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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팬픽] 번역/ 에반게리온 제노사이드 13-4

ㅇㅇ(14.6) 2021.10.19 23:28:48
조회 661 추천 25 댓글 11
														

에피소드 하나 분량이 좀 많이 길다. 그거랑 짧은거 하나 붙이고 다음에 또 중요 에피소드 하나 이렇게 하면 대충 잘 분할될듯


이거 원래 작업 80%쯤까지 갔다가 클릭 미스로 날려먹었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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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야, 바보 신지, 집중 안해!"


"집중하고 있거든!" 신지는 화들짝 눈을 뜨고 앉아있던 작은 벤치에서 허리를 폈다. 아스카가 붉은색 투피스 수영복을 들고 탈의실로 돌아와 있었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 신지는 딱히 잠든 기억이 없었다. 지루해서 잠시 눈을 감았을뿐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 마치고 쇼핑하러 가자는 아스카의 제안에 괜찮은 발상이라고 생각해 동의한 것뿐이었다. 도시에 쇼핑 구역도 얼마 남지 않은 이상 그렇게 오래 걸릴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오산이었다. 아스카가 뭔가를 고르고, 신지의 의견을 묻고, 한번 입어본 다음 또 다른걸 고르고 앞의 과정을 반복하는데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모됐고 신지는 슬슬 이게 큰 실수였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신지의 또 다른 오산은, 아스카의 네르프 카드가 제한없는 환승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번 쇼핑 원정에 지리적 한계 같은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건 어때?" 아스카가 수영복을 들어올려보였다. 수영복이라기보단 그냥 삼각형 천조각 몇개를 끈으로 적당히 이어놓은 것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아스카 나이의 아이가 그런 복장을 입는걸 법으로 금지해놓은 장소가 지구 어딘가에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신지는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 좋아보여."


"아까도 한 말이잖아!" 아스카는 짜증난 표정을 지으며 탈의실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이미 입어보고 내다버린 옷들이 상당한 크기의 더미를 형성하고 있었다. "넌 다 좋다고 그래! 못생긴 것들도 전부! 좀 잘 해봐! 아무 의견이 없으면 데리고 다닐 가치도 없는거잖아!"


신지는 아스카의 발밑에 깔려있는 분홍색 블라우스를 떠올렸다. "진짜 좋아보였단 말이야!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야!"


"이 바보야!" 손가락질을 해보이는 아스카. "넌 에바 파일럿이잖아! 좀 까다롭게 굴어보란 말이야!"


사실 그게 문제였다. 신지의 패션감각은 아주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아스카는 그 정반대였고. 둘의 성격차가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례라 할 것이다. 아스카는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옷을 입었다. 신지에겐 남의 관심만큼 피하고 싶은 일도 드물었다.


"그리고, 이건 좀..." 말하지 않아도 알아먹길 기대하며 신지는 엄지와 검지를 펴보이고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보였다.


아스카는 다시 한번 비키니를 들어보이고 찬찬히 뜯어봤다.


"그래도 진짜 예쁜데." 엉덩이에 손을 대고 중얼거린다. 아스카는 아까의 분홍색 블라우스 뒤로는 다시 교복차림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교복 셔츠는 밖으로 삐져나와 있고, 단추도 딱 가슴을 가릴만큼만 채워놨다. 치마로부터 올라온 어깨끈은 양쪽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요즘 아스카는 잘 먹고 잘 자고 지낸지 좀 되어 몸에선 예전의 병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어, 그, 비키니는 이미 하나 있잖아." 신지는 한마디 덧붙이며, 오늘은 아스카와의 논쟁에서 자신이 이기는 희귀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거 입으면 어린애 같아보인단 말이야." 아스카가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이런게 여자다운거라고. 위에 지퍼도 없잖아."


벗기기 쉽게 장치까지 되어있는게 뭐가 잘못이냐고, 그런 염치없는 생각을 해보는 신지였다. 아스카가 그 줄무늬 비키니를 입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게 유아적이다 뭐다하는 발상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예전것도 정말 잘 어울리는걸. 색깔도, 어, 잘 어울리고. 나 패션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뭐가 좋고 싫은지는 보면 알아. 치수가 안맞는거라면 모를까 아직 맞는 옷이 있으면 바꿀 이유는 없을 것 같아."


