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셨습니다~"
은퇴가 얼마남지 않은 교수님이 간단히 인사를 받고 느린 걸음으로 강의실을 나갔다.
"저...가을 언니?"
"응?"
애초에 책상 위에 올려둔 물건도 몇 없었지만 가을이는 뭔가 바쁘게 짐을 챙기는척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저희 조별과제 발표가 얼마 안남아서요...오늘은 조 모임에...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민수는 잔뜩 움츠린 채 안경을 쓱 올리며 말했다.
평소에 말 몇 마디 안섞어 본 여자가 말을 걸자 가을이는 순간 짜증부터 났지만 이내 표정을 싹 바꿨다.
"어머, 미안해. 내가 오늘 진짜 정말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다음에 꼭 할게, 응?"
"아니...다음주면..."
"부탁할게...응? 내가 다음 모임때 커피 쏠게. 알겠지? 오늘만 봐주라~"
가을이는 민수따위는 상대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은 이미 문쪽으로 쏠려있었다.
"먼저 갈게. 안녕, 민주야~"
"아...저..."
민수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가을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내 이름도 모르면서...어이가 없네..."
그러나 소심한 성격의 민수는 이내 자신이 조별과제를 다 해야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
"안녕하세요~"
소리는 방긋 웃어보이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사장이 소리를 맞이했다.
"일찍 왔네?"
"네, 수업이 좀 일찍 끝나서요! 아, 이거 제가 채울게요. 정산하고 계세요."
소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조끼를 걸치며 말했다.
"그래, 그럼 부탁 좀 하자."
"네~"
방금 들어온 물건들을 착착 정리하는 소리를 보며 편의점 사장은 대견하다는듯 바라보았다.
—————
"어서오세요~"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소리는 반사적으로 인사부터 했다.
손님을 보고 인사하려 했지만 지금 보고 있는 전공책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별 일 없겠지 싶어 가만히 있으니 이내 카운터에 무언가 올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네, 계산 도와드리..."
그제서야 고개를 든 소리는 가을이와 눈이 마주쳤다.
"...겠습니다."
가을이도 소리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입을 꾹 닫았다.
같은 나이, 같은 대학, 같은 소대.
이 정도면 인연이라고 할 만 하지만 정작 제일 오래 접촉했던 군대에서의 추억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 기수 차이였지만 애초에 가을이와 소리의 성격은 상극이었고, 신경질적이고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가을이는 소리에게 있어 최악의 선임이었다.
"봉투..."
가을이는 소리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숙취해소제를 낚아채듯 가져가버렸다.
가을이에게도 소리는 그닥 친한척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망나니같은 가을이에게도 일말의 미안함은 있기 때문일까.
—————
기본적인 어두움, 그리고 파스텔톤의 조명.
심장은 물론 혈관과 근육 하나하나 뛰게 만드는 음악.
가을이는 클럽 스테이지 한가운데서 가볍게 춤을 추고 있었다.
짧은 옷들 때문에 드러나는 매끈한 몸매에 주변의 남자들이 가을이의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야! 저 년 봤냐?"
"아, 시발. 작게 말해도 들려, 새끼야."
"아, 닥치고~ 봤냐고."
"뭐, 누구?"
테이블 맞은편에 여자를 놔두고도 남자는 친구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리듬을 타며 가벼운 움직임으로 허리를 튕기고 있는 가을이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여자와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야, 시발. 저 년 누구냐."
"존나 꼴려, 시발. 가볼래?"
친구의 꼬드김에 남자는 슬쩍 일어나 먼저 가있으라는 손짓을 한 뒤 맞은편 여자에게 지폐 몇 장을 주었다.
"잘 놀았어요. 담에 또 봐요~"
"예? 아, 어디가요?"
"알 필요는 없고, 그럼."
남자는 기분 나쁘게 웃어보이고는 스텝을 밟아가며 가을이게로 향했다.
여자는 테이블에 올려진 지폐를 세어보더니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야! 어떻게 됐어?"
"아, 몰라. 딴 년 꼬시는가봐."
"뭐? 누구?"
"저기 가운데 있는 저 년."
여자의 말에 여자의 친구들은 스테이지에서 춤추는 가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가을이의 외모와 몸매에 부러움을 느꼈으나 이내 질투심으로 바뀌어갔다.
"저러고 싶을까? 옷도 존나 짧네."
"창녀같아."
"남자들도 저런 년이 뭐가 좋다고..."
여자들의 질투심은 이미 위험수위까지 올라갔다.
