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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년전쟁. 잉글랜드의 역습과 크레시 전투

prevo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9.02 1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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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로이스 해전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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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잔혹하고 끔찍했다. 바다 위에서는 후퇴도 도망도 불가능하며 오직 운명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사력을 다해 싸우기 때문에 바다에서의 싸움은 땅에서의 싸움보다 훨씬 사납고 격렬하기 때문이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40년 6월 24일 슬로이스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함대 간의 대규모 해전이 발생했다. 이 슬로이스 해전에서 플랑드르의 도움을 받은 잉글랜드 해군은 프랑스 함선 190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망디에서 소집된 함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전투에서 생존한 노르망디 지방 유력자들은 이제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대가로 많은 토지를 분배받기는커녕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의 최전선에서 침략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게다가 크레시 전투를 시작으로 잉글랜드군이 북부 프랑스의 주력군을 오는 족족 야전으로 갈아버리면서 거의 20년 동안 프랑스 왕실은 노르망디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수 없었고, 순망치한으로 일드프랑스의 방위도 크게 약화되었다.




2. 2차 투르네 포위전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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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프랑스 왕과 그의 군대는 더운 날씨와 주둔지 근처의 도축장에서 풍기는 악취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의 도시인 투르네를 지켜냈으며, 적의 거대한 군세가 많은 시간과 비용만 소모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과 그의 동맹들은 스스로 프랑스 왕국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프랑스 왕의 눈앞에서 그의 영토를 불태우고 파괴하는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고, 그들이 지역의 가장 훌륭한 도시 중 하나를 포위한 채 주변 마을들을 유린한 뒤에야 비로소 프랑스 왕이 휴전을 간청했기 때문에 그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고 파리로 돌아갔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양측 모두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으므로, 이 사건 이후 마을의 선술집에서든 귀족들의 응접실에서든, 진짜 군인이든 또는 그저 스스로 군사적인 문제를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든, 의견이 부딪힐 때마다 많은 토론과 논쟁이 벌어졌다.

-장 르 벨의 연대기



생오메르 전투와 투르네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잉글랜드의 진격을 저지했다. 결국 1340년 9월 25일 양국은 9개월 동안 휴전하기로 한다.


10월 28일 에드워드는 헨트 시민들에게 보내는 사과문을 써둔 채 몰래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도망쳤다. 빚쟁이들이 프랑스 왕처럼 갤리선 함대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배를 쨀 수도 없으니 이제 담보를 잡힌 빚만 갚고 나머지는 무시해도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피렌체의 대표적인 은행인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이 10년 이내 모두 파산한다.


문제는 그렇게 도망쳐서 도착한 국내에서도 막대한 액수의 빚만 남기고 사실상 실패로 끝난 원정에 대한 남작들과 평민 대표들의 불만이 엄청났으며, 의회는 에드워드를 그의 아버지처럼 당장 폐위하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거만하고 욕심 많은 도박꾼일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았고, 전쟁의 성과를 최대한 잘 포장해서 선전하는 동시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깔끔하게 양보해서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만들어 낸 속도만큼 놀랍도록 빠르게 수습한다.


하지만 그처럼 전통 있는 왕권의 상속인이 아니라 벼락출세자에 불과했던 헨트 상인 야콥 반 아르테벨데의 독재 체제는 대규모 군사작전의 연이은 실패로 사실상 끝이 났으며, 플랑드르 시민 정부는 세 주요 도시의 유력자들의 과두정 체제로 서서히 전환된다. 1343년부터 헨트 시는 아르테벨데의 정적들에게 거의 장악되지만 헨트를 견제하기 위한 나머지 두 도시 유력자들의 지원으로 그는 간신히 권력과 목숨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르테벨데는 결국 1345년 5월 헨트 시의 방직공 길드와 축융공 길드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시작된 내전에 휩쓸리면서 7월 17일 방직공 길드의 폭도들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에드워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과두제 정부와 플랑드르 민중의 여론 모두 여전히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다.




3. 낭트 포위전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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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로 괴롭히지 말고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브르타뉴 공작 장 3세의 유언



1341년 4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공작령에서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장 3세의 조카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배다른 동생인 장 드 몽포르간의 후계 대결이 발생했다.


장 3세는 새어머니가 낳은 동생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조카인 잔을 후계자로 키웠다. 그리고 그녀를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브르타뉴 동부의 친프랑스파 귀족들의 지지를 구했다. 그 결과 공작이 죽은 시점에서 잔과 샤를은 이미 브르타뉴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의 신하를 자처하며 프랑스 궁정 문화를 애호하는 귀족들이 정작 프랑스 왕실의 합법성을 보증하는 살리카법을 거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으므로 몽포르에게도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있었다. 프랑스 왕도 자신의 조카의 아내라는 이유로 여성의 계승권을 지지하고 남자 형제 상속인을 반대하며 내전에 개입할 명분을 바로 찾을 수는 없으리라 예상되었다. 관건은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몽포르 자신이 브르타뉴 공령의 실질적인 통치자임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계산하에 몽포르는 공작이 죽자마자 브르타뉴의 수도인 낭트를 기습적으로 점령했고 프랑스 왕실이 비로소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8월 중순에는 이미 브르타뉴 전역의 요충지를 대부분 장악했다.