"그래, 네 말이 맞아." 아스카의 말에 신지의 가슴속에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곧바로 박살날 만족감이. "넌 패션이 뭔지 몰라. 입어볼거야."


적금발 머리를 찰랑이며 아스카는 커튼으로 가려진 칸막이 뒤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동안," 커튼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소 좀 해줄래? 여기 좀 엉망이야."


신지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아스카가 내버려둔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집어들어, 옷걸이에 걸고 공간이 마땅찮은 것들은 곱게 개어둔다. 칸막이쪽에선 아스카가 부스럭거리며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 사이에 작은 틈이 있어 아스카의 늘씬한 다리가 치마를 벗어던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스커트 하나를 옷걸이 집게에 물리고 있을때 아스카가 커튼을 열고 나타났다.


신지는 얼굴에 피가 쏠리며 뺨이 새빨개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 성인 여성이 저런걸 입으면 섹시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아스카처럼 어린 소녀가 입고 있으니 음란하단 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상의쪽 삼각형들은 아스카의 아직 덜 자란 작은 가슴조차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있었고, 하의쪽은 매듭이 골반 아래에서 지어져 치골 아래쪽으로 거의... 거의....


아스카가 저런걸 입는거야 그렇다치고, 신지가 무슨수로 그 옆에 같이 다닌단 말인가? 누구든 저걸 보면 아스카가 노출증 환자 비슷한거라고 생각할거고 그 옆에 있는 신지에 대해선 어떤 부류라고 생각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기에 신지는 그냥 아스카를 빤히 바라봤다.


"왜?" 아스카는 고개를 숙여 자기 몸을 내려봤다. "다 제대로 가려진거 맞지?"


그러곤 몸을 돌려보였다.


신지의 얼굴이 아스카의 머리 위 신경연결기와 똑같은 색이 됐다. 목에서 꺽꺽이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비키니의 뒷부분은 그냥 엉덩이 사이로 사라지는 끈에 불과해 모든게 다 드러나있었다. 아스카의 뒷모습은 지금 머리카락과 끈 두개를 제외하면 나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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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너 얼굴 진짜 빨개. 좋은 징조려나?" 아주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심장마비가 올 징조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나.. 잘..." 신지는 손에 들고 있는 스커트를 들어올렸다. 그렇게라도 아스카의 몸을 가리고 싶었다. "이건... 어..."


"별론가?" 아스카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칸막이쪽으로 돌아갔다. 비키니의 헐거운 손아귀 아래 가슴이 흔들렸다. 고의로 그러는 것이 분명하게 살랑이고 있는 엉덩이가 신지의 시선을 자석처럼 잡아채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다시 커튼을 친다. 그땐 이미 신지의 뇌리에 아스카의 반-나신이 새겨진지 오래였다.


칸막이 밖으로 나온 아스카는 아까처럼 대충 입은 교복 차림에 야한 비키니는 손에 말아쥐고 있었다. "뭐, 이걸로 난 마무리 한것 같네." 비키니를 한쪽 구석으로 휙 던지며 말한다. "이제 네 차례야."


신지는 아직도 빨간 얼굴로 아스카를 빤히 보고 있다가 그 말도 거의 놓칠뻔했다. "뭐-뭐?"


"너, 바보야!" 아스카의 손가락이 신지의 쇄골을 쿡 찌르더니, 아래쪽, 신지의 교복을 가리켰다. "너 혼자 다닐땐 따분하게 입어도 상관 없지만 난 그런 사람이랑 같이 다니고 싶은 생각은 죽어도 없거든. 난 누구랑 다르게 기준이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네 옷장에 좀 손을 대야겠어."


신지는 불편하게 꼼지락댔다. "그래도-"


아스카는 신지가 말을 끝낼 기회도 주지 않고 신지가 들고 있던 옷걸이를 낚아챈 다음, 손목을 붙잡고 칸막이로 끌고갔다.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신지는 반쯤 반사적으로 저항해봤지만 아스카가 관련된 일이면 으레 그렇듯 자신이 이길 방법은 없다는건 이미 알고 있었다.


