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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장편)바벨의 끝으로 (20)

PUNK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2.10.27 22:18:51
조회 1250 추천 38 댓글 34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불가능한 꿈',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원작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불이 환히 켜진 도시의 영롱한 간판들이 별처럼 빛난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울림이 그대로 밤의 눈을 타고 메아리치듯 소녀의 귀를 따라 흐른다.


서늘한 밤의 바람을 맞이하여 루시는 살짝 눈을 감았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그런 스스로의 기분에 화답하듯, 끈적거리는 어둠이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세상을 덮었다.



"데이비드...!"



쏟아지는 별들의 바다.


오늘은 기이할 정도로 별이 많았다. 원초의 하늘을 가리는 도시의 빛이 이상하게 오늘은 공존을 허락한 듯 했다. 세상은 부산히 발길을 재촉하고 저 멀리 순환철과 자동차와 인간들이 조급증에 걸린 짐승처럼 달려간다. 저 몽환의 풍경 가운데 그가 서있었다. 더없이 깊은 눈동자가 가만히 이쪽을 바라본다. 입술은 굳게 닫혀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을 떨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감이다. 그가 온건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련사 앞에서 춤추는 저 동쪽 대륙의 뱀이 된 기분이었다. 얼마간의 침묵,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발을 내리친다. 금속음이 교차하고 몇 번이나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몸을 굴리고 회전시켰다.


붉게 물든 소녀의 눈 가장자리로 무수한 문자열과 행렬의 폭포수가 쏟아져내린다. 마이크로 초 단위로 펼쳐지는 연산의 흐름 속에서 소녀는 움직였다. 음악을 연주하듯 상체를 흔들고 허리를 숙였다.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바람이 일고, 소년의 손에 들린 기다란 칼이 스치듯 그 위를 지나갔다.


허브에 이는 경고음이 꿈에 빠진 듯한 소녀의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루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걷고 있었다. 저 아찔한 밤의 커튼을 배경삼아 소녀는 춤춘다. 자 아찔한 건물의 옥상을 따라 두 사람이 흔들거리듯 돈다. 세마젠*1)를 치듯 몇 번이나 서로를 향해 교차하듯 달렸다. 벌써 수 차례나 일격을 나눴음에도 둘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끌리듯 그의 손과 자세에 모든 시선을 쏟는다. 형체가 흐릿해지고... 소녀가 빠르게 몸을 굴렸다. 고작 몇 센티 차이로 저 아래 수백 미터의 어둠이 기다리는 경계에서 멈췄다. 불과 방금 전까지 그녀가 서있던 자리엔 나이프 두 개가 달빛을 맞이하여 서슬퍼렇게 빛난다. 턱까지 차오르는 춤을 억지로 되살리고, 어지러워지는 허브의 패킷을 재정립한다.


형광색의 응급구조사 재킷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죽음이 만개하듯 꽃피운 걸 보니 씁쓸함이 앞섰다. 오늘 소년은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다. 설령 최소의 선을 지켰다해도, 무수한 목숨을 그가 거둔 건 사실이다. 어쩌면.. 오늘 그 목록에 자신 또한 추가될지 모른다. 순환계 임플란트를 재가동시키고 안구의 표면에 흐르는 정보값을 빠르게 훝었다.



그대로 내달려서 내리쳤다.



루시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아니, 그녀는 지극히 호전적이며 달려들 때를 놓치지 않는 맹수였다. 초 단위로 내리치는 금속 와이어가 채찍처럼 공간을 찢는다. 그렇게 부른다. 이쪽으로 와. 여기 있지 마. 좀 더 가깝게.. 탈진해버릴 정도로 쏟아낸다. 지금 소녀는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것을 희열과 함께 온 몸으로 느꼈다.



앙상히 세워진 건물의 철골 사이를 소년이 곡예를 부리듯 빠져나간다. 산데비스탄은 마치 처음부터 소년과 한 몸이 된 듯 했다. 탄식하듯 눈에 넣었다. 저토록 유연하고 우아한 움직임이 가능하던가? 퀵핵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범위에 넣자마자 빗나가고 또 사라졌다 여지없이 덮쳐온다. 계속해서 울리는 경고음이 거칠게 내리치는 건반의 반주처럼 울렸다.