몽포르의 예상대로 필리프 6세는 처음에는 중립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하지만 몽포르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대륙에서 잉글랜드의 새로운 동맹이 생길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를 지원해 내전을 조기에 종결하려 했다. 그러자 모든 계산과 노력이 무색하게도 프랑스군이 포위공격을 시작한 지 일주일만인 11월 초 낭트를 점령하고 몽포르를 포로로 잡았다.




4. 엔봉 포위전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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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되었지만 수비군은 용감히 저항했고, 포위군은 시체를 쌓으며 뒤로 밀려났다. 프랑스 영주들은 군사들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여러분은 여성이 이룩한 가장 대담하고 놀라운 업적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이 용감한 백작부인은 완전무장한 채 전마에 올라타고는, 공격받지 않은 성문에 배치돼 있었던 300명의 중장병들에게 말에 오르라고 지시한 다음, 이 기병대를 이끌고 나가 종자와 하인들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포위군 주둔지에 과감하게 돌격했다. 그들은 눈앞의 모든 적을 죽이며 사방에 불을 질렀고, 곧 진영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장 르 벨의 연대기


남작, 기사, 향사들이 서로 창이 닿을 거리까지 접근하면서 백병전이 시작되자 전투는 격렬해졌고 남자들은 서로의 용기를 시험했다. 몽포르 백작부인은 사자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에 바닷바람에 녹이 슨 날카로운 칼을 들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용감히 싸웠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그러나 장 드 몽포르는 사실 몽포르 파벌 중 최약체였고 실세는 그의 아내인 잔 드 플랑드르였다. 그녀는 남편이 패배하고 붙잡힌 뒤에도 서부 브르타뉴의 요새화된 소도시 엔봉에서 강경하게 농성했다.


1342년 5월 성벽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던 프랑스군은 수비군의 반격에 학살당했다. 블루아 파벌과 프랑스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5. 반 포위전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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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왕은 잉글랜드 왕이 최근 브르타뉴에 도착해서 광범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샤를 드 블루아 경이 그에게 지원군이 오지 않으면 모든 마을과 도시가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인 노르망디 공작에게 필요한 모든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며, 귀족과 평민들 모두에게 소집령을 내려 왕세자를 따라 브르타뉴로 원정을 갈 준비를 하게 했다. 귀족과 평민 모두의 호응이 너무 대단해서 도로와 경작지가 군사들로 가득 찼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42년 8월부터 잉글랜드가 몽포르 파벌을 지원하면서 뒤늦게 내전에 개입했다.


11월에는 에드워드가 직접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해 브르타뉴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반을 포위했지만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이 브르타뉴 동부에서 잉글랜드 분견대가 벌인 약탈 행렬은 블루아 파벌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었다.


잉글랜드 주력군의 상륙이 기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는 이에 대응할 시간이 부족했고, 북부 프랑스의 습한 겨울 날씨와 질척해진 도로가 대규모 군대와 보급품의 이동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브르타뉴에 파견된 프랑스군의 숫자는 잉글랜드군보다 많았으나 필리프는 이번에도 역시 에드워드와의 정면대결을 포기하고 1343년 1월 휴전을 체결한다.


이때는 점령지를 전부 탈환한 스코틀랜드군이 국경 지역을 끊임없이 습격하고 있는 등 잉글랜드 측의 상황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필리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프랑스군이 더 불리한 상황이었으므로 잉글랜드와 몽포르 파벌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루브르궁에 연금돼 있었던 장 드 몽포르도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6. 캥페르 포위전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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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많은 브르타뉴 귀족들과 일부 노르망디 귀족들이 올리비에 경과 유사한 죄목으로 파리에서 처형당했다. 대표적으로 말레트르와 영주와 그의 아들, 그리고 나고르 영주, 티보 드 몰리옹 경, 그밖의 여러 브르타뉴 영주들과 열 명의 기사와 향사들이 모두 죽었다. 힘과 용맹을 겸비한 기사들인 앙리 드 말레트르와 경, 기욤 바콩 경, 라 로슈테송 영주, 리샤르 페르시 경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운명을 겪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하지만 브르타뉴인들의 내전은 계속되었다.