스트레스도 풀고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꼬셔 럭셔리 라이프를 즐겨보려 했던 여자무리들에게 주변 남자들을 흡수하는 가을이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
가을이는 약간 취한채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있었다.
잠깐 사이에 꽤 많은 남자들이 몰려 그들과 조금씩 술을 마시다보니 자신이 생각했던것 보다 좀 더 마시고 말았다.
가을이는 파우치에서 숙취해소제를 꺼내 바로 입 속으로 들이부었다.
"하..."
가을이는 몸을 뒤로 젖혀 머리를 기댔다.
화장실 벽의 차가운 감촉이 두피를 타고 전해져왔다.
잠시 눈을 감고 그 기운을 느끼는동안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명의 목소리와 구두소리가 들렸다.
대변기칸이 한개뿐인지라 가을이는 슬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자 여자 3명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그렇게 남자 꼬시니까 좋냐?"
"뭐?"
"옷 그렇게 입고 남자들 죄다 꼬시면 좋냐고."
"...뭐래, 병신년들이..."
가을이는 피식 웃으며 그들을 헤치고 나아가려 했다.
여자 무리 중 한 명이 그런 가을이의 머리끄덩이를 집아당기려고 했다.
"아악!"
그러나 이내 비명을 지르는건 가을이의 머리를 잡으려고 했던 여자였다.
가을이는 자신을 잡으려던 여자의 손을 역으로 낚아채 힘을 주어 꽉 잡았다.
"씨발...시비 걸지 말고 좋은 말 할때 꺼져라."
가을은 거칠게 잡고 있던 여자의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하...어이없는 년이네."
여자는 손이 꽤나 아팠는지 탈탈 털며 좌우에 있던 친구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거 그냥 보내줄랬더니..."
가을이는 오늘 일진이 사납다고 생각하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
가을이는 비틀거리며 자취방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여자들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나가 남자들을 더 꼬셔볼려고 했지만, 이내 단념하고 말았다.
"하..."
오늘따라 유난히 비탈길도 더 험해보였다.
킬힐은 불편함을 자극했고 가을이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있었다.
"야."
비탈길을 겨우 다 올라와 한숨 돌리고 있을때,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을이는 눈을 찡그리며 돌아보니 아까 클럽 화장실에서 봤던 그 여자들이었다.
"미친..."
가을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큭큭거렸다.
"야...너넨...하하."
인적도 드물고 어두컴컴한 길을 자기에게 복수하겠다고 따라온 여자들이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너네 또 맞고싶어서 나 따라온거니?"
"아무래도 니년같은 창녀는 가만 놔두면 안되겠어서 말이야."
"근데 시발 아까부터 말을...!"
가을이는 걸음에 방해가 되는 킬힐을 벗어던지고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뒤에 누군가가 더 있다는걸 깨달았다.
"뭐야?"
"알아서 뭐하게?"
그리고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들의 뒤에 있던 여자 중 한 명이 가을이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악!"
"닥치고 따라와라."
그 여자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가을이를 끌어당겼다.
"아악!"
가을이는 가로등 불빛과 멀어진 골목 사이로 던져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무려 7명의 여자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니가 너~무 싸가지가 없어서 말이야. 내 아는 언니들 좀 불렀어."
"하...!"
가을이는 들고있던 파우치를 옆에 곱게 놓아두고 일어섰다.
"그래. 그럼 니 언니들도 너처럼 개패듯 패줄게."
"씨발년이!"
———
"하아...하아..."
가을이의 옆에는 여자무리들 중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클럽에서 본 여자들이 데려온 언니들은 하나하나 떡대가 있어 체격에서 밀리는 가을이는 악으로 깡으로 상대했다.
가을이의 손은 상대들의 피로 물들었고 입술이 터졌는지 턱선을 따라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은...어떤 년이냐? 그냥 한꺼번에 다 덤벼."
무리의 대장쯤 되어보이는 여자가 눈짓을 하자 그동안 주변에서 깔짝거리기만 하던 여자들이 한꺼번에 가을이에게 달려들었다.
먼저 치고 들어오는 여자부터 주먹을 날려 저지시켰으나 금세 옆으로 치고 들어온 여자가 가을이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어...억..."
가을이가 순간적으로 자세가 무너지자 다른 여자들도 그 틈을 비집고 강하진 않지만 독기가 들어간 주먹을 날려댔다.
"악! 아악!"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손으로 팔로 막아내봤지만 모든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잡았다, 요년아."
아까 가을이의 옆구리를 때렸던 여자는 어느새 가을이의 뒤에 서서 가을이의 겨드랑이로 팔을 넣어 가을이의 뒷통수로 손깍지를 꼈다.
