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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종말과 죽음 3부] 고통의 파편들 ii : 경야

말카도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3.17 12: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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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종말과 죽음 3부 : 에필로그
· [종말과 죽음 3부] 고통의 파편들 i : 이후



고통의 파편들 ii : 경야



그는 아버지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린다. 모든 일이 끝났지만, 아버지가 홀로 남겨져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종말이 오는 순간 아버지의 옆에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종말이 다가온다. 공기의 밀도는 점점 희박해지고, 한기가 치민다. 죽어가는 함선의 삐걱대는 신음이 점점 더 커진다.


저 높은 곳의 구획화된 창 너머로는 어둠이 보일 뿐이다. 우주의 밤이다. 소수의 광점이 얼핏 보인다. 별, 혹은 멀리서 다가오는 함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칠고 고르지 않은 행렬을 이루며 빠르게 회전한다. 지금 이 함선은 어떤 통제도 없이 표류하며 움직일 뿐이다. 망가진 껍질이 남았을 뿐이다. 서서히 선회하는 함선은 궤도에 부유하는 쓰레기 꼴이다. 이 함선의 마지막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붕괴의 소음, 그리고 구조적 파괴의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은 로켄은 복수하는 영혼이 곧 무결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산산이 부서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전에 테라의 중력에 붙들려 성층권으로 끌려내려가 불타오르며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전체가, 아니, 어쩌면 수백만 개의 파편으로 산산이 쪼개져 옥좌성의 하늘을 유성우나 불운한 혜성처럼 빛내게 될지도 모른다.


“함선의 손길이 제 위에 드리운 것이 느껴집니다(각주 1).”


로켄이 입을 연다.


“그 표현을 아시겠지요, 아버지? 당연히 그러실 것입니다. 많이 들으신 표현일 테니. 저희 군단은 항상 그런 식의 유대를 누렸습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그편에 선 것이었지요. 사과할 생각도, 용서를 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희가 가졌던 것을 위해 싸우려 그 자리에 섰습니다. 정말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최고였지요.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위해 싸웠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싸웠습니다.”


로켄은 아버지를 응시한다. 텅 빈 눈구멍에서 오직 어둠이 맞받아 볼 뿐이다.


“사실입니다.”


로켄의 말이 이어진다.


“저는 아버지를 위해 싸웠습니다. 제가 루나 울프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아버지를 위해, 예전의 아버지를 위해 싸웠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아버지, 지금의 당신이 아닌 그 아버지를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싸웠습니다. 아버지께서 스스로의 뜻으로 그렇게 되신 것인지, 아니면 강제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비난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세상의 다른 저편을 본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듯이, 저 또한 영원을 보았습니다. 카오스는 그저 저희의 존재를 취해 이용했을 뿐이지요. 아버지, 당신께서는 강하셨습니다. 자랑스러운 존재였고, 정말 치열한 존재였지요. 그래서 카오스가 아버지를 취하여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항치 못한 것에 대해 저항했다 해서, 제가 아버지보다 낫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버지, 오래된 넷은 저에게 아버지에게 했던 방식으로 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워마스터셨습니다. 정말 훔칠 값어치가 있는 존재였지요. 저는 그래서 아버지를 위해 싸웠고, 아버지의 반대편에서 싸웠습니다. 아버지가 어긴 맹세를 지켰고, 아버지를 되돌리기 위해 싸웠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모든 싸움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켄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돌아오셨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찰나였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그러했듯, 모든 것을 보셨습니다. 그렇게… 이해하셨겠지요. 그러니까, 예전의 아버지 말입니다. 최소한, 그것 때문에라도, 진정 감사할 따름입낟.”


지금까지 중 가장 강렬한 전율이 갑판을 휘감는다. 저 멀리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로켄이 일어선다.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켄이 입을 연다.


“전혀 길지 않겠지요. 함께 가시지요. 더 이상 제게 남겨진 싸움은 없고, 아버지 역시 홀로 떠나셔서는 안 됩니다.”