몽포르 파벌에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었으나 몽포르 백작부인 잔 드 플랑드르는 엔봉 포위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로 정신이상 증세가 악화되어 일상생활도 불가능했고, 지도자를 잃은 몽포르 파벌은 지리멸렬했다. 몽포르파의 지도부에 속한 인사들 중 많은 이들이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기 위한 무리한 작전 도중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힌 뒤 휴전 조약을 위반했거나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1344년 5월 블루아 파벌이 브르타뉴 남서부의 주요 도시인 캥페르를 점령하고 수많은 주민을 학살했으며 포로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후 12월까지 몽포르 파벌의 지도부에서 그동안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항복했다.


1345년 3월 장 드 몽포르가 프랑스에서 탈출해 잉글랜드로 망명했지만 그때는 이미 브르타뉴 내부의 정치적 기반을 전부 잃은 뒤였다. 1345년 6월 휴전이 끝나자 몽포르는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돌아왔으나, 캥페르를 포위했다가 수비군의 반격에 패주하고 엔봉 시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병에 걸려 사망한다.




7. 오베로슈 전투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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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최고의 모험을 즐긴 더비 백작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45년 6월 휴전이 끝난 뒤, 더비 백작 헨리가 이끄는 맨앳암즈 500명, 웨일스 경보병 500명, 장궁병 1000명 규모의 지원군이 보르도에 도착했다. 그는 8월부터 페리고르의 요충지인 베르주라크를 기습해서 주둔군을 전멸시키고 페리고르의 세네샬과 프랑스의 고위 귀족 10명을 포로로 잡은 뒤 지방의 중심 도시인 페리괴를 포위했다. 마침 레스터 성에서 요양중이던 그의 아버지 랭커스터 백작이 사망하면서 헨리는 랭커스터 백작위를 상속받는다.


10월부터 남부 프랑스의 주력군이 소집을 끝내고 진격해오자 랭커스터 백작은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하지만 10월 21일 오베로슈를 포위한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 분견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키고 백작 1명, 자작 7명, 남작 3명, 배너렛 기사 12명, 툴루즈의 세네샬과 클레르몽의 세네샬, 그리고 수백 명의 기사들과 향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왕세자인 노르망디 공작이 지휘하는 본대가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었고 용병들과 현지에서 징집된 민병대를 제외해도 맨앳암즈만 6000명이 넘는 거대한 군세였지만, 짧은 기간에 반복된 일방적인 패전에 남부 프랑스군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 노르망디 공작은 그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앙굴렘으로 후퇴한 뒤 11월 야전군을 해산한다.


이로써 남부 프랑스에서는 크레시 전투보다 약간 빠르게 잉글랜드군의 야전 무적 신화가 시작되었고, 가스코뉴 전선의 주도권은 완전히 잉글랜드 쪽으로 넘어왔다.




8. 캉 포위전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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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국왕은 가스코뉴 원정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그 이유는 노르망디의 유력자인 고드프루아 드 아르쿠르 경의 조언과 청원 때문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원정이 전략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며 이렇게 설득했다. "노르망디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방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그곳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정복할 수 있으리란 사실에 저의 목을 걸 수 있습니다. 노르망디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적이 없고 프랑스의 모든 기사들은 왕세자를 따라 에귀용을 점령하러 떠났습니다. 폐하, 이 지방은 성벽이 없는 큰 도시들로 가득하고 그곳에서 폐하의 군사들은 앞으로 20년은 봉급을 받지 않아도 족할 부귀를 누릴 것입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46년 7월 12일 에드워드 3세와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점에서 브르타뉴 방면의 동맹인 몽포르 파벌은 전멸 직전이었지만 간신히 숨은 붙어있었고, 가스코뉴 방면은 (전쟁 초기부터 의회에서 지적한 대로) 잉글랜드 본토가 무방비로 노출될 위험이 있었지만 작년부터 랭커스터 백작이 펼친 활약으로 활로가 열렸다.


따라서 에드워드의 선택지는 이제 네 개였다. 주력군을 이끌고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에 상륙해서 빈사상태인 몽포르 파벌을 확실히 부활시키는 것. 플랑드르에 상륙해서 수많은 도시 민병대와 함께 북부 프랑스를 휩쓸면서 프랑스의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는 것. 가스코뉴에 상륙해서 남부 프랑스군의 잔당을 빠르게 분쇄하고 남쪽에서의 공격에 전혀 대비가 돼 있지 않은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는 것. 마지막으로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해안 지역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노르망디, 플랑드르, 가스코뉴 세 방향에서 프랑스를 압박하는 것.


에드워드는 결국 마지막 안을 선택했지만, 출항 직전 플랑드르 전선에서 교란작전을 벌였고 출항 직후 8일 동안 누구도 잉글랜드를 떠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는 등 보안에 철저히 신경썼다.


