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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동방] 푸른 달_4앱에서 작성

무나강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03 19: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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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편

3편



메이드장이 항의했다.

"말도 안됩니다! 그런식으로 우리 가족들을 전부 내다 버릴 수 없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었고, 눈은 노골적인 악의를 드러냈다.
레밀리아는 변명하듯이 조금 물러섰다.

"물론 저도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장 최선의 선택지가 그것이라는 뜻일 뿐이에요.
어떻든 결정은 주인어른이 내리시는 거니까요."

메이드장은 여전히 공격적인 태도로, 주인을 힐끗 봤다.
주인은 두손을 모으고 고심하고 있는 듯 했다.

"만약... 그런식으로 모두 나가버리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거죠? 그리고 우리 저택은 어떻게 되는거고?"

그 질문은 항의라기보다는 단순히 의견을 묻는 질문이었다.

"인간마을을 비롯한 환상향 전역에서 각 유력자들이 대책을 세울 것입니다.
거기에는 환자의 격리와 치료소도 있을 거구요. 물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기의 사정보다는 나을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주인어른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그동안 환자를 지켰고 또 간호했기 때문이죠.
노력은 충분했고, 한계는 가깝습니다.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틀린말은 아니었다. 메이드장도, 주인도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메이드장이 걱정하던 사용인들도 어쩌면 여기보다 밖에서 더 나은 생활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럼... 이 저택은요? 사용인이 대거 줄어들면 유지가 힘들텐데... 크흠!"

주인이 말을 마치다가 짧게 기침했다.
레밀리아가 답했다.

"확진자와 '확진 의심자'를 전부 내보낼 경우, 남은 인원이 얼마일지는 모르나
어쩌면 이 저택을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저택 자체가 거주민에 비해서 너무 큰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저택의 구역 몇개를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심각한건 아니고,
그냥 난방을 하지 않고 청소 빈도를 현저히 줄이며, 사용 자체를 안하는 것 뿐입니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치명적이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밀리아가 이쯤에서 말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 각자가 가진 사용인만으로도 충분할거라 생각합니다.
더 심각해지면 우리들 스스로가 일을 할수도 있죠.
오늘 보신 것처럼, 유키 아가씨가 메이드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낸 것처럼요."

레밀리아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술술 얘기했다.
주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메이드장이 주인의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이보세요! 지금 선을 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유키 아가씨에게 사용인이 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다른 그 누구가 메이드복을 입어도, 유키아가씨만큼은 절대로 안됩니다!"

이번에는 레밀리아도 숙이지 않고 호전적으로 응수했다.

"정신차려! 난 유키 아가씨를 예로 든 것 뿐,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다고 했어!
그럼 너는 어떤 해결책을 낼건데? 가만히 듣다가 반대만 하는 것밖에는 못해?
그리고, 유키 아가씨가 메이드 복을 입을지 말지 그걸 왜 네가 정하지?
유키 아가씨의 의견은 아예 무시하는 거야?!"

"모두 그만!"

치열한 말싸움에 주인이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만! 지금은 그럴... 크흡! 콜록, 콜록!
커헉!"

중재하려는 주인은 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거친 기침을 뱉어냈고,
그의 책상 위로 거뭇한 토혈이 넓게 흩뿌려졌다.
주인의 동공이 풀렸고, 입가에선 붉은 피가 섞인 타액이 흘러내려 수염을 적셨다.

"주인님!!!"

"주인어른!"

메이드장과 레밀리아가 거의 동시에 주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뒤에있던 메이드장이 고꾸라지려는 주인을 부축했고 레밀리아가 덜컹이는 머리를 받쳤다.
파츄리도 깜짝 놀라 의자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있었던 날카로운 신경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일사분란한 소란스러움이 서재 안을 가득 채웠다.
레밀리아가 파츄리에게 외쳤다.

"침실로 옮겨야 해! 메이링을 불러와줘! 지금 당장!"

"으, 응! 알았어!"

당황하던 파츄리는 대답하고 재빨리 서재의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녀의 앞에 있던건
넘쳐흐르려는 눈물을 글썽인채 움직이지 못하는 유키와 그녀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플랑이었다.

파츄리는 잠시 허둥지둥 하다가 일단 자신이 맡은 바를 수행하기 위해 그들 사이로 지나갔다.
레밀리아가 정신없이 주인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피를 막는동안,
메이드장은 유키와 플랑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소리쳤다.

"아가씨! 보면 안돼요!"

