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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와 전투(이태리 vs 에티오피아)-[펌]

...........(124.63) 2008.02.23 00: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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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와 전투
(1895 - 1896)

 아프리카의 많은 강국들중에 오직 에티오피아 왕국만이 19세기 말까지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 우연이 아닌 1896년 3월 1일 아도와에서 이탈리아 침략자들에게 결정적이고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주권을 지킨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아도와 전투는 한니발이후로 유럽의 군대가 아프리카의 군대에게 당한 큰 참패였고, 그 영향은 20세기까지 미친다. 또한 적에 대한 과소평가와 오만이 전장에 미친 가장 좋은 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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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는 성서시대부터 존재해 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남쪽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지역의 사람들을 "그을린 얼굴"이라고 명명했고, 이는 에티오피아의 어원이 된다. 아프리카 대륙을 가로지는 지구대에서 분리된 에티오피아는 온화한 기후에 비옥한 토지가 있는 고원과 해수면보다 낮은 무더운 저지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는 4세기에 에티오피아로 전해졌고 이후 열정적으로 신봉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부유하고 찬란한 문화가 꽃피워졌고, 고대 아프리카 언어인 기즈語로 쓰여진 보물로 치장된 성경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출현과 급속한 전파는 에티오피아인들을 1,200년 동안 고지대로 고립시켰다. 

 1868년 영국은 5,000명의 영인군(英印軍)을 파병해 유럽 선교사와 외교사절을 억류한 테오드로스황제를 응징하겠다며 에티오피아를 침입했다. 4월 13일 영인군의 우세한 화력에 마르달라에서 패배한 후 그의 귀족들에게 버림받아 자결했다. 영국은 공위(空位)를 두고 봉건영주들간의 4년에 걸친 권력투쟁을 내버려 둔 채 떠나버렸다.

 최후의 승리는 영국이 남기고 간 무기와 탄약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티그레의 토후 카싸이에게 돌아갔다. 후에 요한네스 4세가 된 그는 다양한 외부세력과 끊임없는 전쟁을 해야했다. 1870년대에는 에티오피아가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마사와 항구를 점령하고 홍해를 장악하여 황위를 꿈꾼 이스마엘 파샤의 이집트군을 격퇴했다. 요한네스의 군대는 1876년 3월 7일 구라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했고 유럽인과 미국인 용병에 의해 지휘되는 20,000명의 이집트 군대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1885년 다른 외국세력이 마사와를 점령했다. 이탈리아는 그동안 홍해를 따라 무역을 해왔는데 크리스피 수상은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식민제국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유대관계를 쌓아온 영국의 동의하에 마사와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이에 에티오피아인들은 그들의 불법점유에 매우 불쾌해했고, 요한네스는 에리트리아의 마사와에서 이탈리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쉴새없이 공격을 했다.

 이탈리아군은 마사와 점유후에 급속히 에리트리아 배후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웃지못할 일도 발생했었는데, 1885년 3월 사바구마에서 이탈리아군이 띄운 기구를 보고 에티오피아군이 공황상태가 된 것이었다. 또 야간에 조사등(照射燈)을 에티오피아군에 쬐자 깜짝 놀라 돌같이 굳어버리거나 당황하여 도망쳐 버렸다. 그 광경을 본 이탈리아군은 비웃기 바빴다. 그러나 반대로, 1887년 1월 26일 사티요새의 교대를 위해 종대기동하던 550명의 이탈리아군이 협곡에서 매복에 걸려 43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부상당하는 참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의 공세를 받는 동안, 요한네스는 아프리카 주변국과도 전쟁을 해야 했다. 1889년 3월 12일 그는 수단군과 남부 수단 갈라바트에서 충돌하였다. 양군 모두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승리를 기원하였다. 이 전투는 19세기 후반의 전쟁보다는 중세의 십자군전쟁의 모습으로 보였다. 이 전투에서 요한네스는 전사하고 그의 군대는 뿔뿔히 흩어졌다. 몇 달후 요한네스의 라이벌이었던 쇼와의 토후, 메네릭이 황제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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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릭 2세>

 왕위에 오른 메네릭 2세는 (메네릭 1세는 솔로몬왕과 시바여왕의 아들임) 매우 지적이고 기민하며 무자비한 인물로서 잔인한 에티오피아의 봉건 정치사회의 미덕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테오드로스의 볼모로 있었는데, 그동안 서구인의 무기에 매혹되었다. 그는 또한 제국의 분열과 영국군에 의해 봉건영주들의 군대가 참패를 당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메네릭은 에티오피아의 통치는 강력한 국가와 군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근대무기의 획득이 필수적이라고 결심했다.