가을이는 당황하여 팔을 허우적대며 뒤에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보려 애를 썼다.
"이...씨발년이...!"
"야, 얘 팔 잡아."
"네!"
가을이의 두 팔이 먼저 잡히고, 발버둥치며 저항하던 다리마저 잡히고 말았다.
다리를 잡은 여자들은 쉽게 뿌리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가을이의 다리를 품에 감싸고 주저앉았다.
"씨발...이거 놔!"
"독한년...이제야 잡히네."
"씨..."
가을이는 팔과 다리를 움직여 어떻게든 떼내어보려고 했지만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붙잡고있는 여자들은 도저히 떨어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내 동생들을 때리고 그래? 멀쩡한 처자가."
"너네 잘난 동생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안하던?"
"그랬어?"
"아...아뇨? 저 년이 다짜고짜 때렸어요."
"미친ㄴ..."
짝 소리와 함께 가을이의 얼굴이 돌아갔다.
"우리 동생들 괴롭힌 벌을 좀 받아야겠는걸?"
"...씨발..."
오로라 정도의 피지컬을 가진 여자는 실실 웃으며 겉옷을 벗었다.
"우선..."
퍽—
여자는 가을이의 배를 직격으로 강타했다.
"커억..."
짧은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가을이의 배로부터 강한 아픔이 전해졌다.
"고개 뻣뻣하게 들고 있는게 맘에 안들어서 말이야?"
"하아...하아..."
"한대 더?"
눈 깜짝할 사이에 여자는 가을이의 배에 주먹을 한방 더 먹였다.
"아악!"
"동생들한테 제대로 머리박고 사과해봐. 그럼 더 안때릴게."
"...조..."
가을이는 고개를 슬쩍 들어 피식 웃으며 말했다.
"ㅈ까세요...시발년들아..."
"미친년, 큭큭. 가오잡냐? 야."
다리를 잡고 있던 여자들은 대장 여자의 손짓에 가을이의 다리를 더 벌렸다.
"꽉 잡아라."
"네."
"니년이 자초한거다."
붕—소리와 함께 가을이의 무방비한 뷰지로 킥킹을 하는 여자.
"!!!"
예상치 못한 고통에 가을이는 소리도 내지 못한채 고통으로 몸을 꼬았다.
"아프냐?"
"아윽..."
"사과 할때까지 한다."
"뭐...아아악!"
활짝 벌려진 다리 사이로 여자의 발이 움직였다.
가을이는 다리를 오므려보려 했지만 전혀 방어할 수 없었다.
"으흑...하아..."
"사과할 마음이 좀 생겨?"
"그...그만...악!"
또다시 뷰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가을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고통에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허억...허억..."
"독한년일세...그럼 한 방 더!"
여자는 발을 들어 가을이의 뷰지를 가격하려다 움찔하며 멈췄다.
가을이의 뷰지에서 오줌이 나와 바지를 적시고 이내 허벅지를 타고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 뭐야!"
가을이의 다리를 잡고 있던 여자들은 오줌이 묻을까 기겁하며 가을이에게서 떨어졌다.
그제서야 다른 여자들도 가을이를 놓아주었다.
반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가을이에겐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었다.
"하아...하아..."
"미친. 오줌 지렸네."
"언니가 무서웠나봐요."
"센 척은 다 하더라니."
가을이는 대꾸할 힘도 없이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이제 가다가 우리 얼굴만 봐도 지리게 만들어놓자고."
대장 여자가 먼저 쓰러져있는 가을이를 짓밟았다.
그에 따라 다른 여자들도 앞다투어 가을이를 밟기 시작했다.
"깝치지 마라~"
"다음에 언니들 보면 인사하고, 응?"
"허억...윽...으극..."
가을이는 본능적으로 머리만을 가린 채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밟히고 있었다.
가을이의 매끈한 피부에는 어느새 멍자국과 긁힘 자국들이 가득 생겨났다.
"야야, 잠깐."
한참을 밟던 대장 여자가 다른 무리들을 멈추게 하고 가을이의 팔을 치웠다.
가을이는 기절한 듯 눈을 감은 채 약한 숨만을 쉬고 있었다.
"기절했나봐요."
"어...119 부를까요?"
"뭐하러. 우리한테 개긴년인데."
"그럼 그만 가요, 언니. 제가 술 살게요."
"잠깐, 그 전에."
대장 여자는 클럽녀들의 가방을 뒤져 필통을 꺼냈다.
"한 번 밟을때는 확실히 밟아줘야 한다고."
대장 여자는 유성펜을 꺼내 가을이의 쇄골 부분에 낙서를 했다.