"옷 벗고 있어." 아스카가 커튼을 쳤다. "내가 알아서 골라올테니까."


신지는 잠시 멍하게 서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최소한 바깥만큼 엉망진창은 아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 반대쪽 벽에는 아스카의 맘에 든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셔츠 몇개, 빨간 프릴이 달리고 어깨끈은 리본으로 묶는 짧은 하얀 드레스. 구두는 한쪽 구석에 곱게 모셔져 있었고 그 안에 양말이 쑤셔박혀 있었다. 왼쪽 벽에는 전신 거울이 걸려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자 아까보다도 더 어색했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아스카에게 말해봤자 소용도 없을 것이다.


신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도 쭈그러들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본 창백한 눈이 스르륵 감긴다. 신지에겐 선택권 따윈 없었다. 아스카와 논쟁하느니 그냥 하자는대로 따르는 편이 편했다. 미사토가 듣기 싫은 말을 해도 그냥 들어주는쪽이 나은 것과 같은 이치다. 신지의 인생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신지는 아스카의 말대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아스카와는 달리 신지는 자기 옷을 아주 조심스럽게 처리했다. 바지와 셔츠를 옷걸이에 걸고, 운동화는 아스카의 구두 옆에 정리해둔다. 속옷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섰다. 신지는 언제나 사각팬티보단 삼각팬티를 선호했다. 삼각팬티만 입고 거울 앞에 서있으니 자기도 모르는새에 자기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소심한 성격과 순종적인 태도와는 별개로 신지는 그렇게 말라깽이는 아니었다. 본격적인 성장기가 시작되고 에반게리온 훈련까지 더해지니 신지의 몸엔 꽤 그럴싸한 잔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찬 공기에 슬슬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자신의 벗은 몸을 보고 있자니 뭐라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색했다. 카펫 깔린 바닥도 맨발에는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 머리칼을 훑으며, 신지는 여기 있는게 정말 어색하고, 무엇보다 불편하다고 느꼈다. 그러곤 커튼 너머에서 아스카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아스카, 잠깐!" 신지는 소녀처럼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열지 마!"


아스카의 반응은 짜증 섞인 "뭐?" 한마디였다. 곧 커튼 봉에 옷가지들이 걸렸다.


신지는 손을 뻗어 옷들을 내린 다음 얼른 입기 시작했다. 그러곤 다시 한번 거울을 확인해본다. 거울 속 소년은 신지보다 나이들어보이고, 많이, 아니 훨씬 많이 잘생겨보였다. 아스카가 골라준 옷은 목깃이 달렸고 왼쪽 옆구리를 타고 내려가는 파란 선이 있는 하얀 셔츠였다. 바지는 카키색 카고 쇼츠에 주머니쪽 재봉선을 따라 파란색 안감이 대어져 있었다. 어떻게 한건지 아스카는 신지의 치수도 정확히 맞췄다.


"다 입었어?"


신지는 거울에 완전히 주의가 팔려 아스카의 말을 거의 놓칠뻔했다. "으-응. 들어와도 돼."


커튼이 열렸다. 신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아스카의 눈에 갈수록 커져가는 미소가 걸렸다. 아스카는 기쁜 표정으로 팔짱을 껴보였다. "잘 소화할 줄 알았다니까. 봐, 그러니까 꽤 잘생겼지?"


신지는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붉히고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응," 수줍게 간신히 중얼거린다. "고마워."


"넌 좀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아스카는 안으로 들어와 신지의 곁에 섰다. 둘은 함께 거울에 비친 자기들 모습을 바라봤다.


신지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한 쌍의 연인이 거울 속에서 시선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붉은 머리에 타오르는 것 같은 파란눈의 소녀가 아까 신지가 본 갈색 머리 소년의 곁에 서있었다. 정말 기이한 한 쌍이었지만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쌍'이었다.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란 말도 지금 신지가 보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엔 부족한 말이었다. 거울속에 보이는 것은 그냥 꿈 같은 광경이었다.