 세금은 물론 상아, 금, 은, 사향, 노예를 통해서 얻은 이익으로 프랑스 지배하의 지부티에서 근대 소총과 포를 구매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몇 년이 지나 수만정의 소총과 수백만발의 탄약 그리고 수십문의 대포가 사막의 대상들에 의해 해안 저지대를 통해 메네릭의 새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로 들어왔다. 1890년 중반이 되자 메네릭은 유럽과 미국이 제공한 근대무기로 무장한 그의 군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1. 이탈리아의 제국주의

 이탈리아는 오래전 부터 메네릭에게 소총을 제공하면서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르자 이탈리아는 확실히 수지맞는 장사를 한 것처럼 보였고, 메네릭이 고분고분하게 그의 통치권을 양도할 것처럼 보였다. 1889년 5월 2일, 메네릭은 Uccialli조약을 통해 요한네스의 영지였던 티그레의 일부와 인접한 고지의 일부를 할양하였다.

 권모술수를 통해 이탈리아 정부는 Uccialli조약이 메네릭이 이탈리아에 통치권을 넘긴 법적인 증거가 된다고 선전하였다. 이는 지난 수세기동안 유럽의 상인과 식민주의자가 토착지배자에 행한 전형적인 속임수였다. 그러나 로마에서 생각한 것처럼 메네릭은 야만인 군주가 아니었다.

 조약 17조에 아프리카 외의 에티오피아의 외교권에 대해 이탈리아語와 암하릭語로 기술되었다. 이탈리아語에는 "황제는 그가 다른 모든 열강과 일에 이탈리아정부가 간여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라고 적혀 있었고, 암하릭語에는 "황제는 유럽의 왕과의 일에 이탈리아 정부의 도움을 통해 의사소통할 선택권을 갖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탈리아 협상자는 두 버전의 조약서간의 미묘한 차이를 에티오피아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였던 메네릭은 굴복을 치욕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조약의 부당함을 알았을 때, 이를 즉시 무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뒤늦게 이탈리아가 탄약 200만통으로 그를 매수하려 했음에도 그는 이탈리아인들을 협잡꾼으로 보았다. 유럽의 열강들은 그의 항의를 무시했으나, 터키와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는 조약의 부당함을 받아들였다.

 이탈리아는 요한네스의 장남이자 메네릭의 라이벌인 망가샤와 관계를 맺고 티그레(지명)를 기반으로 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티그레는 기아와 전쟁에 허덕이는 상태였고, 약속했던 이탈리아의 지원도 가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망가샤는 1894년 6월 메네릭과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후에 많은 지방 토후들이 망가샤의 뒤를 따랐다. 이후 메네릭은 명실상부한 왕중의 왕이 된 것이다.

 메네릭은 이탈리아를 내몰 적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신은 그 관대함으로 적을 쳐부수고, 제국을 넓이며,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나는 신의 영광으로 통치했다. 우리의 영토를 더럽히고 나의 통치를 혼란시킨 적은 바다를 건너 우리의 국경에 이르렀지만 그들은 이땅에 두더지처럼 묻힐 것이며, 나는 신의 도움으로 그들을 물리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이 선언에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에리트리아의 이탈리아 장관인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은 신속히 티그레의 봉기를 제압하고 에티오피아의 국경을 지나 망가샤의 군대를 추격했다. 그들은 아디그래트, 아도와, 마칼레등의 지역을 점령했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바라티에리는 영웅대접을 받았고, 국회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후에 로마로부터 에리트리아를 통치할 상당한 보조금을 받았다. "물질적 진보와 영적구원을 원하는 야만인들은 로마인의 근대화를 소리쳐 요구하고 있다." 라는 수상 크리스피의 에티오피아인에 대한 묘사로 고무된 바라티에리는 메네릭의 포획을 약속했다.


