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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가시 하나 거리 19-2

에갤팬픽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0.12 10: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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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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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물 속에서 아스카가 신지를 찾아내고, 그걸 또 끌고 헤엄쳐 호숫가로 데려온 것은. 


정말이지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요행이었고 실제로 아스카는 자신이 뭘 어떻게 해서 그런 위업을 달성한건지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중간의 기억이 상당부분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물에 뛰어든 것까지는 기억이 있었는데, 그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신지의 가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석의 몸을 진흙바닥에 쑤셔넣을 기세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황망한 상황 속에서도 아스카는 뼛속 깊이 새겨놓은 요점들을 정확히 되새겼다. 유두 사이의 중간 지점. 팔은 곧게 뻗어서, 절대 팔꿈치가 굽혀지지 않게. 온 체중을 실어서. 초당 2회. 30회 압박 후 인공호흡 2회 실시. 턱 끝을 살짝 들어올려 기도 확보하고, 가슴이 부풀어오르는지 육안으로 확인.


하지만 그렇게 FM대로 다섯번의 사이클을 돌렸는데도 신지는 여전히 깨어날 기색이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팔에 들어가는 힘이 줄어드는 것이 체감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아스카는 훈련 내용을 상기했다. 흉부 압박은 구조대가 도착할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기. 체력의 한계가 느껴지면 주저하지말고 주변 사람 하나를 구체적으로 지목해 교대하기.


하지만 이곳에는 와줄 구조대도, 교대해줄 사람 같은 것도 없었다. 오직 신지와 아스카뿐. 본부에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고 지금 아스카에게 어디로 연락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대할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퍼스트 그년은 귀가 멀었나? 내가 아까 비명지르고 난리쳤던 것도 안들렸단거야?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아스카는 흉부 압박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자동화된 기계처럼 의식조차 하지 않는 동작으로 검지와 중지가 신지의 턱 끝을 밀어올리고, 반대편 손이 이마를 누름과 동시에 검지와 엄지로 코를 막았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입을 포갠다.


아니야, 그런 년 도움따위 기대해봐야 소용없어. 믿을건 나밖에 없어.  


한껏 채워놨던 폐를 텅 비울 기세로 숨을 불어넣자 신지의 가슴이 눈에 띄게 부풀어올랐다. 아스카는 쩍-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떼고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켰다. 그와 동시에, 아마 눈앞의 급박한 일에 집중하고 있어서일까, 아스카의 머릿속에선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온갖 생각들이 제멋대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 넌 혼자야. 그때처럼. 네 눈 앞에서 죽어버리겠지. 그때처럼.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어린 나이부터 CPR이다 뭐다 죽어라 공부했지만 다 소용없을거야. 네 에반게리온 훈련이 아무 소용없었던 것처럼. 네가 하는 일이란 전부 그런식이니까.


아스카는 다시 신지의 입을 틀어막았다. 헛소리 그만해. 제발 닥쳐.

 

숨을 반쯤 불어넣었지만 신지의 가슴이 올라오지 않았다. 집중이 깨져서 그렇다고, 아스카는 조급해지는 심정을 달래가며 코로 숨을 들이쉬고, 신지의 입에 포갠 입술을 살짝 옮긴 다음 다시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이번엔 제대로 됐다.


단 1초도 낭비해선 안되는 상황이었기에 아스카는 얼른 몸을 일으켜 다시 흉부 압박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에 비해 손에 들어가는 힘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허리와 팔과 어깨에 불이 붙은 느낌이었다. 답답함과 서러움과 분노가 뒤엉킨,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평소에 운동 좀 더 해둘걸. 일본 넘어온 뒤로 너무 소홀했어.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아냐.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쓸데없는 밭일 같은걸 시켜서 체력을 소모시킨 카지씨 잘못이야. 그런 상황을 만든 미사토 잘못이야.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 상하운동 속에서 아스카는 필사적으로 이 사태의 책임자를 찾았다. 제일 먼저 떠올랐던 발상은(카지씨, 미사토) 솔직히 스스로에게도 설득력이 약했으니 다음 대상이 필요했다. 


아카기. 그래, 왜 그년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건 전부 그년 잘못이야. 


열여덟, 열아홉. 새롭게 타오르는 분노를 연료삼아 아스카는 속도를 올렸다. 끓는듯한 괴성이 목에서 새어나왔다. 