아스카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마치 물리적인 확인이 필요한 것처럼, 거울 속의 손을 움직여 신지의 손을 붙잡는다. 거울 속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신지는 손이 움직인 것을 다 보고도 그 촉감에 깜짝 놀랐다.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지만 아스카가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스카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신지는 뱃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미-미안. 나 아직 익숙치가 않아서, 그, 만지고 그러는거. 그냥..."


"그것 때문에 그러는거 아냐." 아스카의 목소리엔 아무 억양이 없는 것이 그 뒤에 숨은 감정을 세심하게 통제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나... 할 얘기가 있어. 중요한거야."


신지는 어색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지 않으면 뱃속의 매듭이 위로 올라와버릴 것 같았다. "아-아스카?"


"따라와." 아스카는 신지를 칸막이 밖으로 끌고나와, 아까까지 신지가 앉아있던 벤치에 앉혔다. 그러곤 신지의 앞에 그 특유의 포즈,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엉덩이에 손을 얹은 그 자세로 섰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도 그대로 진지했다.


아스카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거 미친 소리처럼 들릴거 알아. 어쩌면 내가 정말 미친걸지도 몰라. 그래도 우린 둘 다 에바 파일럿이고 네가 전에 한 말도 있으니까 말해야겠어. 내가 전에 에바 안에서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었지.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비었다고 했잖아."


"너 바보야? 텅 빈 느낌이라고 했지 언제 텅 비었다고 했어." 아스카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던건지는 아직도 확실힌 모르지만, 그래도 이젠 그렇지 않다는건 알아. 왜냐면..." 아스카는 말을 멈추고 잠시 확신이 서지 않는 표정이 됐다. "네가 네 에바에서 어떤 느낌인지 말했던거 기억해?"


"좋다고 했어." 신지는 이 대화가 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려는건가 의문을 품으면서 답했다. 둘은 에바에 대해 거의 대화하는 일이 없었다. 최근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거 다음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그랬잖아, 기억해?"


"응." 그 말에 아스카가 기분나빠했던 것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 설명도 없었던 것도 신지는 기억했다.


아스카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치켜들며 굉장히 권위있는 자세가 된다. "신지, 에바가 왜 그런 느낌인지 나 알 것 같아. 저번 전투때 무슨 일이 벌어진건진 모르겠지만 나 끔찍한거 많이 봤어. 그전에 꾸던 악몽이랑 똑같았어. 뭔가가 날 해치려고, 굴복시키려고 그랬던거야. 내가 그놈을 죽였어. 그러고 나서..." 아스카는 다시 말을 멈췄고 끌어모았던 용기가 주춤하는 것이 신지의 눈에도 보였다. "2호기 안에서 엄마를 봤어."


신지는 아스카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이며 멍하게 아스카를 쳐다봤다. 그럴리가 없었다. 그런게 가능할 수가 없다. 아스카의 어머니는 죽었다. 신지 자신의 어머니처럼. 아스카 본인 입으로 그랬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말은 그렇게까지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아니, 신지의 일부는 전혀 놀라지도 않았다. 지금 놀라지 않은 신지의 일부분에겐 아스카의 말은 옛날부터 쭉 느껴오고 있던 감각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지난 전투에선 신지도 뭔가 느낀게 있었다. 매번 엔트리 플러그에서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생각한 그 어떤 온기를. 그 존재의 목소리까지 들었었다. 그게 자신의 어머니든, 아니면 초호기였든, 신지를 보호해주고 싶었고 신지가 도움을 거부하자 슬퍼했던 존재가 있었다.


신지는 예전에 에바의 내부에서 한달을 꼬박 보낸 적도 있었다. 당시의 일은 나오자마자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지금 깨달은 그 감각에 다시 집중해보니 기억도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 느낌들엔 이름이 있었고 신지의 가슴속에 차지하고 있는 공간도 이미 있었던 것이다. 신지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어 그런 감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것 뿐이었다. 초호기에서 느껴진 유대감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신지는 처음부터 알았던걸까? 에바를 처음으로 탔던 그 순간부터?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거지?" 아스카의 말이 신지의 상념을 깼다. 방금전까지 느껴지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분노로 끓어올랐다. "뭐, 상관없어. 괜한 소리 해서 미안!"


