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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탈아입구 조선 -1-

ㅇㅇ(175.200) 2019.01.07 00:42:53
조회 3082 추천 23 댓글 26
														

‘유럽 유니버설리스 9’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원하는 시대에서 원하는 나라를 골라 플레이할 수 있는 역사 배경의 대전략 게임이다.

전작까지만 해도 고증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역사학자들이 게임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던 게임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에선 현질을 하지 않으면 웬만한 실력으로도 세계 정복보다 나라 멸망이 더 가까워, 제작사가 돈독이 올랐다는 성토가 쏟아지는 게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업적 달성률은 99.7%.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달성률이 높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지금 하는 플레이는 하나 남은 마지막 업적이다.

개발도 3의 약소국인 탐라국으로 100년 안에 전 세계를 정복하라는 미친 난이도의 업적이지.


한 명의 병사도 아쉬워 모든 전투를 직접 지휘하고, 지역 경계에 부대를 배치해 양쪽의 반란도를 동시에 관리하는 컨트롤까지. 7000시간의 플레이타임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 달려간다.


“오스트리아 속국화 성공이야. 이제 마드리드 요새만 공성하면….”


이윽고 스페인의 왕성이 함락되었고 곧바로 전체 합병을 선택했다. 마침내 전 세계가 탐라의 이름 앞에 하나가 되고, 고대하던 업적 달성 메시지가 표시된다.

수백 번의 도전 끝에 성공해낸 쾌거.


========

<업적 달성>

탐라는 도다.

총 업적 달성률 : 100.00%

========


“좋았어. 이거 녹화분 브이튜브에 올리면 이번 달 식비는 나오겠다.”


휘청


“그런데 하늘이 빙빙 도는 게 왜 이렇게 어지럽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한참을 비틀거리더니, 이내 픽 하고 쓰러져버렸다.



******



“정신이 드느냐?”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쓰러져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새하얀 빛이 그녀를 비추는 듯하다. 그녀의 외모 덕분인지 정말로 후광이 비치는 것인지는 몰라도.


“누구세요? 환각은 아닌 것 같고 저승사자도 아니어 보이는데 내가 살아는 있나 봅니다.”


쓰러진 내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인 걸까. 그렇다고 해도 방 안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문이 잠겨 있었을 텐데.


여러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쓰러져 잠든 탓일까? 며칠 동안 잠이라곤 한숨도 못 잤는데 몸은 날아갈 듯 가뿐했다.


“아니, 넌 죽은 게 맞다. 사인은 수면 부족으로 인한 급성 심장마비. 난 저승사자는 아니고 천녀인데. 그 친구들이랑 동종업계 종사자라고 해두자꾸나.”


“뭔 개소ㄹ….”


탁자를 손으로 짚고 일어서려고 했건만 손이 탁자를 그대로 통과한다. 겨우 몸을 일으켰는데, 내 시야에 쓰러져 있는 내 몸이 보인다.

말이 안 된다.


털썩


주저앉으니 육신, 아니 정신만 담긴 영혼과 몸뚱이만 남은 육체가 겹쳐진다. 정말로 내가 죽고 영혼만 남은 상태긴 한가 보다.

의외로 크게 슬프지도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오래 살 놈은 아니었다 싶다.


“큭큭, 겜돌이다운 최후인데요? 이제 전 어떻게 됩니까. 뭐 천국이라도 보내주나요? 마냥 착하게 산 건 아니지만 지옥 갈 짓은 안 했는데.”


“아니, 넌 조선의 왕이 될 것이다.”


황당한 말이다. 황당을 넘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게임 폐인에게 게임 좀 끊으라고 장난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거 철 지난 만우절 농담인가요?”


천녀가 빙긋 웃으며 내 말에 답한다.


“진심이야. 도전과제 올 클리어 특전이라고 해두지. 유럽 유니버설리스의 세계에서 조선의 왕으로 환생할 기회를 주겠노라.”


저승사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실감은 안 났지만 마음에 든다.

왕. 왕이라는데 당장 다음 달 의식주 걱정부터 해야 하는 지금의 나보다 못하기야 할까.


그런데 잠시 고민을 해보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배부른 욕심일지는 몰라도.


…왜 하필 조선이야?

명나라에 찍소리도 못하고 조공만 바치던 바보들. 임진왜란을 당하고도 제대로 된 복수 한번 못하는 겁쟁이!

무시하던 여진족들이 힘을 키우는 동안엔 뭘 한 거야? 결국 일본에 멸망하기까지!


“저승사자는 아니랬고 뭐라고 했나? 천녀? 그래요. 왕은 좋습니다. 그런데 왜 조선입니까? 게임 이름을 보세요. ‘유럽’ 유니버설리스 아닙니까. 결국 비유럽 국가는 들러리일 뿐이에요. 뭐 스페인도 있고 러시아도 좋고 터키도 괜찮지 않습니까?”


