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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6-3

ㅇㅇ(14.6) 2021.07.18 21:02:57
조회 696 추천 20 댓글 20
														

내용상 그 앞에서 끊기는 애매한 부분이라 길게 핫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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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젠장!" 휴우가가 헤드셋을 집어던지고 황급히 미사토쪽을 돌아봤다. "장갑판을 돌파하고 지오프론트로 진입 중입니다. 14 사도때보다도 빠릅니다! 저것들은 대체 뭘 먹여서 키우는건지."


"그 말인즉슨 신기록인거지?" 물으면서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미사토였다. 5 사도전 이후로 일부 취향이 이상한 직원들이 사도가 센트럴 도그마까지의 장갑판을 돌파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세세하게 기억해두고 있었다. 그 숫자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장갑판 강화할 방법을 찾아봐야 할건데. 포격은 아무 효과 없었던거지?"


"예, 그렇습니다." 휴우가가 확인해준다.


당연히 그랬겠지, 라고 미사토는 생각했다. 우리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지령실 요원들이 서로 돌아보며 속삭이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공포가 마치 물리화된 것처럼 모두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결국 두려움을 입밖으로 표시한 것도 그래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걸 계속 쏠 수 있는거죠?" 하루나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소리쳤다.


"생각보다 간단해," 리츠코가 지난 몇 분간 계속 서있었던 미사토의 오른편에서 말했다. "S2 기관이 에너지를 공급해주는거야. 집중해서 봤다면 매번 집중된 에너지를 한번에 발산했다는걸 알았겠지. 아마 AT 필드 조작을 통해 에너지를 응축하는걸거야. 폭발의 강도는 사도가 집중해서 힘을 모은 시간에 비례하겠지. 현재로선 다른 가설도 몇개쯤 세워볼 수 있긴 하겠지만."


입술을 비죽이는 미사토. "과학 수업은 나중에 하자고." 고개를 돌려 하루나에게 입 좀 다물라는 냉엄한 눈빛을 보내고, 다시 리츠코에게 돌아선다. "초호기에 손상을 줄 수 있을만큼 에너지를 모으는데는 얼마나 걸릴지 예상할 수 있을까?"


"대수방정식이 답이야. 마기로 S2 기관의 최대 단발출력을 추정하면 그 뒤론 함수 문제지."


"좋아. 지금 당장 시작해. 휴우가, 사도의 예상 도달 시각은?"


"초 단위입니다. 지오프론트 표층으로부터 100미터 고도에 있고 일정한 속도로 하강하고 있습니다."


"지표면 사상자 보고는?"


"아직 없습니다. 아마 시간이 걸릴겁니다."


시간 같은건 없는데, 라고 미사토는 생각하며 눈 앞의 작은 콘솔에 몸을 기울이고, 거대한 전면 주 디스플레이로부터 작디작은 소형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지의 심장박동과 싱크로그래프가 떠 있었다. 모두 지금 당장은 안정되어 있었다.


"레이쪽 소식은?"


"없습니다."


미사토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으며 초호기와의 통신 채널을 열었다. 이것보다 더 나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건데.


"신지군?"


대답이 없었다.


"신지군, 듣고 있는거 알아."


"네?" 마침내 답하는 목소리가 사뭇 진중했다. 한동안 신지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상황에 걸맞는 모습이었고 사실 진지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걱정했을 판이었으나, 그래도 그 목소리는 마음에 많이 걸렸다. 신지는 웃고 즐거울 나이다. 엄숙하게 전장에 나서는게 아니라.


미사토는 다시한번 죄책감에 휩싸였다. 신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생각났다. 어기고 만 약속들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레이가, 아스카가 생각났고 신지에게 한것과 마찬가지로 두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상기됐다.


아이들을 보호해주고 싶었지만 그걸 실패하는걸 넘어서 더 큰 상처를 매번 주는게 미사토였다. 오늘 레이와 신지를 밖에 내보낸 것도 그랬다. 아이들이 자꾸 목숨을 내걸어야하는 이 상황은 모두 미사토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런건 미사토의 능력 밖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숱한 훈련과 주변의 인력과 장비와 수십억엔짜리 무기들을 가졌음에도 미사토는 지금 무기력감을 느꼈다. 할수만 있었으면 그 모든걸 다 버리고 파일럿의 자리와 맞바꿀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직접 거는편이 더 나았다.


그것도 당연히 불가능한 얘기였다. 미사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것 외에는. 마치 아버지가 죽었을때 가만히 서서 지켜봐야 했던 것처럼. 아스카가 강간 당했을때처럼. 레이가 죽었을 때처럼, 카지가... 그녀를 떠났을 때처럼.


미사토는 신지의 얼굴이 떠있는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LCL에 잠긴 그 파란 눈이 평소보다 더 어두워보였다. 눈자위 가장자리가 아직 빨갰다. 그 얼굴에선 지금 슬픔도 잠시 뒤로 밀려나 비장한 결의가 떠올라있었다.


