로 지나가며 날씨는 한 층 더 추워졌다. 바깥에 나갈 때마다 추위가 코트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고 어느샌가 첫 눈이 내렸다. 하지만 내가 차가움을 느끼는 이유가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니였다.


한 달 정도 뒤에 그녀의 연락을 다시 받을 수 있었다. 만나고 싶으니 역 앞으로 나와 달라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나는 두꺼운 털 목도리를 두르고 지갑을 두둑히 채운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한 눈발이 날려 눈송이들이 코트의 어깨 부분을 하얀 실로 수놓았다.


"꽤 차려입고 나오셨네요."


"오늘은 조금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


"글쎄요... 20% 정도라면 생각해볼게요?"


그녀는 속삭이듯이 웃었다. 그녀가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에 대번에 긴장이 풀려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영하의 날씨 때문에 손등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저녁 때가 되어서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나를 근처 칵테일 바로 끌고 들어갔다. 손님은 대부분 여자였고 바텐더마저도 젊은 아가씨여서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는 그녀를 따라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여자들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이런 곳에서 그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조금 심란해진 감정을 눈치챈 건지 만 건지 그녀는 첫 만남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해맑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점원을 불렀다. 칵테일 잔을 받아든 뒤에도 우울한 기분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자 그녀의 가슴께에 걸린 긴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여기는 분명히 건물 안일 텐데. 하지만 분명히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은 '라벤더'는 본명이 아니라 영업용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녀는 종일 갈색 핸드백을 꼭 껴안고 있었다. 어째서 라벤더라는 특이한 이름을 쓰고 있냐고 말하자 그녀는 그저 싱글거리기만 했다.


"비밀이에요. 영업 상의 비밀."


그녀의 앳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애인 대행 업체의 프로필에 따르면 나보다 한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바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라면 적어도 스무 살은 넘었을 것이다. 그녀를 장난스럽게 "라벤더 씨"라고 부르자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호칭 어색하지 않아요? 라벤더 씨라니..."


"그럼 어떻게 부르는 게 좋아요?"


"으음... 아무리 그래도 본명을 밝힐 수는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부르는 수밖에 없겠네요."


알았어요, 그럼 앞으로도 라벤더라고 부를게. 그런 시시콜콜한 화제의 대화가 오고 갔다. 자정을 한참 넘겼지만 그녀도 나도 자리를 뜰 생각이 없었다. 옆 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들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하며 우리를 놀렸다. 그녀는 아직 새내기 커플이니 응원해 달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당당해질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진짜 애인이 아니니까.


깊은 새벽이 되자 바에서는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와 그녀 둘만이 남았다. 주변만을 간신히 밝혀줄 정도로 어둡게 설치된 조명이 이미 비워 버린 유리잔의 물기를 비추었다. 시침이 숫자 3을 지나칠 때쯤에는 졸린 눈을 하고 있던 그녀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얕은 숨소리를 내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한참 동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부스스 떠졌다.


"아... 잠들어 버렸네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집에 돌아갈 수 있겠어요?"


"아니요... 근처에 자고 갈 만한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바에서 나오자 얇게 날리던 눈발이 훨씬 커져 있었다. 다행히 주점이 많은 거리여서 호텔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분홍색 털장갑을 꺼내 건넸다.


"한 손에는 장갑을 끼고 나머지 손은 잡으면 두 손 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귀여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장갑을 받아들었다. 장갑을 낀 왼손보다 그녀와 마주잡은 오른손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왼손은 시종일관 덜덜 떨렸다.


아직 같이 자는 것만은 어려운지 방은 따로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뭐 그럴 것까지 있냐면서 제지했다. 그리고 방 요금까지 본인이 지불하겠다고 하며 지갑에서 지폐를 여러 장 꺼내 내밀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반쯤 끌려가듯이 그녀를 따랐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샤워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목욕 가운을 샤워실 앞에 걸어 두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누워 TV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심야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프로그램 진행자와 출연진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은 역시 심야 방송은 웃음만을 위해 존재하는구나,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 또한 손님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이겠지. 진솔함이 담긴 감정 따위는 없이, 그저 영업 매뉴얼에 적힌 대로만.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반사적으로 TV를 꺼 버렸다. 그녀가 서 있는 쪽에서 바디 워시 냄새가 났다.


"타치바나 씨도 들어가세요."


"아, 네. 그럼."