무슨 일 생기면 그년을 죽일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죽일거야. 어려울 것도 없어. 싱크로 테스트나 뭐 그럴때. 2호기로 파리 잡듯이 눌러죽여버리면 그만이야.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스물넷. 한창 압박을 하는 와중에도 아스카는 가쁜 숨을 내쉬며 신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눈썹의 움찔거림이든, 입술의 뒤틀림이든, 어떻게든 생명의 징조를 찾아봤지만 그 창백한 얼굴엔 미동도 없었다. 아스카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정도론 모자라. 아주 끔찍한 최후를 선사해줄거야. 천천히 괴롭히면서 죽여줄거야. 사지를 뜯어내면서도 최소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했던 시간만큼은 살려놓을거야. 비명을 지르고 오줌을 싸면서 애원하게 만들어줄거야.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온 몸이 후끈하고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아스카는 마지막 힘까지 쥐어짰다. 


그래, 다 좋다치고, 그럼 넌 어떻게 해야할까, 아스카? 너는 무슨 판결을 받아야할까? 


조롱하는 목소리에 아스카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스물아홉. 서른.


폐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입과 코에서 가쁘게 뿜어져나오는 날숨도 불길처럼 뜨거웠다. 끈이 풀린 꼭두각시처럼 아스카는 신지의 가슴 위에 쓰러졌다. 당장 일어나 인공호흡을 해야할 차례라고 머리가 일깨우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처음엔 불안한 호흡이 내는 소리인줄 알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가 매워져서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시점에서는, 아스카는 이미 어떻게 막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흐느끼고 있었다.


나, 다신 울지 않기로 그때 다짐했는데. 


아스카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미워졌다. 이유는 콕 집어 고를 수가 없었다.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인지. 신지를 이렇게 만든 자신의 행동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인지. 


난 지금 나 때문에 죽은 남자친구 시체 앞에서, 다른것보다도 운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야.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거야. 이건 정상이 아니야. 미친년이야. 애초에 내가 그 모양이니까 나하고 엮인 신지도 이 꼴을 당한거야.   


아스카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신지의 얼굴을 봤다. 싸구려 인형처럼 생기없는 눈이 아스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스카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 눈과, 한쪽 구석으로 물이 흘러나온 입은 거의 웃음기 비슷한 것까지 띄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마치 아스카를 용서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잠깐.


아스카는 눈을 몇번 깜박이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뭔가가 이상했다. 신지는...


신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음 순간 그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


"아스카..."


아스카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움직였다.


"...넌 이게 웃겨? 웃음이 나와?"


"...매번," 신지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언제나, 아스카가 내 위에 있는걸 생각했는데, 이런 식은 아니었으니까."


"뭘 상상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아스카는 이 상황이 온전히 와닿았다. 아스카는 반쯤 울먹이며, 덮치다시피 신지에게 키스했다. 힘없이 열리는 입은 차가웠고, 흙맛이 났다. 신지도 한 손으로 부드럽게 아스카의 뒤통수를 끌어당기고 차가운 혀를 감아오며 응해왔다. 잠시동안 둘은 간만에 거머쥔 상대의 촉감과 맛을 즐겼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신지가 격한 기침으로 아스카의 온 얼굴을 침과 콧물범벅으로 만들어놓기 전까지의 일이었지만.


기겁하며 물러선 아스카가 불평 한마디 입에 담을 틈도 없이, 신지는 몸을 옆으로 반쯤 굴린 자세로 마치 폐를 내뱉을 것 같은 기세의 기침을 이어갔다. 그제서야 아스카는 어쩌면 방금 전까지 숨을 못쉬고 있던 사람의 목구멍에 혀를 집어넣는 것은 그리 현명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눈물과 침과 콧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아스카는 무릎을 질질 끌며 신지의 옆으로 갔다. 무릎에 흙과 풀이 떡처럼 뭉쳐있었지만 아스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고통스럽게 콜록거리는 신지를 보며 잠깐 등을 두드려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까 플러그 위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기에 아스카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 손을 뺐다. 


몇번을 물을 뱉어내고 한참을 풀무 소리 비슷한 것을 내며 숨을 몰아쉬더니, 마침내 신지는 털썩 드러누웠다. 숨소리는 아까보다 안정됐지만 가슴은 여전히 눈에 띄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아스카는 반사적으로 그 옆에 누워, 신지의 어깨에 머리를 뉘이고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촉감이 차가웠다.