"다신 에바에 타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 정말 진심이었어. 어기게 된거 미안해. 네가 평범한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생각했어. 일이 또 이렇게 되버렸네. 다시 한번, 널 믿을 수 밖에 없겠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야. 우리 모두의 미래가 너에게 달렸어. 그러니까 ..." 미사토는 심호흡을 하며, 지금부터 해야할 말을, 그리고 그것을 들어야하는 상대가 신지임을 벌써부터 후회했다. "에바 초호기, AT 필드 전개. 교전에 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신지가 망설임 없이 답해왔다. "맡겨주세요."

















사도가 센트럴 도그마의 숲에 착지하자 그 무게에 땅이 뒤흔들리고 내려앉았다. 날개가 뒤로 젖혀지더니 접히는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우아했다. 그러고는 팔을 축 늘어트리고 살짝 몸을 숙인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입이 슬쩍 벌어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주변의 공기가 지글거리며 사도의 형상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놈의 모습에 집중하자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여태껏 신지가 본 에반게리온들은 기초적인 수준이나마 인간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었다. 지금 눈 앞에 서있는 물건은, 길쭉한 주둥이에 아무 형태도 없는 얼굴, 불타는 붉은 눈이 마치 악몽에서 현실로 튀어나온 악마 같은 느낌이었다.


단순히 싸워야 할 짐승 수준이 아니었다. 두려워해야할 대상이었다.


아마 레이를 죽였을 것이다.


미사토의 지시대로 AT 필드를 전개하자 주변의 공기가 에너지로 지글거렸다. 갑자기 뜨거운 공기가 원형으로 퍼져나가며 땅이 울리고 나무들이 성냥개비처럼 뽑혀 날아갔다. 사도도 상황을 감지하고, 고개를 까딱이며 AT 필드를 전개해 초호기의 필드에 맞섰다.


두 길항하는 힘이 신속하게 서로를 중화시키고 고온으로 달아오른 공기를 머리 위 돔 천장까지 뿜어냈다.


신지는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전투에 어떤 일이 뒤따르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싸움은 친구의 죽음으로 끝난 바가 있었다. 신지는 아직도 자신이 왜 카오루를 죽인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은 절대 잊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일은 그 일이었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저것은 친구가 아니다.


"신지군, AT 필드가 중화되고 있어." 라디오를 통해 미사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접근해서 코어를 부수고 집에 가는거야. 복잡한거 하나도 없어. 도박은 하지 말고."


"알고 있어요."


신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의지를 다졌다. 이전에 숱한 위기를 넘기게 해준 구문을 다시 한번 입에 담는다. 도망쳐선 안돼...


눈을 뜨자 잔뜩 찡그린 이마 밑으로 결의에 찬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도망쳐선 안돼," 신지는 다시 한번, 더 크게 반복했다. "난 싸워야해."


창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신지는 세계구급 계주 선수 같은 속도로 돌진했다. 초호기가 넓은 보폭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자 땅에 크레이터가 생겨나며 지축이 뒤흔들렸다.


"도망쳐선 안돼!"


사도는 에반게리온이 접근해오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 백여미터를 남겨둔 시점에서 신지가 조종간을 잡아당기자 초호기가 놀라울 정도의 민첩성으로 도약했다. 뛰어오른 지점의 땅이 마구 패여나갔다. 허공에서 창을 앞으로 찌르는 신지. 초호기의 질량과 속도에서 나오는 모멘텀이면 사도의 흉부 장갑을 단번에 뚫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거면 됐어, 신지는 생각했다. 이거면, 이거면.


신지는 이를 악물고 공격에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잠깐 동안 주변 시간마저 멈추는 것 같았다. 엔트리 플러그 바깥의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사도가 앞으로 전진해 둘 사이에 남은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신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도가 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창을 내리쳤다. 사도는 어깨를 휙 돌렸다. 동작이 워낙 다급해 거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모습이었지만 창날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신지는 자기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게 반응해 손에서 창대를 돌리고, 두 발로 땅을 찢으며 멈춰섰다. 그 결과 공격은 빗나가지 않았으면서도 빗나갔다.


창날이 사도의 코어가 아니라 머리를 강타해 장갑과 살점을 찢고 들어갔다. 마치 푸주칼이 쇠고기를 내리치듯 주둥이를 찢겨 열리며 분수 같이 피를 흩뿌렸다.


"코어를 놓쳤잖아!" 귀에서 미사토가 소리치고 있다. "코어를 공격해!"


"알고 있어요!"


사도의 상처로부터 붉은 액체가 솟아나는 것을 보며, 익숙한 LCL의 냄새가 후각을 채우고 있음에도 웬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신지였다. 사도가 비명을 지르고 팔을 휘저으며 뒤로 넘어지는 동안 초호기는 그 앞에 다리를 벌린채 착지를 완료했다. 땅바닥이 마구 갈라졌다.