"야, 너네들도 하나씩 써라."
대장 여자의 명령에 다른 무리들도 가을이의 몸 곳곳에 낙서를 했다.
—————
"어우, 피곤해."
소리는 크게 하품을 하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해 시작한 알바들 중 편의점 알바는 그나마 편했지만, 늘 새벽이 되어야 끝나는 근무는 그녀를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들어가면 바로 자야지...'
졸린 눈을 비비며 언덕을 다 올랐을때 쯤 소리의 눈 앞에 널브러져 있는 구두가 보였다.
"엥...?"
소리는 조심스레 다가가 구두를 살펴보았다.
굽이 꽤 높은 구두는 조금 떨어진 상태로 바닥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거..."
소리는 뭔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구두 두 짝을 모두 챙기고 주위를 둘러보는 그 때.
"...어어?"
전봇대 아래의 쓰레기봉투들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소리는 겁에 질린 채 조심스레 그 쪽으로 향했다.
"저...저기요...?"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소리.
"저기...어?"
누워있믄 사람은 소리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가을아!"
소리는 가을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어올려 보았다.
입술은 터진데가 많아 피가 맺혀있었고 뺨도 부어올라 있었다.
"뭐야, 가을아! 정신 좀 차려 봐!"
소리는 뺨을 때리려다 말고 몸을 좀 흔들어 보았지만 가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소리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
"네, 119 종합상황실입니다."
"아, 네. 여기..."
순간 소리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가을이의 몸을 보았다.
가을이의 몸에 적힌 낙서들을 보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요?"
"아...그...제가 잘못봤나...봐요...죄송합니다."
서둘러 전화를 끊은 소리는 조심스레 가을이의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대어두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가을이를 등에 밀착시키고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히 일어났다.
"아우...무거워..."
체격차가 나는 소리에게 축 처진 가을이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일단...집까지만..."
소리는 가을이의 구두와 파우치를 손에 쥐고 힘들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
"으음..."
신음소리와 함께 가을이는 눈을 떴다.
처음보는 천장과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각.
가을이는 몸을 일으켜보려 했다.
"악...!"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져 그대로 다시 누웠다.
"가을아!"
"...김소리...?"
"가을아, 어떻게 된거야? 몸은 좀 괜찮아?"
"야, 니가 왜...여기 니 집이야?"
"어? 어...너 골목에 쓰러져있길래..."
다시금 아까의 기억이 떠오른 가을이었다.
"개씨발!!!"
"...왜 욕을 해..."
"하...난 갈게."
그때 기절까지 해버린 창피함과 지금 이런 모습을 소리에게까지 보여줬다는 생각에 가을이는 기분이 매우 안좋아졌다.
젖 먹던 힘을 다 해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가을아...! 잠깐만!"
소리가 가을이의 앞을 막아섰다.
"너 지금 그러고 나가면 안 돼..."
"뭐? 왜?"
"그..."
소리가 말없이 화장실을 가리켰다.
가을이는 끙끙대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위에 위치한 거울을 통해 가을이는 참혹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이게..."
멍이나 상처 정도는 예상했지만 곳곳에 남겨진 낙서는 예상 밖이었다.
—저는 개ㅈ밥년입니다—
—걸레년—
—창녀—
—남자에 환장함—
—발정기 암캐—
가을이는 몸에 적힌 낙서들을 손으로 문질러보았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너 쓰러져 있는거 보고 119에 신고할려고 했는데...그건 지워야 할 것 같아서..."
"..."
"지금 씻고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응?"
"...싫어..."
"내가 그렇게 보내는게 싫어서 그래."
"하아..."
"온수 틀었으니까 따뜻한 물 나올거야. 먼저 씻어..."
소리는 화장실의 문을 닫아주었다.
가을이는 온 몸이 쑤셨지만 힘겹게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특히 오줌에 젖어버린 바지와 팬티를 벗을때는 치욕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흑..."
서서 씻어볼려고 했지만 도저히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는 가을이었다.
샤워기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화장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가을아, 왜 그래?"
밖에서 소리가 걱정스런 톤으로 물어보았다.
"아...아무것도 아니야."
"힘들면...내가 도와줄까?"
"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너 너무 많이 다쳐서...내가 지우는거 도와줄게, 응?"
가을이는 조금 고민하다가 화장실의 문을 조금 열었다.
잠시 후 소리는 알몸으로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서로의 알몸을 본 것은 군대 이후론 처음이라 서로 어색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유성인거 같아서...빨리는 안지워질거야."
소리가 바닥에 수건을 깔며 말했다.
