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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가시 하나 거리 20-3

에갤팬픽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2.13 23: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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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점심 데이트는 별 사건 없이 흘러갔다. 어떤 사고도, 중대한 말실수 같은 것도 없었다.


아스카는 처음엔 시가지 중심부로 전철을 타고 나가 그럴싸한 한끼 식사를 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녀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신지의 몸 문제도 있었고, 재정 문제에 대해 신지가 한 말도 조금 마음에 걸렸다. 아스카가 용돈이 부족하거나 고작 식사 한번에 벌벌 떠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데이트는 따로 사전 조사 같은 것도 없이 학교에서 아스카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발상이었고, 아스카는 미리 확인해두지 않은 식당에 가서 고가의 금액을 지불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스카는 실망의 가능성 같은건 질색이었고, 되도록이면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둘은 한창 별다른 목적지도 없이 걷던 와중 배고픔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됐을때 마침 눈에 들어온 싸구려 규동 체인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작고 북적이는 곳으로, 몇 안되는 식탁이 가득 차서 카운터에 붙은 바에 앉아야했다. 신지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게 움츠러들더니 혹시 다른 곳을 찾아볼까 아스카에게 물어봤지만, 슬슬 허기가 화로 진화하기 일보직전이었던 아스카는 거절했다. 신지는 아무래도 그런 곳에 아스카를 데려왔다는 생각에 미안함 비슷한 것까지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 아스카의 입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진심으로 개의치 않았고 신지가 걱정이 과한 것이었다. 체감상 과반이 물고기 관련인 것 같고 비린내에도 딱히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은 일본 음식들 사이에서 달콤한 소고기 볶음을 얹은 밥은 아스카의 입맛에 맞았으면 맞았지 불만이 있기는 힘든 메뉴였고, 좁은 공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뭐, 다른 경우라면 불쾌했을 수도 있겠지만 신지의 옆에 붙어 앉는 것은 싫지도 않았다. 평소에 하는 것처럼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것과는 또 다른 친밀감이 있었으니까.


식사를 마친 둘은 전철을 타고 시 외곽으로 향했다. 신지가 주장한 일이었다. 예전에 한번 꽤 경치가 좋은 곳을 봐뒀다는 것이다. 아스카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신지의 뒤를 따랐다.


막상 그곳은 자가용 없이는 접근이 불편한 종류의 장소였는지, 전철역에서 내리고도 꽤 한참을 언덕길을 걸어올라가야만 했다. 아스카는 사실 자신이 걷고 있는 곳이 행정구역상으로도 제 3 신동경시 내부가 맞기는 한건지 의문이었다. 아스카가 조금씩 땀이 나고 책가방을 든 팔이 슬슬 아려올 무렵 둘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 3 신동경시와 그 시가지가 위치한 칼데라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게 높은 곳은 아니었고 하다못해 산중턱이라고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근방에 시야를 방해하는 것 없이 꽤 탁 트인 모양새가 나름 그럴싸했다. 그런 감상은 아스카 개인만의 것도 아니었던 모양인지, 펜스가 쳐진 작은 절벽 끄트머리에는 관광지 같은 곳에 흔히 있는 유료 망원경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막상 주변에는 딱히 관광객 같은 것은 없이 신지와 아스카 둘뿐이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둘이 가진 것을 합쳐도 동전은 잔돈 수준 밖에 없었기에 망원경을 작동시킬 수는 없었다.


아스카는 철제 펜스까지 걸어가 책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펜스에 등을 기대고 신지를 돌아봤다. 저지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이거야? 나한테 보여주고 싶었다는게?"


"응. 어때? 내가 처음 왔을때는 막 건물들이 올라왔었는데, 오늘은 그냥 서있는 모습이라 조금 심심하긴 한 것 같아."