신지는 미쳐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두 손으로 창대를 붙잡고 날을 뽑아내려 애썼다. 코어에 재차 공격을 가해야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창날은 튼튼하긴 했어도 그만큼 막대한 힘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곧 날이 휘어버리더니, 다음 순간 뚝 하고 부러져버렸다.


"이런 젠장!" 신지는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으로 몸을 재껴 사도의 주먹질을 회피했다. 반격으로 마치 몽둥이처럼 휘두른 창대가 틀어막히고, 사도가 초호기의 배를 가격해왔다. "가만히 좀 있어봐!"


버둥거리는 사도를 잠깐 떼어낸 다음, 초호기는 재빨리 그 위에 올라타 무릎에 막대한 체중을 싣고 찍어눌렀다. 사도는 두 손으로 초호기를 밀어봤지만 제대로 된 레버리지 없이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신지는 버튼을 눌러 부러진 창날을 창대로부터 분리하고, 창대 반대편 끝에서 예비용 날을 사출시켰다.


사도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신지는 확실히 마무리 일격을 날릴 수 있게 손을 뻗어 사도의 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창을 휘두르기 위해 손을 들어올린 순간 사도의 붉은 눈과 마주하고, 망설였다. 머릿속에 두 형상이 떠올랐다. 아야나미 레이의 붉은 눈, 그리고 카오루의 붉은 눈이.


순간의 광기속에서 신지는 사도의 눈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방금 지오프론트에 강습하던 순간의 그 눈이 아니었다. 모습이 변했다. 신지가 아는 눈으로.


우린 모두 하나야, 이카리 신지,


신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음 속에서 뭔가 익숙한 것이 자신을 잡아채고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었다. 마음 속 후회스러운 일들을 담아놓는 공허한 웅덩이에 쳐박혀 있던 깊은 고통이, 행복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되돌아왔다. 사도의 눈이 가늘어지자 갑자기 인간의 눈처럼 보였다.


미사토가 소리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신지군!"


그 목소리도 신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옛 기억이 이제 생생한 형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언제나 희미한 미소를 짓고 다녔던 날카로운 인상의 소년. 신지는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아는 것은 절대 그것을 잊을 수 없을거라는 사실 하나뿐. 


"카오루군?" 속삭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자기 귀에도 슬프고 외롭게 들려왔다.


날 죽여. 그러지 않으면 너희들이 죽을 수도 있어.


바로 그렇게 했었다. 신지는 카오루를 죽였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준 단 한 사람을. 죽였다. 어떻게 이놈이 카오루의 눈을 하고 있는걸까? 어떻게 카오루에 대해 안걸까?


"신지군, 당장 피해!" 미사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곧 있으면-"


섬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신지는 몸을 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도망갈 길은 없었다. 폭발이 초호기를 강타하고 날려버리자 온 몸의 모든 부분을 동시에 망치로 내리친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왔다. 옆으로 몸을 굴리며 팔로 머리를 감싸는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빛이 잦아들었을 무렵 신지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지경이었다. 그렇다. 신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 머리가 반쯤 쪼개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고 위를 올려다봤다.


짙게 깔린 연기 속에 사도가 일어서고 있었다. 주둥이에는 창날이 그대로 꽂혀 쪼개진 턱으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것은 미소짓고 있었다.


















"신지군, 살아있어?" 자신이 보고 있던 모니터를 포함 모든 디스플레이가 꺼져버리자 황급히 휴우가의 자리로 몸을 기울이는 미사토였다. 와중에 휴우가가 거의 의자 밖으로 밀려나갈뻔했다. "대답해, 신지군!"


"소령님," 휴우가는 우물쭈물 미사토를 밀어냈다. "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상황 보고해!"


재빨리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을 주워담는 휴우가였다. "근거리에서 발생한 전자기파 때문에 관측장치들이 맛이 갔습니다. 초호기는 크게 손상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확실한건 없습니다."


"신지 상태는?" 미사토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휴우가의 어깨에 손이 얹혔다. "예비 원격 관측 장치 써봐."


휴우가가 작업에 들어가는 동안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문제는 없어보입니다. 외견상으로는." 콘솔 위에 휴우가의 손이 날다시피 오가고 있었다. "심박수가 늘긴 했지만 아직 안전권 내입니다. 침식이나 방해는 일절 관측되지 않습니다."


미사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에서 무거운 뭔가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신지는 안전하다. 최소한 지금은. 그 이상은 바랄 수도 없었다. 사도에게 그냥 쓰러져 죽어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길 수 있었는데," 뒤에서 리츠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일 기회가 있었어."


미사토는 몸을 휙 돌려 리츠코를 노려봤다.


"무슨 소리야?"


"죽일 수 있었는데, 망설인거야.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해."


미사토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폭파 공격 당했잖아. 그 전엔.. 우리 둘 다 똑같은 영상 봤고. 창으로 공격했다 빗나간것 뿐이야. 다른거라도 본 거 있어?"


