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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앙그론 단편] 데쉬아 이후 (1)

말카도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7.04 14:42:14
조회 515 추천 15 댓글 2
														

“이럴 필요가 없어.”


긴 침묵을 깨며, 드레거가 입을 열었다. 워 하운드 군단병들 사이에서 퍼지던 긴장감이 순간 누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타르테스의 감각이 아니더라도 느낄 정도였다. 칸은 느슨한 대열을 짜고 선 전사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표정에서 새어나오는 미묘한 안도를 느꼈다. 마침내, 누군가 말을 꺼냈기에.


“이럴 필요 없다고.”


드레거는 도저히 칸과 문 사이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이래서는 안 되네.”


하지만 그가 드러내는 다른 징후들 때문에, 그의 평온한 목소리가 그저 연기일 뿐임이 드러났다. 칸은 동료 중대장의 호흡이 전투 준비 상태에 버금갈 지경으로 치솟는 것을 알아챘다. 얼굴의 정맥과 삭발한 두피에서 미묘한 경련이 일었다. 눈의 움직임도, 어깨의 미묘한 흔들림도, 그의 육신 깊이 새겨진 근육 이완 루틴의 흔적이 새겨진 채였다.


그의 피부에서는 세척용 젤 내음이 풍겼다. 하지만 그 아래, 아드레날린의 향취가 느껴졌다. 또한, 아스타르테스의 육신이 위험을 감지한 순간 본능적으로 뿜어내는 초인의 에센스 역시 냄새를 풍겼다.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칸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번 이 이중의 문이 열렸을 때 대기실을 뒤덮었던 피의 짜릿한 향취를 대기 순환 시스템이 아직 다 걸러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칸의 혀와 미각 신경이 공기의 피맛을 느꼈다. 칸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함선의 다른 구역이, 그들이 서 있는 이 대기실만큼이나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이곳의 반원형 외벽은 병영 갑판과 연결되어 있었고, 평소라면 드넓은 주랑을 따라 요란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 군화 소리, 하급 시종들과 기술진의 더 부드러운 발소리, 그리고 저 멀리 사격장에서 들려오는 총격, 음속에 육박하는 신형 역장 병기들의 윙윙대는 소리까지. 모두 사라졌다. 드레거 뒤편의 회색 강철 이중문 너머의 거대한 방처럼, 갑판이 고요해져 있었다. 그 낯선 고요함 때문에, 칸의 신경과 근육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칸은 그런 육신을 무시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의 눈빛은 냉정했다.


“8중대장인 내가 현재 최선임 중대장이지.”


칸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계급, 맹세, 황제 폐하. 이 셋을 합치면 내가 뭘 해야 할지 분명해지지. 건방지게 자기가 이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아닐세.”


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포병대의 수석 포격관 자레그였다.


“해결해야 할 문제지, 반드시 해결을, 해결을…”


자레그는 괴로움에 얼굴이 일그러진 채, 침묵하며 문을 가리켜 보였다.


“솔직히… 이 상황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제9중대 소속 스톰버드 전대의 지휘관 호르츠가 입을 열었다. 칸의 눈에 주먹을 쥔 채 떨리는 호르츠의 손이 비쳤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중 하나는 군단을 지휘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의 말이 끊겼다. 문 너머에서, 전차 구르는 소리보다도 더 거대하고, 대포의 폭발보다도 강대한 목소리가 분노 속에서 포효했다. 앞을 가로막은 금속판 때문에 흐릿하고 희미하게 들리는 그 소리 앞에, 워 하운드 군단병들은 침묵했다. 총성, 수류탄의 폭음. 체인액스의 울부짖음, 스톰버드의 포효, 수많은 제노들의 날카로운 노호성까지, 그 앞에서 워 하운드 군단병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고 제 맹세와 명령, 그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감히 저 희미한 노호성 앞에 입을 열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칸을 제외하면 말이다.


“됐다.”


그의 목소리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네들 모두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안다. 모두를 호르츠에게 군례라도 올리도록. 지금 여기서 유일하게 아스타르테스식 배짱을 부리는 놈이니까. 황제 폐하께서 우리의 군주이자 지휘관을 여기 데려오셨다. 우리 혈통이 솟는 원천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지. 우리의 장군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기억하고 있나? 기억하고 있기는 하냐고?”


칸이 둘러보고, 워 하운드 군단병들은 노려보는 시선으로 맞닿았다.


