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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7-1

ㅇㅇ(14.6) 2021.07.25 22:44:46
조회 939 추천 24 댓글 14
														

7장은 제목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빨리 달려야해


오늘은 밤에 일이 있어서 어드바이스 앤 트러스트는 못할듯. 아마 월요일에 어드바이스 앤 트러스트만 2개 에피 해야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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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우린 같은 책의 다른 장 같은 존재 아닌가요?" -마르셀린 데스보르데-발모르



제노사이드 0.07 / 집으로











병실 문을 열자마자 후유츠키 코조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이카리 겐도가 잠들어 있는 아야나미 레이의 침상 옆에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소녀는, 사실 그런 지칭이 어울리기는 하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의료 장비에 둘러싸여 대여섯개의 전극이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머리와 어깨, 그리고 오른팔을 제외하면 전신이 이불에 덮여 있었고, 밖으로 노출된 오른팔에는 손목을 통해 수액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근처에 켜져 있는 전등 빛을 받자 평소 우윳빛처럼 하얀 피부가 회색으로 보였다.


유전자를 받은 사람과 거의 동급으로 죽은 모습이구만. 그것이 후유츠키의 첫 감상이었다. 그는 문을 닫고 침대로 향했다.


"계획대로 됐겠지." 이카리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안경이 번득이며 그 눈을 가렸다.


후유츠키는 한 손으로는 주머니에서 작은 디스크를 꺼내들며 또 한손으로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곧 레이의 손 바로 옆에 디스크가 놓였다.


"그렇네." 후유츠키는 레이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의 애걸복걸하다시피 하더군. 충분히 예상할만한 일이라 하겠지. 내무성은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지만 뭘 어쩌겠는가. 우리의 ... 유용성이 저들의 법적 권한 같은걸 아득히 뛰어넘으니까."


이카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현 상황에서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 중국 사건이 역시 우리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줬군."


"그것도 결과적으로 우리가 살아남았기에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후유츠키는 레이쪽으로 고개를 까딱해보였다. "대가도 치뤄야했고."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사안들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후유츠키는 물론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실 문제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그렇게 처분하는건 후유츠키에게 절대로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현실적인 필요성에서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성공하기 위해서 치뤄야 할 대가라는 점에서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윤리적 관점에서는 절대로 납득할 수 없었다. 둘은 킬 의장을, 혹은 이카리 유이를 만난 뒤 한번도 윤리적으로 옳았던 적이 없었다.


후유츠키는 혹시 그녀가 지금 앞에 누워있는 아이를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봤다. 처음으로 든 생각도 아니었다. 한눈에 자기와 닮은걸 알아볼까? 거울을 보는 느낌을 받을까? 자신을 모사한 인형을 본 느낌을 받을까? 아카기 박사처럼, 이 아이를 증오할까?


"아이 본인은 뭐라고 하던가?" 후유츠키가 물었다.


이카리는 장갑 낀 손을 내밀어 침대 위에 놓인 디스크를 집어들었다. "아무것도. 진통제를 맞고 의식이 없었으니."


"아카기 박사를 시켜 깨울 수도 있었지 않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는 잠깐 동안 손가락 사이에 디스크를 끼우고 쳐다본 다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쪽에서도 준비를 해야하니까. 아마 여러가지 질문을 해오겠지. 적잖은 수가 불편한 주제일 것이고."


"불편한 것도 자네 얘기겠지. 레이쪽에서 불편해할지는 모르겠구만. 한번 자네를 위해 죽어본적도 있지 않은가."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카리의 얼굴에 비장한 빛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그렇지만 그건 다른 레이의 얘기다. 이 레이는 그런적이 없어. 이 레이가 같은 선택을 할거란 확신이 없다. 자기 희생은 쉬운 일이 아니야. 이전의 레이는 아직 자신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고."


후유츠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레이가 어떤 정보를 습득할지는 모두 자네가 결정하겠단거겠지?"


"언제나 요점 파악이 빠르군. 물론 그렇지. 내가 모든걸 결정할거고, 그럼 레이도 내 계획을 진심으로 따를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린 지금 그 시간을 벌었지." 이카리는 다리를 꼬며 다시 고개를 아야나미 레이쪽으로 돌렸다. 옆얼굴에 비치는 조명이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다른 문제는 어떻게 됐나?"


"내무성측에서 나카지마를 해임하려 했네. 우리측 요청으로 저지됐지." 후유츠키는 내무성과의 회견을 떠올렸다.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무의미한 위협이 생각나 가슴속에 살짝 만족감이 감돌았다. "그자를 신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전적이 훌륭하지도 않은 자일세. 말로만 협조하겠다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을수도 있어."


"탄광의 카나리아는 조용할때도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는 법." 이카리가 말했다. "클루게가 그를 제거하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름의 중요성이 있으니 그런거겠지. 그가 제거되는 것이 저쪽에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신호가 되어줄 것이다. 대비에 도움이 되겠지."


