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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방과 후 상왕 라이프 -53-

ㅇㅇ(14.48) 2021.07.13 01:37:59
조회 665 추천 22 댓글 4
														


"대명국(大明國) 건주좌위지휘사 동산(董山)의 아들 타라(妥羅)가 대상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어쭈? 이놈 봐라?'


타라가 올린 인사는 첫마디부터 이방과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동산이 명나라로부터 건주좌위지휘사의 관직을 받은 게 사실이라곤 하지만, 굳이 조선의 대상왕의 앞에서 대명(大明)을 강조한 것은 그 의도가 너무나 뻔했던 것이다.


'명나라의 관원을 지내는 몸이니 조선을 상국의 예로 섬길 생각이 없다는 뜻이렷다? 맹가첩목아의 아들놈이 제법 많이도 컸구나!'


동산이 맹가첩목아의 아들이니, 그 아들인 타라는 맹가첩목아의 손자였다. 과거 맹가첩목아가 전주 이씨 가문의 가병 노릇이나 하며 이성계에게 벌벌 기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이방과의 입장에서는 옛 부하의 아들이랑 손주 놈들이 출세 좀 했다고 맞먹으려 드는 꼴이 가소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 이놈! 무례하구나! 감히 명국의 관직을 내세워 대상왕 전하를 겁박하려 드는 것이냐!"


타라의 자기소개를 들을 때부터 그를 곱지 않은 눈초리로 노려보던 신숙주가 언성을 높였다.


"어허, 선생. 진정하시오. 삼척동자도 제 잘한 일은 남들에게도 알려 칭찬받고 싶어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명나라의 관직 아니오? 과거 우리 이씨 가문의 품으로부터 독립해나간 뒤로 이리 어엿하게 입신양명하여 돌아왔으니 반겨줘야 마땅하지 않겠소?"


이방과가 제지하자 신숙주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고, 타라의 표정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긴 했으나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기껏 명나라라는 뒷배를 내세워 기선제압에 나서려 했는데, 이방과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집 나간 탕아가 돈 좀 쥐고 돌아온 수준으로 평가절하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 타라라고 했느냐? 풍채가 크고 단단한 것이 힘깨나 쓰겠구나. 올해 몇 살이냐?"


"소인이 갑인년(1434년)에 태어났사오니 올해로 스물이옵니다."


타라가 말하자 이방과는 껄껄 웃었다.


"오, 그럼 효옥이랑 동갑이로구나. 내가 만나본 스무 살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니 분명 갑인년 그 해가 아주 상서로웠던 모양이야. 하하하하!"


이방과가 껄껄 웃는 사이 성효옥과 타라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저건 또 뭐야? 어디서 말발굽에 걷어차여 똥간에 얼굴 처박힌 듯 생긴 놈이 감히 전하께 대들어? 여기가 연회장만 아니었어도 저놈을 그냥 확...!'


은근히 이방과에게 기어오르려 드는 타라를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성효옥은 이를 갈았다.


'범상치 않은 자라길래 누군가 했더니 계집이었어? 비실비실 깡마른 게 못생기기만 해 가지고 어디서 눈을 부라려? 확 눈 안 깔아?'


속으로 상대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타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성효옥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선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거친 초원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포동포동하고 살집 있는 여인을 미인으로 여겼기에 그들 기준으로는 성효옥처럼 호리호리한 여자는 '추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하하, 내 그대를 보니 옛 생각들이 나는구나. 그대의 조부와는 참 좋은 추억들이 많았지. 함께 말을 달리며 누볐던 전장은 셀 수도 없이 많으며, 같이 마신 술병들을 쌓으면 그 높이가 저 백두산쯤은 아득히 능가하고도 남을 정도니 말이다."


"저도 부친으로부터 조부가 조선국 태조대왕 전하께 많은 도움을 드렸다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사옵니다. 비록 소인이 태어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름난 용장이었다고 들었사옵니다."


'귀엽게도 노는구만.'


이방과는 내심 조소를 흘렸다.


제 할아버지가 과거 이성계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축소하려 드는 타라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다른 여진족들 앞에서 망신살 뻗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아마도 아까 명나라를 언급했을 때 이쪽에서 적당히 굽혀줄 줄 알았나 보지? 웃기지 마라. 그런 알량한 건주좌위지휘사 직책 정도로 숙여줄 거였으면 애초에 내가 이 북도 땅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이 애송이 놈아!'