그러나 필리프는 잉글랜드군의 노르망디 상륙 계획을 예상하고 해안 요새들에 주둔군과 순찰대를 편집증적으로 깔아놓았다. 설령 첩자들로부터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더라도 당장 파리와 일드프랑스에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노르망디 상륙이었으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운이 더럽게 없게도 잉글랜드군이 라 우그 인근 해변에 상륙하기 고작 3일 전 요새에 배치된 제노바 용병들이 임금체불에 대한 불만으로 탈영했고, 상륙 당일은 용병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한 민병대 소집 명령이 막 내려진 다음이었다. 얇고 넓게 펼쳐진 방어선이 하루만에 뚫리자 노르망디를 가로지르는 잉글랜드군의 진격을 막을 방법이 더는 없었다.


에드워드는 상륙 후 며칠 동안 군대의 약탈을 금지하고 노르망디의 주요 귀족들과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며 반응을 지켜봤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슬로이스 해전과 그밖의 여러 승리들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 유력자들이 가진 잉글랜드군에 대한 두려움과 프랑스 왕실에 대한 실망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적어도 해안을 따라 넓게 흩어진 프랑스군이 집결하기 전까지 1만도 안 되는 군대로 점령지를 안정화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에드워드는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고 프랑스의 주력군을 야전으로 끌어내기 위해 기마약탈을 자행하며 플랑드르 방향으로 후퇴했다.


1346년 7월 26일 잉글랜드군은 노르망디에서 루앙 다음으로 큰 도시인 캉을 점령하고 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으며 200여명의 기사와 향사들과 수많은 도시 유력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9. 블랑슈타크 전투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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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은 적들이 강둑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맹렬히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면서 잉글랜드군 선발대의 상당수가 강물 위에서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강을 건넜고 프랑스군은 수많은 시신을 전장에 남긴 채 패배하고 도망쳤다. 곧 후속 부대들이 수레와 짐마차와 짐말을 끌고 아무런 방해 없이 여울목을 건넜다.

고귀한 에드워드 왕이 너무 늦기 전에 길잡이를 찾지 못해 바로 그날 강을 건너지 못했다면 필리프 왕은 잉글랜드군을 궁지로 몰아넣고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을 이 사건을 의심의 여지 없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46년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결국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인 푸아시까지 진군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왕국의 수도이자 기독교 문명의 심장부가 공격받는 초유의 사태에 시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필리프가 급하게 긁어모은 야전군은 맨앳암즈 8천과 제노바 용병 6천이 전부였다. 그는 잉글랜드군과 대등한 전력으로 야전을 벌이는 도박을 감행하는 대신 푸아시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 다리를 파괴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고작 하루만에 임시교량을 설치해 센강을 건너 파리 남쪽 교외에 이르렀다. 이에 필리프는 생클루 다리를 부수며 센강 북쪽으로 도망쳤다.


잉글랜드군을 공격할 용기는 없으나 그렇다고 파리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계속 이렇게 추태를 부릴 수도 없었던 필리프는 다시 파리 남쪽 교외로 진군해 부르라렌 인근의 고지대에 진을 쳤다. 그리고 에드워드에게 여기서 야전으로 한판 붙자며 도전장을 보냈다.


서로 입장이 바뀌자 똑같이 허세를 부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에드워드는 '필리프가 숨어서 안 보이기 때문에 대신 그가 신민이라고 부르는 반역자들을 처벌하러 가겠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낸 뒤 다시 푸아시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적어도 정신승리에서는 에드워드에게 지지 않는 필리프는 발빠르게 파리 시내로 돌아와, 공포스러운 야만인들을 도시에서 쫓아낸 국왕의 위엄에 감격한 시민들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비겁함을 규탄했다. 그리고 플랑드르 국경 방향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면서 계속 병력을 모았다.


이제 관건은 필리프의 야전군에 충분한 병력이 모이기 전에 잉글랜드군이 솜 강을 건널 수 있느냐였다. 잉글랜드군의 맨앳암즈들은 모두 말에 탔고, 궁수들도 상당수는 승마궁수였으며 나머지는 가볍게 무장했지만 그것은 프랑스군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프는 맨앳암즈와 제노바 용병들의 강행군을 따라올 수 없는 민병대 보병들을 모두 해산했다. 잉글랜드군의 병력이 더 적어서 행군속도에 유리했지만 대신 약탈로 보급을 충당해야 해서 낭비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충분한 전력을 모은 프랑스 주력군에 따라잡히기 고작 몇 시간 전인 8월 24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블랑슈타크라는 이름의 여울목을 방어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솜 강을 건넜다.




