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xxv 아름다움 속 어둠

무언가 변했다. 란은 그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단순히 그들 위에 닥치고 있는 거대한 파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모두가 그 파멸을 느끼고 있지만, 블러드 엔젤 군단은 유독 어떤 종류의 숙명론에 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제9군단의 영광스러운 투혼이 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진작 꺼져버린 것일까? 이제 저들은 흔들리지 않을 것인가? 란은 테라 최후의 전투에서 저들이 곁에 없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아즈카엘론의 말투, 제폰의 과묵함 속에서 란은 의문을 가진다. 블러드 엔젤 군단이 마치 이미 애도를 시작하기라도 한 듯이, 어떤 격세적인 사고방식으로 물러선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다. 그가 느끼지 못한 어떤 운명의 전조를 저들이 느낀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제9군단이 그들의 군주인 프라이마크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준비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란과 임페리얼 피스트 군단은 최악의 상황을 예측하고 이를 막히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방식을 배웠다. 하지만 제9군단의 모습은,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복수하듯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처럼 보인다. 대성전의 초기까지만 해도 제9군단은 복수심에 불타는 야만적인 군세에 지나지 않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대성전의 세월을 거치며, 저들은 변화했다. 문명화되었고, 은총 속에 그 면모를 감췄다. 란은 항상 제9군단의 천사들, 그의 형제들에 대해 이리 생각했다. 저들은 군단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경이로운 존재들이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망령과도 같은 어둠이 숨어 있다. 오직 저들의 적이 마주하게 될 어둠이기에, 란은 자신이 그 어둠과 마주할 일이 절대 없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란은 여기서 더 이상 밀어붙이면 안 되겠다고 결정한다. 게다가, 지금 제폰이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여기 오르지 않았던가.

“나마히의 기수들이 돌아왔소.”

제폰이 입을 연다.

“그리고 아카무스 경은 우리 배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 같군. 이런 것을 보내왔소.”

란은 조각을 받아 든다. 프리펙투스가 발급한 순수의 징표 위에 아카무스가 자기 손으로 직접 적어내린 것 같다. 테라 전역 사령관이 더 이상 슬레이트나 기술의 내구성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란은 내용을 읽는다. 예상한 내용이다. 델픽 접근로에 배치된 아카무스의 여단들이 반역자 군단들의 압도적인 수를 상대로 강력하고 지속적인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다. 월드 이터 군단, 데스 가드 군단, 그리고 워마스터의 빌어먹을 사생아 새끼들, 선 오브 호루스 군단까지. 아카무스는 이 시간 안에 두 번째 측면 전선이 형성될 것이며, 하스가르드 요새는 그 전선의 일부가 되리라 예상한다. 그렇기에 아카무스는 란에게 놈들의 군세를 기습해서 두 번째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최대한 지연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만약 거기에 실패한다면, 아카무스는 다시 메시지를 보내 란에게 놈들의 주력에서 갈비뼈를 강타하는 일격을 지시할 것이다. 아카무스는 두 번째 선택지보다 첫 번째 선택지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다. 아카무스는 란의 숙명을 칭찬하고, 란이 실수 없이 임무에 임할 것이라는 확신을 담는다. 그리고 메시지의 끝에는 서명이 남아 있다. ‘아카무스, 그 이름의 두 번째 계승자.“

정확히 란이 기대한 내용이다. 딱 한 가지 세부 사항을 제외하면. 이 공문의 수신자는 ’파프니르‘다. 형제도, 란 경도, 수가령도 아니다. 그저 파프니르일 뿐. 이 마지막 시간 속에서, 통신 예규에도 불구하고 아카무스는 마지막 순간에 형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형제의 이름을 적어 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카무스는 이 공문을 통해, 자신이 란과 다시 만날 순간이 오리라 생각하지 않음을 전한 것이다.

란은 시선을 돌린다.

”형제여?“

아즈카엘론이 묻는다.

란은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는 블러드 엔젤 군단병들에게 전언의 내용과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전한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 역시 그들이 예상한 대로다.

”레오드 볼드윈이 그대를 찾더군.“

제폰이 입을 연다.

”내가 가리다. 경계를 맡아 주시오.“

”물론이오.“

아즈카엘론이 답한다.

”만약 놈들이 밀려오면, 소리를 질러 주시오.“

란이 말한다.

”그쪽만 재미 볼 생각은 말고.“

아즈카엘론이 웃음을 터뜨린다. 제폰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상처투성이 입술은 미소라기보다는 이빨을 드러낸 포식자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