리츠코는 완전히 무감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사토는 가끔 저런 모습이 정말로 미웠다. 몸을 쭉 펴고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모니터 하나가 다시 작동을 개시하고, 곧 다른 모니터들이 뒤따르더니 마지막으로 주 모니터도 복구됐다.


"영상 시스템 복구 완료됐습니다," 하루나가 보고했다. 여전히 진정하지 못한게 표정에 묻어나고 있었지만 최소한 견디고는 있었다. "관측장치들이 모두 복구되어 마기에서 수신된 정보를 분석 중입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콘솔로 주의를 되돌리는 미사토. "신지군, 내 말 들려?" 무선 통신을 시도해본다. "프로그레시브 나이프로 코어를 파괴해. 또 비슷한 공격을 하는데는 시간이 걸릴거야."


대답이 없었다.


주 모니터 영상에 보이는 초호기는 움직이고 있었다. 방금 지시를 들은 것은 분명했다. 아직 싸울 여력이 있는 것이다. 미사토는 말없이 기도하며 지켜봤다.













신지는 창대를 내던지고 오른쪽 어깨에 수납된 프로그레시브 나이프를 꺼냈다. 두 손으로 붙잡은 나이프를 앞으로 내밀고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천천히 전진한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참을만은 했다.


사도는 공격해오지 않았다. 자신이 방금 만들어낸 크레이터에서 빠져나온 다음 가만히 서있을뿐이었다. 마치 다시 공격해보라고 도발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피투성이 주둥이가 엉망진창이었고 창날이 아직도 꽂혀서 비죽 튀어나와 있는 몰골이었지만 어째선지 다친 것처럼 보이는 것보단 살벌해보이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가 벌어진 입으로 흘러들어가 이빨 사이로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망쳐선 안돼!"


신지는 나이프를 내밀고 돌격했다. 이번엔 사도쪽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초호기를 맞상대하러 나선다. 지축이 뒤흔들렸다. 나무들이 쪼개지고 온 사방에 흙먼지와 잎사귀가 날렸다.


초호기가 짐승 같은 난폭함으로 사도와 뒤엉키자 주변 공기를 모조리 찢어놓을 기세의 충격파가 번져나갔다. 코어를 노리고 나이프를 내리찍지만 사도가 두 팔을 뻗어 붙잡았다. 신지는 온 힘을 다해 몸을 기울이며 억눌러보려 했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사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팔이 쇠막대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온 몸의 근육이 불타는 것 같았다. 나이프를 내리치기 위해 힘을 줄수록 턱이 꾹 닫혔다. 팔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인다. 초호기와 사도 모두 한계치까지 힘을 내며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어느쪽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를 제압할 수도 없었다.


"죽어!" 신지가 소리쳤다. "감히 레이를... 죽어!"


다음 움직임은 신지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도가 옆으로 몸을 틀면서 여태껏 밀어올리던 초호기의 팔을 잡아당겼다. 초호기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주춤거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도권을 뺏기기엔 충분했다. 당황한 신지가 옆으로 나이프를 크게 휘두르는 사이 사도는 한걸음 다가서서 초호기의 머리를 들이받았다.


망치로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에 날카로운 고통이 전해져왔다. 일종의 망치인건 맞았다. 살덩이와 장갑과 악의로 가득찬 망치. 초호기가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치고 신지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사도는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초호기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땅바닥에 꽂아넣는다. 하지만 손을 뻗어 초호기의 목을 붙잡는 순간 신지가 비명을 지르며 나이프를 찔러 올렸다. 순전히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나이프가 사도의 너클 바로 아래를 찢고 들어가 전완까지 살과 뼈를 단번에 갈랐다.


미친 짐승처럼 끔찍하게 울부짖는 사도. 찢어진 손을 황급히 빼지만 곧바로 신지가 따라붙어 머리를 걷어찼다. 금속과 살덩이가 함께 괴성을 만들어냈다. 사도가 뒤로 벌렁 쓰러지고 둘 사이에 다시 거리가 생겼다. 초호기는 벌떡 일어나,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을 향해 온 힘을 모아 나이프를 내리쳤다.


분노를 담아 내리친 칼날은, 사도가 살짝 몸을 비틀자 장갑을 관통하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그 뒤로 이어진 반격을 신지는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머리에 압력이 느껴진 순간에야 깨달았다. 조종석 목받이에 뒤통수가 쳐박혔다. 자신이 뭘 맞은건지 생각하기도 전에 신지는 주먹을 내질러 보복했다. 눈 먼 주먹이었고 어디에 맞았는지도 본인은 몰랐다. 사도가 신음을 내뱉었다.