또 한번의 깊은 쿵 하는 울림이 온다. 숨죽어 있는, 무언가 갈아대는 웅웅거림이 들린다. 갑판이 기울고, 로켄도 흔들린다. 공간 바깥의 복도에서 섬광이 터진다. 그 섬광에 뒤이어 또 다른 섬광이 터진다. 동력이 발작적으로 돌아오며 통로의 조명이 밝아졌다가 동력이 다시 꺼진다. 켜졌다가,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해치 통로를 따라 빛이 새어들고, 빛의 기둥이 갑판을 가로지른다. 세 형상이 빛에서 나와 공간으로 들어선다.


“돌아가셨다.”


로켄이 답한다.


“남은 건 없네.”


아바돈은 로켄을 노려본다. 그의 갑주는 온통 흠집과 갈라진 흔적투성이다. 뺨에는 피가 말라붙은 채다. 손에는 여전히 검이 들려 있다. 눈은 푹 꺼졌고, 빛을 잃은 꼴이다. 뺨은 움푹 패고, 창백한 피부에는 열기가 감돈다. 마치 무슨 쇠약하게 하는 질병에 걸린 것처럼 기진하고 굶주린 외양이다.


“돌아가셨다고.”


메아리처럼 그가 웅얼거린다.


로켄은 고개를 끄덕인다.


“여긴 왜 왔지, 로켄?”


아바돈이 묻는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


로켄이 답한다.


“홀로 계셨으니까.”

“이젠 아니다.”


시카르가 속삭인다. 유스타이린의 주인은 아바돈의 왼쪽으로, 바락사는 아바돈의 우측으로 움직인다. 그대로 로켄을 둘러싸려 든다. 아바돈은 그저 아버지의 시신을 응시할 뿐이다.


“아니, 더는 안 되네, 헬라스.”


로켄이 말한다.


“아버지의 곁에 아버지의 아들들이 오지 않았나. 아버지께서도 고마워하실 걸세.”

“아버지의 아들들이라고, 허?”


시카르가 웅얼거린다.


“그렇네.”


로켄이 말한다.


“나와 싸울 생각인가, 시카르? 그 수많은 피를 흘리고서도, 또 싸우겠다고?”

“그리고 이번에 흐를 피는 네놈의 피겠지.”


시카르가 대꾸하며 로켄의 우측면을 따라 선회한다. 바락사는 이제 로켄의 왼편에 있다.


“싸우면 결론이 나오겠지.”


로켄이 대꾸한다. 유스타이린의 주인과 로켄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이 반역자가 여기 있으면 안 되네.”


시카르가 아바돈에게 말한다.


“반역자?”


로켄이 미소를 지으며 대꾸한다.


“진심인가? 네 입이, 나를 그렇게 부른다고?”

“네놈도 네가 무엇인지는 알 텐데.”


바락사가 입을 연다.


“잘 안다.”


로켄이 답한다.


“아주 잘 알고 있지, 아젤라스. 넌 어떻지?”


시카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터미네이터 갑주가 도약을 준비하며 동력을 돌리는, 감출 수 없이 웅웅대는 울림이 들린다.


“멈춰.”


아바돈이 말한다.


“하지만-”

“멈춰, 시카르. 멈추라고 했다. 바락사, 자네도 마찬가지야. 그냥… 멈추라고.”


바락사는 눈살을 찌푸린 채 검을 내린다. 최선임 중대장을 노려보던 시카르는 곧 한 발자국 물러선다.


“그래서, 몸소 날 베셔야겠다는 건가, 에제카일?”


로켄이 입을 연다.


아바돈은 숨을 들이킨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로켄과 아바돈,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아바돈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바돈이 입을 연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은 안 돼, 로켄. 서로에게 등을 돌리기엔, 우린 이제 너무 소수만 남았을 뿐이다.”

“동의하네.”


로켄이 말한다.


아바돈은 이제 더 이상 로켄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아버지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다.


“여기서 기다렸나?”


아바돈이 묻는다.


“그랬네.”


로켄이 답한다.


“그래, 그랬겠지.”


아바돈이 답한다. 아바돈은 로켄을 지나쳐 무릎을 꿇는다. 그의 손이, 아버지의 시신 위로 부드럽게 올라간다.