2. 제국의 역습

 바라티에리가 이탈리아 국민들과 정부의 아첨을 받는 동안 메네릭은 그의 영주들을 아디스 아바바로 소환했다. 군대가 집결했을 때 황제의 근위병 34,000명을 포함하여 그 수는 196,000명 정도였는데, 그중 절반은 근대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적에 대항하여 바라티에리는 25,000명의 잘 무장된 에리트리아 토착병(아스카리 여단)과 유럽에서 온 징집병의 혼성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바라티에리는 1895년 12월 7일 피에르토 토셀리 소령이 이끄는 1,300명의 에리트리아 부대가 암바알라기山의 협로에서 전멸될 때까지는 수의 불균형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에티오피아의 대군이 마칼레를 포위했다.

 1860년 시실리를 침공한 가디발디의 붉은셔츠단 출신이었던 바라티에리는 전장에서 늙은 몸이었다. 그는 곧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부대를 아디그래트로 철수시켜 참호를 구축하고 사태를 관망함으로써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원군없이 1,200명의 마칼레 요새의 이탈리아군은 메네릭이 요새의 안전을 보장하고 로마와 협상을 요구할 때까지 45일 동안 포위를 견뎠다. 군과 국가의 명예를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크리스티의 이탈리아 정부는 황제의 요구를 무시하고 마사와를 증강시키고 메네릭과의 전쟁에 2,000만 리라의 자금을 추가 할당하였다.

 아디그래트의 바라티에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에티오피아군을 그가 전개시킬 포와 부대에 상대가 되지 않는 훈련받지 않은 야만인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군은 그가 구축한 강력한 방어선에 대해 공격의 유혹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의 부대는 아도와를 점령했고 우회기동하여 아디그래트를 위협했다. 이탈리아군은 사우리아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새 방어선을 구축하여 에티오피아군의 진격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메네릭은 공격하지 않았고, 고착상태는 1896년 2월까지 계속 되었다.

 곧 양 진영의 보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메네릭은 이 전쟁을 잘 계획했고 그의 진격로를 따라서 병참선을 구축하였다. 에티오피아군의 보급상태는 초기에 양호한 편이었으나 전선의 고착상태가 지속되자 보급량이 급속히 줄었다. 2월 말이 되자 메네릭은 마지못해 이탈리아 군이 요새후방으로 물러난다면 그도 부대를 해체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탈리아 쪽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동물과 빈약한 철도망을 이용한 병참선으로 인해 바라티에리의 부대는 보급량을 반으로 줄였다. 그나마 3월 2일 이후에는 사우리아를 지키고 있는 임시방편도 허용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2월 25일까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국내의 정치적인 이유로 군사적 승리를 원했던 크리스피는 바라티에리에게 그의 무능력과 소심함으로 거의 탄핵직전이라는 전보를 띄운 것이다. 전보에 흔들린 바라티에리는 4명의 여단장을 소집하여 조언을 구하자 한명의 여단장이 공격을 제안하였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끝내 설득당해 공세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이탈리아군은 사우리아의 방어선에서 1896년 2월 29일 저녁에 공격하기로 하였다. (1896년은 윤년임)

 그러는 동안 메네릭은 그의 부대가 굶주림과 질병에 지쳐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날마다 줄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는 체념한 상태에서 부대를 해산할 것을 결심했다. 그러한 때에 그의 진영에 적의 부대가 진군하여 황제의 군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메네릭은 황후 타이투와 함께 병사들의 의복을 입고 사제들과 함께 기도를 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본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했고, 적과의 일전을 치루기를 원했다.