"그런 행동을 UN이 승인하겠는가, 지금 같은 상황에." 후유츠키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런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권력에 미친 자들은 절대로 과소평가해선 안됐고 내무성엔 그런 자들이 한가득이다. 중국 사건이 이미 그 증거였다.


"우리와 우리의.. 서비스가 다른 조직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


후유츠키는 거의 웃음을 터트릴뻔했다. "우리보다 훌륭한 보험을 제공할 수 있는 집단이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무릎에 손을 댔다. "늙어서 그런가, 이렇게 파견 다니는건 슬슬 버겁구만."


이카리는 고개를 저었다. "동의하지 않네. 그런건 다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이야. 어차피 조만간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을테고."


"그래, 그렇겠지." 후유츠키는 이카리의 주머니쪽을 가리켜보였다. "외교서한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확인해보게. 러시아쪽 문제도. 꽤 성과가 나올거야."


"거기에 미국까지. 이쯤되면 빅 텐트 아닌가."


"요즘은 앞에서 웃고 악수하며 뒤에선 칼을 들고 있는 무리를 그렇게 부르던가." 그 말을 끝으로 후유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째 오기 전보다 더 피곤해졌다. "뭐, 최소한 칼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으니. 아는게 힘이라고 했지. 그 힘이 우리 목숨만은 지켜주길."


"그걸론 부족해. 그 이상이어야한다." 이카리는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여인을 닮은 그 얼굴을. 후유츠키는 다시 한번, 그들이 만들어낸 것을, 그들의 도구를 유이가 본다면 무어라 할지 자문해봤다.


우릴 증오할지도 모르지. 이것 때문에, 자기 아들에게 우리가 한 짓 때문에. 아니면 결국엔 용서할 수도.


후유츠키는 제발 후자이길 바랬다. 하지만 모든 일에 그렇듯, 후유츠키는 의문 또한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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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공간은 컴퓨터 화면의 주기적인 깜박임과 전면 관측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제외하면 어두웠다. 줄줄이 늘어선 컴퓨터마다 조작원이 앉아 있었고 죄다 피로에 절어있는 모습이었다. 다들 몇시간째 작업 중이었으니.


이부키 마야는 다른 직원들보다도 더 오래 일하고 있던 차였다. 조금 너무할 정도로. 마야는 창가에 서서 딱딱하게 굳은 몸과 아려오는 목으로 창문 아래 펼쳐진 실험실을 내려다봤다. 세개의 원통형 플러그 시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현재 가동되고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번 주 매일 그랬다. 


그리고 마야는 이번 주 매일 이곳에 와서 관측하고, 기다리고, 기대해야했다.


"싱크로율 아직 안정상태죠?" 마야는 감겨오는 눈을 플러그에서 떼지 않고 물었다.


"응. 안정됐어." 휴우가가 키보드로 뭔가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휴우가는 오퍼레이터 중에서도 제일 성실하고 언제나 재깍재깍 해답을 내놓는 인물로 모두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싱크로율은 56.76 퍼센트에 오차범위 1로 고정된 상태야."


"그건 다행이네요." 마야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더 내려갔으면 안좋았을건데. 아무리 싱크로율 저하가 예상됐다곤 해도."


사실 아스카의 싱크로율은 저하 수준이 아니라 수직낙하를 했다. 직전의 전투에서 신기록을 찍은 뒤 그렇게 된 것이다. 온갖 심리적 요인 때문에 전투 중에 싱크로율이 치솟는 것은 거의 당연하다시피한 일이었고, 아카기 박사가 전투 후에 어느 정도의 싱크로율 저하가 있을거라고 예측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아카기 박사조차도 구체적인 감소율이나 기간에 대해선 쉬이 예측할 수 없었다. 가용한 전력이 2호기 밖에 남아있지 않은 현 상황에 아스카의 조종 능력은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뇌파 파형 변화는 왜 생긴건지 아직 불명이야." 휴우가가 말했다. "마기는 99.999 퍼센트가 아스카의 뇌파라고 지목했는데 0.001짜리 분석불가 파형이 있다니까."


마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몇시간 동안 뇌파 파형의 불일치가 관측되고 있었다. 에반게리온의 코어와 파일럿 사이의 일종의 무선 통신 같은 것이 뇌파 연결인데 비유하자면 중간에 이상한 파형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작은 불일치였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이론적으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거니까. 파일럿 한 명이 탑승했다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 신호를 발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뇌파도 한 사람의 것만 나와야 정상이다.


근처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본다. 역시 엔트리 플러그에는 아스카만 탑승해있었다.