“옳은 일을 했군. 존중이었어. 훌륭한 전사라면, 빚질 법한 일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바돈은 고개를 젓고 손을 치운다.


“호루스께서는 바보였네.”


아바돈이 입을 연다.


“우리 아버지는 바보였어.”

“우리 아버지는 꼭두각시였네, 에제카일.”


로켄이 답한다.


“꼭두각시로 전락했지. 카오스가 우리 아버지를 택해 이용했고, 그대로 버렸네.”

“버렸다고?”

“그래, 마지막 순간이었지만.”

“아버지로는 부족했었단 말인가?”

“아버지는 그 이상의 존재셨네.”


로켄이 맗나다.


“아버지는 정말 끔찍한 존재셨네, 에제카일. 절대적인 존재이자 만물이셨지. 하지만 그 동시에, 호루스이기도 하셨네. 아버지께서는 그런 선물과 공물을 원치 않으셨어. 꼭두각시가, 혹은 오래된 넷의 졸이 되고 싶지 않으셨으니까. 아버지는 통제하기를 원하셨네.”

“통제라고?”


아바돈이 날카롭게 대꾸한다. 그의 시선이 로켄에 꽂힌다.


“통제?”


로켄이 고개를 뜨겅니다.


“놈들이 아버지께 베풀지 않은 유일한 것이었지. 힘은 주었지만, 그 힘을 다룰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어. 우리 아버지는 저들에게 그저 무기였네. 아버지를 위협하는 존재를 죽이기 위한 무기였고, 인류를 멸망시킬 무기였어. 놈들은 우릴 살려둘 생각이 없었네. 아버지가 다스릴 무엇도 남겨주지 않았을 거라고.”

“그걸 어떻게 알지?”


시카르가 묻는다.


“나는 거기 있었으니까.”


로켄이 답한다.


아바돈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분은 바보였군.”


아바돈이 입을 연다.


“진정 그렇지 않으리라 믿으셨다니, 실로 바보였어. 나는 분명 경고해 드렸네. 그렇게 될 것을 우려했다고. 아버지께서 이성을 찾으시기를 바랐어. 하지만 귀를 기울이시지 않더군.”

“그분은 호루스 루퍼칼이셨네.”


로켄이 답한다.


“나 또한 그분을 사랑했네, 에제카일. 하지만, 그분이 이미 마음을 정하신 순간에 무엇을 하시라 고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 아니던가.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마음을 정하신 것이 아니었지. 아버지께서는 바ㅂ가 아니었네, 그저 놀아났을 뿐.”


아바돈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다.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게, 에제카일.”

“그러지 않을 걸세.”


아바돈이 조용히 답한다.


“나는 그런 바보가 되지 않겠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바돈의 시선이 로켄을 향한다. 그가 목청을 가다듬는다.


“나는 제국을 믿었네. 하지만 그 제국은 나를 배신했지.”


아바돈의 말이 이어진다.


“아버지를 믿었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나를 실망하게 하셨지. 다시는 그 무엇에게도,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겠네. 누구도 따르지 않겠어. 프라이마크건 악마건 모두 마찬가지다. 이끄는 것은 내가 될 것이다.”

“그럼 현명하게 이끌도록 하게.”


로켄이 답한다.


“그런데 에제카일, 물을 수밖에 없군… 무엇을 이끌겠다는 말인가?”


찰나의 순간, 아바돈이 로켄을 응시한다.


“지금 지휘권을 쥔 것은 나지, 로켄.”


아바돈이 말한다.


“최선임 중대장으로서, 내가 지휘권의 계승자일세. 반대하나?”

“아닐세.”


로켄이 대꾸한다.


“일단 함선을 재가동하는게 우리의 목표다.”


아바돈이 입을 연다.


“구동계를 수리하고, 엔진을 다시 켤 생각이네.”

“쉽지 않을 걸세. 손상이 심각하니까.”

“그렇지. 전혀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복수하는 영혼은 언제나 강인한 함선이었네. 강하고, 모든 것을 견뎌내지. 이미 시작했네.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그게 계획인가?”


로켄이 묻는다.


“다른 제안이라도 있나?”


아바돈이 되붇는다.


“항복하는 게 좋다고 보네.”


