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12일차, 산토도밍고에서 벨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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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다지 길진 않은 거리다. 약 22키로미터. 부담없이 우중충한 하늘아래를 걷기 시작해본다.
오늘의 첫번째 마을은 그라뇽이다. 우리는 그라뇽에서 오래 쉬어갈 계획이다. 왜냐면 (사실 지난편에 썼어야 했는데 깜빡 잊었다.) 산토도밍고에서 준코와는 잠시 헤어지고 벨로라도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는데. 일본에서는 그라뇽의 특별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알베르게가 아주 유명해서 준코는 그곳을 꼭 가고 싶었고, 우리는 30키로미터가 넘어가는 그라뇽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하여 준코에게 그럼 우리 잠깐만 찢어지자 라고 했었는데, 준코는 우리와 꼭 함께 가고 싶었던 거다. 일본사람의 성격상 가자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일정을 조율하며 계속 그라뇽 이야기를 꺼내곤 했었는데 우리가 계속 산토도밍고 까지만 가겠다는 의사를 보이니 전날 저녁 술자리에서 '깊게 생각해 보았는데, 가고 싶었던 그라뇽에 혼자 가서 묵는것과, 너희들과 함께 산토도밍고에서 묵는것 중, 어떤게 내가 진정 원하고 더 행복한 일일까 비교해 보았을때, 너희와 산토도밍고 까지만 가는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함께 산토도밍고까지만 가겠다.' 라고 얘기하고 그라뇽을 포기한 것이다. 준코의 말에 감동한 우리는 그럼 아침에 그라뇽에서 충분히 구경할 수 있게 긴 시간동안 휴식하자 라고 말했고, 준코는 그 말이 또 감격적 이었는지 눈물을 보이며 고맙다고 했다. 나라도 다른데다가, 긴 시간을 함께한건 아니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것 만큼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라뇽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비가 굉장히 많이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침 시간이라 대부분의 문은 닫혀있는 상황. 그리고 나중에 깨달았지만, 준코가 원한건 그라뇽의 특별한 알베르게 에서의 특별한 저녁식사였기 때문에, 사실 아침에 그라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아쉽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라뇽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제시를 비롯한 호주 그룹도 우리가 있던 곳에 들어왔다. 제시와는 생일파티 이후로 정이 많이 들어 볼때마다 꽉 껴안는 사이가 되었다. 국가와 인종은 우정을 쌓는데에 아무런 지장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순례길에선.
그러고 보면 친구들이랑 사진을 많이 찍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게 너무 아쉽다. 풍경사진만 남아있는 내 사진첩과, 지난날의 내가 괜히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한가지 더 쓰고 싶은건, 순례길 위에서 한국인들 우르르 몰려다닌다고 보기 안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순례길 초엔 다 지들끼리 몰려다닌다. 호주인은 호주인끼리, 프랑스인은 프랑스인끼리.. 언어도 문화도 다른데 편한 사람들끼리 모이는건 당연한게 아닌가. 알베르게에서도 한국인이 한국음식을 하는건 꼴불견이 절대 아니다. 호주애들은 호주음식 해먹고, 프랑스애들은 프랑스 음식 해먹고, 이태리애들은 이태리 음식 해먹는다. 물론 나도 한국이 최고! 두유노우 김치? 외국음식 맛없어! 라는둥 외국인들에게 강요를 하는것은 싫어한다.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경험해보고, 존중해야 하는것은 맞다.하지만, 문화사대주의는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라뇽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우의를 쓰고 비를 맞으며 다시 길을 나선다.
까미노 곳곳에는 이렇게 순례자들을 위한 큰 지도가 마련되어 있다.
벨로라도에 가까워질 수록 날은 맑아져 갔지만, 이날의 길은 끝이 안보이는 직진만 있었기에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힘들었었다.
맑아진 하늘, 곧 벨로라도에 도착한다.
벨로라도에 도착하여 성당 옆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았다. 기부제 알베르게로, 분위기가 고즈넉하며 굉장히 친절한 주인아저씨가 있던, 아주 포근한 알베르게 였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마을 구경을 나서본다.
성당 안에 있던 특이한 동상.
마을은 시에스타 시간이여서 굉장히 한적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던 중, 나와 이름이 같은 호주 다니엘과 그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미안해 ㅠ_ㅠ 이름을 까먹었어...) 우리는 함께 바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잡고 술을 한잔 하기로 한다.
다니엘의 여자친구는 심한 감기가 걸려있었고, 때문에 위스키를 마시고 싶어했는데, 다니엘이 잘 못알아 듣고 와인을 사와서 두명은 토닥토닥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한참을 말 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시에스타 시간이 끝나, 슈퍼마켓이 문을 열었고 장을 봐 알베르게에 돌아왔다.
알베르게 앞의 작은 개울.
요리를 만들기 전에, 윤화누나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안남았으므로 헤어지기 전에 그림을 그렸다.
윤화누나와는 일정이 달라 브루고스에서 헤어지게 된다.
오늘의 메뉴는 샐러드와 볶음밥,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맛있엇던 찌개이다. 우리 외에 아일랜드 그룹도 있었는데, 서로 요리를 나누어 먹었다. 재밌는 시간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쪽 테이블에 옆 성당의 신부님과 그의 일행들이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것을 보고 친구중 한명이 안수기도를 받고 싶다고 하여,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아는 내가 가서 부탁을 드렸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셔서 나에게 먼저 기도를 해주셔서, 얼떨결에 종교가 없는 나도 안수기도를 받게 되었다. 살면서 종교랑은 큰 인연이 없던 나였지만, 마음이 차분해지며 뭔가 감동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때쯤 부터 나는 종교는 없으나 한 사람의 순례자로써, 나름의 감사기도를 드리며 걸었던것 같다.
이날도 역시 행복하다 행복하다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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