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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신통조선(단편)

팝콘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9.01.22 18:52:49
조회 497 추천 28 댓글 4
														

조선에는 오래된 병폐가 있었다.

제사, 제사를 너무 열심히 지낸다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제사가 결코 무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는 데 있었다.

어떤 괴력난신의 무도한 종자인 줄은 알 수 없으나,

제사를 지내며 축문에 '땡뺑'이란 말을 집어넣으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정말로 제사를 받는 신명과 신접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남들에게 이를 알린 끝에, 작금에 이르러서는 가히 조선의 상식이 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조선에서는 역주(力呪)라 불렀으니, 힘있는 주문이란 뜻이었다.


제사는 단순한 신접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제사를 지내어 신접할 때마다 몸은 건강해지고 정신에는 활력이 찼으며,

총명함이나 육체적인 힘도 늘어났다.

그뿐 아니라 신령의 지식이나 재능을 일부나마 배울 수 있었다.


어느 유림은 아비는 대단히 총명하였으나 아들은 우둔하고 도리를 몰라 크게 근심하였는데,

아비가 죽은 뒤 제사를 지내다가 대오각성을 하더니

3년상 기간 중에 사서삼경을 모조리 외움은 물론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

그 내용을 모두 익히기에 이르렀다.

3년상을 지내며 매일 젯상을 올릴 때마다 지친 육신과 머리가 모두 활력을 되찾았다.

나중에 지인들에게 설명하기를,

모르는 내용을 처음부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알았다가 까먹은 것을 다시 공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하니,

들은 이들은 모두 자기네 아비가 그만큼 똑똑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아무 신령에게나 다 제사를 지낼 수는 없었다.

반드시 제사를 받는 신령과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모종의 '인연'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한 인연이 없다면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효과가 없었다.

가장 큰 인연은 혈연이었다.

또한 학맥으로 인한 인연 등도 어느 정도 효험이 있었으나, 혈연만큼은 아니었다.

실제로 피를 이어받지 않았더라도 양자가 되면 어느 정도 효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옛 영웅호걸이나 대학자의 제사를 받드는 정통한 종손들은 가만히 앉아서도 돈을 벌었다.

걸출한 인물의 힘을 받고 싶은 자들이 종손들에게 온갖 재물을 들고 찾아와,

잠시라도 좋으니 제발 양자로 받아들여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짜리 양자

한 달짜리 양자

1년짜리 양자....


양자의 권리는 명분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이었다.

강감찬의 종손에게 한 달짜리 양자로 들어간 어느 무과 지망자는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제사를 지낸 끝에

병서 한번 보지 않고도 병법의 술리를 대강이나마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종묘제사라 하여 조선의 새로운 지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왕가의 옛 방법에 없다 하여 사대부들마저 역주를 받아들이던 때에도

꿋꿋이 옛 방법을 지켜나갔으나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태조대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임금은 신접하여 털썩 쓰러지더니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어찌어찌 제사를 끝마친 뒤 임금은 소회하기를


"태조대왕의 영과 접하니 기쁨을 느꼈으나, 태조대왕께서 소손의 불초한 몸을 느끼시고

'어찌하여 옥체가 이러하단 말이냐!' 하며 노여워하시는 기분을 느껴 슬펐더니라." 하고 설명하였다.

그 뒤로 임금들이라 하여도 구중궁궐에만 머물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공정왕이나 단종대왕께는 역주를 사용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으니,

혹여 무슨 노여움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제사의 묘용이 신묘했기 때문에

오히려 제사를 받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병으로 죽은 자, 평생 원망받거나 심대한 악습이 있던 자, 범죄자 등은 결코 제사를 받지 못했다.

제사를 지냄으로써 오히려 병이 들거나,

멀쩡했던 자손이 범죄자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 신접의 제사가 되는 '역주'를 넣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역주를 사용한 제사가 너무나도 널리 퍼진 나머지

이젠 역주 없는 제사는 아니 지내는 탓이었다.


나랏님들이 대대로 이런 불효한 관습을 없애고자 노력하였으나,

제사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도움과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마당에 사라질 리 없었다.

대신 불도를 닦는 중들에게 의지했다.

유가의 제사가 신령을 청하여 신접을 꾀하는 반면에,

불가의 제사는 불보살의 힘으로 영가들을 천도하여

극락으로 왕생케 하거나, 육도의 어딘가로 환생케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들에게 재(齋)를 맡기면 신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되

해를 입는 일도 없었다. 사대부들은 이러한 사태를 매우 고깝게 여겼으나,

지어 자신들도 집안에 불초한 자가 나오면

역시 제사를 중에게 (은밀히) 맡길 터라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서는 여제(厲祭)가 사라졌다.

여제는 본디 불행하게 죽은 귀신을 달래고자 하는 제사인데,

이제는 아무도 여제를 지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제를 지낼 만한 일이 생기면,

목민관들은 은밀히 승려를 불러 천도재를 지내는 것으로 해치웠다.


승려들 또한 역주를 불가의 수행에 접목했다.

그리하여 악사여래의 진언으로 가벼운 병은 낫게 하고 무거운 병은 가볍게 하며,

천수천안의 진언을 읊어 멀리 떨어진 것을 보고 가까운 미래를 예지하였다.

특히 불가에서 전하는 밀교의 술법과 잘 어울렸기 때문에,

조선의 불가에서 점차 선종은 사라지고 오직 교종과 밀종의 지식만 살아남았다.

특히 밀교에서 말하는 '허공장보살 구문지법'은 잠시 동안이나마 머리를 천재로 만들어주는 효험이 있어,

과거 공부를 앞둔 이들이 몰래 승려에게 거금을 시주하고 술법을 배워가기도 했다.


불도를 닦는 자들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으니,

불가의 술법으로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으므로

유생들이 절에 가서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깨끗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시대에 사라진 회암사가 중창되고 황룡사가 재건되었으니,

음사가 기승을 부림이 이와 같았다.


처음 조선에 서방으로부터 '천주'란 신명을 모시는 서학이 당도했을 때에도

조선의 신도들은 역시 역주를 여기에 도입했다.

양인의 승려들이 처음에는 사도의 술법이라 배척하였으나,

신도들이 억지로 권면하여 마지못해 역주를 서학의 기도문에 붙여 기도했을 때,

이역의 승려는 황홀한 법열을 느끼며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한동안 그대로 머물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승려는 눈물을 머금으며 자신이 모시는 천주에게 죄를 거듭 자복하며 본국에 사정을 알렸는데,

본국에서는 이자가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효용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아! 슬프다.


이제 제사는 제사가 아니라 신묘한 기예이니, 효성스러운 제사가 어디 있고 경건한 예배가 어디 있는가?

제사를 지내며 신명의 도움을 받을 생각만 하고,

불도와 서도에 예배하며 황홀한 법열을 즐길 생각만 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도리는 사라지고 다만 이득을 따지는 태도만이 남았으니,

과연 하늘이 이런 것을 원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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