하지만 유키는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했고,
메이드장은 자꾸만 앞으로, 뒤로 쓰러지려는 주인을 부축하느라 문을 닫을 수 없었다.
그저 힘들게 플랑에게 눈짓할 뿐이었고, 플랑은 그걸 보고 알아들었는지, 유키의 얼굴을 자신의 품으로 감쌌다.

플랑은 자신의 가슴이 뜨겁게 젖어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기서, 정신을 잃은채 피를 토하는 주인 할아버지와, 그를 부축하려 애쓰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 메이드장을 보며,
자신의 눈시울도 덩달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메이링이 왔고, 메이링은 그 요괴의 괴력으로 가볍게, 그리고 안전하게 주인을 안아
주인의 방의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주인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기에, 메이드장은 그의 고개를 옆으로 뉩히고 입가에 부드러운 쟁반과 수건을 올려놨다.
레밀리아는 메이링을 시켜 에이린을 부르게 했고,
파츄리는 때마침 소악마가 가져온 얼음을 주인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주인은 이제 거의 의식을 잃었다.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귀는 빨개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타액과 핏덩이로 얼룩진 입술에서는 희미한 신음 소리만 새어나올 뿐이었다.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메이드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돌아가는 에이린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 일이 많았고 생각할 것은 더 많았다.
닥친 문제들은 너무 무거웠다.

그녀는 이제 무엇을 해야할지, 천천히 머리 속을 정리했다.
그래, 일단 에이린 님의 진료내용을 아가씨에게 알려드리는게 의무였다.
멀어져가는 에이린을 뒤로 하고 저택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유키 아가씨가 보이지 않았다. 플랑도 모르는 듯 했다.
걱정이 됐다.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레밀리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레밀리아에 대해, 이제는 분명한 경계와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레밀리아와 유키 아가씨가 같이 있는 상황 만큼은 막아야 한다.



레밀리아가 거울을 옆으로 밀자, 역시나 유키는 홀로 쪼그려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레밀리아는 말없이 들어와 거울을 닫고 유키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유키의 부들거리는 흐느낌과 거기서 느껴지는 두려움이 조막만한 비밀공간을 가득 채웠다.

레밀리아가 천천히 손을 올려 유키의 어깨 위에 살며시 얹었다.
그럼에도 어깨와 등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고, 등 위로 늘어진 긴 은발도 그에따라 흔들렸다.
레밀리아는 유키를 지긋이 보며 말했다.

"방금, 에이린 씨가 다녀왔어.
할아버님의 진료를 봐주시기 위해."

유키는 눈물로 범벅이 된 가냘픈 얼굴을 천천히, 레밀리아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레미는 계속 얘기했다.

"아직 전염병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데.
그렇다고 전염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보다 정확히는, 아예 무슨 병인지조차 감이 안온다고 하시더라.
평범한 기존의 병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해."

그 말에 유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레밀리아는 더욱 다가가 건너편 어깨를 감쌌다.
이제 유키는 반쯤, 레밀리아의 품 속에 들어갔다.
레밀리아가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유키. 이건 분명 유키에게 괴로운 사실이겠지.
하지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야.
지금으로썬 어찌될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혹시라도 일이 생긴다면..."

그 말에 유키의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도 더욱 커져갔다.
레밀리아는 아예 껴안듯이, 유키를 자신의 품 속에 묻고는, 계속 말했다.

"일이 생기면... 유키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야 해.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이 저택을 이끌어가야 해."

유키가 레밀리아의 품 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저는 못해요.
할아버지를 잃고 싶지도 않고, 이 저택을 이끌어나갈 자신도 없어요."

레밀리아가 한층 더 상냥해진 목소리로 유키를 보듬었다.

"유키. 너는 할 수 있어.
괜찮아. 모두가 너를 따르고 존중할거야.
우리 저택은 또 다른 결정을 필요로 해.
너의 결정을."

유키가 고개를 들고 눈물에 잠긴 눈동자로 레밀리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다가... 내가 잘못하면요?
혹시라도... 힘을 다해서 견디지 못하게 되면요?"

"그럴때는, 내가 뒤에서 널 잡아줄게.
그리고 너의 짐을 내가 짊어질게."

레밀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유키의 이마에 키스했다.



레밀리아는 조용히 비밀공간을 나와 거울을 다시 밀어 닫았다.
유키는 조금 더 있다가 나가겠다고 했다.
레밀리아는 거울 바로 옆의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파츄리가 말없이 창문 밖을 보고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투여한거야?"