신지가 움찔하는게 느껴졌다. 아스카의 몸이 너무 뜨거워서인지(아스카 본인이 느끼기에도 불덩이 같은게 사실이었다) 혹은 부끄러워서인지. 후자일 경우를 대비해 아스카는 '저체온증을 방지하기 위해서야, 이 바보야.' 라는 대사를 대사를 준비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연습까지 했지만, 그것을 써먹을 일은 없었다. 신지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누워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둘은 이제 맨몸을 맞대고 눕는데 핑계가 필요한 사이는 아닌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신지가 너무 지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거거나. 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스카는 신지의 깡마른 어깨에 뺨을 비볐다.


서늘한 호숫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와 키 큰 풀들을 흔들고 아스카의 몸을 식혔다. 달빛도 별빛도 없었지만 본부 피라미드에 쏘아져 반사되는 새파란 스포트라이트와, 공동 벽을 타고 올라가는 전철의 먼 불빛, 야간에 회수되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마천루들의 붉은 항공장애등이 점멸하는 모습들이 호수에 비쳐 묘한 풍취를 만들어냈다. 


의외로 꽤 괜찮은 광경이라고, 아스카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신지의 어깨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다음 순간 신지가 입을 열었을때 아스카는 이미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스카."


"응?" 아스카는 고개를 돌려 신지의 얼굴을 살폈지만, 신지는 누운채로 허공을 응시할뿐 이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묘한 불안감이 다시 아스카를 붙잡기 시작했다. 제발 바보같은 소리는 하지 말라고, 간만에 분위기 좀 좋아진거 망치지 말라고, 그럴거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아스카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속만 타들어갔다.


하지만, 약간의 뜸을 들이고 나온 신지의 말은 아스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살아있긴한건지 확신이 없어. 너무 멍하고. 힘이 없어서."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혹은 대답을 기대는 하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아스카는 신지의 어깨에 기댄 자세 그대로 신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지는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또렷하게 느껴지는건, 그래서 내가 살아있긴하구나 싶게 해주는건, 고통뿐이야."


그러곤 신지는 눈을 감았다. 눈물 한방울이 흘러나와 귓가로 흘러내렸다. 아스카는 잠시 말을 잃고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신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스카는 한번 입술을 핥고, 침을 삼키고, 신지의 가슴 위에 올라가있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편 다음, 그 손을 뻗어 신지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이거는? 난 느껴져?" 


확실히 해두기 위해, 아스카는 신지에게 몸을 갖다붙였다. 바깥 바람을 맞고 살짝 굳어져 예민해진 젖꼭지가 신지의 팔에 닿자 찌릿한 느낌이 아스카의 상반신을 타고 달렸다. 


신지가 눈을 뜨고 아스카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것뿐, 신지는 묘하게 슬픈 표정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고통의 일부인거야. 아스카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관통하고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신지에겐, 나도 고통인거야. 고통의 근원인거야. 


바보같은 소리. 의식을 잃을 정도로 세게 플러그에 머리를 박고, 그 다음엔 호흡이 멈춰서 억지로 되살려냈으니까, 그래서 멍하면서도 아프다고, 그런 얘길 하고 있는거야. 무슨 학교 문학 수업처럼 꿈보다 해몽식 과대해석을 하는게 우스운거야. 네 죄책감이 그런 멍청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을뿐이야.


또 제멋대로 날뛰는 머릿속 목소리들을 억누르려고, 아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신지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아스카가 떠밀리듯이 공백을 메웠다.


"고통 말고 다른걸 줄 수도 있어."


신지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아스카?"


아스카는 상체를 일으켰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신지의 시선이 한번 아래쪽을 향했다가 황급히 다시 아스카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을때마다 언제나 그랬듯 아스카는 뱃속이 따뜻해지는 만족감과 짜릿함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 지금 둘은 무엇을 해서 근래들어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마무리해야하는건지, 모든게 딱딱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한번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신지가 방금 한 말조차도, 아스카가 그때 학교에서 급조했던 이야기와 귀신같이 들어맞는 것이 있었다. 살아있음을 체감하게 해준다고. 이보다 완벽한 예시가 어디 있겠는가.


아스카가 흙바닥에 한 손을 짚는데, 신지의 손이 올라와 어깨를 붙잡았다. 아스카는 의문이 담긴 눈빛을 신지에게 보냈다. 설마 거절하려는 것도 아닐텐데, 왜?


아스카의 예측은 이번에도 빗나갔다. 신지가 살짝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괜찮아. 그렇게 해줄 필요 없어."