신지는 한번 더 주먹을 휘두른 다음, 나이프를 내리쳤다. 사도는 초호기의 손목을 붙잡아 나이프를 막고 다른쪽 손을 초호기의 목을 향해 내질렀다. 신지는 황급히 몸을 뒤로 빼 목을 붙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사도는 다시 일어나 앉기 시작했고 초호기의 체중으로도 그걸 막을 수 없었다. 신지는 이를 악물고 아직 자유로운 손으로 여러 차례 주먹을 휘둘렀다. 매번 타격이 가해질때마다 사도도 똑같이 타격을 교환했고 조금씩 조금씩 밀려나는 것은 신지였다. 어느 순간 나이프를 든 손목이 비틀리기 시작하고 주먹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도가 자기 손목을 비틀고 있는걸 깨달은 신지는 사도를 발로 걷어차며 일어나려 해봤지만 너무 늦었다.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신지는 균형을 잡지 못해 뒤뚱거리며 물러났다. 사도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따라붙었다.


빙글빙글 돌고 앞으로 나갔다 물러났다 하며 초호기와 사도는 마치 무리의 지배권을 놓고 싸우는 숫사자처럼 끔찍한 타격을 교환했다. 어떤 종류의 기술도 유파 같은 것도 없이 술집 난투극 같은 싸움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상대가 움직이지 못할때까지 망가트리는 것만이 목표인 그런 싸움. 둘은 그저 가진 모든 것과 모든 수단을 그때그때 던져가며 주변의 대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었다. 커다란 흙덩어리들이 곳곳에 날아다니고, 수십 그루의 나무가 단번에 뽑혀나가고, 도로가 깨지고 가로등이 뒤집혔다.


우위에 선건 신지였다. 신지는 사도를 쓰러트리고 쭉 튀어나온 주둥이를 끊임없이 주먹으로 내리친다. 하지만 사도는 초호기가 쏟아부을 수 있는 것 이상을 견딜 수 있는 모양이었다. 초호기를 걷어차서 밀어내고, 균형을 회복하지 못한 초호기의 목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신지는 재빨리 사도의 멀쩡한 팔을 옆으로 밀어내며 팔꿈치로 놈의 얼굴을 갈겼다. 충격에 사도는 몸이 거의 반쯤 돌아가버렸다. 놈의 주둥이는 이제 완전히 형태를 잃어 창날이 꽂혀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만신창이 같은 몸에도 불구하고 빛과 같은 속도로 신지는 사도의 목에 팔을 둘러 초크를 걸었다.


"놔주지 않겠어!" 신지가 번득이는 눈으로 소리쳤다. 입에는 피가 흥건하게 차있고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코에서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도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신지는 모든 힘을 사도의 목뼈를 부러트리는데 집중했다. 당기고, 꺾다보니 곧 놈의 경추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지의 심장박동이 흥분으로 미친듯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져 고통스러웠다. 


충분하지 않았다. 온힘을 다 하는데도 모자랐다. 신지는 정신을 집중해 다른 대안을 찾아봤다. 이 근처 어딘가에 프로그레시브 나이프가 아직 떨어져 있을 것이다. 주워서-


사도가 앞으로 몸을 던졌다. 두 팔을 모두 놈의 목에 두르고 있던 신지는 그걸 제대로 막을 방법이 없었다. 사도는 땅바닥에 손을 뻗더니 뭔가 길쭉한걸 집어들었다.


신지는 그게 자신이 아까 버린 창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피할 방법이 없었다.


사도는 앞으로 몸을 던져 틈을 만들고, 뒤로 창을 찔러올렸다. 


창날이 초호기의 어깨 장갑을 관통하고 근육을 찢어버렸다.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다. 신지는 비명을 지르며 사도를 놓고 물러서 어깨를 부여잡았다. 큰 실수였다.


사도가 몸을 돌렸다. 온 몸의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나와 구부러지고 흠집난 장갑을 붉게 얼룩지고 있었다. 하지만 초호기의 상체를 붙잡는 팔 힘은 마치 조금도 부상입지 않은 것마냥 강철 같았다. 충격적일 정도의 힘이었다. 놈은 그러곤 날개를 활짝 폈다. 팔에 더 힘이 들어와 신지의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갔다. 숨을 쉬어보려고 해도 갈비뼈가 부러져버릴 것 같은 느낌만 되돌아왔다.


온 힘을 다해 사도를 밀어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었지만 힘이 부족했다. 신지에겐 언제나 힘이 부족했다. 신지는 전사 같은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싸워야해서 싸워야하는 소년에 불과했으니까.


"이런 젠장!" 고함치는 신지. 사도가 초호기를 꽉 붙잡고 온몸에 피를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목에서는 가래 끓는 듯한 소리를 낸다. 혹시 웃음일까.


저것이 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쫙 끼쳤다.


사도가 날갯짓을 하자 둘 모두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다른 기계도 그렇게 에바 두기를 동시에 그런 모습으로 들어올릴 수는 없었다. 신지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절박하게 주먹으로 사도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미 다 부서지고 너덜너덜해진 머리가 더 짓뭉개지기 시작했다. 사도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둘은 마치 피투성이 독수리 같은 꼴로 떨어졌다.