"일단 옷 입어도 보일만한 곳 위주로 먼저 지워볼게. 여기에 앉아볼래?"
소리는 가을이를 부축해 수건 위로 앉혔다.
"물 온도는 어때?"
"...괜찮아..."
"응, 그럼..."
소리는 샤워타올을 손에 칭칭 감고 비누를 한껏 묻혀 낙서가 되어있는 가을이의 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악...!"
"아! 미안해..."
소리는 멍자국이나 상처를 피해가며 가을이의 몸을 씻겨주었다.
어느새 소리의 몸은 물이 아닌 땀으로 가득해졌지만 소리는 개의치않고 가을이의 몸을 씻겨주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얘는 참...'
가을이는 자신의 몸을 씻겨주는 소리를 바라보았다.
맞후임으로 들어왔던 소리에게 유난히 못되게 굴었던 가을이었다.
소리는 매사에 열심히 하고 일도 곧잘 배우며 가을이 기수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가을이의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가을이만 소리에게 차갑게 굴고 거리를 두었다.
그건 아마 자신에게는 없던 활기참과 밝은 에너지가 부러워서였을까.
그저 군대 선임이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헌신적인 소리를 보고 있자니 가을이는 괜히 미안해져 고개를 돌려버렸다.
—————
"저기..."
그 일이 있고 난 뒤 가을이는 몸을 완전히 회복한 날부터 소리가 일하는 편의점을 줄기차게 방문했다.
소리에게 말을 걸거나 그러진 않는데도 기본 30분 이상은 머물다 가는 일이 많았다.
"왜?"
"뭐 찾아...?"
"아니, 그냥...보는거야."
"아..."
"난 신경쓰지 마. 하던대로 하라고."
"으응..."
선글라스를 끼고 휘파람을 불며 편의점 한 켠으로 사라지는 가을이.
"어서오세요~"
전공첵을 보려는 찰나 편의점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여자 3명은 곧바로 카운터로 다가왔다.
"말보로요."
"아...그 신분증 보여주시겠어요?"
"네?"
"신분증...확인해야 해서요..."
"참나! 저기요, 제가 미성년자 같아 보여요?"
"네? 아, 아니...그게 아니라..."
"그냥 빨리 좀 줘보세요, 네?"
"그게 저희가 규정상..."
"오랜만이네?"
3인방은 소리가 나는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을이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그녀들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언니들도 잘 계시고?"
"뭐? 아! 너..."
"안그래도 만나고 싶었는데! 잘됐다~"
"저 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나?"
여자들이 가을이를 향해 오려고 하자 가을이는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폰을 들어보였다.
"너네들이 그때 나 폭행했던거. 여기 다 녹음해놨거든? 이대로 경찰서 들고 가줘?"
"뭐?"
"내가 이거 신고만 하면 너네랑 그 잘난 언니들도 다 깜빵 가는거야~ 엉?"
"미친년...너는 안때렸냐?"
"내가? 너네들을? 난 그냥 맞기만 했는데?"
가을이가 녹음된 파일을 틀자 가을이를 때리던 무리들의 대화와 가을이의 신음소리만이 들렸다.
가을이는 골목으로 끌려가기 전 몰래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켜놓고 나중에 본인이 때린 부분은 편집을 했던 것이다.
'유예리 이 년 덕을 볼 때가 다 있네.'
군 복무시절 녹음기 때문에 예리에게 쩔쩔맸던 때를 생각하며 가을은 피식 웃었다.
"암튼 깜빵가기 싫으면 조용히 꺼지고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라~응?"
"씨발..."
그녀들을 녹음파일을 들은 후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가을이를 노려보며 그대로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가을아...너..."
이제서야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소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가을이를 바라보았다.
"아, 그냥 내가 봐준거야. 너 나 싸움 잘하는거 알잖아."
"응? 아...그...렇지...?"
"너도 좀. 저런 애들이 진상짓하면 단호하게 뭐라 하고 그래라."
"어어...그게 잘...안되네? 하하..."
"어휴..."
가을이는 카운터에 있는 볼펜과 영수증을 집어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담에 또 저년들 오면 전화 해. 간다."
"응? 어어...가...!"
가을이는 선글라스를 고쳐쓰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나갔다.
소리는 멀어져가는 가을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가을이가 주고 간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
처음으로 나름 커미션...이랄까? 김소리님께 세세한 설정 받아서 써 본 팬픽입니당 ㅎㅎ 맘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맘에 안드시는 부분 있으면 피드백 해주세요!
이제 조금 여유 가지면서 예고했던 다른 팬픽 써보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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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NFT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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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