아스카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왜 꼭 이걸 그런식으로 생각하는걸까. 왜 이런걸 신지 본인만큼이나 아스카도 원할 수 있다는걸 모르는걸까. 이건 신지도 신지지만 아스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한건데. 아스카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뻔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랫배가 오그라들면서 자신감이 죽어버렸다.


대신 아스카는 신지의 하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쟤는 의견이 다른 것 같은데."


왼쪽에서 끙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쪽 의견은 들어선 안된다고 생각해."


여기까지 와서도 고집이냐고, 대체 그러는 이유가 뭐냐고, 아스카는 슬슬 짜증까지 내고 싶어졌다. 그 대신 아스카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지난 며칠간 몇번은 연습해두고 또 사용하는 환상을 해봤던 대사였다.


"우리 약속," 아스카는 작게 씹어 내뱉듯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됐든간에 빚지고는 못살아. 이 일은 이번 주가 끝나기 전에 해결해두고 넘어가고 싶어."


열이 올라오는 얼굴로 아스카는 신지의 안색을 살폈다. 신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창백한 입술이 한번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 모습을 보고, 이쯤되면 알아먹었겠지 싶어서 아스카는 어깨를 비틀었다. 신지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난관은 아니었다. 신지의 하체쪽으로 몸을 기울인 아스카는 자신이 이걸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일절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당장 생긴 것부터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짙은 색에, 중간 부분을 타고 오르는 투박한 혈관 외엔 아무 굴곡도 하이라이트도 없는 고기 막대. 징그럽게 움찔움찔하기까지. 다른 부위엔 외양상 딱히 하자가 없는 신지의 일부치곤 너무 못생겨서 솔직히 뭔가가 잘못된거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의 끝부분이 아스카의 눈을 잡아챘다. 마치 길쭉한 물건에 포장을 덮어씌우다 포장지 길이가 모자라 내용물이 약간 노출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출된 부분으로 다 가려지지 않은 핑크색 살과 그 중심의 '눈'이 보였다. 


저 껍질을 벗기면 그 아래에 아스카가 잡지를 통해 알고 있는 형태가 나오는걸까? 하지만 아스카는 그게 인위적으로 그렇게 해도 되는 일인지 확신이 없었다. 저것도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저기에 있는걸건데. 벗겨져야 하는 상황이면 굳이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벗겨지지 않았을까? 


예전에 신지가 자신에게 저것을 넣으려고 했을때는 어떻게 했던지 떠올려봤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때 아스카는 워낙 흥분하고 경황이 없었어서 지금 돌이켜보면 기억이란게 죄다 뿌옇게 흐릿한 잔상들만 남아있었다. 아스카는 살짝 콧김을 내뿜었다.


그냥 입에 넣으면 되겠지. 빨대처럼 빨아올리면 되는건가?


아스카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몸을 숙이는데, 신지가 다시 손을 뻗어 아스카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스카, 그만. 나, 아파. 많이."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아스카는 잠시 눈만 끔벅거렸다. 저게 대체 무슨 개소린가 싶었고 혹시 또 겁이 도져서 핑계를 찾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신지의 뚝뚝 끊기는 말과 목소리는 정말로 어딘가가 아파보였던 것이다. "나, 아직 아무것도 안했는데..."


신지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거기 말고. 여기. 아스카가 그러니까, 호흡이 빨라지는데, 갑자기 가슴이 찌르는 것처럼 아프고..."


"아," 아스카는 곧바로 어떤 가능성이 떠올라서, 황급히 다리를 끌며 신지의 가슴 옆으로 갔다.


미치겠네. "갈비뼈 부러졌나봐. 그런 느낌은 없었는데, 내가 그냥 눈치 못채고 넘어간걸지도."


신지의 몸이 눈에 띄게 움츠러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공이 측은할 정도로 사정없이 흔들려서 아스카는 얼른 덧붙였다. 


"호들갑떨지마! CPR에선 원래 자연스러운 일이야! 어디 폐나 심장 같은데 찔렀으면 큰일이지만 그정도 사고 터졌으면 진작에 알아차렸을거니까."


잠깐 아스카는 신지의 가슴을 눌러보며 어느쪽을 다쳤는지 확인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아무짝에도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아스카는 한숨을 내쉬며 신지의 팔을 들어올리고 그 아래로 들어가 신지의 어깨에 고개를 뉘었다. 가슴이나 옆구리를 누르지는 않도록, 조심조심. 


아스카가 잠시 했던 생각을 신지도 똑같이 하는 모양이었다. "아스카,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은거야...?"