속으로는 상대를 비웃으면서도 일단은 외교석상이니만큼 이방과는 점잖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맹가첩목아의 손자가 무슨 일로 이리 반가운 발걸음을 해주었는고?"


시작부터 주도권을 빼앗기고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것에 내심 초조해져 있었던 타라였지만, 어쨌든 사신단의 장으로서 본연의 임무는 달성해야 했기에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소인이 온 것은 대상왕 전하께서 북방으로 친림하신 것에 마땅히 예를 표하기 위함도 있었사오나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었사옵니다. 그것은-"


하지만 타라의 말은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대상왕 전하께 예를 표하기 위해서라... 하하하, 농치곤 형편없구나. 대상왕께서 북도로 왕림하시기 훨씬 전부터 행차하신다는 소식을 북방 각지에 전하였거늘 이제서야 인사를 올리러 왔단 말인가? 두만강 건너 지척에 사는 그대들이 어찌 송화강과 흑룡강, 요동 땅에서 온 부족들보다 더 늦게 올 수 있단 말인고? 이게 그대들 건주좌위에서 말하는 상전을 모시는 도리란 말인가? 아랫것들이 이 모양이니 그대의 아비 동산도 고생이 많겠구나."


신숙주가 조롱조로 말하자 성효옥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맞장구를 쳤다.


"호호호! 왜 아니겠사옵니까? 조선의 일개 아녀자들도 상전이나 웃어른을 공경하고 인사드릴 줄 알거늘 어찌 한 부족의 대장부란 자들이 이 모양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나이다."


신숙주와 성효옥이 얄밉게도 쿵짝이 맞아가며 약올리자 타라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겁을 먹었거나 했기 때문은 아니고,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저 연놈들은 또 뭐야!'


처음부터 띠껍게 나오던 신숙주도 신숙주였지만, 귀에 거슬릴 정도로 간드러지게 웃는 것이 누가 봐도 일부러 저렇게 웃고 있다는 게 뻔하게 보이는 성효옥 때문에 하마터면 평정심을 잃을 뻔했던 타라는 심호흡을 내쉬며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침착하자!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잊어선 아니 된다! 애초에 대상왕의 애첩(?)이나 부하 따위랑 기싸움이나 벌이려고 온 게 아니지 않는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타라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흠 잡을 곳 없는 완벽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소인의 부친도 조선과의 옛 정과 대상왕 전하를 흠모하는 마음이 컸으나 공교롭게도 요동도사를 접견할 일이 생겨 잠시 부락을 비웠었기에 소식이 늦은 것뿐이옵니다. 결코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주시지요."


그 와중에도 조선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조부 맹가첩목아 당시의 '옛 정'에 불과하다고 선을 긋고 있으니 참으로 지극한 일관성이었다.


신숙주가 뭐라 한 마디 더 하려 했지만 이방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좋다. 명색이 한 부족을 책임지는 수령이 아니더냐? 공사가 다망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지. 그래, 방금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했으렷다? 어디 한 번 들어보자꾸나."


이방과의 허락이 떨어지자 타라는 허리를 한 번 숙여 공손히 예를 표했다.


"예, 전하. 소인의 부친은 이 기회에 조선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어하옵니다."


"뭘 어떻게 명확히 하자는 말인가?"


이방과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타라는 그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으며 대답했다.


"앞서 전하께서 짚어주셨듯이 전하의 가문인 이씨 왕가와 저희 동씨 일문은 과거 동북면에서 동고동락하며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분을 다졌었지 않았사옵니까? 이제 두만강 남쪽의 조선 땅은 이씨 왕가가, 북쪽은 소인의 가문이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 어찌 장쾌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타라는 이방과의 눈치를 살피는 걸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발언을 이어갔다.


"부친이 절 보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옵니다. 이제 바야흐로 조선과 우리 건주좌위가 두만강을 경계로 북방 천하를 양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고 교류를 지속한다면 만대에 걸친 평화를 이룩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다행히 소인의 부친이 명나라의 관직을 지내고 있으며 요동도사와의 교분도 두둑하니 명나라를 증인으로 내세워 화평을 맺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흐하하하하하하!"


타라의 말을 들은 이방과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그 동산이란 놈이 제법 먹물 좀 먹은 모양이로구나! 맹가첩목아도 잔머리는 꽤 굴릴 줄 알았지만 천생 무장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그놈이 아들 하나는 제대로 키웠어! 하하하하!"