 바라타에리는 에티오피아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것은 알았으나 여전히 실제의 병력수보다 훨씬 적은 수라고 생각하였고 적을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어둠을 이용 17,700명과 56문의 포로 무장된 부대를 진군시켰다. 3월 1일 새벽이 되자, 바라티에리는 그의 부대가 에티오피아군의 진영이 내려다보다는 아도와의 고지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메네릭은 그의 부대가 괴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면공격하거나 후퇴해야되는 양자택일의 결정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그의 전략개념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으나 바라티에리와 그의 군대는 시작부터 운이 좋지 않았다.


3. 이탈리아군의 혼란


 바라티에리는 4개의 여단이 각각의 길을 따라 새벽이 되기 전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02:30분이 되자 바라티에리는 진군을 개시하였으나 곧 장애물을 맞게 되었다. 각 여단은 진군이 시작되자 그들은 곧 깎아지는 벼랑과 험한 협곡등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탈리아인들이 조잡하게 스케치한 지도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격의 좌익을 맡은 4,000명의 아스카리(에리트리아인으로 구성)여단의 지휘관인 마테오 알베르토네 준장은 어둠속에서 혼란을 일으켜 중앙을 맡은 아리몬디 준장의 유럽여단의 공격로로 들어서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리몬디의 부대는 혼란을 일으켜 정지해 버렸고, 04:00가 될 때까지 수습하지 못했다.

 바라티에리의 공세 중앙이 정지해 버렸지만 알베르토네의 주공과 우익을 맡은 다보르미다 준장의 부대는 후위에서의 혼란을 모른채 계속 진군하였다. 알베르토네는 곧 공격목표인 키다네 메레트山으로 생각하는 곳에 이르렀다. 그가 곧 멈추었을 때 길잡이 에티오피아인들이 키다네 메레트山은 4.5마일 더 이동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아리몬디 여단은 여전히 그의 후방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지만 전혀 알지 못한채 알베르토네는 아리몬디 여단이 전방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고 그 좌익은 더 멀리 진격하여 접촉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더 지체함 없이 알베르토네는 그의 여단에 진격을 명령하여 06:00에 아스카리 여단은 에티오피아군과 조우할 때까지 2.5마일을 더 진군하였다.

 이어지는 어둠과 짙은 아침 안개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짙게 가리웠지만 알베르토네의 느린 기동은 곧 눈에 띄었다. 07:45이 되자 바라티에리는 다보르미다에게 군의 중앙을 지원할 수 있게끔 우측으로 우회기동을 지시하였다. 몇가지 이유로 다보르미다의 여단은 우측 우회기동을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중앙에 2마일의 간격이 발생하게 되었다. 다보르미다의 기동에는 다행히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진 않았지만 발생한 간격은 하라의 토후인 마코넨과 30,000명의 전사들에게 돌진을 허용하여 서전을 장식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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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와 전투 전개도>


 산꼭대기와 좁은 협곡으로부터 녹, 적, 등색의 깃발과 구리와 금으로 만든 예수상이 바다를 이루고 빛나는 투구를 쓰고 염색한 머리장식과 사자갈기로 치장한 방패를 든 에티오피아군이 물밀 듯 쏟아졌다. 메네릭의 군대는 82,000명의 소총과 칼로 무장한 병사들과 20,000명의 창병, 오로모(지명)의 난폭한 8,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능숙하게 운용을 하지는 못했지만 40문의 산포가 키다네 메레트山에 포진해 있었다. 토후 테클라 헤이마노트가 우익을 알루라가 좌익을 마코넨과 망가샤가 정면을 맡았다. 메네릭은 25,000명의 근위병과 정예기병을 황후 타이투와 3,000명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을 예비대로 남겨 놓았다.

 잘 무장된 에티오피아군은 여전히 前근대적인 모습이여서 적을 보면 모든 훈련은 잊는 듯 했다. 유럽인들의 눈에는 그들의 공격은 마치 "아찔한 물길의 인간홍수"와 같았다. 애국심과 종교적 열의로 무장한 에티오피아 전사들은 1887년 도갈리 전투의 생존자인 이탈리아 장교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미친사람과 같았다. 전통적으로 에티오피아군은 기회를 포착하면 적을 우회기동하여 포위섬멸하는 전술을 선호했는데 이 고립된 이탈리아 여단들은 그들에게 딱 좋은 먹이감이었던 것이다.