방금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을 했는지 깨닫는데 몇초가 걸렸다는 사실이 마야의 피로를 증언하고 있었다. 아스카가 당연히 혼자 있지 그럼 누가 엔트리 플러그에 같이 들어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몇시간째 저러고 있었는데. 해치를 직접 닫아주고 실험용 격납고를 마지막으로 나온게 마야 본인이었다.


"파형 간섭 가능성은 감안해봤어요?" 마야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어봤다. 이것도 만만찮게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했다. 아카기 선배가 확인을 원할거니까.


다들 누군가에겐 보고해야하는 입장이니까. 마야는 생각했다. 다들 싫어하는 일이고. 특히 나한테 보고하는건 더.


클립보드를 옆구리에 끼우고, 빌려 입은 실험복 차림에 최근 자르지 못해 평소보다 길어진 머리카락까지 더해지니 마야는 어떤 권위적 존재라기보단 의대 신입생 같은 모양새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곳 네르프처럼 인류의 명운이 걸려 있는 곳에서는 나이 같은 것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그래서 외양도 꼭 그 인물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늘고 섬세한 외양과 달리 마야는 네르프 전체에서 가장 경험 많은 오퍼레이터 중 하나였고 오직 휴우가 마코토와 아오바 시게루만이 그에 비할만했다. 그 둘조차도 아카기 리츠코의 수제자로서 얻을 수 있었던 기회와 교육은 가지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래서 마야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18 사도를 상대로 한 작전에서 영호기가 완파되고 지난 몇 달간의 노고가 그렇게 무로 돌아갔다. 인명 피해도 있었다. 특히 영호기와 동행한 마야의 크루에 피해가 집중되었고 마야를 원망하는 여론이 생겨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선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전우들이었고 전사자의 발생은 곧 친구의 상실이었으니까. 그나마 성공이라고 할만한건 아야나미 레이를 무사히 살려서 데려왔다는 것 정도였다. 그것도 정말 아슬아슬한 일이었지만.


"이제 일곱번째 테스트잖아." 휴우가가 답했다. "매번 다른 필터를 적용했고. 파형 간섭일리는 없어."


"그럼 뭘까?" 휴우가에게 돌아서는 마야.


"나도 몰라." 어깨를 으쓱하는 휴우가였다. 모니터의 빛을 안경이 반사하며 하얗게 빛났다. "일종의 오염일지도. 그래도 필터쪽에서 뭔가를 감지해야할건데 아무 반응이 없고. 꼭 싱크로 그래프의 메아리 같다니까. 보이지?"


마야는 그의 뒤로 걸어가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래프에 두 곡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붉은색, 'S. Asuka Langley: recorded'이라고 표시된 이전 기록과, 'S. Asuka Langley: actual'이라고 표시된 초록색 현재 그래프가. 이론적으로 두 그래프는 완전히 겹쳐야 정상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격차는 극히 미세했지만 마기에 포착되고 보고될 정도는 됐다.


그래프 옆에는 작은 화면에 아스카의 얼굴이 떠있었다. 날카로운 얼굴이 지금은 눈을 감고 편한 모습이었다.


독일에서 이곳으로 온 직후부터 아스카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네르프 요원들의 비호감을 샀다. 지금 모니터에 떠있는 모습처럼, 그런 태도가 제거된 상황에선, 아스카는 정말 자기 나이에 걸맞게 어려보였다. 본인이 가장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려보였다.


그러고보면, 정확히 몇 살이었지? 마야는 잠시 궁금해졌다. 열네살? 열다섯살? 


마야가 그 나이였을땐 왜 티비에 나오는 여자 가수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지 같은 것이 인생 최대 문젯거리였다. 아스카의 삶이 어떨지는 마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을 저 나이에 겪다니. 마야는 가끔 아스카에게 정말 미안했다. 몇 달간의 장기입원만 해도 어지간해선 가슴아픈 일인데 아스카의 경우엔 그정도 사건은 작은 축에 들어갔다. 사도가 아스카의 마음에 침입했을때 아스카가 질렀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아스카의 공허한 얼굴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눈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카는 강하고 굳센 아이였다. 센트럴 도그마의 사람들이 흔히들 인정하는 수준보다 더더욱. 아무도-심지어 지령실에서 직접 눈으로 봤던 인원들마저도- 어떻게 아스카가 2호기를 재기동시킨건지 알지 못했지만, 마야는 아마 아스카 특유의 굳건한 성정이 기적을 이루는데 한몫 했을거라 믿었다. 마야는 정말 기뻤다. 아스카가 아니었으면 아마 신지는 죽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 모두의 생명이 위험에 빠지긴 했지만.


"파일럿한테 악영향이 있으려나?" 마야는 실험 결과보단 아스카의 안전쪽에 더 관심이 있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물었다.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 휴우가의 답이었다. "일단은 작은 수치니까. 그래도 스트레스가 심각한 상황에선 오차가 커지고 싱크로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봐. 그래도 대처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지 않을까. 그리고, 나한테 지금 이론이 하나 있거든."