10. 크레시 전투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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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브루아와 크레시 사이에서 토요일에 치러진 이 전투는 험하고 잔혹한 싸움이었다. 수많은 용감한 무훈이 전해지지 못한 채 이곳에 묻혔다. 저녁 무렵이 되어갈 때는 많은 기사와 향사들이 지휘관을 잃고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도망치지 않고 들판을 떠돌며 곳곳에서 작은 무리를 이루어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금세 격퇴당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346년 8월 24일 잉글랜드군이 솜 강을 건너자 필리프는 추격을 포기했다. 마침 플랑드르군이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호응해 남하하고 있었으므로 두 군대가 합류해서 다시 남쪽으로 역습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필리프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즉시 방어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국경 지역의 소도시 베뒨의 주민들의 결사항전에 플랑드르군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잉글랜드군은 보급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는 8월 26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을 시작해 오전 중 크레시 마을 근처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만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3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며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군 전사자 중에는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친부인 보헤미아 국왕 겸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 등 화려한 인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중세의 어느 시대에도 기병은 무적이 아니었으며, 참호로 보강되었거나 사기 높고 정연한 보병 대열에 의해 기사들의 돌격이 저지되거나 심지어 퇴로가 막힌 채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프랑스군 지휘관들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라딘의 측근인 바하 앗딘의 증언에 따르면 12세기 후반에는 참호를 파고 중무장 보병과 쇠뇌수를 배치한 야전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프랑크인들'의 장기였으며 이들의 완성된 진지를 공격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다.


13세기부터 프랑스가 서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르면서 이전 시대의 보병 전술이 전부 잊혀졌다고 가정해도, 고작 두 세대 전인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은 이미 참호를 낀 민병대 보병들에게 돌격했다가 방직공과 축융공과 소작농들의 군대에 학살당하는 굴욕을 당한 바 있었다.


기사들의 정면 돌격이 대규모 궁수 부대의 사격에 저지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도 다마스쿠스 보병대에 돌격한 프랑스 기병들이 궁병들의 집중 사격을 받고 패주하자 독일 기사들이 '독일인들의 전통적인 방식대로' 말에서 내린 다음 방패를 앞세우며 도보로 진격해 적군을 격퇴한 유명한 사례가 있었다. 십자군이 상대한 지하드군에서 거의 항상 주축을 이뤘던 투르크계 유목민 용병들의 장기는 궁술이었다.


이 시대의 프랑스에는 십자군에 참가해서 투르크나 사라센 궁수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었겠지만, 필리프 6세와 군사 고문들이 1339년 라 카벨, 1340년 투르네, 1343년 말레트르와에서 항상 2~3배 이상의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잉글랜드군과의 야전을 포기한 사실이나, 처음으로 공격을 개시한 크레시 전투에서는 제노바 쇠뇌수들을 먼저 내보낸 것을 보면 적어도 지휘관들은 맨앳암즈가 아무리 많아도 장궁병들을 견제할 궁병 전력 없이는 불리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투 당일과 이후 며칠 동안 프랑스 진영의 주된 여론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제노바 용병들이 배신해서 프랑스군이 대패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리프 6세가 전투 다음 날 아침 아미앵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은 '배신자'인 제노바인들을 보이는 대로 잡아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은 아미앵 시와 인근 지역에서 학살이 이미 시작되고 나서야 철회된다.


이후 생존자들의 증언이 모이면서 제노바 용병들의 명예가 회복되자, 연대기 작가들은 전통적인 수사법대로 무술 훈련 대신 사치스러운 취향에 물든 기사들의 낮은 규율과 상관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오만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병 전술의 정교함을 곧 문명의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로 여긴 19세기 군사학자들은 이러한 기록과 편견에 근거해서 중세 후기의 원시적인 보병 전술에 대패한 중세 기병대는 전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과학적이고 당연한 결론을 내렸으며, 잉글랜드군과 대치하기 직전 행군 대열의 후열이 전열을 앞질러갔다거나 필리프 왕이 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알랑송 백작이 먼저 제노바 쇠뇌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등의 정황에 미루어 크레시 전투를 맹렬하지만 무질서한 '중세식' 기병 돌격이 초기 근대식 보병 대열과 대규모 투사무기에 패배하면서 중세가 상징적으로 종결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이는 정황에 따른 추정일 뿐 크레시에서 모든 프랑스군 부대가 대열을 무너뜨렸거나 또는 무너뜨린 그대로 재편성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돌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나폴레옹 전쟁의 기병전 사례들을 보면 크레시 전투의 후반부처럼 적진 돌파에 실패하고 지휘관을 잃은 기병들이 스스로 재집결해서 다시 돌격하는 것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훈련과 규율 없이 용기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대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한 진정한 원인은 아마도 지휘관들에게 정보와 지식과 그에 기반한 전략 전술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전부 어설프고 불완전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필리프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적과 아군이 가진 전력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잘 알지는 못했다.


즉 야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정예 궁병대를 대규모로 모집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대형 방패인 파비스 없이는 쇠뇌수들이 개활지에서 장궁병에게 맞사격 하면서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보병과 궁병의 지원 없이 완성된 야전 진지를 공격하는 것은 3배 이상 많은 중기병 전력으로도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말 그대로의 뜻이라는 사실은 몰랐으며 그래도 네 번이나 적 앞에서 도망쳤다는 치욕을 감수하기보다는 싸우다 죽는 편이 낫고 운이 좋다면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었건 이 전투로 프랑스의 주력군을 몰살시킨 덕에 시간을 번 에드워드는 다음 침공의 교두보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의 국경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인 칼레를 포위했다.