로켄이 말한다. 시카르가 옆에서 코웃음을 친다.


“항복 따위는 하지 않는다, 로켄.”


아바돈이 대꾸한다.


“물론 그렇겠지.”


로켄이 입을 연다.


“하지만 조건을 걸고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 최선의 결론일세.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심지어 함선은 심하게 망가졌지. 그리고 지금 자네를 쫓는 군세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네. 어느 한쪽이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한, 이 전쟁은 은하계가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되겠지. 카오스는 도망쳤네. 사라졌다고. 그리고 자네 같은 신세에 빠진 이들이 더 있겠지, 에제카일. 자네와 같은 대의를 따랐던 이들 중에서도 후회하는 이들, 혹은 잘못 인도되어 기만당한 이들, 아니면 단순히 스스로의 방식에 오류가 있었음을 깨달은 사람들 말일세. 하지만, 만약 제16군단의 최선임 중대장이 모범을 보인다면, 모두가 그 뒤를 따르지 않겠나.”

“길리먼이 우릴 죽일 거다.”


바락사가 입을 연다.


“길리먼께서는 제국의 복원을 원하겠지.”


로켄이 대꾸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시 온전해진 제국일세. 만약 조건이 온당하다면, 나는 길리먼이 아스타르테스 형제들의 복귀를 받아들이고 살려줄 거라고 보네. 아홉 군단을 통째로 잃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은 오해에서 시작된 실수였지. 자네 편에 선 모두가 용서를 받지 못하지는 않을 걸세. 그러니 모범을 보이라고. 그 과정을 시작하게. 다른 이들을 데리고, 자네의 참회를 보이면 되지 않겠나.”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시카르가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다른 방법이 없네.”


로켄이 답한다.


“어느 대안보다도 나은 선택지지. 자네 모두를 사냥하고 절멸시키며 별들로부터 쓸어낼 새로운 성전이 닥쳐오기를 바라나? 이 내전이 새로운 이름으로 지속되겠지. 연민 없이, 자비 없이, 용서 없이 펼쳐질 전쟁일 걸세.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나?”

“어디든 생각해 내면 돼.”


아바돈이 답한다.


“에제카일-”

“아젤라스가 옳아, 로켄.”


아바돈이 입을 연다.


“길리먼은 우릴 죽일 거야. 우리가 한 짓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 우리가 옳았고 우리의 불만이 정당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걸세.”

“길리먼께서는 여기 없었잖은가.”


로켄이 말한다.


“하지만 돈께서는 여기 있었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더 잘 알고. 어쩌면 귀를 기울일지도 모르네. 결국 그는 근위장 아니던가. 에제카일, 자네가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준비되어 있다면, 직접 그를 찾아가겠네. 제16군단을 대표해서 말하겠다고. 자네의 주장을 설득하고, 조건을 협상하지. 진심일세. 원한다면 맹세라도 바치겠어. 근위장은 내 말을 들을 걸세. 확실해.”

“그렇게까지 하겠다고?”


아바돈이 묻는다.


“내 군단을 위해, 그리고 군단이 한때 가졌던 영예를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겠네. 이 어둠이 내리기 전의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겠어.”


로켄의 시선이 아래의 시신을 향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내가 이렇게 하시길 바랐을 걸세.”


로켄이 말한다.


“루퍼칼께 내 목숨을. 이제 더 이상 아버지께 내 목숨을 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 기억 속의 아버지께 내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어.”


아바돈은 잠시 침묵을 지킨다.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아바돈이 묻는다.


“내가 계속 싸우겠다고 한다면? 그때는 내 반대편에 서겠나?”

“내가 결정할 입장이 아닐세, 에제카일. 날 죽일 생각인가?”

“아니, 가비엘. 그러지 않을 걸세. 이용할 수 있는 형제라면, 어떤 형제건 이용해야겠지.”

“나는 자네를 위해 싸울 생각은 없네.”


로켄이 입을 연다.


“그리고 자네와 함께 도망치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나는 자네의 뒤를 쫓을 걸세. 매일, 매 시간마다, 아직 내 제안이 유효함을 상기시켜 주도록 하지.”