신지는 고개를 들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바닥을 보고 있었다. "아니야, 난..."


"난 뭐?" 아스카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져 눈썹이 V자를 그릴 지경이었다. 신지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거다.


신지는 부루퉁한 표정이 됐다. "난 아스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초호기는, 초호기의 느낌은..." 신지는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무력하게 고개만 저을뿐이다.


"어머니 같다고?" 아스카가 물어왔다. 날카롭던 태도도 신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조금 부드러워졌다.


신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평생 그리워했고 다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연상시키는 가슴속 공허감이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스카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나도 몰라."


아스카가 신경질적으로 손짓해보였다. "넌 에바가 어떻게 기동되는지도 몰라?"


"아스카는 알아?"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기. 아스카에게 멍청하단 소리 듣기 딱 좋은 태도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스카도 답이 없었다. 신지와 똑같이 답을 모르고 헤매는 모습이었다. 엉덩이에 얹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가고 몸에서 느껴지던 자신감도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신지는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리를 벤치에 끌어올리고 무릎을 가슴에 갖다댄 다음 팔로 끌어안는다. 그 다음 튀어나온 목소리는 정말 불가능할 정도로 작았다. "이 얘기 계속 하기 싫어."


아스카가 자신을 어린애라고 불러도 상관없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린애 같은게 맞았기 때문이다. 거울에서 봤던 잘생긴 청년은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다. 신지는 두렵고 외롭고 길잃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너 우울해진거야?" 아스카의 목소리는 진지했지만 비난조는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 얘기 하게 만들었다고?"


신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카는 엄격한 눈으로 잠시 신지를 뜯어보다가,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고는 신지의 옆에 앉아 몸을 기대왔다. "마마 얘기 들어볼래?"


궁지에 몰렸을때마다 그러하듯 신지는 대답은커녕 고개도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카가 계속 말을 한다면 신지 자신이 말을 할 필요는 없어질테니 아스카가 이야기를 이어가길 바라는 신지였다.


"마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어." 아스카가 꿈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예쁘기만 했던건 아니야. 똑똑하기도 했어. 당연하지, 네르프에서 일했으니까." 아스카가 신지의 어깨에 손을 얹자 편안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신지는 몸을 움찔했다. "네 어머니는 어땠어?"


아스카의 다른쪽 손이 신지의 손 위에 얹혔다. 신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열려 아스카의 손가락과 얽혔다. 지금 아스카는 뭔가를 요구하고 있는게 아니었다. 최소한 신지가 받는 느낌은 그랬다. 아스카는 정말 많은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아이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지금 아스카는 신지가 이것을 자신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이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아스카의 손을 꼭 잡고, 신지는 평생의 감정을 단어로 표현해내기 시작했다.


"너무 어려서 잘은 기억나지 않아." 신지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분이셨어. 어머니가 미소짓는걸 보면 난 행복했어. 나도 웃고 싶어졌어." 신지는 혹시나 싶어 아스카의 반대쪽 손으로 눈을 비볐지만 눈물은 없었다. 놀랍게도 추억은 슬프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감정적이고 강렬할뿐. 아스카가 자신을 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아스카는 질문을 던져왔다. "그리워?"


신지는 언제나 어머니가 그리웠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자니 평소보다도 더 그리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신지는 그렇게 말하진 않고, 그냥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나도 마마가 그리워." 신지의 손을 잡은 아스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만 그런건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래도, 있지, 마마가 나한테 그런적 있어. 내가 특별하다고. 난 그걸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평생 특별해지려고 노력했어. 그러지 못했을땐 내 일부가 죽은 것 같았지. 마마를 잃고 아직 내게 남아 있던 부분들이 죽은 것 같은 느낌이었어. 더는 살고 싶지 않았어. 내가 틀렸던거야.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이 그래. 난 그땐 몰랐던거야. 날 특별하게 만들어준건 다른게 아니라 마마였단걸.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잃는 일은 없다는걸. 네 어머니도 널 특별하게 만들어줬을거야."