그럼 그렇지. 본인도 몇시간째 생각해봤을거니까.


"들어나볼까요. 난 모르겠으니까."


휴우가는 안경을 콧대 위로 밀어올렸다. 그가 잘난척하기 직전에 반드시 하는 시그니쳐 무브 비슷한 것이었다. 


"몇년전에 물리학자들이 신형 입자 가속기 돌리다가 초광속으로 움직이는 입자 발견한거 기억해? 말도 안되는 소리지? 특수상대성 이론 같은거 생각해보면? 그래서 검사를 또 돌려봤는데 또 같은 결과가 나온거야. 다른 과학자들 데려와서 다시 해봤는데 또 그래. 결론이 뭐였는지 기억해? 장비 결함이었지. 장비에 문제가 있으니까 검사를 아무리 반복한들 상관이 없었던거야."


"장비 결함이라고요?"


휴우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겠네. 전부 상태가 안좋긴 하니까."


맘에 들지 않는 이론이었다. 만약 아카기 선배가 휴우가에게 동의한다면 마야는 모든 컴퓨터 터미널을 전수검사하며 하나하나 재연결해야할 것이다. 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오류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장비 결함은 마기가 알아서 계산 과정에 포함해줄 수 있었다. 설정된 오차범위만 건드려주면 해결될 문제다. 아카기 박사가 완벽주의자라 그런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인게 문제지. 실험실에 전구 하나만 나가 있어도 불호령이 떨어지는게 이곳이었다. 그래, 마야는 조만간 또 야근을 뛸 운명이다.


"또 점검해야할게 있나?"


휴우가의 말에 마야는 재빨리 클립보드를 확인해봤다.


"아뇨. 오늘은 이걸로 끝. 파일럿쪽 통신 열어줘봐요."


휴우가가 버튼 하나를 누르더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채널 열렸어."


"아스카, 들리니?" 의식적으로 감정을 숨긴 목소리로 물어보는 마야였다.


"네." 대답은 거의 곧바로 돌아왔다. 눈을 뜨는 모습이 모니터에 보였다. LCL 용액과 희미한 조명 때문에 화면에는 주황색 기운이 어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눈동자는 파란색을 발하고 있었다. "다들 낮잠이라도 자는줄 알았네. 어땠어요?"


"오늘은 좋은 소식이야. 싱크로율이 안정됐어." 마야는 잠깐 뇌파 문제에 대해 얘기할까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스카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축하해. 이제 시뮬레이터 종료하고 테스트 마무리할거야. 표준 절차로. 많이 피곤하지?"


"별로요."


피곤해보이면서, 라고 생각하는 마야였다. 얼굴에 다 보이는데. 요즘 테스트가 얼마나 잦았는지.


마야는 그래도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담아뒀다. "뭐, 우린 피곤하니까. 아, 한개 더. 카츠라기 소령님이 아까 잠시 들르셨어. 끝나면 다른데 들르지 말고 바로 돌아가라셔. 숙제 빼먹으면 안된다고 하시던데."


"그런걸 누가 신경쓴다고."


"네가 그럴거라고 하시더라. 명령이래."


















주격납고에 도달하자 휘어진 금속 골재들과 콘크리트 더미들이 아카기 리츠코를 환영해줬다. 한쪽 벽면이 거의 완전히 붕괴됐고 사출구로 이어지는 방폭문 하나는 경첩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찌그러진채 쳐박혀 있었다. 작은 덩어리들은 곳곳에 따로 쌓여 있었고, 큰 조각들을 착암기로 부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수면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만 이정도였다.


마치 내전 중인 국가에서 시가전이 벌어진 도시의 모습 같다고 생각하는 리츠코였다. 그렇게 틀린 비유까지도 아닐 것이다. 에반게리온 세대가 이곳에서 난투를 벌였다. 이정도 파괴가 뒤따르는게 당연했다.


전투의 종결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지오프론트의 여론은 아스카가 2호기를 기동시키고 마지막 순간에 전투에 참가한 것이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다는 것이었다. 다들 파국이 얼마나 가까운 일이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들을 구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리츠코와는 다르게.