“정말 모니발스럽군…”


아바돈이 중얼거린다.


“그래서, 어찌하겠나?”


로켄이 묻는다.


“자넨 언제나 이상주의자였지, 로켄. 언제나 그랬어. 그리고 난 실용주의자고. 군단은 피와 희생을 바치며 제국을 건설했고, 황제는 그런 우리를 버렸네. 인류의 지배권을 위해, 우리 목을 베었을 거라고. 우리를 위한 제국은 없었어! 이런 배신은 부조리하고, 우리 격노는 어느 때보다 밝게 타올랐어. 나는… 미안하네. 지금은 실용적으로 굴어야 할 시간이지. 우린 도망칠 걸세. 우리의 생득권을 위해 싸우겠어. 우리에게 제국이 빚진 것을 받아내기 위해 싸울 거고, 해야만 한다면,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우겠네. 그렇게 할 걸세. 이것이 내 결정이야. 우리와 함께 가세. 물론, 떠나도 돼. 자넬 막지 않을 테니.”


로켄이 한숨을 내쉰다. 그의 입이 열린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말 대신 피가 흐른다.


눈을 크게 뜬 로켄은 아바돈의 앞으로 쓰러진다. 아바돈은 전율하며 그를 붙들어 갑판 위에 누인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바돈이 으르렁거린다.


에레부스가 로켄의 등에서 제 의식의 검을 뽑아낸다. 손목을 튕기자, 칼날에 붙은 피가 채찍질하듯 튕긴다.


“처음부터 자네에 맞선 놈이었네.”


에레부스가 입을 연다.


“멈출 생각 따위 없었지. 자네 군단을 배신한 반역자였네.”


아바돈이 일어선다. 그의 검이 워드 베어러 군단병의 목줄기를 향해 찔러든다. 에레부스는 미동조차 없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바돈이 내뱉는다.


“자네에 맞서지 않았나, 아바돈.”


에레부스가 입을 연다.


“이해가 안 되나? 저놈은 기회만 있었다면 자네들 전부를 죽였을 걸세. 자넬 죽이거나, 배신했겠지. 게다가, 그는 죽어야만 했어.”

“무슨 뜻이냐?”

“그는 죽어야만 했어. 반드시 그래야만 했지. 순환의 고리를 닫고, 순환을 완성하기 위해서 말일세.”


에레부스는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오늘 패했네.”


에레부스의 말이 이어진다.


“호루스께서는 실패하셨지.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닐세.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고, 더 잘 해낼 수 있겠지. 실수로부터 배우지 않겠나. 우리는 더 강해질 걸세. 이보다 훨씬 더 위대해지겠지. 천 년이 걸리건, 만 년이 걸리건, 결국 우리가 승리할 걸세. 그러기 위해서는 안내가 필요하지. 악마가 어덯게 태어나는지 알고 있나?”

“내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아바돈이 으르렁거린다.


“배워야 할 것 중 하나일세.”


에레부스가 말한다.


“악마는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네. 저들에게는 시간이 무의미하지. 순환이라고, 알겠나? 저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에 결국 다시 돌아오지. 그리고 그런 그들 중 일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위대한 힘이라네. 이 현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놈들이라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네. 우리 미래의 노력을 돕기 위해 존재해야 하듯이 말이지. 그래서 탄생해야만 했고, 이 순간이어야 했네.”

“알아듣게 말해라.”


아바돈이 말한다.


“악마는 지금 여기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워프에서 태어나지.”


에레부스가 말한다.


“예를 들면, 죽음 같은 것 말이지. 특히 보복을 위한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면 더더욱 더. 어쩌면, 불의한 죽음일 수도 있고. 방금 악마가 태어났네, 아바돈. 자네도 이해하게 되겠지. 그것은 자네 뒤의 발자취가 될 걸세. 자네의 뒤를 걷는 존재가 되겠지. 자네가 듣는 유일한 이름이 될 거고. 살피고 보도록 하게. 이미 여기 있으니.”




각주 1 : 복수하는 영혼의 승조원들이 흔히 쓰던 표현 중 하나. 아마 호루스의 궐기에서 나오던 표현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용례는 기억이 안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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