하지만 루시는 두렵지 않았다.





소년이 쏜 샷건의 총탄을 몸을 굴려 피한다. 와이어가 뻗어나간다. 오른손에 들린 리볼버를 정확히 내리치자, 충격이 전해지며 데이비드가 비틀거렸다. 그대로 소녀가 소리를 내지르며 어깨부터 돌진했다. 북에 부딪치듯 온 힘을 다해 쓰러뜨렸다.





ㅡ우지끈!





깊은 어둠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소녀의 눈이 붉게 점멸을 거듭했다. 빠직! 스파크가 일며 회심의 일격이 막혔다.



"연습을 제법했나 봐, 데이비드!"



역으로 이쪽의 허브가 일그러짐에도 루시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러면 네 머리를 태워주려 했다고!!"



유연성을 살려 백플립을 시도했다. 허공을 가른 소년의 팔을 두 다리로 꽉 붙들었다. 동시에 몸을 다시 돌려 두 팔로 소년의 목을 조른다. 또아리를 트는 뱀이 역으로 조련사를 잡아뜯는다. 도망치지 못하게... 혼자 저 멀리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한번 써봐! 그 잘난 산데비스탄을!'



비스듬하게 휜 활대처럼 둘의 몸이 흔들렸다. 중력의 가속을 받아 저 아래 차가운 바닥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이제라도 와이어를 꺼내 감아야 할까? 아니, 아직 아니야. 소녀를 떼어내려 거칠게 몸부림치는 소년을 더 바싹 조였다. 임플란트를 많이 박아넣지 않은 소년의 완력은 그리 높지 않다.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정복욕이 루시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수평을 그리며 추락이 이어진다. 여전히 위험도 공포도 없었다. 세상이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그래, 바로 이 추락이야말로 처음으로 느끼는 루시만의 산데비스탄일지도 모른다. 순간 큰 진동이 인다. 경직된 몸이 공중을 활공하며 일순 뒤틀렸다. 불과 몇 층의 간격을 남기고 벌어진 일이었다. 분홍머리의 넷러너가 씩 웃었다.



'할 수 있잖아. 데이비드.'



소년은 산데비스탄을 가동했다. 속박을 끊으려 드는 자유의 힘을 이토록 거세다. 기다렸다는 듯 루시의 팔목에서 물감을 흩뿌리듯 와이어가 뻗었다. 저 위쪽 위태롭게 걸려있던 파이프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자, 거센 반동에 두 사람의 몸이 나란히 좌우로 경련하듯 떨렸다. 뇌가 진탕하며 살짝 어지러움을 느낀다. 격한 충격이 잔뜩 녹슨 파이프의 한계를 시험했고, 이내 둘의 몸이 저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3층 정도의 높이.


이 정도면 괜찮다.



제동장치를 걸어 낙법을 시도했다. 반사신경에 부착된 임플란트가 제 역할을 다했고, 몇 차례를 구르던 끝에 구석의 쓰레기통이 소녀의 몸에 제동을 걸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목을 타고 올라온 끈적한 액체를 토해내듯 뱉었다. 검붉은 피였다. 처음부터 저 색이었는지, 아니면 저 밤하늘의 어둠이 유독 이 공간에 짙게 드리운 건진 모르겠지만.





ㅡWarning! Enemy Signal Detected!ㅡ





하늘까지 집어삼킨 거센 불길에 잠긴 병원을 뒤로 하고, 둘은 란초 코로나도 전체를 누비며 들짐승처럼 내달렸다. 빛의 거리를 거침없이 질주하고 종횡하듯 건물을 넘나들며 날아올랐다. 물줄기의 끝이 다가온다. 이제 더는 달아나지 못하리라.


눈을 부릅뜨고 왼손을 정면으로 뻗는다. 동시에 오른손을 자연스레 귓가로 흘리듯 댔다.