추락지점은 센트럴 도그마 피라미드였다. 한쪽 모서리가 완전히 붕괴되고 콘크리트, 강철, 연기가 귀가 멍해지는 소음을 내며 쏟아져내렸다. 대부분의 충격은 밑에 깔린채 추락한 초호기가 받았다.


신지는 피로 가득찬 입을 열어 비명을 질렀다. 너무나 익숙하면서 끔찍한 맛이었다. 자신이 아마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을 스쳐지나갔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그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트럴 도그마 내부에도 지옥이 강림했다. 조명이 깜박이고, 지지대들이 무너져내리고, 벽들이 휘어지고 부서졌다. 가장 안전해야할 지령실 내부에서도 스크린들이 폭발하고 경보음이 마구 울려퍼지는 와중에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곧 세상이 멸망할거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미사토는,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조명이 꺼지고 모든 시스템이 예비 전력으로 전환됐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 휴우가의 목소리만이 깔끔하게 들려왔다. "본부 북사면에 막대한 피해 발생! 직격입니다!"


"호들갑 떨지마," 아오바가 말했다. "처음도 아닌데."


"마지막이 아니길 빌자고." 하루나가 한마디 얹는다.


"전원 잡담 중지," 미사토는 끙끙거리며 일어나 명령했다. 주변 상황도 대부분 비슷했다. 개중엔 비틀거리며 피를 흘리는 인원도 보였다. "초호기 상태나 보고해."


미사토는 주변을 둘러봤다. 리츠코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루나는 바닥에 앉아 자신의 의자 옆에 기댄채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직 작동 중입니다." 바닥에 앉은채로 콘솔을 확인하고 보고하는 하루나. 수훈 추천이라도 할까 잠시 생각하는 미사토였다. 휴우가와 아오바도 금새 자기 자리에 복귀해있었다.


"본부 건물은 버텨냈습니다." 아오바의 보고였다. "기하학의 힘이겠죠."

"예산 때문에 또 난리 나겠네." 휴우가가 중얼거렸다.


"돈 걱정도 일단 살아야 의미가 있겠지." 미사토는 아까까지 서있던 휴우가의 옆자리로 비틀거리며 돌아가 다시 휴우가의 콘솔에 몸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다. 스크린 몇개는 아예 금이 가있었다. "신지군, 내 말 들려?" 꺽꺽이는 목소리로 물어보지만 아무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신지군?"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입안에서 비릿하게 느껴졌다. 온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프지 않은 근육이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지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집중력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신지군!" 미사토가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대답해!"


사도가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본부의 박살난 북사면에 초호기를 쳐박고 있었다. 손으로 밀어내보려 시도하지만 놈이 머리를 반복해서 들이받자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그대로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너무 아팠다. 모든게 아팠다.


"안돼..." 신음하는 신지. "싸워야..."


날 죽여. 너희들이 살아갈 수 있게. 


카오루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숨을 신지에게 준 친구의 목소리. 죽을 운명이었던 소년. 하지만 신지는 그런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도였니마니 하는건 상관 없었다. 카오루는 나쁜 사람 같은게 아니었다. 죽어야할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신지가 지켜야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신지는 계속 싸워야한다.


왜? 갑자기 드는 생각이었다. 죽으면 고통도 다 끝날건데. 아스카에게 상처줄까 걱정할 일도 더는 없을건데. 레이를 보호하느라 걱정할 일도 더는 없을건데. 죽으면 카오루를 다시 볼건데, 어머니를 다시 만날건데.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죽어, 신지군. 다시 한번 카오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함께 죽자.


"신지군!"


대부분의 동물처럼 에바는 미소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놈의 괴물같은 입꼬리가 말려올라가는 것은 분명 어떤 악마적 미소를 연상시켰다. 그러는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 제스쳐의 의미를 아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사도에게 학습 능력이 있단 말인가? 인간의 사회적 신호를 이해한다는 말인가?


신지는 이를 악물고 뒤에 이어질 아마 마지막이 될 일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사도는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잠깐동안 신지는 자신이 머리를 너무 맞아서 실성한건가 의심했다.


"무슨..."


통신으로는 미사토가 아직도 말을 걸고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신지군, 괜찮은거야?"


"고..공격을 멈췄어요." 약한 목소리로, 이게 미사토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긴 하는가 생각하면서 말하는 신지. 자신이 어떻게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잔뜩 낀 것 같았다. 아마 뇌진탕이 온게 분명했다. LCL에는 충격흡수 기능이 있었지만 그것에도 한계는 있다. 신경 피드백이 손상을 주는 것까지 막을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머리에만 문제가 있는게 아니었다. 숨쉴때마다 폐에 불길이 들어차는 것처럼 아팠다. "왜...저러지?"


피해 현황 보고가 전면 디스플레이에 자동으로 떠올랐다. 초호기의 신체 곳곳이 노란색 혹은 주황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시야 가장자리에서 번뜩이는 섬광이 뿜어져나왔다. 땅이 뒤흔들렸다. 