신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스카가 신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갖다댔다. "신지, 날 봐."


신지는 고개를 들어 아스카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워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우린 어머니를 잃은적이 없어, 바보야. 절대 그런적 없어. 언제나 에바속에서 우릴 지켜보고 계셨던거야. 네가 받은 느낌도 바로 그런거였고. 그냥 우리가 너무 상처받아서 그런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것 뿐이야. 우리 둘 사이에 그랬던거랑 똑같아. 우리가 이런쪽으로 좀 눈치가 없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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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착각하지마." 아스카가 신지의 말을 끊었지만 신지는 그것이 고마웠다. 자신이 무슨말을 하고 싶었던건지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 마마를 다시 볼 수 있는게 너무 기뻤어. 할 수만 있었으면 그냥 거기 남아 있었을거야. 마마가 날 돌려보냈어. 그리고, 약속하게 만들었어. 이곳에서 행복해지겠다고, 꼭 노력하겠다고. 지금 내가 하려는게 그거야."


신지는 이제서야 저번 전투 이후 아스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스카는 예전 같았으면 분노했을 일에도 사소한 짜증만 냈다. 말 걸기가 쉬워지고 본인도 말이 많아졌다. 그게 아스카가 갑자기 마법처럼 행복해졌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겪었던 일들을 모두 잊었다는 것도, 몸과 마음의 끔찍한 상처들이 한번에 나았다는 것도 아니었다. 아스카의 속에는 언제나 흉터가 남아있을 것이다. 아스카의 속에는 언제나 흉터가 남아있을 것이다. 신지와 마찬가지로.


신지는 엉망진창인 탈의실을 둘러보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스카에겐 이것이 행복이라는걸. 그리고 그 행복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쇼핑도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전 미사토가 한 말이 생각났다. 둘의 관계에서 아스카가 바라는게 뭔지는 알 수 없는거라고. 물론 선의로 한 말이었겠지만 어쨌든 미사토는 틀렸다. 신지는 안다. 아스카가 원하는 것은 자신과 함께 행복해지는것이라는걸, 설령 그게 궁극적으로 불가능할지라도 시도는 해볼거라는걸. 그리고 아스카가 그렇게 시도를 할 수 있으면, 신지가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신지 역시 원하는 것은 아스카와 함께 행복해지는것 밖에 없었으니까.


어머니도, 지금 어디에 있든간에, 이런 자신의 모습을 대견해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스카는 신지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붙잡고 있는 손을 끌어올려 신지를 일으켜세운다. "그래서," 순진한 얼굴로 입을 쭉 내미는 아스카. "비키니 진짜 싫어?"


신지의 창백한 눈에 혼란이 깃들었다.


아스카에게 어머니에 대해 얘기하는건 전혀 편한 일이 아니었다. 둘에게는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았고 어쩌면 영영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도 있을지 모른다. 에반게리온의 비밀은 그중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도, 신지는 두사람이 비슷한 과거와 상실을 공유한다는 사실에서 모종의 위안감을 느꼈다. 아스카에게서, 아스카라는 소녀에게서, 아스카와의 동반관계에서, 에바를 통한 그녀와의 유대에서 신지는 위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과 유대감도 도저히 옷 취향까지는 따라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 그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었다. 신지라도 가끔씩 제동을 걸어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아스카가 혼자서 대체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 응, 그거 너무..."


아스카는 입술을 앙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남들 보는데서는 안 입는건 어때? 너 그거 때문에 그러는거잖아 그치?"


"남들 보는 앞에서?" 그렇다면 그걸 집 안에서 입고 다니겠단 말인가하는 생각에 목이 바짝 말라오는 신지였지만 아스카가 이 비키니를 간절히 원하는건 확실했고 이게 다른 대안보다 나은건 사실이었다. "좋아."