“네가 탐라국으로 해낸 세계 정복을 감명 깊게 보았다. 본래는 탐라국이 맞겠으나, 내가 관장하는 시간대와 세계관에서 탐라국은 모두 고려나 조선에 복속된 지 오래이다. 그러니 탐라의 후신인 조선으로 가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 너라면 이 나라를 괜찮게 바꾸리라 믿는다.”


휴우우-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간의 울분을 토해내듯 천녀를 향해 소리친다.


“조선으로 뭘 해요? 이웃한 중국?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최고의 강국이에요. 세계 인구의 1/3이 한 나라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일본은 다른가요? 교토 개발도가 46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탯합이 487이라니, 일본 놈들 대체 현질을 얼마나 한 거야! 조선은 이 사이에 끼여서 압사당하기 밖에 더할까요? 전 못해요!”


천녀가 미안한 듯 기운 빠진 목소리로 위로한다.


“네가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다…. 안타깝지만 유럽은 내 관할이 아니니 어쩔 수 없구나.”


“아무튼 조선은 싫어요! 차라리 나를 내버려 둬! 죽었으니 천국 가게!”


내 생떼에 고민하던 천녀가 텅 빈 허공을 향해 손짓한다. 혼잣말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한 게, 마치 다른 신적 존재와 교감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조선을 유럽으로 보내겠다. 네가 조선의 왕이 되어 유럽으로 가는 건 어떻겠느냐?”


이게 대관절 무슨 말인가? 헛웃음이 나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헛소리에요…. 지금 저 놀리는 거 아니죠? 설명 좀 자세히 해봐요.”


“말 그대로 너와 조선을 모두 유럽으로 보내주겠다는 거다. 네 플레이 타임 중 가장 많이 플레이한 게 조선이었잖아. 너도 속마음은 조선이 좋지 않느냐? 난 다 알고 있다.”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내가 유럽 유니버설리스를 구매하고 가장 먼저 플레이한 나라가 조선이었고, 가장 먼저 달성한 업적도 조선 업적이었다. 브이튜브 채널에 업로드 한 조선 공략만 10개가 넘는다.


“…….”


어찌됐든 정말로 조선이 유럽으로 간다면 환영할 일.

조선의 객관적인 체급은 양 옆에 괴물이 있으니 작아 보이는 거지, 오히려 유럽 기준으론 상위권이다. 근대화니 서구화니 고생할 일도 없다. 아니, 잘만 풀린다면 오히려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도 있겠지.

물론 조선이 유럽을 가는 게 정말 가능함이 전제조건이지만 말이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천녀는 웃음을 보이며 계속해서 설명했다.


“음, 위치는 지중해 방면. 정확히는 이탈리아와 조선의 위치를 통째로 바꿔주겠다는구나. 베니순가 뭔가 하는 놈들이 마음에 안 든다나 뭐라나.”


못 믿을 것도 없지 싶다. 죽은 놈을 되살리는 건 가능한 일이었나? 또 그 놈을 게임 속 세계로 보내는 것은?

이런 와중에 조선이 유럽으로 못 갈 이유는 뭔가.


“좋아요. 그런 조건이면 조선을 바꿀 자신이 있어요.”


“다만 조선을 유럽으로 보낸 데에 대한 패널티가 있어. 네가 말한대로라면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에 밀리는 이유는 분명 체급차이였겠지?”


뭐지. 설마 중국이나 일본도 유럽으로 보내겠다는 헛소리라도 할 셈인가.


“중국과 일본도 유럽으로 간다는 건가요? 그건 좀 아닌데요.”


“글쎄. 모든 것을 말해주면 재미가 없지. 네가 조선의 왕이 되어 직접 알아보던가 하고, 마지막으로 환생할 연도를 선택하렴. 나는 유럽 유니버설리스의 기본 시나리오로 시작했으면 좋겠다만?”


천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 너무 이르다면 조선은 존재하지 않고 고려가 있겠지. 또 너무 늦다면 조선의 기본 역량으론 발전한 유럽 국가들을 당해내기 힘들다.

거기다 1444년이면 명실상부 한민족 최고의 위인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치세…. 잠깐!


“1444년이면 세종대왕님은 몇 년 안 지나 돌아가시잖아요. 그럼 저도 그 때 죽는 건가요?”

“너 유럽 유니버설리스 고수 맞아? 기존 왕이 죽으면 후계자로 이어서 플레이하는 것도 모르니?”


저게 가능한 건가. 그럼 나라만 잘 다스리면 대를 이어가며 영원히 살 수도 있겠네. 나야 좋다.


“그랬었죠? 그럼 천녀님 말대로 하죠.”


“이제 작별이구나. 네가 바꿔가는 조선을 천상계에서 지켜보겠노라.”


천녀가 바닥에 대고 무언가 술식을 펼친다. 이내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공명하며 나를 빨아들인다.


윙 윙 위잉 위이잉


“잠깐만요! 가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기본적인 설명은 해 줘야 할 것 아닙니….”


나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시공의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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