허브가 일렁이며 나타난 무수한 선택창이 세상을 비현실적으로 채워나간다.



넷러너는 사이버공간의 지배자. 세상은 데이터와 정보의 집합체. 그런 공간을 우리는 살아간다.



손을 넣어 비집는다. 고작 몇 마이크로 초만으로도 충분했다. 쏟아지는 행렬의 물결 속에서 찾아낸 연산을 끄집어냈다. 붉은 색과 초록빛이 위치를 뒤바꾸며 명멸을 반복했다. 새장이 깨어지고 소녀의 부름에 세계가 호응한다.





ㅡ사용 가능한 퀵핵ㅡ


선택 : 전염

선택 : 합선

선택 : 시냅스 과열

선택 : 안구 재부팅

선택 : 음파 충격

선택 : 사이버웨어 오작동

선택 : 시스템 재부팅





어줍잖은 마음으로 대적할 상대가 아니다.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미안, 전부 때려박겠어.'





ㅡ사용 가능한 퀵핵ㅡ


선택 : 전염 (선택)

선택 : 합선 (선택)

선택 : 시냅스 과열 (선택)

선택 : 안구 재부팅 (선택)

선택 : 음파 충격 (선택)

선택 : 사이버웨어 오작동 (선택)

선택 : 시스템 재부팅 (선택)





보였다. 겉보기엔 일점의 선조차 그어지지 않는 기계와 같은 얼굴이. 하지만 노가쿠(能楽)*2)를 연상시키는 저 얼굴 아래 숨겨진 불길이 루시의 가슴에 왠지 모를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작 가면을 쓰고 살아왔기에 알 수 있었다.


칠흑처럼 물든 네 두 눈을 누굴 보고 있는 걸까? 무엇이 널 그리 만든 거야? 어울리지 않아, 데이비드.





'잡았어!'





그대로 왼손의 주먹을 움켜줬다.





ㅡ파직!





소년의 뒷통수가 흔들리자, 푸른 전류가 폭발하듯 피어나 스파크를 터트렸다.


천천히... 히스패닉 소년이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 소녀는 달리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몸을 밀어넣어 바닥으로 떨어지던 소년의 머리를 받쳤다. 지릿한 두통이 머리를 울렸고, 일순 긴장이 풀리며 온 몸이 떨렸다. 끝났다는 안도감, 혹여나 그가 다치지 않았을까 밀려오는 불안감.



자신도 모르게 그의 두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알면서도, 안정을 취하게 내버려둬야 한다는 걸, 루시는 데이비드를 부른다. 흔들었다.


저 어둑한 눈동자는 고고한 연못처럼 잔잔했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다. 소년의 그런 모습이 루시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위력은 전부 조정했어. 이 정도로 넌 멈출 사람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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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넌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Walk, Walk.





"데이비드!"





Walk, Walk.





"데이비드!"










[지금 현재 란초 코로나도에서 아로요 일대에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데이비드...!"





[사이버 사이코시스 출몰 경고령이 발동했습니다. 친애하는 시민들께서는...]





"데이비드...!"





[지금 경찰 특기대가 막 출동....]











"... 특기대.. 그 말은?"



왈칵 표정을 일그러트린 소녀의 귀로 생생한 연료의 분사음이 들려왔다. 비행체의 소음이 분명하다. 점점히 늘어만가는 붉은 점이 빠르게 산토 도밍고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키로시 안구를 통해 전해지는 막대한 정보에 순간적인 현기증을 느꼈다.



"이 속도면.. 안 돼... 도착까지 4분 아니... 3분."



입술을 가늘게 깨문다.





[혹시나 거리에 머무시는 시민분이 계신다면 지금 즉시 안전....]





쭉 늘어진 소년의 팔을 들쳐맸다. 금방이라도 꺾어질 것 같은 다리를 억지로 세웠다. 그제야 루시는 오늘 얼마나 쉼없이 자신이 달려왔는지 체감했다. 피로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단지 잠깐 잊고 있었을 뿐. 허브의 UI가 몇 번이나 강제로 꺼지려는 걸 안간힘을 다해 붙잡았다. 연산 패킷을 전부 의식 유지로 돌리니, 이번엔 반사신경과 면역계에 이상이 발생했다.