아스카는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려 도시를 내려다봤다. 나쁜 광경까진 아니었지만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었다. 대도시라고 부르기엔 조금 애매한 규모. 적당한 높이의 고층 건물들이 중심 구역에 모여있고 그 주변으로 칼데라를 반쯤 채울까말까한 너비로 뻗어있는 시가지. 사방으로 뻗어져나오는 도로 주변으로 형성된 교외 구역들. 시가지 반대편에는 건물들 사이 사이로 호수가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신지의 말대로 중심부의 장갑화 구간들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광경을 보거나, 혹은 아예 밤에 와서 불이 빛나는 야경을 보았다면 또 감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토요일 낮 쨍쨍한 태양 아래에서는 그리 특이할 것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굳이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와준 신지를 실망시킬 것 같아서 아스카는 어떻게 다른 표현은 없을까하고 잠깐 고민했다. 아스카의 그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지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때였어. 미사토씨가 여기 데려와준건. 날 격려하려고 그러셨던 것 같아. 이게 내가 지켜낸 곳이라고. 이 도시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직접 보면 와닿는게 있을거라고 생각하셨나봐."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 언급된 것이 조금 아스카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신지에게는 참 대단한 배려들도 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쾌감을 느끼는 아스카와는 정 반대로, 신지의 목소리엔 묘하게 애상적인 음색이 섞여들어가 있었고 아스카는 그것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스카는 신지를 돌아봤지만 신지는 아스카의 어깨 너머 도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스카도 펜스에 기댄 자세 그대로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다시 한번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개미처럼 작은 자동차들. 그보다 더 작아 움직임도 거의 보기 힘든 사람들. 작고 작은 미물들. 


신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시야의 가장자리에 보였다. 아스카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쪽을 돌아봤다. 신지는 더이상 도시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스카는 신지에게 씩 웃어보였다.


"뭘 보고있어?"


신지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러곤 신지는 얼굴을 붉혔다.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몇번 움찔거리길 반복했다. 아스카는 기대감 속에 신지의 말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신지가 기대에 응해줬다.


"아스카. 너."


행복에 겨운 소음이 아스카의 목에서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둘의 첫키스때와도 그리 다르지 않은 무언가였다. 아스카는 난간을 붙잡고 있던 두 손을 들어 신지의 뺨을 감싸고, 신지의 눈을 들여다봤다. 아스카의 것보다 살짝 짙지만 어쨌든 비슷한 색의 그 파아란 눈을. 


당장 키스로 이어져도 자연스러울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아스카는 웬지 모를 충동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신지의 눈을 들여다봤다. 신지 역시 불안감이나 그 비슷한 것은 없이 아스카를, 아스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지의 그 행동이, 대답이 아스카는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만족스러웠다. 여태껏 그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이만큼 확실하게 아스카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신지가 자신이 아스카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과연 알기는 할지, 반대로 아스카가 신지에게 과연 그만큼 특별하긴 할지 아스카는 의문이었다.


그 생각에 아스카는 가슴이 찌릿해져서 신지를 와락 껴안았다. 신지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고서야 아스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신지는 그 후 몇분을 쪼그려 앉아서 이를 꽉 깨물고 있은 뒤에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 해프닝을 마지막으로 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평일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보다도 약간 늦은 시간대였다. 점심보단 저녁에 가까운 시점이었으니 밖에서 꽤 시간을 많이 쓴 셈이었지만 아스카에겐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강력한 어조로 항의하는 펭귄을 달래며 통조림을 꺼내는 신지를 뒤로하고 아스카는 곧바로 화장실로 가 샤워를 시작했다. 갈아입을 옷 같은건 챙기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스카가 물을 뚝뚝 흘리며 수건 한장만 대충 걸친채 주방에 나왔을 무렵엔 시끄러운 펭귄도 없어져 있었고 신지만이 싱크대에서 뭔가를 덜컥이고 있었다. 아스카는 그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본 신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보며 아스카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뭐해? 넌 안씻어? 오늘 좀 더웠잖아."


신지는 싱크대를 가리켰다. "이거 간단하게 준비만 해놓고. 저녁때 먹어야하니까."


정말 어쩔 수 없는 성실 주부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향하려는 것을 신지가 불러세웠다. "아, 그리고..."


"왜?"


