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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1-4

ㅇㅇ(14.6) 2021.05.28 00:20:22
조회 1191 추천 24 댓글 13
														

어드바이스 앤 트러스트 분량 짧으면 한개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에피는 길드라


내일은 어드바이스 앤 트러스트만 두개 올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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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신지가 하교 후 집에 도착할 무렵 늦은 오후의 하늘에는 주황색 빛줄기가 분노에 찬듯 마구 뻗쳐나가고 있었다. 신지는 현관 카드를 긁고 문이 열릴때까지 기다렸다. 들어서니 반겨주는 것은 암흑이었다. 최근 인상된 전기세 때문에 집을 나설땐 모든 불을 다 꺼야했다.


처음 이 현관에 들어섰을때 신지는 망설였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평생 친척과 선생님 집을 전전했지만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더니 이 친절하지만 낯선 사람, 예쁜 여자가 나타나서는, 집에서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가까운 뭔가를 공유해도 되는건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했었다.


신발을 현관에 벗어두고, 책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뒤 조명 스위치를 눌렀다. 어둠이 물러나자 현관에 다른 신발도 놓여있는게 보였다.


아파트의 구조는 간단했다. 현관에서 짧은 복도를 통과하면 꽤 넓은 주방이 나오고, 세탁실 겸 화장실이 옆에 붙어있다. 넓은 거실에는 안방과 테라스가 이어져있다. 반대편 복도에는 작은 침실이 하나 더 붙어있고, 그 바로 건너편에는 창고가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 신지는 작은 방을 썼지만, 아스카가 도착하고는 방을 가져가버리고 신지를 창고로 보냈다.


신지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가진 물건도 딱히 많지 않아서 박스 하나에 다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아스카가 가볍게 새 '방'에 버려놓은 박스. 반대로 아스카는 갖고 온 짐이 산더미 같았고 필요한 공간도 많았다. 생각해보면 신지는 이제 옛날 방으로 돌아가도 될 것이었다. 아스카는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고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신지는 아스카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스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스카의 물건에 손을 대거나 방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아스카가 싫어할거니까.


"다녀왔습니다." 신지는 주방에 들어서며 말했다. 불을 켜본다. "미사토씨?"


엉망으로 놓여 있는 의자 때문에 통과하는게 까다로웠다. 신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자 중 하나에 여자 교복이 옷걸이채로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조심스럽게, 신지는 교복 리본을 집어들고 관찰해봤다.


아스카꺼잖아. 신지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사토씨가 아스카 물건을 치워버리는건가? 신지는 다시 교복을 봤다. 깨끗하고 얼마전에 다림질된 물건이었다. 옷장 안에서 몇달 동안 먼지가 쌓였던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더 일찍 말해줬어야 했는데."


신지는 고개를 들었다. 미사토가 거실에 서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신지를 보더니 곁에 걸려 있는 교복으로 옮겨갔다. 피곤하고 근심에 차보였다.


"아스카 며칠 안에 퇴원할거야."


"정말요?" 신지는 기뻐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비슷한 뭔가가 느껴지긴 했다. 아스카가 집에 돌아온다니 기쁘다는, 가슴의 작은 두근거림. 하지만 신지는 아스카에 대한 생각과 행복이라는 개념을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아스카에 대한 기억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과 죄책감, 후회가 달려 있었다. 둘은 서로를 너무 많이, 자주 상처줬다. 가끔은 아스카가 하는 일이라곤 신지를 상처주는 것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때도 있었다.


미사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이야."


"아스카 ... 괜찮아졌어요? 아직-" 신지는 '미쳤냐'는 말을 꺼내기 직전에 멈췄다. "죄송해요."


신지는 급작스런 수치심에 고개를 떨궜다. 감히 농담으로라도 할 수 없을만큼 잔인하고 불공정한 말이었다. 아스카는 미친게 아니었다. 아픈거였다. 신지 자신의 경험에 비춰봐서도 그런 말은 해선 안되는거였다.


"아스카는 ... 나아졌어." 미사토의 말투는 신지의 기분보단 흥겨웠다. "혹시 병원에 데리러 갈때 신지군도 같이 갈 수 있을까 싶어."


신지는 망설였다. 아스카는 신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인생을 망치는데 신지가 일부나마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신지의 가슴속에서 아스카에 붙어 있는 감정들은 매우 복잡했고 대부분은 부정적이었다.


너 그정도로 겁쟁이야? 신지는 생각했다. 아야나미한테 똑같은 실수 해놓고 아스카한테도 그럴거야?


"아스카도 좋아할거야." 미사토가 덧붙였다.


신지는 그 부분엔 딱히 동의하지 않았지만, 아스카가 정말 돌아온다면 언제가 됐든 대면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만약 병원에 가서 본다면 아스카도 ... ...어쩐단 말인가? 신지가 자길 버린걸 잊어주기라도 할거란 말인가? "저 ... 네. 알았어요."