리츠코는 아스카가 2호기를 다시 조종할 수 있게된 것이 기뻤다. 약간 대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취해 느슨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일을 그르칠만한 위험 요소들이 한가득이었다. 빡빡한 검사 일정을 잡은 것도 그때문이었다. 사소한 문제들이 큰 문제가 되기 전에 모조리 잡아내야했다. 중국 지부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해보면 어떤 리스크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2호기 테스트를 마야에게 위임한 것을 다시 한번 후회하는 리츠코였다. 마야는 확실히 유능하긴했다. 다름아닌 리츠코 본인에게 훈련 받았는데 당연한 일이다. 영호기를 수리하지 않기로 결정된 지금 마야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반대로 리츠코에겐 일이 많았으니까. 많아도 너무 많은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아카기 리츠코는 아니었다. 마야에게 일부 일을 위임하는 것도 엄청난 타협이었고, 그나마도 마야의 능력이 용인가능한 수준인 것을 아니까 그런 것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아스카의 검사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게 리츠코였다. 물론 현 단계에선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프를 읽고 정보를 요약하는 것은 마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나머지는 마기가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또각거리는 힐 소리를 내며 리츠코는 교통로를 내려갔다. 곧 보조원 하나가 따라붙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지시에 대기했다. 리츠코는 슬쩍 손짓해 그를 물리쳤다. 일부 사람들과는 달리 리츠코는 수행원이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고양이도 그렇게 처리할 수 있으면 좋을건데. 뭐, 고양이쪽이 차라리 더 똑똑하고 상대하기 편하긴 하지만.


주격납고를 수리하는데만 수십억엔은 거뜬히 소모될 것이었다. 외부에 입은 피해들까지 모두 수리하려면 그보다 더한 돈과 시간이 들 것이다. UN에서 황급히 긴급예산을 편성해야 했을 정도로. 네르프는 이제 다시 중요해졌고 인류를 수호하는 일은 싸게 먹히지 않는 법이었다.


초호기와 2호기는 모두 각각의 주기용 격납고로 옮겨진지 오래였다. 기존에 사용해온 전용 장비들을 동원하면 그만인, 쉬운 축에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펄프처럼 짜부라진 A호기의 잔해를 치우거나, 박살이 나버린 격납고 내부시설들을 정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 단계부터 모듈형 구조로 만들어진 격납고의 특성상 작업에 필요한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가 꽤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영리한 설계와 사전계획은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것이 리츠코의 장기였다. 리츠코는 그래야만 했다.


격납고는 작업중인 기술요원들로 가득했다. 바닥에 차있는 LCL 수면 밑에는 아마 더 많을 것이다. 지난 일주일 내내 해온 것처럼 각자 주어진 일을 하며. 유지보수 인력이 모두 해체-재건 작업에 투입된 상황이었다. 격납고를 재사용할 수 있을때까지 대강 절반 정도는 진척된 것 같다고 판단하는 리츠코였다. 이렇게 작업에 열심인 기술진들을 믿는 리츠코였지만 지금 하러 온 일만은 직접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머리에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있는 기술요원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리츠코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리츠코는 이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이름을 불러주진 않았다.


"현 상황은?"


"수납구 장갑 제거 완료했습니다."


"좋아." 리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출기 기폭장치 발동시키고 엔트리 플러그 꺼내."


기술요원은 목에 두르고 있던 마이크로 리츠코의 명령을 전달하고, 고개를 돌려 밑에 깔려있는 LCL 수면을 바라봤다. 리츠코도 통행로 난간 너머로 몸을 기울여 아래쪽을 봤다. 주격납고 바닥에는 A호기의 잔해를 더 수월하게 해체하고 제거하기 위해 6미터 깊이의 LCL 용액이 주입된 상태였다. 잠수 작업은 귀찮은 부분이 많은게 사실이었지만 전기톱을 들고 이곳저곳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것보단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이었다.


처음에는 공기방울 몇개만 보였다. 그러더니 곧 잠수부들이 여러명씩 무리지어 나타나더니 헤엄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곧 작은 펑 소리가 들려오더니 수면이 파도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엔트리 플러그가 마구 뒤흔들리는 주황색 수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곳곳이 심각하게 패여있고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지만 놀랍게도 부서지진 않은 상태였다.


상부 통행로에서 크레인이 내려오고, 잠수부들이 다가와 플러그를 크레인에 고정시켰다. 플러그의 양쪽 끝부분이 붉게 칠해지고 흰 원이 그려져 있는게 보였다. 마치 표적지 같은 모습이 블랙 유머의 일환이라 해도 믿을 지경이다. 플러그 측면에는 검은색으로 간체자 한자가 쓰여져 있었다. 별로 흥미로울 내용은 없는 전형적인 테크노배블이었다. 


글자 밑으로는 손으로 그려진 오성홍기가 그려져 있었다.


"더미 플러그." 리츠코는 옆에 서있는 기술진에게 말했다. "예상대로네. 폐기처분하게 터미널 도그마로 옮길거야."


"알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누구도 접근권한이 없는 진실이 따로 있었다. 리츠코도 그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본인부터가 곧 플러그를 열고 일주일 묵은 중국 파일럿의 시체를 대면하는게 꺼려지는 판이었으니. 물론 불가피한 기만이었다. 만약 진실을 알았다면 신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리츠코가 신지에게 거짓말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리츠코가 미사토에게 거짓말을 하고 미사토가 그걸 신지에게 전한 것이었지만.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일 수 있지만 리츠코는 그때문에 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A호기를 격퇴한 것은 그렇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등떠민 신지가 아니었다. 리츠코는 아스카에겐 굳이 거짓말 할 필요도 없었을거라 확신했다. 미사토는 신지를 편애하지만 사실 파일럿들 중에 진정한 전사는 아스카 하나뿐이었다. 그 어린 소녀는 타고난 전사였다.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 포함.


