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꿈이다.

이 시작에는 개연성이 없다. 내가 그렇고 당신이 그렇듯이, 주체적인 입장에서 탄생이란 전혀 연역적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일지 선택하지 못한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태아로서 자궁 속에서 본능을 배우고 자극을 들을 순 있겠으나, 그 역시 당신의 선택이 아니란 건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는, 다만 강매당한 연극의 관람객으로서, 때로는 연기를 하고, 때로는 연기를 볼 뿐이다. 재미가 있으면 썩 괜찮은 이야기일 것이고 재미가 없더라도 그 역시 나름 가치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시작이 무작위일지라도, 우리가 향하는 곳은 우리의 선택으로 만들어지리라..

우리는 선조의 선조부터 지식을 넓히는 데 힘쓰는 종족이었다. 지식이란 곧 힘이며, 정치적인 권력 역시 지식의 깊이로 정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곧 추락을 의미하며, 우리의 종족 모두가 토론하길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 크레쉬크는 너무 토론하길 좋아하는 나머지, 잠자리에서까지 토론을 이어가는 경우가 잦았다. 나중에 알게된 다른 제국에 비해 출산율이 현저히 낮다는 문제점은 이런 부분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우리는 귀엽기(...)때문에 아무리 토론이 흥미롭더라도 서로에게서 완전히 성적 흥미를 상실하는 경우는 없었다.

현 사무총장 오텝 인스-베트(38)는 뒤가 구린 인물이었다. 우리는 지식이 곧 힘이었기 때문에, 오텝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노예상이란 의혹이 있었더라도 그의 방식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때마침 초공간 항행로가 발견되고, 우리의 문명이 우주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의 통합은 필수였다. 논란이 많았긴 해도, 오텝은 그런 논란을 전부 패배자의 변명으로 치부했다. 결국 우리의 사회는 그의 노예 길드를 국가사업으로 채택했고, 그가 부렸던 다수의 외계생물 역시 노예로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스-베트는 그의 사업을 확장시켜 크레쉬크마저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지식은 국가 최고의 것이었지만, 그의 가치관은 오직 효율과 경제만을 중시한 탓이었다.

이런 그의 성격에 강하게 영향받은 터울이 많이 나는 동생 오텝 옴-베크(26)가 무역상의 기질을 타고난 것도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회의 우두머리에 오텝 가문이 다수 포진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에 만만치않게 영향력 있는 가문도 있었다. 국방부 장관과 연구부장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헤케트 가문이었다.

제아무리 사무총장이라 하여도 지식의 어머니라고도 할 수 있는 연구부장의 권한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서로 알력다툼이 있는 명문가의 일원이었으니, 오텝 가문에서 마음대로 기술 발전을 주무를 수 없었다. 강력한 명분이 없는한, 어떤 것을 발전 시킬지는 전적으로 연구부장의 영역이었다.

2200년이 다가오던 어느 날, 연구부장은 기술의 발전을 보다 촉진시키기 위해 연구 계획 제 1안을 발표했다.

그녀는 오직 기술력만이 국력이라 굳게 믿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연구부장이기 이전에 한 명의 크레쉬크였기 때문에, 기초과학에 투자하길 원했다. 대다수의 국민도 그녀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케트 가문을 견제하고 싶은 사무총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그녀의 결정에 태클을 걸어 그녀의 판단에 흠집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2200년이 되기 2주전에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행정적 부담에 대해 지적했다. 국가의 규모가 행성 전체로 커지고, 수많은 보고단계들이 쌓여 중간 관리직의 피로도가 상당히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근거로 들었다.

또한 인적 자원에 대한 부담 역시 지적했다. 한창 사랑을 나누다가도 네온 원자 충돌실험을 설계할 정도였으니 국가적으로 재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또 우주 산업에 막대한 양의 광물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의 제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자원은 당장 그들의 모성계에 있는 자원을 채굴하기 위한 시설을 짓기에도 턱없이 모자란데다, 행성개발을 위한 추가 비용까지 생각하면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기초과학이 아니라 산업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런 그의 논리에 따라 수정안으로 제시한 연구목록은 이것이었다.

연구부장 옴-이테크(21)는 이것이 꼰대(38)의 기싸움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가 내세운 명분은 틀린 부분은 없었기에 그의 수정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치적인 다툼보다는 순수하게 과학을 발전할 수 있다면 어느정도 개인적인 손해는 감수할 요량이었다.

-계속-

다음 편부터 조금씩 시간 진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