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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파묻힌 단검 - 막간 V (2)

톨루엔환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2.23 0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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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루스 행성; 과거]


병사들과 수송차 행렬이 마침내 낮은 언덕을 넘자 눈앞에 피난지(Safehold)의 외벽이 펼쳐졌다. 흉벽 위의 수비병들은 다가오는 차량과 군인들의 대열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소식을 전했다. 인간의 사신이 드디어 남부 원정을 마치고 귀환한 것이다.


8년 전만 해도 피난지가 있던 곳은 스스로를 은둔자라 칭하는 산적 무리가 모여 살던 화강암 투성이 산이었다. 사신은 이들의 우두머리를 일대일 대결로 쓰러트린 후, 오버로드와의 전쟁에 참전하도록 종용하자 합의의 일부로 모타리온의 저항군은 땅을 양도받았다. 바르바루스 최초의 진정한 자유도시인 피난지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모든 투사들의 상징이 되었다. 피난지는 그 이름대로 오버로드의 폭정에 맞서는 피신지이자 투쟁의 장소였다. 높은 돌담과 난공불락의 철문, 흉벽에 설치된 수비병의 총이 그 어떤 보복도 막아낼 거라는 믿음으로 인간들이 두려움 없이 거닐 수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도 악랄했던 도살은 날이 갈수록 드물어지고 있었다. 오버로드들은 여전히 열등민들을 습격하며 잔혹극을 벌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들의 힘이 쇠퇴되고 있다. 바르바루스 전역에 느리지만 멈출 수 없는 혁명의 파도가 일고 있다. 사람들은 생애 처음으로 희망을, 혹은 그 비슷한 감정을 품었다.


첫 번째 증기 수송차가 도시에 접근하자 성문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고, 사신의 귀환을 기다려왔던 시민들은 수비병들이 있던 흉벽 위로 몰려들었다. 기대에 찬 침묵 속에서 잿빛 차량들이 다가오며, 같은 색깔의 찌그러진 금속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전투에 지쳐 총과 곤봉을 어깨에 메고 나란히 걸어왔다. 새로운 상처를 입은 얼굴들은 전쟁터에 함께 나섰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을 찾으려 흉벽을 올려다보았다.


선두의 차량이 속도를 늦추며 해치가 열리자, 야위고 웃음기 없이 진중한 인상의 사람이 솟아 나왔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그는 등에 메고 있던 농부의 낫을 뽑아 치켜들고 단 한마디만을 외쳤다.


“승리로다!”


피난지는 함성과 환호로 가득 찼다. 모타리온이 수송차에서 뛰어내려 성문으로 첫발을 내딛자 모두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모타리온은 지금까지 꿈만 꾸던 일이 현실이 됐다는 걸 확인하려는 듯,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기고 있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모든 병사들도 영웅처럼 환영을 받았다. 모타리온은 잠시나마 그 활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기쁨이라고 부르는 감정을 감지할 수는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해를 넘어선 범주였다.


너무나도 많은 감사를 받고 있지만, 모타리온의 마음 속에 남는 건 어두운 감정뿐. 그는 군중 속에서 정착지와 계곡을 해방하기 위해 안개가 자욱한 먼 남쪽 땅에서 피를 흘린 용맹한 바르바루스의 자손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전사들을 찾는 사람들을 보았다.


목숨을 바쳐 오버로드 안볼리안의 비행선을 격침시킨 포수 크웰과 그녀의 사냥조원들, 훌륭한 도끼 전투원이었던 셀로스 모키르라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여전히 모타리온을 따르는 그의 아들들에, 마지막 은둔자의 산적이었던 헤산 페인이 옛 은신처를 보지 못한 채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고향에 묻힐 수 있도록 사신은 병사들에게 페인의 유골과 함께 귀환하도록 명령을 내렸었다.


모타리온은 장소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았다. 죽음이 찾아온다면 자신이 쓰러지는 곳 그 어디라도 좋은 묫자리가 될 거라며 진작에 결심했었다.


이때 정찰복을 입은 여성이 군중 사이를 비집고 모타리온에게 다가와 금속 수통을 건넸다. “이거 필요하시죠?”


그는 감사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며 물병을 받아들였다. 오염 없이 청명한 물이 입술을 적시자, 모타리온은 여자를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기억에 걸렸다. 익숙한 저 눈.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인은 무감정한 얼굴임에도 여전히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낯이 익구나.” 그가 말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걸요. 죄송합니다. 깨끗한 물 한 병은 저희를 위해 해 주신 모든 일들에 대한 보답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네요.”


