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좀 길다. 원작 재주행하고 캔피어까지 다시 읽으니까

블리치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썼음.

대부분의 블붕이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블리치는 다양한 종교에서 모티프를 많이 받은 만화임.

사후 세계와 사신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만

암튼 여기서 의외인 점은

쿠보가 의외로 [신 / 메시아]를 모티프로 연결시키는 캐릭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임.

우선 가장 대표적인 게 퀸시들의 아버지 유하바하인데

유하바하는 이름부터 기독교의 유일신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

Yhwach는 야훼(YHWH)에서 따왔고

슈리프트는 대놓고 디 '올마이티'

사도들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는 방식도 성체랑 비슷함.

(워낙 알려진 사실이니까 블붕이들은 다 알고 있을거라 믿고 간략하게 적음.)

반면에 천년혈전 편에서 유하바하를 상대한 사신들의 정점

'스님' 효스베 이치베는

외모부터 일문자까지 달마대사를 모티프로 한다.

쿠보가 묘사하는 사신의 세계가 불교적인 색이 진한 걸 생각하면 꽤 어울리기도 하고

영왕을 '모시는' 행위가 탑 속에 사리를 모시는 방식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기도 함.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하바하와 달리 이치베가 모티프로 하는 달마는 종교 창시자이지

신이나 구도자 같은 초월자가 아니라는 점임.

초월자 하면 블붕이들이 바로 떠올리는 1부의 최종보스

아이젠 소스케는 어떨까?

며칠 전에 누가 '아이젠은 독일식 이름 아니냐'는 글을 썼던 걸 봤는데

여기에 대답하면 아이젠은 독일어처럼 들릴지 몰라도 독일과는 전혀 관련없는

티베트에서 발원한 이름임

뭔 개소리냐

티베트 불교에서 명왕을 일컫는 '라가라자'라는 신을

일본식으로 읽은 게 아이젠 명왕(Aizen Myōō)이거든.

이 아이젠 명왕은

욕망의 폭력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깨달음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상징하는데

이마에 세 번째 눈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서

이제 나방젠의 눈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지.

그리고 이 아이젠 신은

명계를 다스리는 분노의 화신이기도 함.

이름부터 이마의 눈, 웨코문드(명계)로 내려간 위치와

영왕의 상태에 분노해서 자신이 하늘에 서겠다는 욕망으로 초월자에 이른 동기까지

작중에서 아이젠은 결국 신이 되지는 못했지만

모티프가 아이젠 명왕과 연관되어 있는만큼

쿠보는 아이젠을 신에 근접한 인물로 그린 것임.

그러니까 1, 2부의 최종보스는 둘 다 신성을 가진 존재들인 건데

블리치가 정말 흥미로운 건 쿠보가 여기에 덧붙인 3명의 인물들 때문임.

유하바하 이전에 쿠보는 딱 한 번 기독교 메시아의 모티프를 이미 그린 적이 있음

아란칼 편에서.

바로 자엘아폴로 그란츠.

죽음을 맞이해도 부활하는 능력에

능력의 이름도 수태고지(가브리엘),

위의 캐릭터 표지도 대놓고 그리스도임.

지옥에서 부활했으니 정확히 말하면 적그리스도가 모티프라고 봐야겠지만

아무튼 옥이명명 편에서도 걸쳐입은 옷이나 후광같은 디자인을 보면 일관되지.

비중은 그닥 크지 않은데도 아란칼의 유일한 과학자로서

완전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얘기하는 자엘아폴로에게

비중에 비해 굉장히 중요한 상징을 모티프로 부여한 것임.

그리고 이런 자엘아폴로를 상대한 사신측 과학자

쿠로츠치 마유리는

'지장보살'을 모티프로 하는 만해를 가졌지.

이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구원자임.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해주는 저승사자의 역할도 하고

흥미로운건 일본 한정으로

기본적으로는 선한데 때때로 사람을 해치는 존재로도 묘사됨.

아무튼 쿠보는 캐릭터를 묘사할 때 인물의 최종형/비기(만해) 못지 않게

권두시를 인물의 핵심으로 제시하는데

쿠로츠치 마유리의 권두시는

"태어난다는 건 죽은 것과 다름없다."

자엘아폴로의 사상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문구이기도 하지만

마유리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는 내용임.

만해는 사신의 영혼이 투영되어 만들어지는 최종형태인만큼

금색소쇄지장의 형상은 갓 태어난 아기이고

적을 죽이거나 자신이 죽어서 공격을 성공시키는 방식이지.

쿠보는 사신들의 참백도 능력에 주로 일본 문화, 불교, 도교와 관련된 모티프를 부여하는데

약 100여 명의 아군 측 주조연 사신 중에 [신 / 구도자]가 모티프로 부여된 인물은 딱 둘 뿐임.