"너 확실히 딜 한거야." 아스카의 얼굴이 이번에도 본인 원하는 것을 받아낸 승리감에 빛났다. 그러곤 신지쪽을 다시 바라본다. "너 그거 진짜 잘 어울려. 살거야?"


어떻게 사지 않는단 말인가? 아스카가 골라준 옷인데. 신지에게 조금만 깡이 있었다면 감사 인사로 키스라도 해줬을 것이다. 대신 신지는 아스카의 손을 꽉 쥐어줬다. 아스카도 똑같이 손을 쥐어왔다. "응. 살거야."


"그래. 너 완전히 바보는 아닌거 알고 있었어."


칭찬을 할때도 꼭 조롱을 섞어야하는게 참 아스카답다 할 것이다. 아스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면 신지는 분명히 화가 났을 것이다. 신지는 그냥 아스카가 손을 놓아줄때까지 계속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둘은 손을 놓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손가락으로 상대의 손가락을 훑었다.


비키니를 집어드는 아스카의 얼굴에 신지가 아까까지는 보지 못한 작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좀 작긴 해." 아스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래, 아스카는 결정했다. 아마 신지의 정신건강을 대가로 상당한 재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스카의 입장에선 새 장난감 하나 사는것과도 별로 다를 일이 없을 것이었다.


아스카가 신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곁눈질을 해왔다. 아름다운 파란 눈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어차피 남들한텐 안보여준다고 했으니까."


이젠 신지가 (또) 얼굴을 붉힐 차례였다.


더 놀리기 전에 주제를 바꾸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쫓겨나기 전에 결제부터 하는게 좋겠어." 신지는 주변의 난장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둘은 순서대로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아스카가 먼저였다. 아스카는 자기 옷을 갈아입은 다음, 신지가 셔츠와 바지를 커튼 너머로 넘겨줄때까지만 기다리고 곧바로 결제하러 사라졌다. 신지는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도 뒤에 남아 탈의실을 정리했다. 그러지 않으면 두 사람은 아마 영구출입금지 목록에 이름이 오를 것이었다.


10분 후 가게를 나서자 아스카가 쇼핑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지를 보자마자 씩 웃으며 그대로 들이민다. 자기가 산 물건을 자기가 들고 다닌다는 발상은 아스카에게 불가능한거라고, 신지는 생각했다. 둘은 이제 에어컨 따윈 없는 바깥 공간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해가 서쪽 하늘에서 지고 있었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그려낸 것처럼 주황빛으로 물든 거리엔 행인들이 가득했다. 아스카에게 이끌려 전철로 한시간 거리나 끌려오니 제3 신동경시의 피폐한 광경도 별세상 얘기 같았다. 이곳에선 아직도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갔다.


예상 그대로, 곧 아스카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시간이 몇신데 아직도 이렇게 더워?" 아스카는 손으로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나 땀흘리는거 싫단 말이야!"


"열기보다는 습도 때문에 그런거야." 신지는 자신도 도무지 모르겠는 이유로 설명을 시작했다. "호수에 있는 수백만 평방톤의 물이 분지 지형에 갇혀서-"


"평방 톤은 대체 무슨 헛소리야, 바보야." 아스카는 짜증난 얼굴이었다. "너한테 물어본거 아니거든."


신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하는 말이야. 물의 순환이-"


"아 좀!" 아스카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피치로 소리쳤다. "난 이런 찐따랑 같이 있고 싶지 않거든. 너도 나랑 같이 있으면서 찐따처럼 굴고 싶지는 않을거 아냐!" 아스카는 그 말과 함께 신지의 팔짱을 끼고 자기 옆구리로 휙 끌어당겼다.


신지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저번과는 달리 아스카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고 신지의 몸도 곧바로 풀렸다. "아스카 말이 맞아."


아스카의 발걸음이 빨라지며 신지를 끌고갔다. "빨리 와!"


말이야 쉽지. 아스카의 쇼핑백까지 전부 신지가 들고있지 않은가. 하지만 신지는 별말 없이 아스카에게 끌려갔다. 목적지가 집이든 다음 가게든 상관없었다. 아스카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만족하고 따라갈 것이다. 둘은 그렇게 인파 속 미소짓는 두 아이가 되어 바쁘게 걸어갔다.