“이거면 충분하다.” 모타리온은 그녀가 누군지 생각해냈다. “헬러스 컷 외곽의 밭에서 수레에 깔린 아이가 자네였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신은 말을 이었다. “거기서 피난지의 거리까지는 꽤 먼 거리 일 텐데 말이다.”


“예. 하지만 전 전장에서 싸우고 싶으니까요.”


“전쟁은 어디에나 있지.” 그는 수통을 돌려주려고 했다.


“가지세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걸어 나갔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바뀌지 않습니까.”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타리온은 자신의 부하가 따라잡기까지 기다리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 생각하느냐?”


“물론이죠. 우리가 살아있는 증인이잖소.” 훈다 스코르발은 갈라진 황야 출신의 건장하고 육중한 체격의 전사이자 뛰어난 격투가였다.


인간의 사신 군대의 정예병인 그는 자신의 계급과 지위를 나타내는 해골과 태양의 표식을 하사 받았다. 굵고 창백한 팔뚝에 새겨진 부릅뜬 해골은 병사들 위에 드리워져 함께 행군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의미하며, 여섯 개의 꼭지점 별은 바르바루스에 찾아올 새 자유의 새벽빛을 상징한다고 한다. 스코르발과 같은 표식을 가진 이들은 모타리온의 데스 가드며, 오버로드와의 전쟁에서 난무하는 불굴의 칼날이다.


모타리온은 스코르발의 오른팔을 쳐다보았다. 피 묻은 기름진 붕대 밑에 감춰진 저 손목. 이 부상은 불과 일주일 전 살육 짐승 열 마리와의 전투 막바지에 얻은 전리품이었다. 그 중 한 마리가 스코르발의 손을 씹어 삼켰지만, 전사는 괴물의 목을 찢어 피에 질식시켜 죽였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춥냐...?” 군중 사이로 낯익은 넓적한 얼굴이 걱정스럽게 눈살을 찌뿌리다, 다시 원래의 들뜬 미소를 품고 이들에게 다가왔다. “야, 뭐 두고 왔냐? 훈다?”


“헛소리 마라, 두랄.” 스코르발은 다친 팔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럴 기분 아니거든.”


“살육 짐승이 훈다로 한끼 때우려 했다.” 모타리온이 차분히 말했다. “맛이 어지간히 없어서 짐승이 목 막혀 죽었나 보구나.”


“대장님도 이러깁니까?” 스코르발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아, 왜 죽었는지 알겠군.” 새로 도착한 사람이 말했다. “네 피가 하도 써서 그런 거야, 훈다. 내가 항상 말해왔잖아.”


“잘 어울리는 별명이구나. 끝까지 가지고 있게.” 모타리온은 스코르발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데스 가드의 일원인 두랄 라스크가 웃음을 지었다. “기술 유랑민들인 포지 타이런트와 맺은 동맹 관계가 굉장히 성공적이니까. 분명 기계장이들이 네 원래 손보다 훨씬 좋은 새 손을 만들어 줄 거라고!” 그는 고개를 들어 모타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긴 합니까? 며칠 전 지평선에서 불길을 보긴 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아서 말입니다...”


“물론 사실이지.” 모타리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전투는 끝이네, 친우여. 그곳의 정착지는 해방되었고, 지금쯤이면 내 몸소 흙에 박아 넣은 네카레의 마지막 잔당들로 뱀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을게다.”


“이리 감격스러울 수가.” 라스크가 속삭였다. “그리고 서쪽 구덩이로 간 순과 무나우의 임무 결과도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렇느냐? 잘됐군.” 모타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지요.” 스코르발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지금 당장이라도 웃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모타리온의 음울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인간의 사신이 웃는다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내가 얼마나 큰 책임을 맡고 있는지 이해하는가?”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라스크를 쳐다보았다. “티폰의 군대와 연락은 해봤느냐?” 몇 달 전, 그의 부관이자 믿음직한 친구가 하급 오버로드를 쫓으려 산기슭으로 들어갔지만 그 이후로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찰병들이 동부에서 그의 군대의 흔적을 찾았다고 보고는 했습니다.” 라스크가 힘차게 말했다. “하지만 그쪽에서 아무런 신호조차 주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리고는 전사는 더욱 큰 미소를 지으며 태도를 바꿨다. “그래도 기다리면 소식이 들릴 거요! 대장님의 귀환과 이 승리가 전환점이 될 거란 말입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오버로드놈들이 멸종할 날이 코 앞이란 말이오!”