레밀리아가 물었다.

"적당량."

파츄리가 뒤돌아보지도 안고 대답했다.

"적당량이 얼마인데? 저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처음엔 원래 그래."

"어쨌거나, 너무 빠르면 안돼. 알겠지?
내 일이 끝나기 전에 그쪽이 먼저 끝나면 전부 그르칠지도 몰라."

"그래. 처음에만 좀 빠르고 이후엔 천천히 죽어갈거야.
너야말로, 그 쪽은 어때? 너무 느린거 아냐?"

파츄리가 몸을 돌려 레미를 보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그리고 운명은 화학이랑은 달라.
느릴 수록 더 분명해지지."

레미는 그렇게 말하며 유키의 눈물로 젖은 옷을 벗었다.





#
서재 안, 책상은 어느새 피가 말끔히 닦여있었고 붉게 젖은 양탄자는 아예 없어졌다.
주인의 온기가 오래전에 사라진 의자에 유키가 앉음으로, 회의는 재개되었다.

구성은 전과 같아서 레밀리아와 파츄리가 책상 건너편 소파에 앉고 메이드장이 유키 뒤에 조용히 서있었다.
분위기는 전보다 부드러워졌다. 아니, 낮게 깔렸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저도 밖에서 들었습니다."

유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태도였으나 한편으론
침울하고 어두운 태도로도 느껴졌다.

"문제는 두 가지. 내보낸 사용인과, 텅 빈 저택이죠.
먼저 사용인 말인데... 저는 레밀리아 씨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메이드장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유키의 목소리는 너무나 무거워서 어조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저도 부분적으로는 동의합니다.
다만 일이 끝난 후 모두가 다시 돌아오는걸 보장해주셨으면 합니다."

"레밀리아 씨는 동의 하나요."

유키가 빛을 잃은 눈으로 레밀리아를 쳐다봤다.

"네, 물론입니다. 그건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럼 두번째 문제입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제가 메이드복을 입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이어졌던데, 맞나요."

"그건..."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주요한 의제는 아닙니다."

메이드장이 망설이자 레밀리아가 재빨리 말했다.
그러자 메이드장도 한 마디 했다.

"하지만 아가씨가 메이드 복을 입을 가능성 자체를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아가씨는 우리 저택의 심장입니다."

유키는 아무 말도 없었다.
공허한 눈은 낮게 내리깔았고, 안색은 창백했다.
서재 전체가 그녀의 무거운 침묵에 짓눌리는 듯 했다.

레밀리아가 말했다.

"맞습니다. 유키 아가씨는 씨는 심장이죠.
이 저택은 유키 아가씨에 의해서만 온전할 수 있고,
유키 아가씨가 없으면 이 저택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키 아가씨가 심장이라면, 뇌는 누구입니까?"

레밀리아가 메이드장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주인어른도 쓰러진 마당에, 현재 이 저택을 좌지우지 하는 건 메이드장 아닌가요?"

"그게 무슨...!
지금 그런걸로 싸울 때가 아닙니다."

메이드장이 반박하려다 어두운 표정의 유키를 힐끗 보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저 내가 하려는 말은, 현 상황에서 이 저택을 가장 잘 파악하고,
이 저택의 사용인들을 가장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메이드장인데,
지금 그 메이드장이 아가씨가 메이드를 도우려는 걸 막는다는 것입니다.

뭔가 숨기고 있는게 있나요? '우리 주인'들이 모르는 사용인의 무언가가 있나요?"

"말을... 신중히 하는게... 좋을겁니다..."

메이드장은 큰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화를 참느라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제 말이 심했군요.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유키 아가씨가 메이드 복을 입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아예 메이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임시적으로 돕는 것 뿐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유키 아가씨의 의견은 전혀 참고하지 않은걸로 보아
단지 사용인으로써의 실권을 지키고 싶은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용히 시작된 토론은 어느새 날이 선 재판장을 방불케 했다.

메이드장은 우두커니 서서 이빨을 꽉 깨무느라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의 주먹쥔 손이 부들 부들 떨렸다.
유키는 그걸 보고는 레밀리아에게 조용히 말했다.

"레밀리아 씨, 그런 근거없는 공격적 언행은 삼가주세요."

"다시한번, 죄송합니다. 말이 지나쳤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유키 아가씨의 의견이니까요."

레밀리아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드장은 겨우 숨을 고르며 유키 쪽에게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아가씨, 저는 결코 그러려던게 아니라..."