"고마워." 미사토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잘 안된 것 같았다. "믿을 수 있을줄 알았어."


그제서야 미사토의 어조가 무거운게 신지의 주의에 포착됐다. 둘이 대화할 일이 있으면 미사토는 언제나 밝고 긍정적으로 말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게 늦은 시간이든 피곤하든 무슨 주제든간에. 미사토가 아스카를 상대로 신지 같은 감정이 있을 것도 아니었다. 아스카가 돌아온다면 미사토는 기쁠 것이었다. 그걸 숨길 이유도 없고. 그럼 지금 신지만큼 풀죽어보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신지는 미사토를 쳐다봤다. 미사토는 곧바로 시선을 돌리고, 안절부절 못했다. "미사토씨?" 신지는 갈수록 더해지는 불안감속에 속삭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스카한테..?"


미사토는 한숨을 내쉬더니, 거실 문 프레임에 기대섰다. "아스카 문제는 아니고. 이건..." 미사토의 얼굴이 단호하게 굳어지더니, 심호흡을 한다. "쉽게 말할 방법은 없는 것 같으니 직설적으로 할게. 신지군, 초호기에 다시 타줘야겠어."


신지의 손에서 리본이 흘러나갔다.


미사토가 재빨리 덧붙였다. "더 이상 조종 안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사령관이 앞으로 사도가 더 나타날거라고 해서 준비 태세를 갖춰야해."


미사토의 말은 그냥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마치 신지의 귀가 이해 자체를 거부해버린 것처럼. 가슴속에서 뭔가 쿵하고 떨어졌다. 카오루를 생각할때마다 느끼는 슬픔과 너무할 정도로 비슷한, 공허한 느낌이었다.


그 다음으론 고통이 찾아왔다. 옛 상처가 다시 열리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아니라, 새로운 상처가 찢어져 열리는 느낌. "야-약속했잖아요." 신지는 말을 더듬었다.


"알고있어. 미안해."


분노, 강력한 불청객인 분노가 급작스레 찾아왔다. 불 붙은 파도가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감정의 노도.


"약속했잖아요!"


미사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약속한거 알아, 신지군. 믿어줘. 다른 방법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거야."


신지는 주먹을 쥐었다. 분노에 가늘어진 눈빛과 함께 한 걸음 걸어나간다. "약속했잖아요!"


"알아. 미안해." 미사토가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안해. 정말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 운용 가능한건 초호기 하나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신지는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말로 옮겼다. 마음 한구석에선 미사토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자는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지만, 신지는 무시했다. 배신감이 너무 컸다. "그거 탈때마다 사람들이 다친다고요! 토우지. 레이. 아스카. ... 카오루..."


"알아."


"매번 그랬는데! 어떻게 다시 하라고 할 수 있어요? 이해한줄 알았는데. 그냥 듣는척만 한거죠? 그렇죠? 미안하단걸론 부족해요! 미안하다고 해서 나아지는건 없어요. 아픔이 줄어들진 않는다고요. 미사토씨는 알지도 못하면서!"


미사토의 눈꼬리와 어깨가 동시에 축 처졌다. "신지군, 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정말이야. 하지만 네 아버지 명령인걸."


아버지 ... 지금 상황에서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버지도 강요할 수 없어요!" 전 서드 칠드런이 고함쳤다. "미사토씨도 마찬가지고. 명령 같은거 신경 안써요. 믿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미사토씨는 아버지랑 똑같은 흉물이야!"


마지막 말이 입을 떠났을때, 신지는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끔찍한 말이었다. 특히 방금 전까지만해도 자길 신경써준다고 믿은 사람에게 하기에는 더.


미사토의 눈이 커지더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미사토는 당황했다. 분노속에서, 신지는 자신이 겨우 말만으로 이렇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네가 맞아." 미사토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노력했다. "널 강요할 수는 없지. 하지만 너도 남자잖아. 남자는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니까, 남들이 기대고 있는 일이니까 해야할 때가 있는 법이야. 네 선택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는거라고. 네 말도-" 미사토는 잠시 말을 멈췄다. 생각을 정리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신지군. 네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난..."


신지는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랑 똑같아요! 날 그저 이용하려는거야! 한번이라도 신경쓴적 있어요? 한번이라도 진심이었던적 있냐고요!"


"난..."


미사토는 여기서 끝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이었다. 약속을 깬 것을 무슨 말로 정당화해도 신지는 납득하지 않을 것이었다. 신지는 초호기를 조종하지 않을 것이다. 기운이 쭉 빠진게 역력한 모습으로, 미사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의 논쟁을 포기했다.