"화, 황공하옵니다..."


마치 대호가 포효하듯 사방을 울리는 이방과의 웃음소리를 들은 타라는 방금까지의 당당함을 잃고 약간 불안해진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그도 나름 건주좌위를 물려받을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상대가 웃는 것은 결코 즐거워서 그러는 게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방과는 웃음을 그치자 마자 건주좌위의 요구를 수용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만대의 평화라! 그거 좋지! 암, 좋고말고! 무릇 전쟁이란 것은 남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내 백성들의 목숨까지 해치는 것일진대 누군들 그걸 바라겠는가? 하지만 말이야! 모든 일에는 도리와 순서가 있는 법일세. 자네의 조부가 내 부왕이신 태조대왕께 견마지로의 충정을 다하였던 일은 천하가 다 알고 있으며, 지금도 이렇게 무수히 많은 부족들이 아조의 경내로 들어와 입조하고 있지 않나? 그대의 부족이 두만강 북쪽을 평정했다기에는 어폐가 심한 듯 한데?"


"하, 하오나..."


타라가 뭔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이방과는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정녕 북방의 평화를 바란다면 그대들이 다시금 아조의 번호로 들어오는 것이 순리에 맞는 일이지 않겠나? 그러면 태조대왕과 맹가첩목아가 맺었던 군신의 의리도 되살리고, 두만강 남북이 하나되어 세세토록 전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그대가 말한 만대의 평화를 온전히 실현시킬 방도가 아니겠는가?"


'제기랄...!'


대상왕을 설득하려다 오히려 자승자박한 꼴이 되고 만 타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론 안 된다! 이번 협상을 성공시켜야 나의 후계자 자리가 공고해질 수 있단 말이다!'


아직 어린 막내는 그렇다치더라도 둘째 동생인 타의모(妥義謨)가 벌써부터 차기 수령 자리에 대한 야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었기에 조금의 허점도 노출되어서는 안 되었다.


아버지 동산으로부터 조선에 신속하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라는 당부를 들었던 타라는 결국 또 다시 명나라를 방패로 쓰기로 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의 말씀은 천하의 대세와는 부합되지 않사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뭇 부족의 수령들 역시 저마다 명 조정의 관인을 받고 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렇게 조선의 경내에 운집한 것 자체만으로 천조의 권위를 능멸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옵니다. 부디 대상왕 전하께서는 소인의 충언을 귀담아 들으시어 명과 조선, 여진 제족 간의 화평을 이어나가소서. 이는 소인이 천하의 호걸이신 전하를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옵나이다."


타라는 말을 마치고 슬쩍 뒤돌아 연회장에 모여있는 여진족들을 노려봤다.


"아니! 저, 저놈이!"


"크, 크흠!"


몇몇 수령들은 건주좌위의 수령조차 아닌 새파랗게 젊은 놈이 눈을 부릅뜨는 것에 불쾌해했으나 대다수의 부족들은 타라의 시선을 애써 피하느라 바빴다.


타라의 말대로 북방에서 명나라의 권위는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토목보의 변 이후로는 이만주가 날뛰는 것 하나 제대로 통제 못 하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긴 했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건주위와 건주좌위의 영역 사이에 끼어있다시피 한 모련위의 수령 낭발아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반조선 노선을 걷고 있는 건주위에 이어 건주좌위까지 적으로 돌변한다면 모련위의 존속은 누란지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니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호오! 이놈도 예삿놈은 아니로구나!'


이방과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말 몇 마디만으로, 그것도 무려 대상왕이 지켜보고 있는 바로 앞에서 조선으로 향하려는 여진족들의 마음을 동요하게 만들었으니 그 깡이 보통내기가 아닌 셈이다.


이방과는 짐짓 한 발 물러나듯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말끝마다 명나라가 어쩌구 저쩌구 해대는데 명나라 아니면 입에서 말이 안 나오기라도 하는 건가? 아조와 그대들 건주좌위의 향후를 논하는 자리이건만 어찌 그리 소심하게 나오는가?"


이방과의 말에 타라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별 수 있겠사옵니까?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야지요. 그리고 그 하늘이 명나라를 가리킨다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옵니까?"


"저놈이...!"


신숙주가 발끈하여 나서려 했지만 이방과는 다시금 손짓으로 물러나게 했다.


"하늘이라... 뭐,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천하의 그 누가 대명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겠느냐? 내 너의 충언을 감사히 받도록 하마."