11. 네빌스크로스 전투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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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인들은 매우 용감하고 강인하며 전쟁의 혹독함을 잘 견딘다.

이들은 잉글랜드를 약탈하고자 할 때, 밤낮으로 하루 20~24리그를 행군해서 그러한 전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종군 민간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말을 타는 것이 확실하다. 기사들과 향사들은 크고 훌륭한 승용마를 타고, 나머지는 작은 조랑말을 탄다.

산악 지형 때문에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빵이나 와인도 운반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단히 검소하기 때문에 빵과 와인이 없어도 설익은 고기와 개울물만 먹으면서 오랫동안 잘 견딜 수 있다. 이들은 냄비나 솥을 사용하지 않고, 가축의 가죽을 벗긴 다음 그 안에 고기를 담아서 조리한다. 그리고 이들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각자 안장 받침 아래에 크고 납작한 돌을 하나씩 넣고 안장 뒤에 귀리를 가득 담은 자루를 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물품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군사작전 중 설익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위장이 상하고 기운이 빠지기 시작하면 귀리를 물에 반죽하고 불에 달군 돌 위에 얹어서 둥그런 비스킷을 만들어 먹으며 속을 다스린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두 말을 타고 있으며 수레나 다른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 멀리 행군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잉글랜드에 침입해서 그 나라를 불태우고 파괴하며 전부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로 많은 소를 약탈한다.

이들에게는 3천 명의 중장병, 즉 철갑옷을 입고 크고 훌륭한 승용마나 준마를 탄 기사와 향사들과, 그 지방의 전통적인 무장을 갖추고 작은 조랑말을 탄 2만 명의 교활하고 용감한 병사들이 있다. 이 조랑말들은 묶어두거나 빗질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타고 다닐 일이 없을 때는 알아서 풀을 뜯도록 황무지나 들판에 풀어놓는다.

-장 르 벨의 연대기



잉글랜드군이 포츠머스에 집결한 1346년 6월부터 이미 필리프 6세가 서신을 보내서 절박한 어조로 도움을 간청했으나,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는 그동안 씹고 있었다. 그는 14년 전 더플린 무어와 할리돈 힐에서의 교훈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프랑스 왕의 요청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다. 게다가 에드워드 3세가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고 9월부터 수만 명의 병력을 소집해 칼레를 포위하게 되면서 잉글랜드 왕이 지휘하는 주력군에게 반격을 당할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10월 7일 데이비드 왕은 결국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한다.


이미 8월부터 첩자들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북부 잉글랜드의 지휘관들은 미리 준비해둔 군대를 신속히 소집했다. 스코틀랜드군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소집이 완료되었고, 10월 17일 새벽 더럼 남부를 약탈하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전초부대 하나가 짙은 안개 속에서 행군 중이던 북부 잉글랜드 야전군과 갑자기 마주쳐 교전을 벌인 끝에 큰 피해를 입고 도망쳤다.


생존자들의 보고를 듣고 북부 잉글랜드 주력군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된 데이비드 왕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석조 십자가 때문에 네빌스크로스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지대로 이동해 진을 쳤다. 곧 잉글랜드군이 도착했지만 양측 군대는 아침부터 오후 한낮까지 몇 시간 동안 서로 노려보며 대치만 하고 있었다.


결국 잉글랜드군 지휘관 랠프 네빌과 헨리 퍼시가 먼저 장궁병들을 보내서 스코틀랜드 전열에 사격을 퍼붓게 했다. 이에 데이비드 왕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지원받은 고품질의 갑옷을 입은 맨앳암즈들을 도보로 돌격시켰다. 하지만 목초지 곳곳에 널린 울타리와 도랑 때문에 대열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장애물을 피해 흩어진 채 화살비를 뚫고 간신히 잉글랜드군 전열에 도달한 맨앳암즈들은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에게 간단히 격퇴당했다.


경무장 승마보병 위주로 구성된 두 번째 대대는 선봉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며 전의를 잃고 도망쳤다. 데이비드 왕의 대대는 고지대에 남아서 잉글랜드군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밤이 되자 후방에 묶어놓은 말을 타고 도망쳤다. 하지만 후퇴는 곧 무질서한 패주로 바뀌었고, 밤새 이어진 추격전에서 많은 패잔병들이 죽거나 붙잡혔으며 데이비드 왕도 결국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결과는 잉글랜드 군대의 대승이었다. 수많은 귀족 지휘관들을 비롯해 지난 십수년 간 치열한 게릴라전으로 발리올을 축출하고 잉글랜드 주둔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낸 스코틀랜드의 고참병들이 이 한 번의 전투로 몰살당하면서 잉글랜드는 브리튼섬 본토에서의 위협이 사라졌다.