좋은 신호다. 만약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못 했다면, 갈겨버렸을 테니까. 상처투성이 회색 장갑문 너머에서 희미한 노호성이 다시 울러 펴졌다.


“자, 여기 집중하자고.”


칸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이다. 로드 커맨더도, 고깔 투구를 쓴 황금의 커스토디안도, 그 누구도-”


다시 노호성이 터지고, 모두가 등을 꼿꼿이 폈다. 눈은 크게 벌어진 채였다.


“-워 하운드 군단과 군단의 군주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다. 오직 황제 폐하를 위해 우리는 물러설 것이고, 황제 폐하께서는 그분의 지혜를 우리에게 보이셨다. 황제 폐하께서 이 임무를 우리 어깨에 지우셨어.”


칸의 시선이 다시 드레거를 향했다. 칸이 그러하듯, 드레거는 높은 칼라를 한 하얀 튜닉에 푸른 띠를 두르고 진청색의 의장용 부츠와 장갑을 두른 채였다. 실용적인 함상용 회색 차림이 아니었다. 그의 옷깃과 어깨 위로 황제 폐하를 상징하는 벼락의 문양이 반짝였다. 칸과 동일한 차림이었다. 워 하운드가 그들의 가장 엄숙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장을 차려 입은 것이다. 그리고 드레거가 그 차림인 이유는 분명했다. 드레거는 칸을 대신해 들어가길 원했다. 들어가서, 죽음을 맞는 것이 자신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제 우리에겐 프라이마크가 계시네.”


칸은 그 말을 내뱉으며 전율을 느꼈다. 테라에서 원정을 나선 후 수년이 흘렀고, 워 하운드 군단은 아직 되찾지 못했던 우주에서 강력한 황제의 피조물들이 차례로 등장해 합류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칸은 샐러맨더 군단이 불타는 위성의 궤도에 대기하던 중 그곳에서 발견한 존재가 진짜 그들의 군주임을 알게 된 순간을 들었다. 노브 쉔닥으로 항해하던 중, 황제의 곁에서 냉정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페투라보를 보았던 순간을, 아이언 워리어 군단이 그들의 군주가 자신들을 지휘할 것임을 깨달은 순간 보인 변화를 기억했다. 모든 군단은 같은 갈망의 빈틈을 품었다. 항해와 전투가 거듭되는 순간 속에서, 그 갈망은 더욱 깊어졌다. 혈통의 근원께서 저 다음 별에 계실 것인가? 이 함선이, 이 통신선이 저 어둠 속에서 그들의 아버지이자 지휘관이신 분이 발견되었음을 전해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부에론의 소집 도크에 모였던 그 순간, 그들의 프라이마크가 발견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의 군주, 그들의 최초, 그들의… 그리고 여기까지 이어졌다.


“이제 우리에겐 프라이마크가 계시다고.”


칸이 다시 되뇌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군단이고, 그분이 원하는 대로 이끄실 것이다. 우리가 황제 폐하의 소유이듯, 우리는 그분의 소유지. 우리의 소원도, 계획도 중요하지 않아. 워 하운드 군단의 지휘관은 이제 워 하운드 군단의 프라이마크를 뵐 것이고, 그 결과는 프라이마크의 뜻대로 될 것이야. 그렇게 되겠지. 이제, 이야기는 끝이네.”


그리고, 자네 차례도 머지 않을 것 같군. 드레거가 군례를 올리고 조용히 문을 향해 걷는 것을 보며 칸은 생각했다. 그 생각에 순간 당황했지만, 칸은 동시에 자신이 무감정하게 그 생각을 떠올렸음 역시 깨달았다. 워 하운드 군단의 피는 뜨겁지만, 그의 생각은 평온하고 무미건조했다. 칸은 워 하운드 군단의 체인액스 아래 파멸로 치닫던 적들이, 혹은 황제가 전장에서 군단에 불명예를 안긴 보조병단에 10분의 1형을 내리는 것을 금하기 이전에 집행당한 이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드레거가 잠금쇠를 돌리고, 문이 소리 없이 바깥으로 열렸다.


문 너머로, 기이하리만큼 무미건조하고 드넓은 계단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다시 포효가 들려왔다. 말이 아닌 포효였고,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노호였다.


칸은 잡념을 떨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레거가 뒤에서 문을 닫은 순간, 어둠이 칸을 감쌌다.




앙그론이 군단에 합류하던 시절을 다룬 단편. 짤막짤막하게 나눠서 올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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