모타리온은 먼 곳을 노려보았다. “아직은 아니란다, 두랄. 앞으로 더욱 많은 전투가 기다리고 있느니라.” 그 순간 그는 고개를 돌려 양아버지의 어두운 성채가 우뚝 선 북쪽 봉우리, 데스 가드조차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유독한 안개에 휩싸인 그 곳을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을 잃었도다.”


스코르발은 동의하듯 나지막이 목을 긁었다. “그래도 그 희생을 원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와 함께하기보다 오버로드를 따르기로 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네들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오.”


오버로드에게 굴복하는 삶이 더욱 나을 것이라 생각하는, 정신이 열등민 그 자체인 인간들도 있었다.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망가진 영혼들의 죽음은 예상한 일이었지만, 최악의 부류들은 노예를 자처하여 동족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자들이었다. 데스 가드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모타리온은 이 잔당들이 남아 있다면 오버로드의 작업장에 던져져 새로운 골렘 병사로 엮어졌을 거라 상상했다.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 강해,” 라스크가 말했다. “우리 사신께서 데스 가드를 훈련시킨 결과요! 덕분에 우린 무적입니다. 게다가 데스 가드들이 전투 기술을 모든 인간 정착지에 전파하기까지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전사고, 모든 마을은 요새가 되었고, 모든 농부들이 군인이 되었다니!”


“기념으로 한잔 합시다.” 스코르발은 모타리온이 들고 있는 물병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더 센 게 있다면 말이요.”


라스크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막사로 손짓했다. “따라와, 딱 좋은 게 있어.”


라스크는 이들을 낮은 초가지붕 건물 뒤편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고, 방에 들어서자 발효된 설탕과 진한 효모냄새가 모타리온의 예리한 감각을 찔러댔다. “뭐가 있는겐가?”


라스크는 달그락대는 파이프, 타오르는 불꽃과 끓어오르는 플라스크가 있는 복잡한 구조물로 걸어갔다. “포지 타이런트들이 훌륭한 무기를 만드는 건 널리 알려졌지만,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 기술도 있소.” 그가 기계장치의 꼭지를 틀자 김이 피어오르며 쏟아져 나오는 액체를 금속 잔에 담아 모타리온에게 건네주었다. “술을 아주 기가 막히게 만듭니다.” 라스크는 자신과 스코르발이 마실 잔을 하나씩 더 채우고는 잔을 들어 건배를 올렸다. “오늘과 다음 승리를,” 데스 가드 전사가 말했다. “위하여.”


모타리온은 술을 한 모금 마셔보고는 눈살을 찌뿌렸다. 스코르발과 라스크는 이 맛을 즐기는 것 같지만, 모타리온의 강인한 체질에겐 싱거운 차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엄마 젖을 못 뗀건가, 두랄? 아까 마셨던 물보다도 맛이랄 게 없군. 이게 우리 최고의 전사들에게 맞는 술일까?”


“부드럽게 잘 넘어 가는데 말이지,” 스코르발이 말했지만, 이내 모타리온이 손을 저어 침묵시켰다.


“아니야.” 인간의 사신이 말하고 긴 손가락으로 기계식 증류기를 훑어보더니, 여과되지 않은 원액으로 가득 찬 구리 탱크를 발견했다. “이게 더 낫겠군.” 모타리온은 잔에 더욱 강렬한 진액을 채우고 자신만의 건배를 올렸다. “이제 마시자.”


라스크는 술잔의 탁한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사신이여... 이건 거의 독극물이라고요! 사람이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죽는단 말입니다!”


“우리가 강하지 않다면 이겨낼 수 없겠지.” 모타리온이 읊조렸다. “독과, 어둠과, 고통을 거스를 수 없다면 죽음에 맞설 수 없어.” 그는 자신의 잔 바닥을 응시했다. “양아비로부터 절대로 잊지 못할 귀중한 교훈을 하나 배웠었지. 모든 것은 시험이란 걸 말이네. 인생이란 견뎌내야 하는 도전이요, 매일 자신을 시험하지 않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로다. 그러니 마시자.”