"망극하옵니다, 전하!"


타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다른 여진족들은 놀라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대상왕 전하께서 저 새파란 애송이의 말에 굴복하셨단 말이야?!"


"마, 말도 안 돼..."


부족을 막론하고 여진족들의 얼굴에 서린 당혹과 실망의 감정을 읽어낸 신숙주는 다급한 표정으로 이방과에게 속삭였다.


"전하,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야인들이 동요하고 있사옵니다! 속히 저 타라란 자를 내치시어 야인들의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막아야 하옵니다!"


하지만 이방과는 신숙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선생은 가만히 계시오."


그러더니 이방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타라를 내려다봤다.


"남들은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말을 아낄 법도 한 자리이거늘 이토록 배포가 두둑하니 과연 용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맹가첩목아의 손자답구나. 그대의 조부와의 옛 인연도 있고, 또 이렇게 먼 길을 왔으니 어찌 그냥 돌려보낼 수 있겠느냐? 그대도 연회에 동석하도록 하라."


"전하께서 직접 초대해주시는데 어찌 사양할 수 있겠나이까? 기쁜 마음으로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방과가 좌우에 명하여 타라가 앉을 자리를 준비하게 했는데 그곳은 대상왕이 앉은 상석은 물론이고 연회장 안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구석진 곳이었다.


'비위가 상하셨겠지, 암!'


타라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며 속으로 이방과를 비웃었다.


'여러 부족들 앞에서 망신을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일부러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말석을 내준 것일 터. 하지만 당신이 내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란 것도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는 말이지. 아무리 태연한 척 해도 명나라를 거스를 배짱은 없으니 이런 치졸한 수라도 쓰지 않으면 나를 어쩌지도 못한다니... 이성계의 아들이라더니 그 핏줄이 아깝구만!'


타라는 문득 그의 아버지 동산을 떠올렸다. 아버지 역시 이성계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할아버지 맹가첩목아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무용담을 들어온 영향 탓인지 이성계라는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벌벌 떨곤 했다.


하지만 타라의 세대는 이성계라는 신화에서 눈을 돌린 지 오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법 대단했던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이미 무덤 속에 묻힌 지 수십 년도 더 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또 없다는 게 타라의 지론이었다.


'게다가 그 이성계도 결국 명나라에는 제대로 큰소리 한 번 못 치지 않았던가? 이제 세상은 바뀌었어! 조부님 대에는 이성계가 하늘이었겠지만, 작금의 하늘은 명나라다! 조선은 이미 그 기회를 놓친 거라고, 흐흐흐!'


변설로 이방과를 꺾음으로써 그간 콧대 높던 조선과 이성계의 망령에게 한 방 먹여줬다는 승리감을 만끽하며 타라는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이제 돌아가면 아버지께서도 내 공을 인정하시고 날 유일무이한 후계자로 지명하시겠지?'


나중에 들 축배를 미리 드는 셈치고 타라는 술상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었다.


쉬익!


쨍그랑!


"어...?"


타라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방금 그는 잔에 술을 따르려고 술병을 집어들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빠르게 스치듯이 지나간 듯 하더니 그가 쥐고 있는 술병의 목 바로 아래 부위부터 깔끔하게 절단되어 떨어지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던 것이다.


창졸간의 일이라 멍해진 것도 잠시 옆에서 둔탁한 무언가를 때리는 것과도 같은 팍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그가 앉아있는 곳 바로 옆에 서 있는 기둥에 박힌 화살 하나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타라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 그럼...바, 방금 그게 화살이었다고...!?'


"괴, 굉장해!"


"역시 대상왕 전하셔! 옛날의 어르신을 쏙 빼닮으셨다니깐!"


주변의 다른 여진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타라는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하려고 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대상왕이 있는 상석과 이곳은 못해도 이백 보는 가볍게 넘을 정도로 떨어져 있다. 하물며 내 근처에는 등불조차 없으니 이 캄캄한 야밤에 날 보는 것은 무리...!'


하지만 상석이 있는 쪽을 돌아본 타라는 이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상석에서 홀로 우뚝 선 이방과(키와 덩치가 워낙 커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가 막 활시위를 당긴 자세로 이쪽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던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유목민 뺨치는 시력 덕에 타라의 기겁하고 있는 모습을 원거리에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던 이방과는 참으로 오랜만에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간나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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