 08:15 안개가 사라지자 에티오피아군으로 뒤덮인 산과 계곡이 드러났다. 이탈리아군은 강력한 화력으로 에티오피아군을 교착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이를 통해 탈출을 기도하였다. 순식간에 많은 병사들을 잃은 메네릭은 퇴각을 명령하려 했으나 그의 황후 타이투와 마니샤왕이 그를 간신히 설득하여 25,000명의 황실근위대를 추가로 투입하였다. 이 예비대의 투입은 결정적이었다.


4. 붕괴되는 이탈리아군

 08:30이 되자 알베르토네 여단은 2시간이상을 잘 견뎠지만 지원요청에 대한 답신이 없자 곧 붕괴되었다. 이미 여단의 장교들의 대부분은 테클라 헤이마노트의 기병대에 거의 전사하였고, 알베르토네도 포로가 되었다. 사방에서 끝없이 몰려드는 흉폭한 적들의 공격을 받은 아스카리 여단은 전투를 포기해 버렸다. 그들은 2마일 정도 후방의 아리몬디 여단이 있는 벨라山으로 달아나 버렸다.

 아리몬디의 포병은 아스카리 여단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사격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스카리 여단의 퇴주로에 에티오피아군이 섞여 공격해 오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사격은 너무 늦게 개시되었고 중앙의 보병과 포병은 곧 총검을 휘두르는 에티오피아군을 맞아야 했다. 아리몬디 여단은 필사적으로 싸워 혈로에서 벗어났다.

 09:15 바라티에리는 엘리나 준장의 예비여단과 함께 상황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이동중이었다. 그는 여전히 다보르미다 여단의 실제위치를 모르고 있는 상태였으며, 아리몬디를 지원하라는 그의 명령을 이행중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에티오피아군은 전위에 소총병을 후위에 창검을 가진 부대를 배치하여 아리몬디 여단에 대해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수백명의 에티오피아군을 쓰러뜨렸으나 그들의 공세를 저지할 수 없었다. 10:00가 되자 벨라山은 메네릭의 손에 떨어졌고 이는 아리몬디 여단에게 치명적이었다. 2개의 저격중대가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10:15이 되자 갈리아노 중령이 이끄는 3대대(원주민으로 구성)가 여단방어선 좌익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군의 함성에 이탈리아군의 사격이 묻힐 정도였으나 그들은 1시간 반정도 더 버티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위치가 더 불안해 지자 바라티에리는 퇴각을 명령했다. 그러는 와중에 아리몬디 준장과 갈리아노 중령은 전사했다.

 무자비한 적을 앞에 두고 후퇴하는 것은 많은 훈련, 담력, 리더십이 요구되는 매우 위험한 모험이다. 그러나 바라티에리의 부대는 이러한 미덕이 없음이 곧 명백해 졌다. 얼마되지 않아 여단은 오합지졸처럼 뿔뿔히 흩어졌고 부상병과 포 그리고 무수한 무기를 방치한채 사우리아로 달아났다. "비바 이탈리아"를 외치던 바라티에리는 그럭저럭 알피니와 베르살리에리(부대명)의 일부를 끌어모아 방어진을 구축했으나 공황상태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오가 되자 에티오피아군은 진군중인 이탈리아의 3개여단중 2개여단을 격파한 것이 드러났다.