"물론, 알아요.
절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유키는 처음으로 작게 미소지었다. 메이드장은 조금 안심이 되어 다시 허리를 폈다.

"...그래서, 아가씨.
결론을 내리셨나요?
아직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아뇨, 기다리실 필요 없습니다."

유키가 말했다.

"주요한 의제에서 벗어난, 제가 입을 옷부터 말씀드리자면,
메이드 복을 입되, 정장도 입을 것입니다.

메이드장 말처럼 저는 이 저택을 지켜야 하고 그렇기에 주인으로써의 역할이 있지만,
동시에 레밀리아 씨 말대로 저는 사용인의 입장과 정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사용인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유키는 이쯤에서 한 박자 쉬었다.
메이드장은 묵묵히 듣고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제가 두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겠죠.
아니 저는 아직 한가지 일도 완벽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메이드장은 지금처럼 혹은 지금 이상으로, 저택을 관리해주세요.
그리고 레밀리아 씨. 레밀리아 씨는 저를 도와 저택의 내정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아가씨!"

메이드장이 황급히 외쳤으나 유키는 한쪽 손을 들어 그녀의 발언을 막았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이상입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저는 이제 좀 쉬고 싶군요.
파츄리 씨, 지금 바로 할아버님을 봐주시고, 혹시 깨어나시면 즉시 알려주세요."

"아, 네."

파츄리는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곧 문을 열고 나갔다.
유키도 조용히 일어나 서재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서재 안에는 당혹스러움과 승리감, 무언가가 끝났다는 사실과
또 무언가가 시작될거라는 예감이 한데 뒤섞여 둘을 감쌌다.





#
"하아..."

메이드장의 주방 한구석에 쪼그려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제 막 오늘이 된 야밤의 주방엔 언제나 아무도 없기때문에
견습 메이드일 때부터 고민있으면 자주 여기서 한숨을 쉬곤 했다.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착잡했다.
주인어른은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이름도 모르는 병으로 중태에 빠지셨고
가족이라 생각했던 동거인은 날이선 채 자신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더군다나 아가씨는 충격으로 아예 사람이 변한 듯 하더니,
자신을 공격한 상대의 편을 들어주기까지...

일이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아..."

끼이익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는데, 주방 문이 열렸다.
메이드장은 반사적으로 입을 막고는 갑작스런 방문자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불은 다 꺼져있었고, 밖도 깊은 밤이기에
창을 통해 스며드는 약간의 푸르스름한 달빛을 제외하면 부엌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미지의 인물은 천천히 메이드장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는데,
메이드장은 얼굴을 보기도 전에 발소리로 누군지 알아챘다.

"플랑 아가씨!"

플랑은 이렇게 빨리 자신을 알아차릴 것이라곤 생각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그리곤 다시 걸어가 옆에, 그러나 거리를 조금 두고, 앉았다.

"플랑 아가씨, 왠일이에요? 또 간식 먹고 싶어졌어요?"

"아, 아니... 혹시 언니가 있을까 해서..."

플랑이 그렇게 말하자 메이드장은 그날 처음으로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 저 보려고 온거에요?"

"응..."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아니, 딱히..."

기운찬 메이드장의 목소리에 비해 플랑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고,
그런 애매모호한 얼머부림을 끝으로 플랑은 아무 얘기도 안했다.
메이드장 또한, 플랑의 무언을 존중하며 말없이 플랑 쪽을 응시할 뿐이었다.

오랜시간 어둠속에 있어서 눈이 적응했기에, 또 푸른 달빛이 미세하게나마 부엌 안으로 들어왔기에,
메이드장은, 고개를 떨군채 조용히 허공만 처다보는 플랑을 볼 수 있었다.
플랑의 금발이 푸르스름한 빛에 닿자 잿빛으로 물들여졌고, 메이드장은, 역시 플랑 아가씨는 햇빛 아래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플랑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톤은 여전히 낮았다.
메이드장은 조금 놀랐지만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뭐가요?"

"언니가... 그런거...
문 밖에서 듣고 있었어..."

플랑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아... 음..."

메이드장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별로 상관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많이 상관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걸 플랑 아가씨가 신경쓸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메이드장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플랑은 미안해했다.
오늘 일 뿐 아니라 과거의 일도, 그리고 미래의 일까지도.
그 모든 걸 생각하면 이런 사과는 너무 작아서 아예 안했다고 해도 좋을정도였다.

