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일리야는 피로를 느꼈다. 위장은 텅 비었고, 수분도 말라붙었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다. 때로는 포화를 가로지르기까지 했다. 노얀 칸과 더 이야기를 나눠 현재 계획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랬다간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일리야는 구실거리를 하나 대고선 그대로 물러나 요새 깊숙이에 있는 그녀를 위한 방에 내려갔다. 방에 들어선 일리야는 떨리는 손으로 물잔을 잡으며 장군복의 옷깃에 있는 버튼을 풀어냈다. 의자에 무겁게 내려앉은 채, 눈을 감고 사지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던 일리야는 다음 순간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뭔가 엄청나게 크고, 괴물처럼 위험하며, 그녀의 존재와 같은 영역에 간신히 걸치는 존재. 그런데 같은 방에 그런 존재가 있다니.

“노크하실 수도 있었잖습니까.”

눈을 여전히 감은 채, 일리야가 중얼거렸다.

칸의 답을 들으며,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내용과 말투에 일리야는 자기도 모르게 낄낄거렸다.

“용서하시게. 들어왔을 때 별로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그래서… 어떻게 내 존재를 알릴지 가늠이 안 되었다네.”

눈을 뜬 일리야는 의자에서 느릿하게 자세를 고쳤다. 칸은 먼 벽에 기대어 선 채였다. 딱 하나 있는 변변찮은 조명의 빛 너머, 일리야의 방에 있는 어떤 가구에도 어울리지 않는 거체였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남을 의식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곧 회복할 겁니다.”

일리야가 칸에게 말했다.

“저희, 이야기 좀 하시죠.”

칸은 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적절한 절단을 해 보았더니 여자 앞에 약한 대칸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