뭐, 그것도 죽일 사람이 남아 있었을때의 얘기지만. 리츠코는 그 부분에 조금 의문이 있었다.


2호기가 기동되었을 무렵 A호기의 파일럿은 이미 죽어있었을 것이다. 에메랄드 서판이 에바를 침식하며 파일럿의 정신을 완전히 부숴놨을 것이고, 남은 것은 에바와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뇌만 남아 있는 껍데기였을 것이다.


서판의 안전 장치를 제거한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결과는 리츠코의 상상마저 뛰어넘었다. 중국 지부 입장에선 말그대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참사를 불러온 코드가 지금 ...


크레인이 치익 소리와 함께 멈췄다. 돌아보자 회수 차량이 진입하고 있었다. 네르프에서 운용하는 중장비 차량들은 대부분 특수제작된 것이었고 이것도 그 중 하나였다. 엔트리 플러그를 고정시킬 수 있게 여섯개의 반원형 고정장치가 설치된 트레일러의 앞뒤로 캡이 달려 회전할 필요 없이 앞뒤로 이동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리츠코의 감독 하에 크레인이 플러그를 트레일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묵직한 무게가 추가되자 서스펜션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음을 냈고 트레일러 전체가 눈에 띄게 밑으로 쳐졌다. 플러그의 큼직한 두 균열에서 LCL 용액이 흘러나오며 트레일러와 그 밑바닥을 적셨다. 작업반 몇명이 트레일러에 올라타 고정 장치들을 잠그기 시작했다. 다들 익숙한 일인지 작업은 빠르게 끝났다. 리츠코의 방향으로 엄지를 세워보이며 작업 완료를 알려왔다.


"엔트리 플러그 고정 완료됐습니다." 옆에 서있던 기술진이 말했다.


리츠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캡으로 향했다.


"터미널 도그마 방향 유지보수 인원들 정리해. 우선순위 알파로."


"알겠습니다."


리츠코는 대꾸 없이 곧바로 차량에 손잡이 목적으로 달린 금속 막대기를 붙잡고 문을 연 다음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주황색 작업복 차림의 금발 소녀가 의아한 눈길을 던져왔다.


"박사님?"


"미코 맞지?" 리츠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출발해. 7번 게이트."


"알겠습니다." 소녀는 손목을 휙 꺾으며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야수처럼 괴성을 뿜으며 작동을 시작했다.


차량은 화물용 터널 중 하나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리츠코가 생각했던 것보다 소음이 훨씬 심했다. 정비 명령을 내려야겠다고 기억해두는 리츠코였다. 근래들어 에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장비들의 유지보수엔 예산도 시간도 제대로 배정해주지 못했던게 네르프였다. 이제 다시 한번 네르프의 중요성이 높아졌으니 그런 문제도 쉬이 해결될 것이다.


앞에서는, 좁은 입구가 곧 넓은 공간으로 변하며 좌우 벽과 천장이 맞닿는 지점에 달린 조명만이 유일한 광원으로 빛나고 있는 콘크리트 동굴이 펼쳐졌다.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속에서 원형으로 빛났고, 그 빛이 비춰지는 곳만이 시커먼 공허에서 유일하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었다.


엔트리 플러그 같은 부품들은 사실 격납고에서 저장고로 오갈일이 있으면 화물용 엘리베이터로 운송하는게 일반적이었다. 혹은 무장이나 배터리 팩처럼 아예 에바에 달린채로 옮기거나. 하지만 이 플러그는 저장고로 가는게 아니었다. 에바에 탑재될 일도 영원히 없었고.


"제대로 부른거 맞지?" 리츠코가 물었다. "이름."


"네. 미네구모 미코라고 합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혹시 전에 만나뵌 일이 있을까요?"


"아니. 없을거야."


미코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아, 꼭 대답하실 필요는 없으시겠지만."


"직원 프로필은 다 외워놓으니까. 직원들의 업무 적격 여부는 중요한 일이거든. 특히 에반게리온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인력들은 더더욱. 사소한 실수도 엄청난 비용을 낳거나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일이니까."


"프로필 한번 보신걸로 제 이름도 외우신거라고요?" 미코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묻어났다. "대단해요. 직원이 수천명은 될건데, 제가 흔한 이름은 아니긴 하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니야." 잠깐 생각해보니 자신이 왜 이 소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지금 밝힐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리츠코였다. 주제를 돌려야 할때다. "터미널 도그마엔 가본적 없지?"