"미사토씨가 곧 오실거야, 그러니까 옷은..."


아, 미사토. 올때가 됐지. 또 무슨 비열한 수작으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할까. 아스카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늘은 꽤 좋은 날이었다. 간만에 찾아온 이 좋은 분위기를 아스카는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스카는 어깨를 슬쩍 늘어트려 수건을 흐트리면서 대충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던졌다.


"옷을 뭐 어떻게 하라고? 다 벗고 앞치마만 입고 있을까? 넌 변태니까 그런것도 좋아하겠지?"


수건만 걸친 아스카의 몸에는 비록 홍조를 띄울지언정 나름 진정하고 있었던 신지였지만 이번 것은 견디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달아오르는 그 얼굴을 보며 아스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머릿속 '언젠가 해야할 것' 목록에 항목을 추가했다. 정말이지, 아까 학교에서 생각해냈던 '무릎 위에 올라가 먹기'도 그렇고, 둘 사이에는 아직 시도도 해보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고 그런 생각을 하니 아스카는 정말 짜릿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스카...!"


힘겹게 중얼거리는 신지를 뒤로 하고 아스카는 놀리는 듯한 동작으로 방으로 향했다. 간신히 가려져서 서늘한 바람이 드는 엉덩이에 시선이 꽂히는게 느껴지는 것이 느껴졌고 그것 역시 아스카의 의도였다.


방에 들어온 아스카는 헤어 드라이어로 꼼꼼하게 머리를 말렸다.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리고 그게 조금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선지 멈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머리쪽 루틴을 끝낸 아스카는 이제 수건을 벗어 침대에 깐 다음 그 위에 앉아 몸에 바디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기분 좋은 향기가 방에 퍼져나갔다. 몸단장을 시작한 뒤로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쭉 써온 브랜드였기에 그 냄새는 아스카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마치 고향의 냄새 같달까. 이것도 사실 처음엔 몸에 자꾸 들척하게 달라붙는 LCL 냄새를 지우려는 목적이 더 강했었지만.


아니, 생각해보니 그건 아스카가 직접 해낸 발상은 아니었더랬다. 몸에서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어린 아스카에게 그 당시 핸들러였던 미사토가 제시했던 해결책이 아니었던가. 적당히 가성비 좋은 브랜드의 추천까지 전부 다.


아스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옆에 내려놓은 크림 통을 내려다봤다. 바디 크림이란게 원체 소모량이 많은 물건이다보니 가장 최근에 뜯은 것도 벌써 반 가까이 쓴 상태였고, 독일에서 가져와 한쪽 서랍에 넣어둔 여분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새것을 사긴 해야할 것이다.


그땐 새로운 종류를 찾아봐야겠다고, 아스카는 생각했다. 딱히 미사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몇년을 한 종류만 썼으니 한번 바꿔볼 때도 됐고, 독일에서 쓰던걸 일본에서 구하려면 비용의 문제도 분명 있을거니까. 일본도 이런쪽으로는 꽤 일가견이 있는 나라로 알고 있는데, 현지의 물건을 한번 시도해보는게 그렇게 나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아스카는 어째선지 묘한 불쾌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괜히 또 미사토를 떠올렸기 때문에 그런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스카는 왼쪽 어깨부터 팔로 내려가며 크림을 바르는 동작에 집중하면서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고 노력해봤다.


새 크림을 살때 신지도 데려가볼까? 너는 어떤 냄새가 좋냐고 물어보면서?    


그 생각에 아스카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 그것도 별로 나쁘진 않은 발상 같았다. 그리고, 그래, 오늘 같은 날 아스카는 기분 좋은 생각만 해야지, 쓸데없이 불쾌한 일을 떠올릴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아무 불안 요소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지랑도 다시 다정해졌고.