몇 번이나 그의 해킹을 받아냈던가?



걸음마를 뗀 저 초보 넷러너에게 루시의 방벽(ICE)은 몇 번이나 뚫렸다. 상상 이상의 위력이었다. 대체 뭐가...? 루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생각을 가다듬을 틈따윈 사치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ㅡ쿠구구쿵!





도시가 흔들렸다. 동편의 먼 하늘에서 족히 다섯 대는 넘는 AV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체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알 수 있다. 공포가 소녀를 엄습했다. 한 번 잡은 먹잇감을 저 냉혹한 사냥꾼들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으면 한 쪽이 죽어야만 끝이 나리라.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소년을 끌다시피 건물 구석으로 몸을 감췄다. 달리지 못하면 걸었고, 걷기 힘들면 질질 끌어서라도 도망쳤다. 맥스택 앞에서 저항은 무의미하다. 저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선 도시의 누구라도 종잇장처럼 구겨지리라.



불꽃이 일었고, 남은 모든 힘을 그러모아 소년을 감싸안은 채 몸을 굴렸다.





ㅡ쿠쾅!





"크윽...!"




격통으로 비명을 지르는 몸을 억지로 세웠다. 로켓 발사기를 든 대원의 냉혹한 고글은 시뻘건 핏빛이었다. 넷러너의 그것이 아니다. 자비라곤 거세된, 학살을 애들의 장난처럼 즐기는 도살자의 눈빛이다.



[저항은 무의미하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라.]



결말 따위는 알고 있다. 저 학살자들은 진작 결정을 내렸다. 지극히 수사적인 저 말은 사냥감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착각이었다. 살 수 있다는 달콤한 환상. 그걸 짓밟으며 희생자들이 짓는 절망을 저들을 음미하며 맛본다.





간신히 진정시켰던 허브가 또 다시 일그러진다. 넷러너! 길거리 갱단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 소녀의 방벽이 수수깡처럼 찢겨나간다. 이지러지는 의식의 위로 총탄의 세례가 이어졌다.


고작 그것 뿐이었지만, 루시는 고개를 힘껏 숙였다. 벌레가 기듯 납작 엎드려 비참하게 숙였다. 균열이 퍼저가는 도로가 뒤집히고 폭발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사냥꾼은 철저히 사냥감을 구석으로 몰았다.





"데이비드..."





다가오는 사신의 모습에 소녀가 공포에 떨었다. 저들은 단순한 경찰이 아니다. 학살자들이자 동시에 한때 미친 자의 길을 걷던 싸이코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저들은 미쳐있었다. 당장 죽이지 않는다는 건, 죽음 이상의 끔찍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방증.


발악하듯 프로토콜 창을 열었지만, 소녀의 자그마한 저항은 맹수의 이빨이 썩어빠진 뼈다귀를 깨부수듯 산산조각났다.



"하찮은 넷러너 따위가 발악을 하는군."



저들은 이 도시의 진정한 심판자들이다. 강렬한 살의와 끔찍스러운 욕망이 소녀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조금은 벌을 줘야겠지?"



추잡한 미소가 살짝 맥스택 대원의 얼굴을 따라 흘렀다. 경찰이라기보단 악마에 가까운 얼굴. 몇몇은 아예 아랫도리를 붙잡고 입술 바깥까지 혀를 내밀며 침을 흘렸다. 저 모든 게 끔찍스러울 정도로 소름끼쳤다.


여전히 어둑한 밤하늘. 그러나 소년과 함께 춤을 추듯 누볐던 아까와 달리, 저 어둠은 모든 색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잠깐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온다.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악했을 것이다. 팔다리를 떼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서라도 하수구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루시는 그렇게 이 도시에서 살아왔다. 아라사카의 이빨에서 도망친 이래, 친구들의 비명을 딛고 어떻게든 살아왔다.





"지랄하지 마."





