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기다린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날 보고싶다던 사람의 말은 달콤한 거짓이었다.
알고 있었다. 상처에 익숙해진 사람이 되어서는.

나는 이제 혼자 그곳에 간다.
너와의 약속을 위해 네가 추천해준 숙소에서 묵을 테지만
너에게서 연락은 없다.
혼자 희망고문을 해본다.
너도 날 믿지 못한 거라고.

그곳에 가기에 그저 들뜨는 새벽이다.
그곳의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곳이다.
너에게 자존심을 무릅쓰고 전화할지는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마음가는 대로 하고 와야 내 30만원의 가치가 비로소 매겨질 터
어차피 이것은 낭비다. 시간도 돈도 마음도.

멋진 풍경을 보며 멍 때릴 것
해안도로를 달릴 것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적당히 혼술할 것
모두 잊을 것
이번 여행의 목표로 삼은 것들이다

상담을 알아봤지만 한회기 10만원은 한달 꼬박 겨우 살아내는 내겐 부담스런 액수였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머리가 터지지 않도록 잘 버티어 왔다.
3일 만큼은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싶다.
나를 욕되게 하는 모든 일들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면 좋겠다.
영혼이 썩지 않을 수 있는 곳,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곳.

지나치게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의 얼굴엔 표정이 사라져있다.
우리 엄마가 그러하고, 다큐 속 기구한 운명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나는 되도록 인생의 감정을 송두리째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10대에 처음 짝사랑을 하고 아파하며 시를 쓰던 날처럼
20대에 세상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내느라 흔들리고 흔들리던 날처럼
모든 생을 통틀어 온전히 나의 감정 그대로를 살아내고 싶다.

그곳에 가면 있는 힘껏
슬플 땐 슬퍼하고
기쁠 땐 맘껏 기뻐하기로 했다.

외로움의 종류는 두 가지로 나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하나는 이땅에 혼자 와서 혼자 가기에 느끼는 태생적 외로움이며
하나는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기에 느끼는 외로움일 것이라고
전자는 즐기면 그만이고 후자는 쉽게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이다.

혼자 왔다 혼자 가는 한 일생의 과정에서
내 곁에 머물러주는 이들에게 충실해야겠다.
사실 난 모두를 떠나보냈고, 그게 누구의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껏 곁에 남아준 사람들이 내게 베풀어준 친절을 기억해야겠다. 모두가 떠나간 내 곁에 남은 사람들의 소중함이란.

쉽게 흔들리게 만든 사람을 마땅히 미워함과 동시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깊은 뿌리를 내리겠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늘 풍성하게 나뭇잎이 자랄 수 있도록 곁에 두고 가꾸어 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흔들리겠다고. 그럼 나 또한 그를 위해 마음껏 자라보이겠다고. 한결같은 정성을 보이는 사람에게만 나또한 변함없이 기댈 수 있는 품을 내주겠다고.

덧난 상처 위에 거듭된 다짐이 쉽게 무너지더라도
나날이 나를 지키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곳에 가기 전날에
상처에 익숙해지는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