또 한번 생각이 신지에게로 향하는 자신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서 뭐 어쨌다는건가. 그 녀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있는 곳에서, 아스카의 곁에서 존재하며 아스카만을 보고 있었다. 손 닿으면 있는 곳에 기다리고 있는 기쁨. 왜 이쪽에서 신지를 생각하는데 부끄러움을 느껴야한단 말인가. 아마 저쪽에선 언제나 아스카만을 생각하고 있을건데. 그건 좀 공정하지 못한 처사 같았다. 최소한 아스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의 꼬리를 무는 식으로, 아스카는 이번엔 베를린 지부 시절을 떠올렸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처럼 샤워를 하고 나와 뒷정리 루틴을 하던 상황을. 너무나 조용한 방. 몇 분에 한번꼴로 핸드폰을 열어 카지씨의 메세지가 혹시 왔는가 확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도, 아무것도 기대할 일도 없던 시절. 밥을 해주고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혀줄 동거인 같은 것도 없던 시절.


그때는 그런 것도 당연한 줄 알고 살았더랬다. 지금은 아니었다. 솔직히 아스카는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정말 못할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넌 약해진거야, 아스카. 그거 전혀 자랑이 아니라고.


갑자기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아스카는 이마를 찡그렸다. 콧방귀를 뀌며 무시해보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크림을 바르던 손도 멈추고 아스카는 잠시 가만히 앉아있었다. 가슴과 배까지 모두 마쳤기에 다음 차례는 다리였다. 어젯밤에 생긴 불그죽죽한 생채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여기다 이런걸 발라도 되는건가? 약을 발라야하는거 아닐까?


잠시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지였다. 


"아스카, 들어가도 돼?"


"들어와."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동시에 전개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아스카는 무심결에 답했다. 자신이 완전히 벌거벗은채로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있는 모습이란 사실을 깨달은건, 문을 열고 방에 반발자국 정도 들어서던 신지가 그대로 얼어붙은채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것을 본 뒤였다.   


"아, 음." 당황한 아스카는 깔고 앉은 수건을 한 손으로 끌어올리다가 혼란에 빠져 멈췄다. 생각해보면 둘은 이것보다 더한걸 이미 여러차례 본 사이였고,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엔 아스카의 주도로 그러했었다. 가끔은 장난치듯이. 가끔은 성화를 부려가며. 가끔은 욕망의 회오리 속에서. 지금와서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는건 모양새도 이상했고 언행일치의 문제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놀란 티를 내버린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수습할 수 있을까?


아스카가 미처 대책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신지는 또 아스카를 놀라게 만들었다. 문을 닫으며 방으로 들어오더니, 아스카를 똑바로 쳐다보며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에는 아까 주방에서 본 것보다 더 새빨간 홍조가 떠올라서 정말 저러다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신지는 아스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스카는 얼어붙어서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덮치려는걸까.


어쩌면 오늘 약올린게 도를 지나쳐서, 인내심의 한계를 넘겨버려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된걸지도 몰랐다. 이번의 경우엔 절대 의도한 것이 아니었고 대가라는 표현도 좀 묘하긴 했지만 어쨌든. 신지가 자신의 몸상태마저 잊게 만들 정도로 아스카가 선을 넘어버린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아스카가 바라마지않는 일이었다. 바로 이 사안을 갖고 아스카는 신지를 쭉 등떠밀고 유혹하는 입장이었었다. 당장 어젯밤에도 그랬었고. 그런데, 막상 이렇게 그 가능성이 눈 앞에 실질적인 형태로 드러나자 아스카는 헤드라이트를 쬔 고라니처럼 큰 눈을 하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신지가 침대 바로 앞까지 와서 무릎을 꿇고 앉은 다음 아스카의 한쪽 발을 부드럽게 감아쥐었을때도 아스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대신 아스카는 눈을 꽉 감았다.


왜 하필 발이야. 그 순간 아스카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딴게 아니고 이것뿐이었다. 혹시 입에 집어넣거나 하면 다신 키스 안해줄거야. 아니, 그건 좀 심하다쳐도 일주일은 안해줄거야.