그렇기에 소녀는 다시 팔을 교차하듯 뻗었다. 처음으로 절대적인 공포 앞에 고개를 펴고 항거했다.


별들은 더는 보이지 않지만 사라진 건 아니다. 모노 와이어가 휘파람 소리처럼 공간을 갈랐다. 그런 소녀의 '자그마한 장난'이 가소롭다는 듯, 맥스택 대원이 두 팔을 뻗었다. 어디 한 번 재롱을 더 떨어보라 말했다.











Don't Walk. Don't Walk.





빨갛게 변한 신호등 앞에 걸음을 멈췄다.


저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은 길을 두고...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는 거야. 보다 정확히는, 네 한계를 알려주는 '시그널'을 품어. 경고등 비슷한 거지. 네가 임계를 넘어서려는 순간, 되돌아가지 못하려는 순간, 마지막 경고를 해주는 그런 걸 말이지.'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Walk, Walk.





신호가 다시 바뀌었다. 동시에 반대편 차선으로 초록불이 들어왔다. 소년은 이제 바로 그 차선 가운데 서있었다. 이쪽의 횡단보도가 바뀌면, 저쪽의 차선 또한 푸른불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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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는 듯 저 앞으로 내달리는 트럭을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차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나긴 도로를 질주한다. 어느새 자신의 바이크 위에 탄 채, 악셀그립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립을 쥔 손에 힘을 싣는다.





핸들을 반대로 꺾었다.



저 멀리로, 막 와이어를 꺼내든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고작 본인 하나도 지탱하기 버거울텐데, 분홍머리의 소녀는 어떻게든 저 가냘픈 몸으로 소년을 등지고 가린다. 지키려 든다.





정말... 바보같은 여자다.





'사람이든 임플란트든, 아니면 네 몸뚱아리 그 자체든, 뭐든 좋아.'





안개가 걷혔다.











ㅡ파지직!!



"크아악!





갑자기 뻗어온 뭔가가 와이어를 부여쥐었다. 당기지도 그렇다고 밀지도 않고 가만히 잡았다.


스파크와 함께 와이어를 타고 흐른 고압전류가, 소녀의 몸에 더러운 손을 뻗던 맥스택 대원을 숯덩이로 만들어버렸다.





고개를 돌렸다.


맑은 흐르는 연갈색 눈이 그곳에 있었다.


주저앉을 뻔한 자신을 겨우 추스렸다.





"뭐야, 루시."


"......"


"머리카락 다 타는 줄 알았잖아? 진짜 아팠다고?"



엉망진창이 된 건 매한가지인 주제에 그 와중에 입만은 살아서 방정이다. 씩 웃는 저 얼굴이 너무도 얄밉다.



"나쁜.. 놈..."



흐려지는 눈가를 황급히 닦아낸다. 딴청을 피우듯 슬쩍 고개를 돌려주는 저 놈의 뺨을 반드시 날려주리라 결심했다.





"할 말 많은 거 아는데...



손을 들어올렸...



"루시! 우리 말로! 때리진 말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태워 다시 내렸다.





세상이 그대로 멈췄고...





"일단, 여기서 튀자."





찾아든 온기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마치 영사기를 돌리듯 변해가는 풍광. 한 팔로 소녀를 들쳐안은 소년이, 다른 손을 들어 저 개자식들의 면상에 주먹을 한 방씩 꽃아넣는다. 슬로우모션에 걸린마냥 입술만 뻐끔거리는 얼빠진 맥스택 놈들의 얼굴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멈춰버린 하늘로 살짝 시선을 돌렸다.


거짓말처럼 환히 피어난 별들이 녹색 눈동자에 맻혔다.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부여쥔다.


소년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형광색 자켓 뒤로 돌린 하얀 두 팔에 힘을 넣는다.



바스라지도록 끌어당겼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주석

*1) 수피즘 이슬람에서 신과 합일을 이룰 때까지 무아지경의 상태로 빙글빙글 도는 춤이자 의식.

*2) 일본의 전통 가면극으로 등장 인물들은 가면의 일종인 노멘(能面)을 쓰고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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