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
아크릴판에 문구가 소박하게 적혀져 있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좌우명. 제법 나쁘지 않은 문구였기에, 그가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한 번 쯤 써먹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시야를 넓혔다. 책상 위 연필 꽂이에는 연필, 볼펜 할 것 없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고, 깨끗하게 정리 된 책상 위에는 종이학이 꽉 찬 유리병이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는 '언제 쯤 오실까요? 선생님! 기다리고 있어요!' 같은 말이 적혀져 있었다. 보다 눈을 부릅 뜨고 자신이 남긴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겨우 찾은 흔적이라곤 책싱 아래에 있는 작은 얼룩 뿐이었다.
한숨을 푹 쉬고 허리를 펴자, 그대로 책상 위 올려진 출입증이 눈에 들어왔다. '연방수사동아리 샬레' 문구 아래에는,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근무를 한 적도, '동아리'라는 곳에 가입한 기억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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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겐 평소와 다름 없는 등교길이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이어폰을 킨 다음 노이즈 캔슬링을 켰다. 지하철 아래로 내려간다면, 전부 비슷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하나씩 모난 구석이 있는 사람들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인파의 물결 속, 똑같은 사람이 하나 더 추가 됐다.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겨우 왼쪽 구석 자리를 쟁탈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학교에 도착하기 전 지루함을 달래야만 했다.
도착 시간까지 삼 십분. 애매한 시간이었다. 지루함을 달래기에는 영상이 딱이었다. 이럴 땐 지나간 애니메이션 리뷰를 보면서 시간을 떼웠다. 대부분 애니메이션이 이세계물이었고, 편의주의적 전개로 떼워져 있었다. 고등학교 같았으면 이런 걸 대체 왜 보냐며 평론가가 된 것 마냥 조목조목 따졌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왜 이런 게 인기가 많은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가끔은, 생각 없이 보기 좋은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처음, 주인공을 핍박한 악당이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주인공의 입 속에서 애니메이션 특유의 '교훈' 연설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쓰러지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체절명의 상황. 주인공이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숨겨왔던 치트가 칼 끝에서 번쩍였고, 악당은 비명 조차 외치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바스라졌다. 쓰러져 있었던 히로인이 일어나고, 엑스트라가 찬사를 보낸다. 속으로는 코웃음 쳤지만, 그는 그 나름대로 시원함을 느꼈다. 속을 뚫어버리는 '사이다'를 이래서 자주 찾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제 다음 리뷰를 보려고 할 때, 옆에서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이즈 캔슬링 때문에 거슬릴 수준은 아니었지만, 주변 소음이 있으면 영상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눈으로 한 번 찔러 보었지만 박장대소를 하면서 통화에 빠진 사람에겐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이어폰의 음량을 올리고, 음질이 좋은 노래를 돌려 듣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감은 채 망상에 빠졌다. 흔한 생각이었다. 지금 지하철에 테러리스트가 들어선다면, 방화범이 들어선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등학교 때부터 했었던 망상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지만 질리지 않았다.
어느덧 정신을 차리니 학교 앞 정거장에 도착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간 뒤, 전공 수업이 있는 건물을 향해 몸을 옮겼다. 학교에 올 때 마다 온 몸의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으나, 이 이상 자체휴강을 한다면 낙제 확정이다. 바쁜 발걸음을 옮겼을 때.
'퍽'
그대로 정신을 잃어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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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비폭력적인 방법을 쓸 순 없었나요."
"뒤, 뒤에서 불렀는데, 도, 도저히 선생님이 돌아보시지 않으셔서..."
"업무중에는 이어폰을 빼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그쪽에서도..."
두 여성의 목소리가 귀에 교차에서 들렸다.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하자 고통 또한 엄습했다.
"아, 아아..."
신음을 길게 이었다. 귀가 윙윙 울리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속이 매스꺼워 제대로 몸을 건사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어렴풋이 상황 파악을 마친 그가 머리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말했다.
"저, 저는 돈 없습니다... 대상을 잘못 잡으셨어요... 부잣집 자제도 아니고, 털어봐야 천 원짜리 몇 장이 전부입니다..."
누구에게 원한 산 적도 없고, 일 평생 성실하게 살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다. 그가 머릿속에서 낼 수 있는 건 납치 뿐이었다. 다음으로 들린 건 낮은 여성의 목소리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하고 계시지 못하는 것 같군요."
"서, 설마, 제가 너무 강하게 때린건... 헤으으..."
쓰러진 그를 앉히는 여성,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군청색 긴 생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정신이 다시 점차 흐릿해져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조금만 더 쉬셔도 좋습니다. 일어나시면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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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꿈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온갖 산해진미로 만든 요리다. 먹어도 먹어도 끝 없이 들어왔지만, 배는 하나도 부르지 않았다. 테이블은 분명 2인용 테이블이었지만,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는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혼자서 밥을 먹는 건 이젠 일상이었다. 별 생각 없이, 혀 끝에서 퍼져나가는 맛을 즐기려 노력했다. 정신 없이 먹어대기를 몇 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감각이 먼저 돌아온 것은 코였다. 짙은 소독약 냄새가 먼저 감싸고, 귀가 열리더니 삑삑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빛이 눈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등 뒤 피부로는 푹신함이 느껴졌고, 입 속은 텁텁했다. 어지러움은 전 보다 덜했지만, 여전히 뒤통수가 울리긴 마찬가지였다.
"일어나셨군요. 선생님."
옆을 바라보니,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단 하나 기억나는 군청색 머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의 시야에 완벽하게 들어왔을 때는, 머리와 맞는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와 함께, 그 위를 가리고 있는 안경. 다음으로는 뾰족한 귀였다. 귀를 손으로 가리키고 '당신 귀가 왜 그래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기억 나시나요? 선생님이 처음 총학생회에 오셨을 때. 제일 먼저 깨웠던 게 바로 저였습니다."
자신을 선생이라고 부르는 말에 그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성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선생님께 초콜릿을 드리던 때가 생각나네요. 너무 무례하게 군 게 아닐까 싶어 조금 후회되는 것 같습니다만... 다음 발렌타인에는 제대로 된 초콜릿을 드리고 싶네요."
문득 쓰러졌을 때도 자신을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걸 떠올렸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 쉰 그가 겨우 단어를 말했다.
"죄..."
"죄? 기억이 나신건가요? 선생님!"
"죄... 죄송한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네?"
"저, 저는 임용고시도 본 적 없어요. 아니, 그 전에 사범대는 문 턱에도 가본 적 없구요. 선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에요.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은데..."
여성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에 옅은 눈물이 고여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 여성은 다시 온화하게 미소짓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혼자서 떠들었군요.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만."
"저를 납치하신건가요? 솔직히 지금 혼란스럽거든요. 당신을 믿어도 될지..."
"원래는 접선한 뒤 천천히 이야기를 드릴 생각이었는데. 요원이 말하길 아무리 불러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다고 하셔서."
완벽한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을 탓할 날이 오다니. 그에게는 세상 신기한 날이 다왔다.
"기억에 없으신가요? 현재 선생님이 계신곳은 키보토스. 학원도시입니다."
"에? 학원도시요? 뭐, 무슨 몰카인가요? 방송국? 요즘 유튜브는 이런 것도 하나?"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시는 모양이시군요..."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씁쓸하게 웃었다.
"...곧, 자초지종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안심해주세요. 저희는 선생님을 해치지 않습니다."
또각 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여성은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가자 그는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순 이상한 일 투성이었다. 납치도 있었고, 세상에 안경이 어울리는 군청색 머리의 엘프귀 미녀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큰 일이 아니길 바라며,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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