"네, 없습니다."


리츠코는 씩 웃었다. 아, 순결이여.


미코는 지금 자신이 뭘 싣고 가는지는 꿈에서도 모를 것이었다. 만약 안다면 항의할지도 모른다. 반면 리츠코 자신은 이미 죽음에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어머니의 기이한 자살부터 최근에는 레이들의 파괴까지. 리츠코에게 죽음은 너무나 흔해빠진 일이라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어떤 자연스러운 일에 가까웠다. 하나하나 그렇게 감정 소모할 일은 아닌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죽는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무심하기에 죽음이란 운명을 맞은 사람 하나하나를 애도해주지 않는다. 고통받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었고 그렇기에 동정 받아야 할 것도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런 말을 해줘봤자, 옆에 앉아있는 소녀에겐 아무 소용 없겠지만. 지금 싣고 가는 화물의 진실에 대해 알려주는 것과 똑같이. 이 아이는 젊고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상처라곤 모르고.


중앙 허브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거대한 조명이 자동적으로 켜졌다. 사방으로 여섯개의 철로가 뻗어 있었고 철로 각각에 게이트가 달려 있었다. 각각의 게이트 앞에는 긴 직사각형 화물 플랫폼이 있었고 리츠코가 탄 차량이 그중 하나에 부드럽게 올라탔다.


트레일러에 달린 전자태그가 인식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그러더니 곧 허브가 회전하며 그들이 나온 곳 반대편으로 차량을 옮기고, 허브 중앙부가 개방되며 밑으로 내려가는 경사로가 드러났다. 경사로를 타고 내려가자 또 화물 플랫폼이 있었고 그 앞에 열린 게이트로 여태껏 둘이 지나온 터널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터널이 이어졌다.


"정말 사실인가요? 그," 미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밑에 괴물이 있다는거요."


"괴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지." 리츠코는 손목시계를 확인해봤다. 시계침과 숫자들이 녹색으로 빛나 가늘어진 눈동자에 비쳤다. 15분이면 엘리베이터에 도착할 것이다. 그 다음으론 터미널 도그마까지 훨씬 더 긴 여정이 남겠지. 터미널 도그마에는 '그것' 말고도 한구석에 따로 거대한 소각로가 구비되어 있었다. 네르프의 모든 비밀이 숨겨지는 곳이었다.


물론 그전에 이 운전수를 돌려보내고, 이 찌그러진 엔트리 플러그에 단신으로 진입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파일럿의 잔해를 처리하기 전에 유해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내야하니까.


"박사님께선 어떻게 정의하시는데요?"


"일부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지. 나머지는 죽이고."


미코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희미한 빛 아래서도 잔뜩 굳어지며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리츠코의 관점에선 합리적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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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 사설 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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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판 정식 일러












아스카는 바닥을 보던걸 멈추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깨와 등 근육이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전철역 승강장 끄트머리에 서서 학교로 가는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 차였다. 하코네선 모노레일역에는 밝은 햇살이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화창하고 더운 날이었다. 좋았다. 독일에서 살던 시절에도 추운건 싫어했던 아스카였다.


예전 같았으면 히카리가 곁에 서서 같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오늘 히카리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등교한 참이었다. 히카리가 아스카를 등교시키려고 얼마나 안달이었는지 생각해보면 조금 짜증나는 일이긴 했다. 그래도 히카리가 아스카의 생활에 일상을 가져다주려고 노력해온 것은 아스카도 인정해야했다. 아스카가 혼자서 할 수 있는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우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아스카가 도움을 필요로 했을때 히카리가 곁에 있어줬다는 사실은 절대 인정할 수 없을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아스카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안에선 사실 히카리의 종용도 필요가 없었다. 히카리가 이제 학교에 다시 나가보지 않겠냐고 물었을 시점에서 아스카는 이미 그러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어딨는가? 딱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에바 테스트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하는 마당에 학교는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터였다. 자신도 모르게 아스카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교실 원래 자리에 앉아, 며칠간은 옛 일상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잠시였다. 


최근들어 생긴 문제가 학교와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아스카도 알지 못했다. 아마 그렇진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아스카는 지난 한주 내내 갈수록 잠이 줄어들고 아침에 피곤한채로 일어났다.


간밤에는 겨우 세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1층으로 내려왔을땐 아무 식욕도 기력도 없었다. 그래도 아스카는 평소 루틴대로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고, 억지로 아침을 먹은 다음 히카리의 집을 나섰다.


도착했을 무렵 이미 역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네르프 직원들, 양복 차림의 직장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생들이었다. 몇몇은 같은 학교 다니는걸 대충 얼굴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도 이름은 몰랐지만. 아마 저쪽에선 아스카의 이름을 알 것이다. 학교에서 아스카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아스카는 생각했다. 누구덕에 살아있는건데.