신지는 미사토가 물러나는 것도 보지 않았다. 대신 방금 바닥에 떨군 리본을 주워 의자에 걸고, 지치고 배신당한 모습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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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미사토는 영호기 격납고에 도착해 하부 덱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방에 쳐박혀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장화가 금속 손잡이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충격파처럼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들을 뚫고 울려퍼졌다.


반대편에서는 리츠코가 다이빙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격납고에는 한줌의 기술자들 밖에 없었고, 경례를 한번 보내는 것 외엔 미사토에게 별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편이 미사토도 선호하는 바였다.


"진짜네?" 네르프 소령은 아주 용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카트라즈에서 버드우먼이 탈옥했다는게?"


리츠코는 산소 조절기를 작업하던 것을 놔두고 고개를 들었다. 미사토는 그쪽을 향해 걸어가며 모자를 정리했다.


"이렇게 오래 걸린게 더 놀랍지." 리츠코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건 웃는게 아니었다. "귀중한 자원을 낭비할수는 없으니까."


그럼 그렇지. 미사토는 생각했다. 도구처럼 써먹히면서도 할 수 있는 말은 저게 다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뭐라 하겠냐만은.


미사토는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있었다. 3개월도 더 전에, 더미 시스템을 파괴한 직후 리츠코는 이카리 사령관의 직명을 받은 정보부에 의해 무기한으로 감금됐다. 리츠코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고, 누구도 나서서 막을 수 없었다. 미사토는 더미 시스템이 파괴되는 현장에 신지와 함께 있었다. 레이의 여분 신체들이 분해되는 광경을 코앞에서 보며. 리츠코의 경멸담긴 말에 의하면,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들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미사토가 본 중 가장 불쾌한 광경 중 하나였다. 그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미사토는 세컨드 임팩트를 폭심지에서 목격한 인물이었으니까.


"뭐 어쨌든. 돌아와서 잘됐어. 나 혼자만 재미보면 섭하겠지. 코트라도 받아줄까 어쩔까?" 미사토는 리츠코의 바로 옆까지 걸어가며 말했다. 도착한 다음 미사토는 차가운 금속 표면 위에 앉아 모서리 너머로 다리를 흔들거렸다.


발 밑에 가득찬 LCL 용액을 들여다보니, 건조 중인 영호기의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상체, 팔 하나, 머리만 온갖 계량기와 케이블, 파이플에 둘러싸여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장갑이 덧씌워지지 않은 현 상태에선 반쯤 발굴이 끝난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완전 예쁘네." 미사토가 조롱조로 말했다. "이렇게 흉측하다니. 장갑은 진짜 보기 좋은데."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야. 겉모습 따위 누가 신경쓸까." 리츠코가 대답했다.


미사토는 거의 웃을뻔했다. "이건 무기야. 신 같은게 아니고. 신이었으면 레이가 부술 수도 없었겠지. 레이도 참 대단하다니까."


"대단'했지'." 리츠코가 수정했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쭉 펴더니 실험복을 벗었다. 밑에는 짙은색의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미사토는 바닥에서 코트를 주워 자신의 무릎을 덮는데 썼다. 리츠코의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고마워." 리츠코가 말했다.


"괜찮아. 나 남 돕는거 좋아하니까. 그나저나 여기 와서 뭐하는거야?"


"샘플 채취. 영호기는 현 단계에서 공기에 노출되기엔 너무 약한 상태니까, LCL의 영양 성분이랑 산소 공급이 보호에 도움을 주거든. 그래서 제대로 된 샘플을 얻는 방법도 이것뿐이야." 리츠코는 다이빙용 손목시계를 점검했다. "나도 뭐 하나 묻자면, 신지군이랑 대화는 했어?"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미사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무슨 일인지 곧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리츠코는 어쨌든, 천재니까. "잘 안됐나보네."


미사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주제에 대해선 깊이 얘기하는걸 피하고 싶었다. 아마 리츠코에겐 신지가 초호기의 조종을 거부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이다. 정식 보고서도 이미 작성해놨다. 신지가 내뱉은 말들이 아직 아팠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자신이 그런 말을 들어 싸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상처가 더 아프고 잊기 힘들었지만.


"미사토?" 리츠코가 다시 묻는다.


"그런 일은 다신 하고 싶지 않아." 미사토는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를 평온하게 유지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표정이...이제 날 미워할거야."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지 그랬어."


"어떻게? 무슨 방식? 의무니까 입 닫고 하라고? 그렇게 말했어. 나 스스로도 그런 말 믿는지 모르겠어. 그게 진실이긴 한건지 나도 모르겠어.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단거야?"


"설정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했어야 했단거야." 리츠코의 대답은 예측 그대로였다.


