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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메시지 통제 능력을 잠시 잃었을 뿐인데도 이야기의 방향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흐르게 될 수도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1985년 봄에 잘못된 커뮤니케이션 덕분에 톡톡히 곤경을 치렀는데, 대통령이 경제정상회담 참석차 유럽을 들른 김에 비트부르크 국립묘지도 방문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나왔던 것이다. 이번 국립묘지 참배는 2차대전 종전 40주년을 기념하고 과거의 적에서 현재는 강력한 아군으로 돌아선 서독과의 화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려는 취지가 있었다.
처음 유럽 순방 일정을 세웠을 때 레이건은 너무 음울해 보일 수 있다는 이유로 집단수용소 방문을 고려하는 일에도 난색을 표했었다. 더구나 비트부르크 국립묘지는 히틀러의 직속부대이며 살인마들로 악명을 떨친 무장친위대 병사 49명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포로수용소를 관리한 부대도 이들 무장친위대였다. 집단수용소 방문까지 거절한 마당에 비트부르크 묘지를 참대한다면 자칫 레이건이 나치를 경외하고 있으며, 나치와 맞서 싸운 연합군 병사들이나 그들에게 목숨을 잃은 600만 유대인들을 비롯해 전사자들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춰질 소지가 다분했다. 비트부르크에 무장친위대 묘역이 있고 묘지 참배가 레이건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라도 방문 일정을 취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게다가 레이건은 독일의 강제 포로수용소로 악명이 높았던 다하우(Dachau) 수용소나 베르겐-벨젠(Bergen-Belsen) 수용소를 방문하는 길에 비트부르크 묘지를 잠시 들른다는 대안도 거절했다.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어리석게도 고집불통의 태도로 일관하고 도덕적으로 둔감하게 굴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레이건이 상징적 제스처를 곧잘 취하기로 유명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행동은 역겹기까지 한 일이었다. 《더뉴리퍼블릭》은 이렇게 적고 있다. "2차 대전 종전 40주년이라는 특별한 시기를 맞이하여 애도와 화해의 기념식을 열 필요가 있기는 하다. 이런 기념식들은 본디 상징적인 제스처이다. 하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저녁 뉴스에 보도될 내용만을 신경 쓰느라 상징과 홍보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온갖 비난과 이에 대한 해명이 무수히 나돌기는 했다. 전직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이며 레이건의 이미지메이커이기도 한 마이클 디버(Michael Deaver)가 사전 답사 차 비트부르크 국립묘지를 방문했을 때 눈 때문에 나치의 묘석을 보지 못했다든가, 답사팀이 두 번째로 들렀을 때에는 폭우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차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든가,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전 비서실장과 도널드 리건(Donald Regan) 전 재무부장관이 순방일정을 답는 동안 서로 일을 바꿔하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식의 해명이 나돌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어떻게 그런 실수가 벌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차한 변명일 뿐이었다. 백악관이 실수를 했다는 것이 알려졌는데도 대통령이 기존 일정을 여전히 고집하자, 더군다나 포로수용소 방문을 추가하는 것마저도 계속 거부하자, 이런 해명도 다 쓸모없게 되고 말았다. 파이던지기 싸움이 벌어지는 한복판을 흰 양복을 입고 걸오도 얼룩 하나 묻히지 않을 것 같아 보여서 한때 '테프론 대통령(테프론은 화재에 강한 합성수지를 뜻한다. 테프론 대통령이란 자기보호를 잘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언론과 야당의 비판에 일비일희하지 않고 사소한 비단 정도는 우습게 보는 대통령이란 의미이다. - 옮긴이)'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레이건이 이제는 얼룩질대로 얼룩진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레이건의 커뮤니케이션이, 그가 말한 내용과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 모두가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레이건의 위기였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연대기 편저자이며 레이건으로부터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신임 관장직을 직접 임명 받은 엘리 위즐(Elie Wiesel)은 4월 19일 백악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대통령으로부터 미의회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위즐은 공식 석상에서든 사석에서든 레이건이 비트부르크 국립묘지 참배를 취소하도록 설득하려 백방으로 노력해왔다. 위즐은 이번 기념식을 이용해서 대통령에게 그리고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자신의 뜻을 직접 전달하고자 심금을 울리는 연설을 했다. 연설문의 일부 내용은 이러했다.
"이 자리를 빌려 그간의 사건들에 대해 대통령께 존경과 경외의 뜻을 담아 한 말씀 전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일전에 마련했던 자리에서 대통령께서는 비트부르크 국립묘지에 나치 무장친위대의 묘소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저희에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께서는 전혀 모르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방안을, 다른 길을, 그도 안 되면 또 다른 적절한 방안이나 장소를 찾아보시기를 대통령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곳은 대통령이 있을 장소가 아닙니다. 대통령께서 있을 장소는 나치 무장친위대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옆입니다.
이것은 정치의 문제를 떠나 인류애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기에 이 둘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나치 무장친위대의 악랄함을, 그들의 손에 죽어간 희생자들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제 친구들이자 제 부모들이었습니다."
엘리 위즐의 감동적인 연설에도 레이건은 비트부르크 방문을 취소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포로수용소 방문을 일정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한 발 늦은 대처였다. 레이건이 순수한 의도로 포로수용소를 방문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는 중에 레이건이 헬무트 콜(Helmut Kohl) 서독총리에게 묘지 참배 일정을 취소해달라고 직접 부탁했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콜이 레이건의 부탁을 거절하고 묘지 방문을 고집했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게다가 레이건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고 위기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그가 서독을 방문하는 주된 이유가 경제정상회담 참석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에 간섭하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집스레 말한 레이건의 행동은 다음과 같은 결과들을 초래했다.
■ 전 세계에 대고 자신의 행동에 간섭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미국인들이 아니라 독일인들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 사실상 전국 모든 퇴역군인 단체의 분노를 샀다.
■ 레이건을 비난하고 비트부르크 묘지 참배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 즉 신문 칼럼니스트, 사설 작가, 유대출신 지도자들, 의회, 소련 등에게 상당한 무기를 쥐어주었다.
■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아니라 죽은 무장친위대 병사들의 감정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총체적인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실패였다. 그리고 《더뉴리퍼블릭》은 "결국 홍보에 기대 살아 온 대통령, 홍보로 죽게 될 것이다."고 보고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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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티븐 핑크 저, 조성숙 옮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위기관리의 대가, 스티븐 핑크의 명저』(미디어윌, 2013)
우리나라로 치면 미 대통령이 태평양전쟁의 진정한 화해와 미래지향적인 미일관계를 명분으로 봉헌된 전사자들 중에 학살 가담자가 있는 일본군 전사자들을 모신 신사를 참배한 격입니다. 레이건이 무슨 생각으로 참배를 강행했는지는 아직 찾아본게 없어서 모르겠지만, 독일국방군과 무장친위대가 "아시아적 야만" 무신론 볼셰비즘에 맞서 기독교 유럽을 수호했다는 신화가 영향을 끼친게 아닌가 하고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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