그렇게, 입술 내지는 혀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아스카는 차가운 무언가가 정강이를 핥자 깜짝 놀라 움찔하며 눈을 떴다. 아스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신지의 한 손에 작은 튜브가 들려 있었다. 연고나 그 비슷한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올려다보는 눈을 보니 신지쪽에서 오히려 아스카의 반응에 조금 놀란 모습이었다. 아스카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스카는 순간 자신이 정말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스카, 그렇게 아파?"


아스카는 목을 가다듬었다. 당혹감도 조금 가시고 이제 본래의 태연함이 조금씩이나마 돌아오고 있었다. "전~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것도 못참을리가 없잖아? 그냥 너무 차가워서 신경이 놀란것뿐이야. 척수반사 같은거지. 들어는 봤니?"


놀란 가슴도 진정되자, 이제는 자신이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들키는건 정말 죽음보다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혹시 낌새를 챈걸까 싶어 아스카는 신지의 안색을 살펴봤다. 신지는, 아스카로선 다행으로 여겨야할지 아닌건지, 자신을 뜯어보는 아스카의 눈을 피했다. 그 시선이 방바닥과 아스카의 발등 사이 어딘가에 멈춰서고 입술이 머뭇거리며 열렸다.


"아스카, 그, 조금만 가려줄래...? 싫다는건 아니고, 자꾸 신경이 쓰이니까..."


조금만 상황이 달랐어도 '어떻게 신경이 쓰이는데? 뭐가 하고 싶은데?' 같은 말을 던지며 신지를 놀렸을 아스카였지만 당장 지금은 스스로도 너무 경황이 없어 그런 생각은 잠깐 머릿속을 스쳐지나갈뿐이었다. 대신 아스카는 조심스럽게 수건을 끌어올려 상반신을 가렸다. 신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연고를 짜 아스카의 다리 상처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펴바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감각이 다시 한번 아스카의 다리를 달렸다. 


쪼그린 자세가 불편했는지 신지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가, 이를 꽉 깨물고 신음을 흘리며 옆구리를 눌렀다. 앉는 과정에서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아스카는 자신이 정말 어이없는 상상을 했음을 깨달았다. 신지의 몸이 저 모양인데 자신은 그런건 생각지도 못하고 혼자 이상한 생각이나 했다는걸. 그리고 오늘 학교가 마치자마자 그냥 바로 집에 왔어야지, 쓸데없는 데이트 같은 소리를 하면서 저렇게 아픈 애를 끌고다녔다는 것을. 혹시 아까 걸어다닐때도 계속 아팠는데 자신을 위해 내색하지 않았던걸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난 왜 이런걸까.


아스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지에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선뜻 나오지 않는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받고 있는 자신도 싫었다. 이대로 가다간 신지와 이렇게 한 공간을 공유하는 것조차 싫어질 것 같았다. 신지가 없어지면 이렇게 불편한 느낌도 같이 없어질건데. 하지만 그건 또 싫었다. 그러면 불편한 느낌도 없어지겠지만, 자신의 발을 부드럽게 쥐고 다리를 쓰다듬어주는 손도 없어질거고 아스카는 그것 역시 싫었으니까.


아스카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신지가 침묵을 깼다.


"미안해, 아스카."


아스카는 고개를 까딱했다. "뭐가? 네가 왜?"


신지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아스카의 다리에 약을 펴발랐다. 


"이렇게 빤히 보이는건데, 위원장이 지적하기 전까진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침에 너무 경황이 없었나봐. 남자친구라면서 부끄럽게 됐어. 내가, 난, 이런건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아스카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사실 아스카는 처음부터 그런건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고 데이트로 기분이 좋아진 뒤로는 더더욱 그러했다. 신지가 이렇게 사과해버리면 괜히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게 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과는 별개로.


어쩌면 그런 온기에 힘입어서, 아스카는 평소라면 내키지 않았을 일도 할 수 있었다. 


"혹시 아까 몸 불편했으면 미안해. 그냥 집에 빨리 와서 쉬는게 맞았을지도 몰라."