"무슨 기계 다루듯이?" 미사토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리츠코가 이해해줄거란 기대도 안했었지만, 기대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이렇게까지 신경쓰는 분야에 이정도로 심드렁한 모습은 참을 수 없었다. "감정이 없는 물건처럼 다루라고? 난 그런거 못해. 인간은 그런식으로 작동하지 않아, 리츠코. 너 같은 사람은 이해 못하겠지만, 목적에 필요하다고 해서 그렇게 고통을 주는걸 정당화할순 없는거야. 걔한테도 행복해질 권리는 있다고."


"우리한테도 같은 권리가 있는거 아니야? 하지만 인생은 그런식으로 돌아가지 않아. 우린 우리 자신에게 요구되는 일을 해야해. 아무도 그러지 않으면 우린 아직도 동굴에서 살면서 불도 피우지 못하고 있을거니까. 희생도 곧 삶의 일부인거지." 리츠코는 미사토 옆에 쪼그려 앉더니 알루미늄 산소탱크를 등에 고정하기 시작했다.


"다 좋으니까 다음번엔 네가 신지한테 직접 말해볼래?"


리츠코는 스쿠바 마스크를 이마에 고정시켰다. "아스카는?"


"아직 병원. 무슨수로 2호기 조종을 시킨다는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아스카 파일 너도 봤지?"


리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봤어. 괜찮을거야."


"오물로 가득한 욕조 안에서 죽기 직전인걸 정보부가 발견했어." 그 보고서는 생각만해도 아랫배가 불편해졌다. "영양실조 상태에 자해하는거 막으려고 약까지 놔야했고. 대량살상병기를 맡겨도 될 것 같진 않은데."


리츠코는 별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아스카가 자살을 하진 않을거야. 그런건 아스카가 할 일이 아니야. 원하는게 그런거였으면 더 쉽고 효율적인 방법들도 많았지. 그래서, 아냐. 아스카는 자신의 실패에 대해 고통받고 스스로를 벌하고 싶었던거지. 삶에 대해 애착을 버리는게 꼭 죽고 싶은것과 같은건 아니야."


"그럴지도." 미사토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요점은 그대로. 어떻게 그런 상태에서 에바를 조종한단거야?"


"몇가지 시도해보고 싶은게 있어. 에바는 아주 복잡한 시스템하에 만들어졌으니까. 그 중에 하나만 살짝 조정해도 전체 작동에는 큰 차이가 날 수 있어. 필요하다면 보조 소프트웨어도 개발할 수 있고. 전력 연결을 더 강화할 수도 있고. 이건 내 전문분야니까 맡겨둬."


미사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럼 아스카한텐 어떻게 말하지?"


"듣고 싶은 말 아무거나 해줘. 아,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면 바로 다음날 내 사무실로 보내는 것도 잊지 말고. 검사 좀 해야하니까." 리츠코는 마스크를 눈까지 내렸다.


"검사는 이미 다 받았어. 그러니까 퇴원하는거지. 기동 실험 준비만 되면-"


"그건 내가 결정할거야. 퇴원 결정도 정신과 치료의 일환이지 꼭 그렇게 해줄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건 아냐. 필요하다면 병상에 그대로 눕혀논채 테스트해도 상관 없어."


"너 가끔보면 정말 잔인해."


"잔인한게 아니야. 이건 ..." 리츠코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듯했다. "미사토. 들어봐. 계속 이렇게 사적으로 임할순 없는거야. 거리를 둬. 그렇게 나쁜거 아냐."


그럴 일 없을거 너도 알잖아. 미사토는 생각했다. "너의 그런면 정말 부러워, 리츠코. 그리고 하나도 안부럽기도 하고. 그런면이 너란 사람한테 무슨 의민지 생각해보면." 미사토는 리츠코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지가 날 흉물로 불렀지. 그럼 리츠코 넌 뭘까?


"그런건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어. 솔직히 말해 우리가 그런 겉치레 같은 도덕에 신경쓸 처지도 아니고. 우리한테 중요한건 파일럿이야."


미사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말에는 미사토도 공감했다. 아마 리츠코가 의미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겠지만. 리츠코는 파일럿들에게서 도구와 무기만을 봤다. 미사토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이들,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이었다. "그래. 코트는 내가 계속 들고 있을게."


"진짜? 오래 걸릴 수도 있어."


미사토는 어깨를 으쓱했다. "상관없어. 나도 시간은 많아."


"그럼 맘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리츠코는 호흡기를 입에 물고, 마스크를 완전히 고정시킨 다음 큰 풍덩 소리와 함께 LCL로 입수했다. 미사토는 리츠코의 실루엣이 주황빛 심연 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계속 잔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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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본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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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본 연재 이전 사설 삽화. 그린 사람은 동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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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에서 드디어 아스카 나온다


원래 아스카 분량까지 끌어오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져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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