“죽음에 맞서,” 스코르발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쭉 들이켰다.


“죽음에 맞서,” 라스크도 숨을 고르고는 그대로 따라했다.


모타리온도 같이 마시며, 원액이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가슴에 퍼져 나가는 고통을 즐겼다. 전투만이 줄 수 있는 활력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스코르발과 라스크는 모타리온을 따라하려 애쓰며, 얼굴을 붉히면서 고통에 헐떡였다. 덩치가 큰 스코르발은 잔을 깨부쉈고, 그의 동료는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라스크는 마침내 쉰 목소리로 힘겹게 울부짖었다. “찢어지고 불타는 이 느낌이!”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한잔 더 마시느니 골렘의 칼을 내 배에 쑤셔 박겠어...”


“술이 제 역할을 하긴 했군,” 모타리온은 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이 잔을 다시 나누자꾸나.”


“좋소!” 스코르발이 외쳤다. “네카레 골통으로 마십시다!” 덩치 큰 전사가 우레와 같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날카로운 전투 사이렌의 소리에 묻혀 버렸다.


“기습이다!” 라스크가 허리춤에서 회전 총열식 권총을 꺼내며 외쳤다. “감히 어떤 새끼가 여길 들어오는거야? 아주 날 잘못 잡았구만!”


모타리온은 빈 잔을 던지고는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왔다. 프로펠러의 묵직한 굉음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뒤이어 은은한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시 들판 전투가 한창일 때 크웰의 전투조원들이 불태웠던 비행선과 똑 닮은 것을 보자 낫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흉벽 위의 포수들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흐린 하늘에서 나타난 저공비행선을 향해 분주히 무기를 조준하고 있었다.


비행선 바닥에 열린 검은 해치에서 밧줄이 떨어지고, 모타리온은 다가올 전투를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전투 전의 활력이 그의 신경을 자극하며, 피난지로 돌아오는 기나긴 행군으로 쌓였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졌다.


그러나 익숙한 낡은 회색 갑옷의 형체가 밧줄을 타고 내려오자 고대했던 전투는 연기처럼 흐트러졌다. 데스 가드 전사들이 막사 광장 곳곳에 착지하고는, 밧줄을 풀고 가슴에 장갑을 두른 주먹을 대며 모타리온에게 경례를 했다.


“이것 봐.” 긴장이 풀린 라스크는 비행선 측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측면에는 해골과 태양의 표식이 전 주인이었던 오버로드의 문양을 덮고 있었다. “아, 구름이 걷히는구나.”


이마에 뿔 하나가 튀어나온 찌그러진 투구와, 말총 장식을 달은 견갑을 입은 전사가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밧줄을 풀은 티폰은 모타리온을 보자 투구를 비틀어 벗고, 수염을 기른 얼굴로 야만적인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였군. 피난지로 돌아가는 대열을 보고 너일 줄 알았지.”


“맨날 그렇게 화려하게 나타나는구만.” 스코르발은 경멸을 드러내며 냉정히 말했다. “공중에서 불 타 죽지 않았으니 운 좋은 줄 알으라고!”


티폰의 입꼬리가 뒤틀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전리품이 마음에 안 드는건가?” 그는 비행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볼크랄의 창고에서 식량, 약품과 깨끗한 물을 최대한 실어 모았는 걸. 여기서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먹고 사는데 오버로드 놈들의 도움 따위는 이제 필요 없어.” 스코르발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으나 모타리온이 말을 끊었다.


“사람들에게는 보상이 필요하지.” 그가 단호히 말하며 낫을 흙바닥에 꽂고 자신의 부관을 훑어보았다. 티폰은 더 이상 안개 낀 산길에서 함께 싸웠던 야위고 성마른 청년이 아닌, 타고난 운명처럼 교활한 전사로 자라났다. 그는 전쟁 초기에 수십 번이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내어 모타리온이 데스 가드 분대장직을 맡길 만큼 인정받은 자였다. “만나서 반갑네, 형제여.” 티폰이 옛 인사 방식대로 모타리온의 손목을 잡자 두 사람의 완갑이 부딪히며 절그럭댔다.