신지가 아스카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입도 동시에 한두번 열렸다 다시 닫혔다. 그 모습에 아스카는 어쩌면 이번이 자신이 처음으로 신지에게 사과한 경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좀 묘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아무리 노력해봐도 아스카는 자신이 과거에 그랬던 사례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다리에 느껴지는 신지의 손길에 아스카는 상념으로부터 깨어났다. 신지가 다시 한번 약을 바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릎에 가까운쪽, 제일 넓고 심한 생채기들에. 신지는 아스카의 무릎을 보며 잠시 눈을 찡그렸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마지막에 그거 말곤 문제 없었어. 다리가 부러지거나 한 것도 아닌걸. 생각보단 움직일만해. 외식하는 것도 좋았고."


따끔한 느낌에 아스카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너 집에서 요리해먹는거 좋아하는거 아니었어?"


신지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움직임을 재개했다.


"응, 그렇긴한데..."


"그렇긴한데?"


신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명하자면 복잡해."


"그런게 어딨어? 말해줘."


하지만 신지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손에 든 튜브에서 약을 더 짜낼뿐이었다. 처음엔 큰 생각 없이 던졌던 질문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아스카의 호기심도 마구 불어나기 시작했다. 아스카에겐 답이 필요했다.


아스카는 몸을 숙였다. 그 와중에 대충 둘러놓은 수건이 살짝 흘러내려갔지만 아스카는 그냥 내버려뒀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마 신지의 주의를 흐트리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말해달라니까. 그리고, 사람이 말할땐 이쪽을 봐야지 무례하게 그게 뭐야."


고개를 든 신지의 동공이 눈에 띄게 커졌다. 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아스카의 귀에도 들렸다. 아스카는 마치 버튼을 누르면 정해진대로 동작하는 기계 같은 그 뻔한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 여러번 봤고 몇차례 만져보기까지 했는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그렇게 좋은걸까.


용케도 신지는 목소리를 짜냈다. "말 그대로야. 복잡해. 나도 잘 모르겠어서 설명하기 힘들어."


"그냥 말해주기 싫어서 거짓말 하는거 아냐?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신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아스카는 어쩌면 자기 목소리에 짜증기가 묻어났을지도 모르겠단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아스카는 아직 기분이 꽤 좋았으니까. 신지가 자꾸 이상한 고집을 부리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신지는 고개를 돌려 아스카를 외면했다. 다리에 약을 발라주던 손도 움직임이 멈췄다. 생각에 잠긴건지, 부루퉁하게 짜증을 내는건지 아스카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어째선지 마음이 살짝 조급해진 아스카가 다시 한번 재촉하려는 순간에야 신지는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건 맞는것 같은데, 아스카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해서.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스스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누가 그만하라고 한 적도 없어서 쭉 하다보니 익숙해졌을뿐인거 아닌가 싶기도 하니까. 첼로처럼. 내가 과연 그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냥 조금 능숙해져서 그걸로 칭찬받는걸 더 좋아하는건지 모르겠어. 또 그렇게 생각해보면 난 정말로 좋아하는 일이 있기는 한지도 모르겠고. 만사가 그랬던 것 같아."


아스카는 눈을 끔벅였다. 그 순간 찾아온 깨달음이 아스카를 조금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스카는 신지의 개인적인 생각, 생활, 습관 같은 것에 대해 이정도의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사실 길거나 깊다고 할 수도 없는 무언가였는데도. 이것에 비교될만한 것은 그때 밤에 있었던 일 하나뿐이었지만 사실 그마저도 아스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안이었지 신지만의 내밀한 이야기 같은 것은 아니었었다.


기이한 압도감과 복잡해지는 생각속에서 아스카는 일단 제일 눈에 띄면서 또 건드리기 쉬운 부분 하나를 골랐다. "첼로는 또 뭔 소리야?"


신지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그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거나, 혹은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잠시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아스카는 그 당황한 표정이 귀여워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 첼로 할 줄 알아?" 일본어는 악기의 종류마다 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다르단 사실을 알았지만 그 중에 무엇이 이 상황에 적합한지는 확신이 없었기에 아스카는 그렇게 말했다.