"사도가 에반게리온 전용 출입구 하나를 뚫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려왔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잘 분간이 안됐다. 미사토는 아니었다. "43번일거야. 그래, 43번 출구 확인완료."


싸워야해. 일어나. 일어나, 바보 신지. 다 죽는단 말이야. 네가 원하는게 그런거야?


신지는 천천히 초호기를 일으켰다. 콘크리트 덩어리들과 굽은 강철 골재들이 휘어진 보라색 장갑판 위에 부딪혀 마구 굴러다녔다. 균형을 회복하며 사도쪽을 바라보자 그 앞에 연기를 뿜는 거대한 구멍이 나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생각해보기도 전에 사도가 날개를 펼치더니 출입구 터널로 몸을 날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건 ... 센트럴 도그마 심장부로 전진하는 것이었다. 후퇴 같은게 아니었다. 신지는 가쁜 숨을 내쉬며 호흡을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지금의 몸상태로는 어림도 없었다. 고통스러운 재채기가 이어지고 곧 얼굴 주변 LCL 용액에 핏방울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내려가고 있어, 라고 생각하는 신지. 내려가고 있다고.


"미-미사토씨," 목이 너무 아파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저거... 저거 어디로 가는거죠?"











"어디쪽으로 연결된 출구야?" 황급히 신지의 질문을 반복하는 미사토. 미사토는 지금 휴우가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설계도 띄워봐."


"알겠습니다."


지령실 전면의 대형 홀로그램이 센트럴 도그마를 측면에서 조감한 청사진으로 바뀌었다. 각 층과 터널이 빛나는 푸른색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붉은 점으로 표시된 사도가 터널 하나에서 하강 중이었다. 옆에는 각각 라벨이 달린 숫자들이 떠서 따라다니고 있었다. 각각 심도, 그리고 하강속도였다.


"수직 터널은 지오프론트 표층에서 주격납고로 이어집니다." 하루나의 보고였다. 이마에 멍이 번져 있었다. 보고를 하고 나서야 자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듯 뒤늦게 눈이 커졌다. "안돼." 고개를 들고 미사토쪽을 쳐다본다. "소령님, 2호기가 아직 대기 상태입니다. 3번 사출기. 주격납고."


미사토에겐 굳이 부연설명해줄 필요도 없었다. 2호기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사도가 강하중인 터널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청사진이 뜬 순간 알 수 있었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현 상황에서 2호기는 사도 격퇴는커녕 최소한의 자기 방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2호기 안에는 아스카가 타고 있다.


"해당 터널의 모든 방폭문 닫아. 발목은 잡을 수 있을거야. 현재 초호기 위치에서 주격납고까지 제일 빠른 길이 어디지?"


"6E 출구입니다." 아오바가 대답했다. "43번 출구와는 마지막 장갑판 위 350m 지점에서 교차합니다. 이론적으론 초호기를 해당 출구로 투입, 435번 방폭문에서 사도를 요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경사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할겁니다. 제일 큰 문제가 그 부분입니다. 현재 사도의 하강 속도는 아군의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보다 빠릅니다. 주격납고로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2호기를 비우는건?" 하루나가 질문한다. "긴급 구조대가 아스카 대피시킬 수 없나?"


고개를 젓는 휴우가. "불가능해. 교통로 다시 설치하는데만 15분에서 20분은 걸릴거야. 엔트리 플러그를 긴급사출시키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그 경우에도 격납고에 플러그채로 방치하거나 구조팀이 투입되어야 하고 레이때처럼 심각한 부상을 유발할 수 있어."


"6E 엘리베이터의 플랫폼 잠금장치를 해제하는건?" 아오바가 아이디어를 내본다. "엘리베이터가 자체 무게로 내려가게 하는거지. 브레이크 고장난 차가 중립기어로 내리막길에 던져진 꼴이 되겠지만 속도는 확실할거야."


"말되네." 동의하는 휴우가. "엘리베이터는 작살나겠지만."


"본부 절반이 작살났는데 엘리베이터 하나쯤 더 부서지는게 뭐가 대수야."


"잠금장치를 원격해제할 수 있어?" 미사토가 물었다.


"그런 용도로 폭파 볼트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초호기가 탑승한 다음 전자신호만 보내면 됩니다." 


"선로는 버틴다쳐도 도착 지점이 난리 아니겠습니까? 도착이 아니라 추락일건데. 중간에 혹시 시스템에 안잡힌 장애물이라도 있었다간 끝장이고." 누군가의 지적이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낫겠지. 미사토의 생각이었다. 대안이 없어.


미사토는 결정을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지령실 요원들도 미사토가 내린 결정을,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는데 사용된 논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아스카가 죽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죽겠지.