관측창 너머 격납고는 LCL로 들어차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2호기가 강화 케이블로 고정된채 붉은 안개속에 서있었다. 대부분의 장갑이 제거되어 얇은 허리 위로 목부분까지 갈색 살점이 드러나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빨간색 구형 코어가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리츠코의 주의를 끌고 있는것은 코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코어 바로 위쪽에 형성되고 있는 작은 종양 비슷한 물체가 눈을 끌었다.


에메랄드 서판이 에바의 DNA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메모에 따르면 게놈 구조에 대한 서판의 이해와 조작 능력은 네르프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그리고 서판이 3대의 에반게리온을 괴물로 바꿔버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도, 서판이 비록 원시적인 수준이나마 제대로 작동하는 S2 기관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놀랍기 짝이 없었다.


이론적으론, 물질 구성만 맞으면 에반게리온은 잃어버린 부위를 재생할 수 있었다. 초호기가 14 사도의 신체를 흡수해서 자신의 팔을 복구시킨게 대표적인 사례다. 서판에겐 그정도 제한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무에서부터 S2 기관을 만들어내는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네르프가 가지고 있는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론적으론, 에바의 유전정보 안에 S2 기관의 제작법도 들어있을 것이었다.


A호기는 오랫동안 서판의 통제하에 있었던터라 S2 기관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지만, 리츠코가 손을 댄 무렵에는 이미 먼지 덩어리로 퇴화해 있었다. 8호기는 너무 신속하게 파괴되어 어떤 발전의 여지도 없었다. 2호기는 보아하건대 무언가가 만들어질 정도의 시간은 됐으면서 또 상당히 안정된 상태로 확보됐다.


아래쪽 격납고에서는 여섯명의 다이버가 각각 케이블에 연결할 대형 바늘을 들고 2호기에 접근하고 있었다.


"탐침 위치를 상-하 축선으로 바꿔," 리츠코가 지시했다. "그 다음 전압 측정 실시."


뒤에서 명령을 복창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수부들이 종양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바늘을 꽂기 시작했다. 끽해봐야 인간의 상체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S2 기관이 혹시라도 손상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지난 한주 동안의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이보다 나은 방법도 강구할 수가 없었다.


"탐침 모두 위치에 있습니다." 기술진 하나가 보고해왔다. "전압 정상, 안전선 이하로 꽤 여유 있습니다."


리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비록 그 변화를 유발한 지성체는 사라져버렸지만 서판이 2호기에 가한 물리적 변화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OS가 완전히 포맷되고, 신경 연결에 버퍼가 설치되고, 혹시 피드백이 올 것이 우려되는 부분들에 대한 격리조치까지 모두 완료한 지금, 2호기에 남아있는 지난 전투의 흔적은 오직 생물학적 구성요소 밖에 없었다. 초호기가 S2 기관을 섭취한 것은 원리상 일종의 장기 이식과 같은 행위였지만 이번 경우엔 뱃속에서 장기를 생성하는 것에 가깝다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을 제거하는 것도 가능했다. S2 기관이 장착된 2호기는 초호기만큼이나 위협적인 존재니까. 아니, 파일럿의 폭력적인 성향을 감안해보면 더한 위협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츠코는 그 부분에 대해선 별 걱정이 없었다. 통념과는 달리 에바의 최대 약점은 제한된 전력 같은게 아니었으니까.


"아스카가 좋아죽겠네." 리츠코는 뒤에 서있는 기술진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2호기 격리 조치를 유지할 이유는 없어. 초호기에 전투 우선순위 유지하고, 2호기 재기동 절차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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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눈빛들이 오가는게 보였다. 2호기를 재무장시키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인원이 많다는건 리츠코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부는 2호기가 아니라 아스카쪽에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모두 무지의 소산이었다. 2호기를 이 아래 묶어두는건 무의미한 일이었고 리츠코에겐 그런 사소한 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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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되도않은 설명충되는거 너무 현실적인 찐따묘사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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