알몸 위에 하얀 천 하나만 두른 그녀의 모습 때문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금 붉어졌을지도 모를 얼굴을 애써 감추고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그녀와 스쳐 지나갔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사후 고객 관리를 정말 철저하게 하는 여자라는 이성적인 생각으로 감정을 밀어냈다. 그녀는 그저 금전을 위해 일하고 있을 뿐이다. 잡스러운 감정은 가질 필요가 없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가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가 이불을 제멋대로 휘감고 침대 위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TV는 다시 켜져 있었고 그녀의 핸드백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 열린 가방 안으로 지갑과 화장품, 그리고 까만색 비닐 봉지가 보였다. TV에서는 아까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 대신 처음 보는 외국 영화가 송출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시선이 가지 않도록 하며 대강 이불을 덮어준 다음 개인용 소파에 앉아 쪽잠을 청했다. 바깥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 * *


그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도 오지 않았고 먼저 연락을 취해 봐도 전혀 받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이런 일을 하는 그녀로써는 어제 같은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쓰이지 못한 채로 지갑에 남은 천 엔 지폐 더미를 만지작거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애당초 내가 다른 사람을 걱정할 처지가 되기는 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열한 달 동안 만나지 못했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벚꽃잎과 장맛비와 낙엽이 차례로 떨어졌다. 이별이라고 말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애인 대행 업체의 직원으로서 나에게 잠깐 동안 애인이 되어주었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혼자 외로워하며 돈으로 사랑을 사려고 한심한 남자에게 말이지.


2021년의 대부분을 그녀 없이 보내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감정은 점점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고 언젠가는 꼭 그 사람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럴수록 그녀와 만남을 가지며 잊어버리려고 했던 상실감은 더욱 커졌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옭아매지도 괴롭게 하지도 않았다. 그 사실을 츠카사와 신타에게 말하자 얄미운 친구들은 "이 자식이 드디어 포기했나 봐" 같은 소리를 하며 낄낄거렸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서 다시 연락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답지 않은 정중한 어투로 적힌 장문의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도 종국에는 그녀와 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싫어하지 않는 나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결국 그녀와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오랜만이네요. 처음 만났던 날부터 정확히 일 년인가."


약속 시간인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즈음이 되어 다시 만난 그녀는 수수한 차림을 하고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마치 어제도, 그저께도 만났던 친한 친구를 대하듯이. 나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간단히 대답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 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데다 오늘의 그녀는 나의 애인이 아니었다.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걸었다. 두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저녁 노을이 붉게 타고 있는 하늘 아래를 걸었다. 날씨는 제법 쌀쌀하긴 했지만 그 날의 매서운 추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둘은 마치 방문할 장소를 미리 정해둔 것처럼 발 맞춰 움직였다.


"그 때 일은..."


그녀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 앞에 도착한 뒤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제지했다.


"괜찮아요. 그 날은 일이랑 관계없이...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자고 했던 거니까. 돈 같은 건 필요없어요. 오늘도 그렇고."


그녀는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얼굴을 풀고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젠 옛날 얘기잖아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할게요. 들어가요."


그 때처럼 바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점원을 불러 칵테일을 주문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 일 년 전의 상황과 똑같았다. 심지어 바 안에 여자들밖에 없다는 것과 그 여자들을 쳐다보며 찾고 있는 누군가와 마주치지는 않을지 하고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같았다.


그녀는 잔을 잡고 나를 향해 내밀었다. 띵 하고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손가락에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 때는 20%까지는 깎아준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그녀는 쿡 하고 웃었다.


"에이, 그거야 그냥 농담이죠. 처음부터 그 쪽에서 연락이 온 것도 아닌데 제 마음대로 돈을 받을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태도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


"...그 일도 그만뒀어요. 타치바나 씨와 만난 뒤에."


"어째서..."


"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괜찮다면 들어주세요."


* * *


그녀에게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렸을 때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는 것, 어린 여동생을 먹여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하며 돈을 벌게 된 것, 일을 그만둔 뒤에 겪은 어려움들까지. 그녀는 심지어 마약에 손을 댄 적도 있다고 말했다. 단지 추위 때문에 손을 떨고 있는 줄 알았던 그녀가 새삼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어쩔 수 없었어요... 올 해엔 마약 중독 치료 센터에서 살다시피 했고 그래서 여동생에게 신경써줄 틈이 없었어요. 애인 대행 업체 일도 그만둔 다음에는 아르바이트 같은 걸로 겨우 먹고 살면서 지냈지만 빚이 워낙 많아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도 못했고요. 그런데..."


그 시점에서 이야기가 끊겼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눈물 방울이 하나 둘 테이블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말없이 티슈를 뽑아 건넸다. 울음소리를 들은 방문객들이 우리를 보며 웅성거렸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억지로 듣게 해서 미안해요. 알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픔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커져갈 뿐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을 공감하고 같이 슬퍼해줄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아픔은 비로소 경감되고 사라져간다. 그녀의 눈물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아픔도 떨어져 나가길 바랐다.