"좋아, 6E 출구 개방하고 엘리베이터 올려보내. 지금 당장." 초호기의 영상이 수신되고 있는 모니터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미사토. 장갑 일부는 아예 사라져 있었고 일부는 너무 심하게 휜 것이 수리불능으로 보였다. 그래도 기체 자체는 움직이고 있었다. 초호기는 잔해더미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지군? 듣고 있지? 지금부터 집중해."













신지는 초호기를 43번 출구 가장자리까지 끌고 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숨이 가쁘고 몸에 피가 나는 상태였다. 찌르는 것 같이 아픈 가슴을 부여잡으며 터널의 끝없는 심연을 내려다본다. 작은 조명이 양쪽 벽에 점점이 붙어 있는 것이 시야의 끝으로 사라지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외부 관문을 박살낸 폭발의 여파가 아직도 구멍 가장자리에서 올라오는 연기로, 주변 공기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열기로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아스카요..?" 방금 들은 말을 반복하는 신지. 목구멍 한쪽에 차가운 혹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말할때 턱이 아프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 주격납고로 향하고 있어. 2호기가 있는 곳으로." 미사토의 목소리에 절박한 수준의 걱정이 묻어났다. 신지는 지금 들은 말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무슨 생각으로 아스카를 주격납고에 남겨뒀단 말인가.


"미사토씨--"


"6E 출구에 엘리베이터 보내고 있어. 주격납고로 갈 수 있을거야."


"사도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을까요?" 신지는 다시 터널을 내려다보고, 사도가 그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물었다. 2호기는... 아스카가 자기 몸을 지킬 방법 따윈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미안해." 미사토는 최소한 정직했다. 목소리가 낮아지는 것에서 고통이 느껴져왔다. "안전장치를 폭파시켜서 자유낙하 시킬 계획이지만 그래도 사도보다 일찍 도착한다는 보장은 없어."


신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스카는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제때 피신시킬 수가 없어. 비상 수단을 동원해도-"


"아스카를 거기 두면 어쩌겠다는거에요!" 신지는 고함쳤다. 내면의 일부는 미사토에게 화내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격해지는 감정에 두려움이 뒤섞이니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마 나중에 사과해야할 것이다. 그것도 살아남았을때 얘기지만. "아스카는 싸울 수 없잖아요!"


"신지군, 나도 알아."


"그럼 대피시켜야할거 아니에요!" 소리칠수록 고통도 심해졌다. 말싸움이라도 붙었다간 혼절해버릴지도 몰랐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그럴 수가 없어. 주격납고로 가서 뭐든 해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6E 출구로 가. 사도가 2호기를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길 기도하는 수 밖에 없겠지만, 어떻게 되든 일단 서둘러야해."


"아니요." 신지는 어두운 터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둡고, 깊고, 사도가 통과할만큼 넓다. 말인즉슨 초호기도 통과할 수 있다는거다. "다른 방법이 있어요."


"진심이야, 신지군. 다른 방법은 없어."


"미사토씨는 틀렸어요."


신지는 전력 케이블을 초호기의 등에서 분리했다. 내장 전원이 활성화됐다. HUD 한구석에 초시계가 뜨고 5분부터 카운트가 시작됐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팔로 닦아내고, 초호기의 어깨에 아직 꽂혀있는 창을 뽑아내며 전해져오는 고통을 의식에서 밀어내려 노력한다.


"신지군, 6E 출구로, 당장!" 신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의심하기 시작한 듯 미사토가 다시 명령해왔다.


"쫓아가야해요." 신지는 말하면서도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미 졌는데. 그냥 끝내는게 더 나을건데. 할 일은 다 했지 않은가. 그냥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멍청한 생각 하지마. 지켜야하니까 싸워야하는거야. 아스카를 지켜야해. 아스카한테 그런 짓을 했으면 이정돈 해야하는거야. 아스카를 버릴수는 없어.


갑자기 무슨 경위로 떠오른 깨달음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이게 옳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인생에서 겪어본 어떤 것보다도 옳았다.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생각 같은건 아니었다. 뇌에서 나온 무언가도 아니었다. 아마 심장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렇다고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결정하는 것은 신지 자신이었고 신지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신지는 창대를 들어올려보고, 날은 부러졌을지언정 코어에 창대째로 꽂아넣는 것은 여전히 가능할거라고 판단했다. 다른 무기를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부러진 창 정도면 지금 상황에선 더 바랄 것도 없다.


"신지, 지금 뭐하는 짓이야?"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좀 있으면 엘리베이터 도착할거야. 제발-"


신지는 그냥 무시했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 미사토가 신지에 대해 신경쓴다면, 정말로 신경쓴다면, 지금 신지의 결정도 이해할 것이다. 신지는 눈을 감고, 뛰어내렸다.


심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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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평소보다 길지만 중간에 끊을만한 지점이 안보였다


카오루 관련 ptsd는 이후에도 또 나와서 신지를 괴롭힐 예정


아무래도 어드바이스 앤 트러스트는 내일 해야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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