“나도네.” 모타리온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데스 가드를 위하여 수많은 승리와 상처를 입었음에도 훈다 스코르발처럼 티폰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칼라스와 모타리온은 바르바루스인과는 체격과 출신도 다른 이방인이었다. 모타리온의 큰 키와 수척한 외모는 특징으로 받아들여졌을지라도, 티폰의 강인한 체질은 동료들에게 절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모타리온의 기원에 관한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화가 되어 전해졌다. 그러나 티폰은 누가 보기에도 혼혈이다. 모타리온이 노력을 다할지라도 그의 동료는 여전히 편견에 시달렸다.


처음에 열등민들이 오버로드에 대항하여 미래를 위한 투쟁을 위해 무기를 들게 한 동기가 바로 두 사람의 모범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이제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지고,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모타리온의 마음은 미묘한 의심으로 물들었다. 서로 떨어져서 각자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둘 사이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걸까?


그럴 리 없어. 모타리온은 그런 생각을 품길 꺼리며 불안감이 완전히 스며들기 전에 억눌렀다.


“그래서 오버로드 볼크랄의 군대를 물리치긴 한 건가?” 라스크가 말했다.


“물리친 게 아니지, 두랄.” 티폰이 대답했다. “전멸이다. 여기서부터 지평선까지 산기슭을 가로지른 검은 성체가 안보이잖나.” 그는 모타리온을 보았다. “볼크랄이 절박하게 네카레의 지원을 요청하는 동안 돌 폭포 협곡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를 파괴했었지. 그런데도 그림자조차 안 비추더군. 무슨 뜻인지는 아나?”


모타리온은 생각에 빠졌다. “최고위 오버로드가 가까운 동료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방어를 강화하는 쪽을 택한 게로군.”


“내가 생각한 대로구나.” 티폰은 연착륙 할 수 있는 들판을 향해 멀어져가는 비행선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따라올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곳에 숨어있는 거야. 뻔하지.”


“겁만 많은 새끼!” 스코르발이 이를 갈았다. “낯짝 비추는 게 무섭다고 독구름 뒤에서 흑마술이나 부리다니!”


티폰은 지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이겨도 지금 벌어지는 모든 전투가 똑같은 방식이야. 놈들은 매번 골렘과 살육 짐승을 풀고, 가끔 네카레의 하급 동족들이 직접 전장에 나서긴 하지만 절대 맞서 싸우지 않고 있어. 놈들은 우릴 짙은 안개 속으로 끌어들여 독살하려 하기나 하고. 이렇게나 많은 승리를 이뤄도 아직도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고 있어.” 그는 모타리온을 돌아보았다. “이제 남부를 해방시켰으니 어떻게 마지막 승리를 거둘 지 생각해 볼 때야. 그렇지 않으면 곧 교착 상태에 빠진다고.”


“네겐 이미 생각이 있겠지.” 모타리온이 가볍게 말했다.


“물론.” 티폰의 웃음이 다시 돌아왔다. “썩 좋지는 않을 거야.”


아직은 그 수단을 쓸 때가 아니니, 모타리온은 손을 들어 티폰의 말을 끊었다.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아.” 그는 라스크를 바라보았다. “두랄, 이제 때가 되었구나.”


“대장님...?” 라스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이십니까? 그러니깐... 아직 해야 할 게 많아서...” 그의 목소리는 음모를 꾸미는 듯한 속삭임처럼 낮아졌다. “아직 준비가 안됐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마.” 모타리온이 말하며 스코르발을 쳐다보았다. “내 말을 듣거라, 쓰디쓴 피야. 의무실로 가서 빨리 상처를 치료하게. 라스크가 말한대로 네 원래 손보다 두배는 더 단단한 기계손을 구해주마. 그러니 가거라!”


스코르발은 숨죽여 투덜댔지만, 경례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모타리온은 곁눈질로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띄는 티폰을 보며 라스크를 향해 돌아섰다. “작업장으로 안내해주게, 두랄. 우리가 없는 동안 자네가 뭘 만들었는지 보고 싶군.”


라스크는 티폰을 흘끗 쳐다보더니 자신만의 경례를 했다. “물론이죠. 이쪽입니다.”


그가 걸어가자 티폰과 모타리온은 뒤에서 발걸음을 맞췄다. “피난지를 떠나기 전에 네가 병기장에게 한 계획을 맡긴 것 같던데, 그때는 내가 딱히 물어보지 않았었지.” 뒤따라오던 데스 가드의 전사가 말했다. “나를 일깨워주지 않겠나?”


“말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낫지.” 모타리온은 정착지 가장자리에 있는 검은 화강암 산으로 향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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