신지는 고개를 끄덕일뿐 대답은 없었다. 


"왜 한번도 안보여줬어?"


신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그럴 기회가 없었으니까...?"


"무슨 기회? 내가 만들어줬어야 했다는 말이야? 한번 듣고 싶다고 부탁이라도 하라고? 알지도 못하는걸 어떻게 부탁하란 말이야?"


신지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너무 추궁조로 말한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스카는 들었다. 그래서 아스카는, 신지의 손에 붙잡히지 않은 발을 살짝 들어 신지의 팔을 툭툭 쳤다.


"조만간에 한번 들려줄거지?" 진작에 그랬으면 꽤 진심으로 감명받았을건데.


신지가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길거나 불편한 무언가는 아니었다. 신지가 다시 약을 짜내기 시작했다. 아스카는 딱히 딴청을 피울만한 것도 손에 없었기에 먼저 침묵을 깼다.


"그래서, 좋아하는건 맞지?"


아스카를 올려다보는 신지의 입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그렇다고 말해. 묘한 조바심 속에 아스카는 신지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이 왜 그런 느낌을 받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곤 신지의 입에 작은 미소가 걸렸고, 그 광경에 아스카의 마음도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응. 그런것 같아."


"그래, 이유나 계기 같은게 뭐가 중요해? 네가 좋으면 그만이지."


"응."


그렇게 말하는 신지의 입꼬리가 살짝 더 올라갔다. 아스카의 다리에 약을 발라주는 손놀림도 가벼워지고, 무릎 아래 커다란 긁힘들을 마무리한 다음엔 아직 축축한 검지로 아스카의 무릎을 톡톡 치기까지 했다.


"이제 반대편도..."


아스카는, 반대편 발을 들어올렸지만, 그쪽 다리를 내어주는 대신 곧장 발을 신지의 얼굴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신지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아스카는 이것이 영 좋지 않은 각도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딱히 개의치는 않았다. 이제 와서 다 무슨 상관이람.


"봐, 곧이곧대로 다 털어놓으니까 좋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스카는 발가락을 손가락마냥 굽혀서 신지의 볼살을 집은 다음, 위로 끌어올렸다. 신지가 항의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한쪽 입꼬리가 강제로 저 위까지 끌어올려지고 있는 상황에선 바보 같은 웅얼거림만 내뱉을뿐이었다. 


"기분 좋아보이네? 막 웃음이 나오고?"


아스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웃음을 터트렸다. 신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젖혀 아스카의 발에서 풀려났다. 


"하지마, 아스카. 정말-"


그렇지만 신지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방금 아스카의 발이 올려놓은 입꼬리가 한치도 내려오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스카는 아스카대로 신지가 그런 어중간한 항의를 마칠 기회도 주지 않고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신지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무릎을 꿇은 자세에선 움직일 수 있는 각도가 한정된 법이었다. 아스카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방금 신지가 놓아준 쪽 발을 신지의 어깨 뒤로 보내 끌어당기면서 아스카는 반대쪽 발로 신지의 볼을 다시 붙잡으려고 했다. 신지는 황급히 고개를 꺾어 아스카의 발을 피했다. 작은 방이 둘의 웃음과 실갱이 소리로 가득찼다.


아마 이것이 손이었다면 신지는 별 무리없이 쳐낼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아스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신지는 아스카의 발을 상대로는 어떤 이유에선지 대처할 방법 자체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리에 손을 대자니 당장 정강이쪽이 새빨간 상처들로 가득해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신지가 그렇게 망설이는 틈을 이용해 아스카는 오른쪽 발로 신지의 귀를 붙잡고 흔들었다. 당황하는 신지의 표정이 너무 웃겨서 아스카는 허리를 굽히며 박장대소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발가락에서 힘이 빠져 신지의 귀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신지의 두 손이 아스카의 양쪽 종아리를 붙잡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아스카는 숨을 들이키며 몸을 일으켜세웠지만 이미 신지의 손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정강이와는 달리 종아리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기에 신지는 아무 부담 없이 손아귀에 힘을 주는 모양이었다. 엄지까지 종아리에 붙은 상태라 철통 같은 그립이라고까진 할 수 없었지만 불안정한 자세의 아스카를 상대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빠져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아스카는 혹시 신지의 얼굴을 걷어찰까봐, 혹은 가슴이나 옆구리쪽을 치게될까봐 격한 발길질은 할 수가 없었다. 낭패스러운 상황에 아스카는 어찌할줄을 모르고 굳어버려서 반응할 수 있는 시간을 놓쳤다. 신지가 힘껏 아스카의 다리를 잡아당기자 아스카는 그대로 끌려내려갔다.