이윽고 눈물을 그친 그녀가 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 얼굴이 빨갰지만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저라도 들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네..."


그렇지만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제 세 번째로 만났을 뿐인 나에게 이토록 많은 비밀을 털어놓는 걸까. 어째서 이 사람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걸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토록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런데... 어째서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저는 처음엔 단순히 애인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귀찮은 사람이었을 테고 지금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을 텐데."


"타치바나 씨 말고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좋아하니까요."


그 미소는 나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나를 이렇게까지 믿어주는 사람인데,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인데. 꼭 일 년 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미묘한 감정이 되살아나 심장 박동을 빨라지게 했다.


하지만 다른 쪽 구석에서는 또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애인 대행 업체에서 일하던 여자에 마약 중독자가 아닌가. 몸으로는 이미 그녀를 안아주고 있었지만 그녀의 상태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내 심장 속에는 이미 그녀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찾아오던 누군가의 존재로 꽉 채워져 있었기에.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자 반대로 그녀가 나에게 안겼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나가요."


바깥에는 눈 대신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보라색 우산을 꺼냈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어깨가 계속 부딪혔다. 나는 아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걸었다. 우산에 완전히 가려지지 못한 왼쪽 어깨가 젖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보라색 우산, 예쁘네요. 라벤더라는 이름이랑 잘 어울려요."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그런 걸 의도하고 지은 이름은 아닌데."


아직도 그녀의 진짜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낸 뒤 떠 보듯이 질문했다.


"이름이 뭐에요?"


"라벤더."


"본명 말이에요."


"영업 상 비밀이에요."


"영업 중도 아니면서!"


그녀가 오랜만에 소리 내서 웃었다. 술 기운 때문인지 보라색 우산 아래에 있기 때문인지 얼굴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멀게 느껴졌다. 비를 맞고 싶지 않아서 그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의 진짜 속마음은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샤워를 마치고 호텔 침대에 마주 본 자세로 누웠다. 그녀가 나를 만저 안았고 나도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중간한 호의를 베풀었다가 도리어 그녀에게 상처만 주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서없는 생각이었다. 밤새 그녀를 안은 채로 만난 적도 없는 상실감 속의 누군가에게 죄책감이 들기까지 했다.


길었던 밤의 자락이 한 올씩 벗겨지기 시작할 때쯤, 그녀가 나를 보며 지었던 슬픈 미소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쪽지 한 장을 두고 나를 떠났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누군가에게서 이렇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처음이에요.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이런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준 데다 안아주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당신과는 함께할 수 없어요. 언제부턴가 당신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게다가 난 고아에 마약 중독자고 당신처럼 멋진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에요. 당신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보는 그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떠나려고 마음먹었어요.


앞으로 전 당신 같은 사람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예요. 그만큼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그걸 전부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미안해요.


당신이 꼭 그 사람과 만나서 행복해지기를 바랄게요. 메리 크리스마스, 타치바나 씨.


- 라벤더]


멍한 눈으로 핸드폰을 켜 시간를 확인했다. 2021년 12월 25일 토요일 오전 6시 30분. 하늘에 짙게 낀 먹구름 속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 * *


우울하게 내리던 비는 점차 잦아들어 가랑비로 바뀌었다. 행인들은 대부분 우산을 접었고 세상의 채도는 아주 약간 높아져서 회색 종이 위에 그려놓은 파스텔화 같은 이미지가 되었다.


고개를 돌려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미츠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그 사람. 물론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뜻뿐만이 아니라 라벤더의 뜻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를 생각해 주었고 나를 위해 떠났기에 나는 미츠하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이리라.


결국 나는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못했다. 또한 그녀에 대한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나의 세상에서 정말로 떠나 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가끔 그 때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내가 그녀에게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기껏해야 가족 관계와 가명 뿐인 이름. 진짜 이름도, 나이도, 주소도,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모른다. 핸드폰 번호와 메일 주소는 지워 버렸다. 하지만 그녀와 있었던 일들과 그녀가 남긴 쪽지만큼은 기억의 바다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았고 그것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옆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미츠하는 내 시선에 응답하듯이 몸을 돌려 바르게 누웠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겠지. 잠들어 있는 데다 말해준 적도 없으니까.


창 밖에서 갑자기 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왔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걷히고 있는 것 같았다. 우산을 계속 쓰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비가 완전히 그친 것을 알자 하나 둘씩 우산을 접었다. 그 사이에 숨어 있던 보라색 우산을 쓰고 있던 여자가 단박에 눈에 띄었다. 그 여자는 우산의 물기를 털어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빛은 그녀를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 * *


- 팬픽보다는 그냥 자작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냥 타키가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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