그걸 알리가 없는 메이드장은, 플랑의 그 애틋한 마음에 감동하여,
또 한편으로는 더 많은 위안을 느끼기 위해, 플랑을 껴안고는 말했다.

"플랑 아가씨. 전에도 말했지만...
플랑 아가씨는 이 저택에서 유일한 제 안식처에요.
플랑 아가씨의 언니가 저랑 사이가 안좋고 설령 적이 된다 하더라도,
플랑 아가씨와 저는 친구에요.
그리고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메이드장은 그렇게 말하며 플랑을 안심시켰다.
플랑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메이드장의 품에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메이드장은 그런 플랑을 꼬옥 감싸줬다.

그녀가 그렇게 따뜻하게 안아줄수록, 플랑은 괴로워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선택을 해야했다.
그러니까 -이대로 레밀리아의 손을 벗어나 메이드장과 함께 떠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키워주고,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고,
서로의 온기로 서로를 감싸주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그런 미래를 생각하니 플랑의 가슴 한구석이 고양되는 듯 했다.

플랑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언니는... 이 저택을 떠날 생각 한번이라도 해봤어?"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거에요?
하하하 제가 떠난다니...
주인님도 쓰러진 상황에서 이 저택을 지킬 건 저 뿐이에요."

"하지만 이제 사용인들도 다 나간다며...
굳이 저택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아?"

"음... 만약, 만약에 주인님이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유키 아가씨가 있으니까요.
이 저택은 유키 아가씨의 것이고, 제게 유키 아가씨를 지킬 의무가 있는 이상,
저에겐 이 저택을 지킬 의무 또한 있어요."

메이드장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미소가 플랑에겐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설령 유키에 대한 마음이 그저 의무일 뿐이라 해도, 설령 플랑이 더 중요하다고 해도,
그녀가 이 저주가 내려질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분명했다.
진실을 얘기하면 그녀는 납득해줄까? 아니 그전에 플랑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플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됐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이번에는 플랑쪽에서 메이드장의 품 속으로 들어갔다.
두 팔로 메이드장의 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딱 부숴지지 않을정도로만, 강하게.
그리고 메이드장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프, 플랑 아가씨?"

메이드장이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플랑은 말없이 그녀의 품속에서 흐느끼고만 있었다.

그 울음을 결코 이해 못한 메이드장은,
잿빛으로 빛나는 플랑의 금발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
다음날 아침, 주인이 의식을 차렸다.
진행이 너무 빨라졌다고 생각한 파츄리가 몰래 투여한 약 덕분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유키와 메이드장, 그리고 여타 사용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밀리아와 파츄리도 곁에서 그런 척을 했다.

저택의 주인이라는 짐이 너무 무거웠던 유키는 할아버지가 거의 안정을 찾자마자,
어제 토의한 안건에 대해 얘기했다.
조언을 듣고 싶었고, 가급적이면 자신을 다시 아가씨로 돌려보낼만한 결정을 해줬으면 했다.

뒤에서 듣고 있던 메이드장도 주인어른이 부디 이성적인 결론을 내주길, 내심 바라고있었다.
그러나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주인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유키가 메이드부터 시작하는 것은 잘한 일이다.
저택의 사정을 모르는 주인은 있을 수 없지... 크흡!
흠... 그러니까 메이드 복을 입는 것은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크흡, 레밀리아씨와 공통 내정은 무엇이냐...
주인이 두명이면 서로 싸움만 날 뿐이다... 하아...
레밀리아 씨는 식견이 있고... 능력이 있으니...
유키는 레밀리아 씨 아래에서 배우도록 크흡! 하거라...

레밀리아 씨... 유키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물론입니다. 주인어른."

레밀리아가 공손히 대답하자, 주인은 온 힘을 다 썼는지, 다시 잠들었다.
유키가 조용히 할아버지의 이불을 덮었다.

메이드장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믿었던 주인의 이성이 완전히 녹슬은 걸까, 병때문에 머리의 열이 너무 높아진걸까
아예 통째로 유키 아가씨와 이 저택을 레밀리아에게 갖다 바쳐버렸다.

그러나 뭐라 항의할 수가 없었다.
주인은 이미 잠들어버렸고, 위독한 주인 앞에서 싸울 수도 없었을 뿐더러,
유키 아가씨가 너무 자연스럽게, 아니 안도하면서까지 그 결단을 받아들였다.

뒤를 돌아보자 레밀리아가 산뜻한 미소로 자신을 보고있었다.

아무런 적의도, 경멸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였지만
메이드장은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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