적갈색 회오리와 휘날리는 수건과 비명과 까르륵소리와 함께 아스카는 신지의 무릎 위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꽤 난폭한 착지였지만 아픔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상황 전체가 너무 웃겨서 그런걸지도 몰랐다. 어쩌다보니 다음 순간 아스카는 신지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신지는 아스카의 허벅지를 붙잡은 자세가 됐다.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아스카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부러지거나 한건 아니지?"


신지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응. 이번엔 아무데도 안부러졌어."


아스카는 몸을 숙여 신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신지의 손이 올라오더니 엉망으로 흘러내려와있던 수건을 끌어올려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하려다, 아스카는 그냥 입을 닫았다.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막 씻었지만 신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상기됐지만, 그것도 아스카는 상관없었다. 아스카는 신지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러고 있으려니 아스카는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이렇게 웃고 안고 있는 것이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지를. 이것을 잃고싶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서로 열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상대에게 자신을 열어보인 것은 신지였지 아스카 자신은 아니었다. 어영부영 대화가 그렇게 흘러간건지 아스카 본인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피한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리고 아스카는 이런 상태가 더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둘은 대화를 해야했다. 다시 한번 문제가 생기기 전에 서로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했다. 그리고, 사실 말이 좋아 '서로'지, 얼마전에 있었던 일은 아스카 본인의 지분이 더 크다는 것도 아스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평소 같았으면 시끄럽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을 마음 속 목소리도 지금은 잠잠했지만, 그런 방해꾼도 없는 절호의 기회속에서도 아스카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에반게리온 조종과 싱크로율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그렇게 소중한 일인지 신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건지.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아스카는 또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안에 대해서 신지가 힌트, 내지는 따라갈 수 있는 표지판을 자신에게 이미 한번 제공했다는 것을.


아스카는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신지가 의문이 담긴 눈을 보내왔다. 그 파랗고 부드러운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아스카는 결의를 다졌다.


"신지. 너 그때 그렇게 말했었지. 네가 에반게리온 조종을 하고, 이곳에 남아있는건 전부 나 때문이라고. 나만 보고 하고 있는거라고."


신지는 대략 호흡 두세번 정도의 시간 동안 별 반응이 없었다. 그 눈빛과 얼굴에서 경계심 비슷한것까지 느껴지는 것에 아스카는 쓴웃음을 참아야했다. 


내가 그럴만한 이유를 주긴 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카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고,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뭐? 아스카의 목이 떨렸다. 다시 한번 망설임이 아스카의 온 몸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한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명을 해준들 신지가 이해할 수 있을까.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또 싸우게 되는거 아닐까. 


아니면, 아스카 스스로도 과연 그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기는 한걸까.


아스카는 입술을 씹었다. 신지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그 모습에 떠밀리듯이 아스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좋아. 정말로. 많이."


잠시 가슴속에 피어나던, 하려고 했던 말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으로 대신했다는 자괴감 그리고 이런식으로 말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기만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도 환하게 빛나는 신지의 얼굴을 보자 씻은듯이 사라졌다. 신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스카의 허리 근처에 머물던 손이 올라와 아스카를 붙잡고, 신지는 그대로 아스카의 품에 안겨왔다. 아스카는 신지의 머리에 손가락을 묻고 조심스럽게 끌어당겨줬다. 


아스카는 신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충분한것 아닐까.


최소한 아스카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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