아스카는 콧방귀를 뀌고 싶은 것을 참았다. 모두가 아스카처럼 잘 훈련받은 파일럿일수는 없으니까. 


"그래, 괜찮아. 아카기한테 보여줘도 따로 해주는 일은 없을걸? 갈비뼈는 깁스를 해주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자연적으로 잘 붙으니까 그냥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낫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아."


한숨을 내쉬며 아스카는 신지의 몸에 몸을 딱 붙였다. 곳곳에 딱딱한 뼈가 느껴지는 마른 몸은 아직도 차가웠다. 마음만 같아선 팔을 둘러 꽉 끌어안아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지만, 그런식으로 흉부를 압박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한쪽에 엉겨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만 바랄뿐이었다.


신지의 몸이 작게 흔들렸다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오므라들었다. 잠깐 뒤에야 아스카는 신지가 웃음을 터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래?"


신지가 끄응 소리와 함께 목을 가다듬더니, 아스카의 어깨에 놓여있던 손에 살짝 힘을 줬다. "여기. 아스카랑. 데이트하려고 했었는데."


"날 여기 데려오려고 했다고?"


신지가 작게 끄덕였다. 아스카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아까도 지나가듯이 한번 생각한거지만, 의외로 경치가 나쁘지 않긴 했다. 둘이서 뭘하든 방해되는 사람도 없을거고. 


작은 한숨. "같이 손잡고 걷고. 한적한 곳에서 피크닉. 어쩌면 이렇게 누워서 호수 구경. 그래도 이런 방식은 상상도 못했어."


"그런 계획은 언제 다 짜놓은거야." 자신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물기가 맘에 들지 않는 아스카였지만, 고작 이정도에 감동하는 자신이 어이없다고 생각도 하는 아스카였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야," 신지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작은 꼴깍 소리와 함께 침을 넘겼다. 방금 전까지 따뜻함이 가득하던 눈에 묘한 빛이 돌았다. 지금 자신이 보고있는게 무엇인지, 아니, 정말로 무언가를 보고 있기는 한건지 혹은 자신의 착각인건지 아스카가 고민하는 찰나에, 모든 것이 씻은듯 사라지고 원래의 안색이 돌아왔다.


"아스카, 다음번에 같이 와줄거지?"


네가 가자면 어디든 같이 갈거야라는 말이 아스카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멈췄다. 머릿속에 굴려보면 굴려볼수록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너무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그래서 아스카는 잠시 망설이다 신지의 어깨에 한번 입을 맞췄다. "하게 해주면. 어떤 핑계도 인정 안하고. 무조건."


신지의 몸이 한번 들썩였다. 이를 꽉 깨물고 흘리는 신음소리가 신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아스카. 웃게 만들지 마. 제발."


"그럼 딴건 해도 돼?"


아스카는 미소지었고 신지도 그랬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스카는 신지가 원하는 것을 알았고 신지도 그랬다. 둘은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아까 전 급작스럽게 시작되어 급작스럽게 중단되었던 키스와는 달리 이번의 것은 느긋하고 노곤한 무언가였다. 둘 다 지난 며칠간 맛보지 못했던 것을 한점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가져가려는 느낌이었다. 괜히 강도를 올렸다가 신지에게 무리가 갈 수도 있었고.


그러곤, 그런 아스카의 생각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신지의 손이 올라와 아스카의 가슴을 쥐었다. 가뜩이나 예민해져있던 유두가 차갑고 딱딱한 손바닥에 닿자 찌르르한 쾌감이 달렸다. 아스카는 신지의 입안에 뜨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신지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얽었다. 팽팽하게 발기된 신지의 남근이 아스카의 허벅지를 찔러왔다. 신지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손의 힘을 뺐다. 아스카도 살짝 엉덩이를 뒤로 빼며 기세를 늦춰줬다.


둘은 천천히 그 비슷한 공방을 반복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 아스카의 턱이 조금씩 아파오고, 신지의 호흡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 거칠어지기 전까지. 그 뒤론 둘은 서로를 꼭 껴안고 누워 있었다. 둘 다 거기까지가 체력의 한계였다.


