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죽었다. 조선을 위해 검을 휘둘렀던 영웅이, 앞장서 피를 뒤집어썼던 영웅이 죽었다.

필부에 대한 충정으로 죽었다. 아무것도 아닌 공시생의 명령에 목이 달아났다.
필부에 지나지 않는 왕이, 적정을 파악하는데 게으르고, 대책을 짜는데 안이해 죽었다.
장군이 뙤약볕 아래를 행군하는 동안, 왕이 응달에서 게을리 승전보나 기다렸다.
그러니 어찌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 한들, 제 목을 지킬 수 있었으랴.
나는 순간 현기증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오만으로 영웅이 죽었다. 원래 역사에서 스스로의 오만으로 죽었던 영웅이, 바뀐 역사에서 나의 오만으로 죽었다.
 
정예병 이만이 죽었다. 조선의 산야를 수호하던 이만 명이 죽어 사라졌다. 머나먼 북방에서, 차디찬 피를 뿌리던 용사들이 이번엔 남방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죽었다.
 
필부의 오만이 그렇게 했다. 나보다 가치 있는 자들을 덧없이 죽였다.
 
“전하!”
 
누군가 소리쳤다. 아득해오는 시야에 충정으로 가득 찬 눈이 들어왔다.
왕보다 위대한 신하가 나를 충정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과인이….”
 
오랜 버릇이 그 충정에 보답했다. 나는 간신히 왕으로서 답했다. 공시생 재석이 아니라, 조선의 왕으로서 그에게 답했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다. 이를….”
 
이항복은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입이 바싹 말라왔다. 진정으로 무릎 꿇어야 하는 자가 누군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오만하여 기군망상의 죄를 범하였나이다. 적정을 파악하는데 게을렀으며, 대책을 짜는데 안이하였나이다. 부디 신을 벌하여 주옵소서.”
 
나는 충신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책임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왕이 스스로의 잘못을 아는 것은 분명 미덕이지만, 이 시기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죄가 없는 이항복은 물론이요, 명명백백한 내 잘못조차 나는 지금 물을 수 없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항복이 옳다. 게을리 자책이나 하고 있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