 지난 2월 28일 바라티에리 장군이 여단장들과의 회의에서 후퇴를 논의했을 때 다보르미다 준장은 그런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호언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자신이 몇시간 후에 알베르토네와 아리몬디의 뒤를 잊는 비참한 결과를 맡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벨라山의 북서향으로 2마일정도 지나면 마리암 사비투라는 폭 800야드에 길이가 2마일정도가 되는 협곡이 있었다. 다보르미다 여단은 그곳에서 많은 수의 에티오피아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4:00가 되자 협곡의 양방향으로부터 에티오피아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적의 수는 끝이 없었고 격렬하게 공격해 왔다. 벨라山에서의 참패와는 달리 다보르미다 여단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였다. 암석과 참호에 몸을 숨기고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노력하였다. 포병들은 에티오피아군의 창검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포를 지켰고, 보병들은 전사할 때까지 자신의 위치를 떠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에티오피아군은 적을 완전히 섬멸할 때까지 싸워왔다. 토후 미칼리의 오로모기병대는 이탈리아군의 행렬을 휩쓸며 마음껏 적을 베었다. 다보르미다는 어떻게 전사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수천명의 주검과 함께 협곡에서 발견되었다.


5. 승리의 대가

 아도와 전투의 대가는 매우 컸다. 이탈리아 장교 289명, 유럽병 2,918명, 에리트리아인 2,000명이 전사하였고 또한 유럽병 954명 실종, 이탈리아인 470명, 에리트리아 958명이 부상당했다. 700명의 이탈리아인과 1,800명의 에리트리아인은 포로가 되었다. 그중 이탈리아인 70명과 에리트리아인 230명은 메네릭이 그들을 발견하고 멈추게 할 때까지 고문으로 인해 죽었다. 춥고 습한 고산지대의 아디스 아바바로의 이동후에 포로들의 대부분은 1,000만 리라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날 때까지 수개월동안 붙잡혀 있었다.

 800명의 아스카리 포로들은 전통적인 배신자에 대한 처형으로 오른손과 왼발이 절단되었다. 많은 인명손실 뿐만 아니라 바라티에리는 11,000정의 소총과 56문의 포를 모두 잃었고 후퇴하는 동안 티그레인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불과 수개월전에 이탈리아인들에게 칭송받던 바라티에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정부는 비밀리에 그를 해임하고 후임자를 급파하였다. 그러나 패전의 후폭풍은 정치적인 측면이 더 컸다. 로마로 들려온 패전소식에 성난 국민들은 모든 도시들의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의 식민정책의 실패로 크리스피 수상과 내각은 총 사퇴해야 했다.
 
 아도와에서 거의 7,000명의 병사가 전사하였고, 10,000명이 부상당했다. 에리트리아를 노린 메네릭은 이탈리아와의 국경으로 병력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진군하진 않았다.

 역사가들은 왜 그가 더 이상 이탈리아를 공격하지 않았는지 논의해 왔다. 기병대의 많은 손실과 황야에서의 계속되는 전투로 전력이 약화되어 그렇다는 설도 있고, 메네릭의 봉건영주의 부대가 농번기가 다가옴에 따라 귀향을 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제 그의 동기는 더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식민정책상 에리트리아는 최근에 획득한 식민지이고 그들이 그곳을 잃는다면 모든 자원을 투입해서라도 응전하리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의 결정에 어떠한 의도가 있었던지 간에 그는 로마에 2건의 요구를 전달했는데 하나는 Ucialli조약의 파기와 에티오피아 독립의 무조건적인 승인이었다.

 아도와 전투후 몇 달동안 메네릭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유럽각국에서 사절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이탈리아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맞아들였다. 프랑스에는 프랑스령 소말리아를 인정하는 대신에 나일강 북쪽의 적에 대항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고, 영국에는 수단의 이슬람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요청하는 대신에 영국령 소말리아를 할양하였다.

 1896년 10월 26일, 로마는 전쟁의 종결과 메네릭의 모든 조건을 수용하는 아디스 아바바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남부 카파와 갈라지방을 정벌하여 그의 영토와 부를 늘릴 수 있었다.

 아도와 전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자존심이 되었다. 아이티와 황금해안, 남아프리카와 미국의 흑인들은 메네릭의 승리를 칭송하였다. 아도와 전투를 통해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벗어났고 또한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며, 세계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3월 1일은 1896년을 기리기 위한 에티오피아의 국경일이 되었다.

출처-(밀리터리히스토리 Magazine , 그레그 브레이크저)
       -http://www.mediamob.co.kr/widormaker/blog.aspx?id=3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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