한껏 긴장했을때 마구 분비되었던 아드레날린의 영향도 시간이 지나 사라지자 아스카는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특히 팔과 허리가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꼼짝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아스카는 신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 흙과 풀과 아직도 남은 희미한 LCL 냄새 아래로 신지의 체취가 미세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지금의 아스카에겐 수면제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편히 늘어질 여유 같은건 없어야하는걸지도 몰랐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 중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스카는 일단은 이정도로 해두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말도 없이 서로의 온기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고 있으면, 신지가 없어지면 다시 자신이 최고의 파일럿이 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일지언정, 했다는 사실과 직면하지 않아도 될거니까.










다른 조명 없이 수조에서 흘러나오는 주황빛 일렁임만이 모든 것을 불길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가운데, 그의 장신이 검은색으로 우뚝 서있었다. 리츠코가 예상했던대로, 수조 관리 패널 앞에. 리츠코는 이곳까지 황급히 내려오게 만든 용건도 잠시 잊고 익숙한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당신의 소중한 인형들은 마기 메인프레임과는 완전히 분리된 독자 시스템으로 관리된다고, 그러니 전체 시스템의 96%가 사도에게 넘어가는 와중에도 이곳에는 한번도 위협은 없었다고, 그러니 호들갑 좀 자제하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리츠코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이 인형들을 그렇게까지 의식하고 격한 감정을 품는다는 사실을 그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대신 리츠코는 주 용건에 앞서 살짝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보기로 했다.


"아드님께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건 아십니까?"


겐도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패널의 버튼 몇개를 느긋하게 누르는 모습이었다. 리츠코는 적당히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스카, 아니, 제 말은, 2호기 파일럿이 아주 격하게도 다뤘더군요. 흉골 골절에 뇌진탕. 뭐, 심각한 상태까진 아니지만."


겐도의 손이 멈췄다. 리츠코가 방금 전달한 정보 때문이라기보단, 아마 패널에 입력하려던 명령을 마무리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작게 코웃음치며 리츠코를 돌아봤다.


"소류 그 여자가 입원 전부터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다고 하면 믿겠나? 피는 어디로 가지 않는 모양이군."


리츠코는 겐도의 옆에 걸어가 서서 어깨를 으쓱했다. 베를린 지부의 소류 박사는 리츠코가 게히른에 입소하기 전 시대의 인물로, 리츠코는 딱히 그녀에 대해 개인적인 인상 같은게 없었다. 


리츠코가 삼천포로 빠질 기회를 더는 주지 않으며 겐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선은 다시 수조로 돌아간 채였다. "복구는 가능한건가."


리츠코는 입술을 씹었다. 오늘의 '전투'로 네르프 조직이 겪은 손실은 그 규모를 가늠조차 할 수 없이 아득한 수준이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셋뿐이지만.


"아니요. 사도가 장악한 섹터의 다른 정보들과 마찬가지로, 로직 단계에서 오염이 발생했습니다. 폐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수준까지 재구축하는데는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은가."


"처음에 겪었던 시행착오들은 대부분 회피할 수 있으니, 이전에 걸렸던 기간의 3할 정도까지는 압축할 수 있겠죠."


겐도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충격적인 소식을 정리하는 그 나름의 방식일 것이었다. 이전 기간의 3할은, 얼핏 들으면 상당히 낙관적인 수치였지만 이 경우엔 사해 문서가 제시하고 있는 일정에 도저히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미 시스템은 이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용할 수 있을때가 되면 이미 사용할 사람도, 필요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더미 시스템의 핵심 요점들은 모두 리츠코의 머리와 작업 노트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만으론 인간의 영혼을 함수의 형태로 모사하는데 필요했던 어지러운 수준의 연산력과 그 결과로 생성된 막대한 양의 자료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이렇게 중요한 작업에는 물리적 카피와 백업본을 이중 삼중으로 확보해두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애초에 그럴 수도 없었기에 리츠코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본부 마기의 백업은 마츠시로에 보관되고 있었고, 더미 시스템 개발 자료 같은 극도로 민감한 사안을 그곳에 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미 시스템의 유출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자료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훑어봐야하는지 아는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간 리츠코가 개발 중인 더미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아야나미 프로젝트 역시 노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것은 가능성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물리적 카피의 경우엔 저장장치의 문제도 문제인데다, 본부에서 대놓고 암약중인 스파이에게 지나치게 취약했고. 이번처럼 마기 메인프레임이 송두리채 넘어가는 상황 자체도 원래는 상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되짚으며 리츠코는 겐도의 반응을 기다렸다. 인형 하나가 생기 없는 눈을 하고 둘의 앞을 지나갔다. 모터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겐도가 고개를 들며 옷이 부스럭거렸다.


"네바다 지부에 편지를 보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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