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대회] 구원-2-

백합백문학과교수 · 2021.03.17 21:26:08

1편: https://m.dcinside.com/board/lilyfever/728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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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잠자리를 간단하게 정리한 후 바로 밖으로 나선다. L의 사무실이 있는 오피스텔의 내 방은 어디까지나 자는 용도로만 쓰이기 때문에 L이 들여놓은 책장 이외에는 침구밖에 들여 놓지 않았다. 그 오피스텔은 L의 소유로 되어 있는데, 그녀 밑에서 일하는 청부업자들과 일반 입주자들을 섞어서 추적을 어렵게 하고 만일의 경우 우리를 보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데, 사실은 그저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 누군가가 추적장치를 부착했을 것을 대비하여 그 건물에는 정해진 물건 이외의 것을 가지고 출입할 수 없게 해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잠 이외의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따로 원룸을 마련해 놨고, 표면적으로 나는 그 원룸에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 곳에서 교복으로 갈아 입고 학교에 간다.

책에서 읽은 것과는 달리 학교생활은 청춘의 장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전학이라는 형식으로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공부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학교생활은 고역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학교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무슨 책 읽어?”

그녀는 항상 방과 후에 도서실에 책을 읽으러 온다. 도서실은 저녁 6시까지 개방하지만 보통은 대출과 반납만 하기 때문에 5시에 가까워지면 도서실에 나와 그녀, 그리고 사서선생님만 남게 된다.

“이거?”

그녀는 책을 살짝 덮어 표지를 보여준다.

“내.... 최애는... 안경 영애?”

처음 들어 보는 제목이지만 그녀가 마음에 들어하는 책이라면 분명 내 마음에도 들 것이다.

“어떤 내용이야?”

“안경 캐릭터를 좋아하는 여주인공이 게임 속의 세계에 전생했는데 거기에서 안경 메이커 기업의 영애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야. 아무래도 2권에서는 안경 회사의 도산을 막으려는 안경 영애의 이야기가 진행될 거 같은데 2권은 누가 대출중이네....”

그렇게 말하고 낙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와중에 이제까지 존재감이 없어서 존재한다는 사실 조차 잊고 있었던 사서 선생님이 끼어들 듯 말했다.

“그럼 쌤은 교무실에서 일 좀 처리하고 퇴근할 테니까 문단속 하고 열쇠는 교무실에 갖다놔 줘.”

사서 선생님은 항상 5시면 우리에게 열쇠를 맡기고 쾨근 준비를 하신다. 소문에 따르면 체육 선생님(여자)와 함께 퇴근하기 위해 일부러 일찍 자리를 비우신다는 거 같다.

그렇게 사서 선생님이 나가시고 나자 도서실엔 적막만이 낮게 깔렸다. 가득 찬 침묵을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몸을 움직여 도서실 문을 잠그고 그녀의 앞에 있는 책상 위에 앉는다.

“반장, 이제 우리 둘밖에 없네.”

“오늘도..... 하는 거야?”

반장은 체념했다는 듯이 되새김질 하듯 이리저리 넘기던 책장을 완전히 덮고 눈을 감는다.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지만 그 입술은 언제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듯 내 혀의 움직임에 반응한다.

반장은 거절하지 않는다. 아니, 뇌에서 거절을 담당하는 부분이 제거된 것처럼 거절하는 능력 자체가 그녀에게는 없다. 처음 키스를 할 때 그것을 깨달았다. 원래 키스해 달라는 부탁은 반에서 겉돌던 나를 지겹게 따라다니던 반장을 떼어내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니까. 이 아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려고 할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어디 한 구석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자리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반장과 키스를 할 때마다 그 갈증은 이것만으로는 절대 자신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 말하듯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혀를 더욱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나를 채워 줄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는 듯이.

‘쾅!쾅!쾅!’

백합소설에 등장하는 눈치 없는 노말충처럼 끼어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사서쌤이 분명 도서실에 도서부원 있을 거라 했는데.”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내지 못 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곤란해 한다.

도서실에 아무도 없는 척을 할 수도 있겠지만, 도서실 열쇠가 아직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밖에 있는 애가 교무실로 돌아가 사서 선생님과 함께 돌아온다면 상황은 성가시게 된다. 여자 아이 둘이 밀실에 있는 상황 자체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난다면 나는 괜찮지만, 소심한 반장은 나에게서 멀어지려 할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나는 당황해서 문쪽을 응시하고 있는 반장을 뒤로 하고 도서실 문을 열었다.

“아 사람 있다.”

단발의 머리가 대략 내 가슴팍 정도에 올 정도의 작은 체구를 한 아이가 아직 볼살이 살짝 남아 있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올려다 보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다람쥐를 연상시킨다.

“저... 반납하러 왔는데, 혹시 제가 뭔가 방해한 건가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도서실 안을 엿보려고 했다. 어느샌가 반장은 내 뒤에 서서 설명할 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응. 섹스 중이었어. 이제 막 새 생명이 탄생하려던 순간인데 니가 방해했네.”

반장과 작은 여자애 둘 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어차피 이 정도로 강하게 나오면 대부분 농담으로 생각할 것이다.

“아.... 그... 죄송해요. 이거 반납처리해 주세요.”

그러고는 반장에게 책을 넘겨 준다.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곤란했을 것이다.

“아... 응 어라? 최애는 안경 영애 2권이네.”

그렇게 말하고는 즐겁다는 듯 도서부원 자리에 앉아 책에 있는 바코드를 스캔한다.

“총...수아? 특이한 이름이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이게 이름 문제인 건가......

반장은 안경 영애 2권을 수아라는 아이는 파우스트를 대출했다. 수아는 먼저 도서실에서 나갔고, 나도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반장을 방해하기 싫어 적당히 시간을 떼우다 함께 도서실에서 나왔다.

나와 반장은 교문으로 나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공유하고 있는 시간은, 공간은 방과후 6시까지의 도서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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