2호기에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종석에 앉아 울고 있었는데 그러곤 다음 순간 2호기가 움직이더니 다시 조종을 할 수 있었다. 꿈 같은 일이었고 행복했지만 어째선지 그 이후 마음속에서 떨어져나가질 않는 이상한 감각이 있었다. 뭔가가 달랐다. 뭔가가 없어졌다. 뭔가를 잃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은 나무와 LCL 바다에 관해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게 꿈이었든 환각이었든 상상이었든 펜펜과 베개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말해줄 의향은 없는 아스카였다. 아스카는 미친년이 아니었으니까. 2호기가 움직였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갔다. 중요한건 그것뿐이다.


아스카는 몸을 조금 움직이며 손을 들어 눈을 찌르려드는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반대편 승강장의 남자애들이 아스카를 보며 자기들끼리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음란한 헛소리들을 하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소리라도 지를까 고민하던 시점에, 갈색 머리 소년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승강장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침울한 모습이었다.


아스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아픈거 아니었나?


신지는 아스카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아스카와 가능한한 제일 먼 쪽 탑승구로 가서 섰다.


다들 헤벌레 쳐다보지만 너만은 봐주지도 않지. 아스카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겁쟁이. 내가 모를줄 알아?  


이 비슷한 역에서 신지가 퍼스트와 함께 서있던 모습이 기억났다. 한번도 아스카에겐 지어주지 않은 미소를 띄고 재잘재잘 떠들고 있던 그 모습이. 그때 아스카가 할 수 있는건 신지를 보지 못한척하며 혹시 카지에게서 메세지가 와있는가 보이스 메일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이제 한세월 전 일이다. 우등생은 이제 병원에 박혀있고 카지는.. 다시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들이 동시에 여러개 존재하는 것에는 의외의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한 상처에 오래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스카는 이제 카지의 기억을 마음 속 한구석에 묻어놓는데 성공했다. 분명히 언젠가 되돌아오겠지만 어쩌면 그땐 더이상 아프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이상 얼굴을 보지도 못한다는 점이 어느정도 상실감에 쉽게 대처하게 해줬다.


신지는 그렇게 처리할 수가 없었다. 신지가 아스카와 전혀 엮이고 싶지 않다는건 분명했다. 아스카 역시 그렇게 신지를 취급해버리는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일본에 와 만난 사람들 중 신지만큼 아스카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아스카쪽에서 신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에 와 만난 사람들 중, 아니 다른 어떤데서도, 오직 신지만이 아스카에게.. 이상한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스카는 신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신지의 관심을 원했다. 신지의 생각을 원했다. 부끄러운 일이 같이 하고 싶었다. 신지에 대한 감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모순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정말 짜증나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아스카가 그걸 바꿀수는 없었다.


바보같은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스카는 자기 자신도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세상에서 제일 미운 사람을. 하지만 신지에 대해 생각할때면, 아프면서 또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이 가슴에 욱신거려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필요라는 말이 감정으로 바뀌면 곧 그럴까. 자연스럽게, 아스카는 그것도 신지의 탓으로 돌렸다. 


일본에 온 것으로 아스카의 세상은 너무 급격하게 뒤바뀌어 제대로 다 받아들일 시간도 없었다. 새로운 생활방식, 완전히 낯선 새 문화, 처음 보는 사람들, 새 집. 여기까지는 아스카도 어느정도 예상은 한 문제였다. 감정은, 아스카는 신지와 함께 살기 전까진 한번도 자기 감정으로 이런 문제를 겪어본 적은 없었다.


아스카의 가슴을 열어젖힌 것은, 어머니의 죽음에서 생겨난 고통으로부터 아스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꽁꽁 감싸둔 갑옷을 벗겨버린 것은 신지였다. 아스카를 외롭게 만드는 것도 신지였다. 레이에게 주는 관심을 아스카에게는 주길 거부하는 것도 신지였다.


나도 신지를 미워하는게 맞다고, 아스카는 생각했다. 신지는 아스카를 미워한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아스카도 신지를 미워해야 옳은 것이다. 아스카를 버리고 이렇게 상처를 주는데도 왜 미워하지 못하는걸까? 미워해야 옳다. 온 마음과 몸을 다해 미워하는게 옳다. 하지만 아스카는 그럴수가 없었다.


"넌 정말 바보야." 아스카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신지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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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판과의 접촉 여파가 벌써부터 슬슬 암시되고 있지


리츠코 파트에 나온 금발 소녀는 저번 레이 파트에서 나온 마야네 크루랑 동일 인물임. 앞으로 계속 얼굴 비출 조연. 소녀라고 표현되지만 대충 마야랑 비슷한 연배일거임. 일러도 달려있겠다 원래 거기서 끊어도 될만했는데 걍 뒤에 달린 아스카 파트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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