방금 말한 마유리와

마지막으로 우라하라 키스케.

'관음보살'을 모티프로 하는 만해를 가졌지.

(참고로 최종장에서 급조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떡밥은 처음 나올 때부터 있었음.

시해에 연꽃이 그려져 있고 붉은 실이 달려있거든. 관음보살의 상징색이 붉은색임.)

암튼 그런데 이 관음보살은 지장보살과 다르게

원래는 석가모니보다 먼저 부처였는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스스로 부처(신)에서 보살(구도자)로 몸을 낮추어 인간계로 내려온 존재임.

우라하라의 과거 행적이나, 아이젠과의 차이를 생각하면

쿠보가 만든 우라하라의 이야기는 모티프 설화의 특징을 닮아있지

아이젠 명왕이 아이젠의 이야기와 닮은 것처럼.

그리고 우라하라의 권두시는

"그래, 우리에게 운명 따윈 없다.

무지와 공포에 압도되어 발을 헛디딘 자들만이

운명이라 불리는 탁류 속으로 떨어져 가는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운명 결정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문장이고

종교에서 운명을 점지하는 존재가 신이라는 걸 고려하면

더 나아가 인격신을 완전히 배척하는 선언임.

이걸 다른 일반적인 사신들의 사상과 비교하면

키스케의 권두시가 적어도 사신계에서는

얼마나 혁명적인 선언인지 알 수 있지.

물론 자신이 하늘에 서겠다고 한 아이젠과 대조되기도 하지만

아이젠의 권두시를 보면

"인간은 모두 원숭이를 본뜬 것.

신은 모두 인간을 본뜬 것."

어쨌든 둘 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라는 점에서

오히려 사신들보다 이 둘이 비슷함.

다시 만해 얘기로 돌아가서 - 이 사상을 나타내는 형태가 독특한데

시전자가 꼭두각시인 동시에 인형사임.

전지전능한 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지만

'능력이 닿는 한' 모든 걸 새로이 고쳐 만들 수는 있음.

'소망을 구현하는' 붕옥은 아예 영왕까지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라하라라는 캐릭터로 쿠보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 알겠지.

신이나 운명에서 벗어난 인간의 자유의지.

그걸 상징하는 캐릭터가 최고의 과학자인 건

쿠보가 종교와 과학을 보는 시선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지 않냐.

그러니까 우리가 파벨 따질 때 말하는 '초월자' 캐릭터들 이외에

블리치에서 구도자의 상징을 부여받은 인물들은 전부 과학자들임.

쿠보가 보기에 인간이 깨달음을 얻어서 신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은

극한의 이과충이 되는 거라는 소리임.

농담이고,

아무튼 이렇게 보면 유하바하, 스님, 아이젠, 우라하라의 입장 차이도 명확해지지.

유하바하는 영왕의 아들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신중심주의의 고대신임.

원래 세상이 내것이었다고 주장해도 타파해야 할 대상이 맞지.

스님은 애초에 신이나 구도자가 아니라 종교 창시자가 모티프이기 때문에

신중심 사상과 가치 체계를 자신의 입맛대로 유지시키는 중세적인 교주나 다름없음.

아이젠은 여기에 최초로 반발한 인간중심주의, 그렇지만 여전히 신 관념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근대 사상의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마지막으로 우라하라는 신이나 운명의 관념조차도 과학으로 환원해버리겠다는

현대 과학의 의지를 표상하는 인물인 것임.

이런 차이들은 CFYOW 소설에서도 잘 풀어 썼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치고는?

이치고의 주인공 자리가 아쉽다는 평이 나올 수 있고, 그런 평가는 정당하다고 생각함.

그렇지만 이치고는 독자 모두, 우리들 인간 그 자체를 대변하는 캐릭터임.

"우리는 모습이 없는 까닭에 그것(죽음)을 두려워한다."로 시작해서

이런 선언으로 끝나는 주인공이야.

인간의 의지 그 자체 아니냐.

이러니 이치고의 조력자는 우라하라가 될 수밖에 없고

천년혈전 편에서는 아이젠까지 가세하는 게 당연하지만

유하바하는 끝까지 물리쳐야 할 적이고

스님은 같은 편 같아도 경계해야 하는 아군 속의 적으로 나왔다고 봄.

종장에서 조금은 뜬금없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면 자신의 손으로" 하겠다는 과학자의 포부를 밝히는 우라하라나

"인간의 걸음에는 용기가 있다"고 인간 찬가를 하는 아이젠의 대사가 나온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나 싶다.

블리치가 비록 주먹구구식 날림 전개로 망하긴 했지만

이래서 난 쿠보의 블리치를 좋아함.

긴글 읽어준 블붕이 있으면 고맙고

한 줄 결론:

쿠보는 (다른 거 무시하고 이런 것만 보면) 만신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