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에게 한국사 최초 박사를 물으면 남자 박사는 이승만, 여자 박사는 김활란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가 "김활란 이대생 성/상/납" 발언으로 엄청난 논란을 치른 적이 있다.
그런데 사실 김활란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한국사 최초 여성 박사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소개할 한국사 최초의 여성 박사는 김활란과 달리 아주 숭고한 삶을 사신 분이다.
한국사 최초 여성 박사는 1929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 공중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송복신 박사이다.
그녀는 1900년 평양의 평범한 포목상의 딸로 태어났는데 1910년대에 평양의 숭의여학교(현재 숭의여중, 숭의여고, 숭의여대 전신)를 졸업했다.
그때 숭의여학교는 일제의 탄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학교였는데, 1913년에 이 학교 교사였던 황애덕, 김경희, 박정석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위해 헌신할 목적으로 송죽결사대를 조직했다.
송죽결사대에선 전도유망한 숭의여학교 재학생들을 끌어들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했는데, 이때 학생이었던 송복신이 송죽결사대 멤버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그녀는 일본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로 유학을 갔다. 당시 유학을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 상당한 엘리트였음을 입증하는 것인지라,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당대 일간지에 그녀 소식이 자주 실렸다. 신문기사를 보면 얼굴이 엄청 예쁜데다가 노래도 잘 불러서 남학생들이 매우 좋아했다느니, 송복신을 두고 남학생들 사이에서 주먹다짐까지 오갔다느니 하는 얘기가 적혀있다.
1919년,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했을 시점에 재일유학생들 사이에서 무언가 행동에 나서자는 여론이 생기고 있었다. 이들이 내세운 선언서가 바로 2.8 독립선언서인데, 송복신은 이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유포할 목적으로 조선에 잠입하기까지 했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일제는 그녀를 ‘불령선인’으로 지목했다.
시간이 흘러 미국으로 건너간 송복신은 미시간 주립 대학교 위생학과(공중보건학과)에 입학했다. 거기서도 그녀는 독립운동을 지속했는데, 이때 이승만하고도 친분이 생겨서 그가 이끄는 재미 한인 조직에 참여해 독립운동 자금도 여러 번 기부했다.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던 시기인 1929년, 송복신은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서 <인종별 성장 차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해 심사를 받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한국사 최초 여성 박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재능을 가진 송복신은 왜 김활란보다 인지도가 밀리게 되었을까?
사실 송복신은 미국 유학 시기 만난 윈필드 헨리 라인(Winfield H. Line)이라는 청년과 결혼해 미국에 정착했다. 공중보건학 박사 학위를 딴 뒤에는 미시간주에서 공중보건, 위생 전문가로 활동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사 학위 취득 후 국내에서 여러 의미로 이름 날리던 김활란에 인지도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녀는 미국에 거주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송복신은 매우 오래 살아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은 모두 보았다.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만난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것도 보아서 그때 크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4.19 혁명 때는 언론에 대고 "내가 이 박사와 친하긴 하지만, 이번 일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니 대통령직에서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에서 큰 화제를 몰기도 했다.
이후 군사정권 시기에는 송복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전해지지 않는다. 1994년 미국 땅에서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만이 전해질 뿐이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