12. 라 로슈데리앙 전투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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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배너렛 기사 15명과 평기사 200명과 보병 4000명이 죽었다. 샤를 드 블루아 자신도 포로로 잡혔고 토머스 대그워스 경과 그의 동료들은 모두 구출되었다. 포위군 주둔지의 천막과 지휘본부의 대형 천막들도 전리품으로 수거되었다. 샤를 경은 잉글랜드로 끌려가 고귀한 에드워드 왕의 감옥에 갇혔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47년 5월 샤를 드 블루아는 맨앳암즈 1200명과 쇠뇌수 2000명, 그리고 농촌과 도시에서 징집한 수많은 민병대들과 함께 브르타뉴 북부 해안의 잉글랜드 점령지인 라 로슈데리앙을 포위했다.


3주 뒤 노샘프턴 백작의 부관인 토머스 대그워스가 이끄는 맨앳암즈 300명과 장궁병 400명 규모의 지원군이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착했지만 전력차가 너무 심했다. 그러나 포위군이 도시 성벽을 봉쇄하기 위해 4개 부대로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정찰을 통해 알게 된 대그워스는 그중 샤를의 본대를 노린 야습을 감행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미 야습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포위공격 자체가 잉글랜드 주둔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동이 트기 직전에는 잉글랜드군이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대그워스 자신도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곧 동이 트면서 피아식별이 가능해지자 라 로슈데리앙의 수비대장인 리처드 토트셤이 100여 명의 주둔군과 400여 명의 도시 민병대를 이끌고 출격해 프랑스군의 후방을 덮쳤다. 대그워스는 구출되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역으로 포로로 잡혔으며, 다른 세 방향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던 프랑스군 부대들도 지휘관을 잃은 채 각개격파당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블루아 파벌은 맨앳암즈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으며 지도자인 샤를 드 블루아는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어 런던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지도자가 없는 것은 몽포르 파벌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의 군사력은 애초에 미약했다. 게다가 잉글랜드나 프랑스나 지금은 칼레와 플랑드르 국경에서 총력전을 벌이느라 브르타뉴 방면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그 결과 브르타뉴 내전은 당분간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13. 칼레 포위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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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네 명이 여섯 시민을 왕에게 인도했다. 군대 전체가 모여 있었으므로 당연히 수많은 군중이 다양한 의견을 펼치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떤 이들은 당장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고 또 어떤 이들은 동정심에 눈물을 흘렸다.

고귀한 에드워드 왕이 백작과 남작들과 함께 도착했고, 회임 중이던 왕비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궁금해서 따라왔다. 여섯 시민은 즉시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가장 합당한 군주이시여. 칼레의 거상이자 도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저명한 가문들의 일원인 여섯 시민이 폐하를 뵈옵니다. 저희는 도시와 성채의 열쇠를 바치며 그 모든 권리를 폐하께 양도합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을 겪은 나머지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런 모습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모든 결과를 폐하의 자비에 맡깁니다. 부디 폐하의 고귀하신 성정으로 저희를 가엾게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순간 진실로 모든 영주와 기사들이 감동을 받거나 동정심에 울었지만, 국왕은 마음이 분노로 굳어져 한동안 대답할 수 없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크레시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면서 잉글랜드 본토에서의 모병과 징발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선원 15000명을 포함해 상선 700척이 징발되었고 병사 3만 명이 칼레 포위군 주둔지에 배치되었다. 동맹인 플랑드르 시민 정부의 민병대 모집도 활기를 얻어서 최소 2만 명 이상이 소집되었다.


반면에 프랑스 왕의 위신은 한동안 바닥을 찍었다. 1346년 9월 9일 콩피에뉴에서 필리프는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야전군을 소집했지만 10월 말까지 모인 병력은 맨앳암즈 3000명에 보병 5000여명에 불과했다. 10월 27일 필리프는 결국 칼레 구원을 포기하고 야전군을 해산한다. 유일한 위안거리로 겨울 동안 노르망디와 피카르디에서 보급품을 징발해 칼레 시의 항구로 수송하는 작전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도시가 함락되기까지 11개월이나 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347년 6월 필리프는 간신히 칼레 구원을 시도해 볼 만한 규모의 야전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영토를 통해 남쪽에서 포위군 주둔지를 공격한다면 수만 명의 플랑드르 민병대가 비어있는 후방을 노릴 위험이 있었으므로, 포위군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먼저 플랑드르 영토를 기습해서 베뒨과 카셀을 점령하고 칼레 포위군 진영의 보급로를 차단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두 지역에 대한 기습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포위군 진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졌다. 결국 7월 27일 칼레에 도착한 필리프는 포위군 진영 외곽의 감시초소 하나를 점령한 뒤 정찰병들을 보내 적진을 정탐했다.


정찰 결과 적군의 규모와 전장의 지형 모두 크레시 전투 때보다도 불리했다. 필리프는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전투를 포기하고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제안한다.


그러나 국왕의 군대의 도착에 환호했던 칼레 주둔군과 시민들은 그들이 포위군과 며칠 동안 대치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8월 1일 칼레 주둔군이 항복 의사를 밝히자 필리프는 협상을 중단하고 회군한다. 8월 3일 칼레는 결국 점령되었다.




14. 흑사병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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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대표들이 말했다. "폐하. 우선 전쟁을 하시는 동안 가까운 신하들에게 들은 조언들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 조언에 따른 결과 폐하께선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뷔렁포스, 툰 레베크, 부빈, 에귀용과 그밖의 모든 전장에서 폐하를 따른 군대가 얼마나 크고 훌륭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선 항상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집한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군하셨으나 매번 굴욕적인 휴전을 구걸한 뒤 비겁하게 물러났습니다. 심지어 적은 수의 적군이 왕국의 심장부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347년 파리 삼부회 회의 기록


필리프 왕은 왕국의 고위 성직자들과 남작들과 자치도시 대표들을 소집해서 전쟁을 끝낼 방법을 물었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했다. "거대한 함대와 군대를 소집해 바다와 땅에서 잉글랜드를 공격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일을 성사하기 위해 저희 모두 몸과 재산을 기꺼이 폐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이를 위해 국왕은 왕국의 모든 지방에 대리인을 파견해 각자 일정한 숫자의 병력을 요청했다.

-프랑스 대연대기



하지만 휴전이 끝난 1348년 7월에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대규모 야전군이 북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칼레에 상륙하는 일은 없었다. 지난 10년의 사투에 약 20년치 전쟁세에 달하는 전비를 소모하며 막대한 빚을 남긴 잉글랜드 정부는 이후 몇 년 동안 채무를 상환하면서 잉글랜드 본토와 대륙 점령지의 안정화에 힘쓰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프랑스가 반격할 차례였다. 크레시와 칼레에서 연달아 발생한 참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민들의 전의는 꺾이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오히려 잉글랜드에 대한 증오에 불타올랐다. 1347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평민 대표들은 1339년 라 카벨, 1340년 투르네, 1343년 말레트르와, 1346년 파리 등 최소 네 번 이상 전투를 포기한 필리프의 군사 고문단의 비겁함과 크레시에서 강행군으로 지친 군대에게 성급하게 공격을 명령한 어리석음을 비난하며 잉글랜드 본토 침공 작전을 위한 약 250만 리브르(45~50만 파운드)의 전쟁세를 승인한다. 그렇게 크레시 전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도망치지 않고 무훈을 증명할 증인 하나 없이 스러진 기사들의 희생이 보답받는 듯했다.


하지만 분노한 프랑스 10만 대군이 브리튼섬에 상륙해서 런던을 불태우는 일은 없었다. 1348년 1월 프랑스 남부에 도달한 흑사병이 8월부터 북부 프랑스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자 필리프는 거짓말처럼 또 휴전을 체결한다.




15. 헨트 포위전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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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절단은 헨트로 돌아오자마자 많은 군중 앞에서 잉글랜드 왕의 답변을 발표했다. 어떤 사람들은 "속았다! 속았다!" 라고 외쳤고, 다른 사람들은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 지도자들은 바보고 저희들은 머저리입니다!" 라며 통곡했다.

-질 르 뮈시의 연대기


1348년 8월, 헨트 시민 정부의 토템에서 탈출해 파리로 망명했다가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선대 플랑드르 백작의 장남 루이 드 말이 친프랑스파 망명자들을 이끌고 플랑드르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달리 유능한 정치가였던 신임 백작은 친프랑스파 망명자들의 지도자 역할은 계속 유지한 채, 주민들의 영주로서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플랑드르 공동체의 대의를 지지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선언으로 지난 10년 동안 세 대표 도시들 간의, 그리고 대도시와 소도시, 상인 파벌과 장인 파벌, 방직공 길드와 축융공 길드, 친프랑스파와 반프랑스파 간의 반목으로 은연중에 쌓인 갈등이 폭발하면서 백작령 전체가 내분에 휩싸인다.


결국 9월 17일 세 대표 도시 중 하나인 브뤼헤 시 정부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헨트와 이퍼르는 계속 저항했으나 12월 신임 백작이 에드워드 3세와 중립 조약을 체결하자 이퍼르마저 항복한다. 1349년 1월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가 헨트 시의 성문을 돌파하고 마지막 저항군을 전멸시키며 도시를 점령했다. 그렇게 해서 플랑드르 시민 정부는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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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백년전쟁이 시작된 과정

1. 사우샘프턴 습격 (1338)

2. 라 카벨 대치 (1339)

3. 투르네 포위전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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