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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티저] 미국 내전은 서부가 정통정부지 ㅉㅉ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4.17 2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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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n Shining on the World 미국이 내전나기까지의 일이다, 아무튼 2차 미국 내전은 맞음, 원문이 일어라 일어를 몰라서 디플 돌린거 약간 수정함


1944년 대선


태평양 전쟁은 미 태평양 함대에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고, 그 결과 태평양과 중국에서의 일본의 우위를 미국은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미국 본토는 피해를 입지 않았고, 초강대국으로서의 힘은 잃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독일의 패권 확립에 이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수많은 국민들은 밝은 사회의 도래를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거기다 호놀룰루 조약 체결 2개월 후인 8월 10일 FDR이 사망하고, 33대 대통령으로서 취임한 진보당 출신 헨리 월리스는 국민과 민주당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기에 민주당은 차기 대선 후보 선출에 고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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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대통령. 뉴욕주 검사로서 매우 높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1944년 선거에서 전적으로 쟁점이 된 것은 당연히 전후 부흥 정책이었다. 민주당은 뉴딜 정책의 지속을 내세우며 정부 지출을 통해 전후에 닥쳐올 혼란에 대비하겠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전당대회에선 트루먼을 후보로 선출했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민주당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었고, 선거 전부터 공화당의 승리가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공화당은 정작 중요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주요 후보로는 북부의 진보주의자로 평가받는 토마스 듀이 뉴욕 주지사, 역시 서부의 진보주의자이자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을 지낸 앨런 워렌, 중부를 중심으로 보수파의 지지를 받고 있던 로버트 A. 태프트 상원의원이 거론되고 있었다. 앨런 워렌은 전쟁 중 법무장관으로서 일본계 미국인의 수용을 승인한 것이 화근이 되어 전후의 대일 관계를 고려했을때 당에선 그를 지명할 수 없었고, 듀이 대 태프트의 한판 승부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공화당 진보파는 기본적으로 뉴딜 노선을 계승하여 전후 인플레이션과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파는 물가통제법의 조기 완화, 공공사업의 대폭 삭감 등 규제완화, 재정건전화를 주장하며 민주당과 큰 차별화를 꾀하여 전후 공화당의 정책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탈 뉴딜 노선이 많은 당 간부들에게 평가받으며 각 주별 공천에서 보수파가 다소 우세했다. 그러나 예비선거 직전에 갑자기 태프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하면서 보수파의 지지가 크게 분열되어 진보파의 듀이가 최종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부통령 후보로는 보수파에서 태프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존 W. 브릭커가 지명을 받게 되었다. 지명을 받게 되었다. 듀이는 뉴딜 정책의 일정한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전후 새로운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인종 평등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비록 점진적인 정책이었지만, 남부 지역의 인종 문제를 언급한 대통령 후보로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인도주의적 측면뿐만 아니라 부흥 정책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지지층 결집 효과도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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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대통령 선거


1944년 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났고, 민주당은 남부 일부 주에서 45표를 얻는 데 그쳤는데, 1936년 523대 8로 공화당을 이겼던 민주당은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을 경험하는 역사적인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는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한 패전으로 인한 것이 컸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공화당이 내세운 인종 평등 정책이 민주당의 태도를 '시험'한 것이다. 민주당에게 뉴딜 정책의 지속은 인종 문제에 대해 남부 흑인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실제로 FDR 정권 하에서 남부 유력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뉴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최저임금법도 남부 흑인을 배제하는 것이 묵인된 것이다. 공화당은 이러한 인종적 '뉴딜의 한계'를 예리하게 지적하며 남부, 노동조합, 백인 노동자라는 공황과 전쟁으로 연결된 취약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민주당의 기반을 해체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흑인 문제에 대한 대응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에게 둘 중 하나를 분리하는 것은 당의 해체를 의미했고, 어떤 유효한 답변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북부 자유주의층은 공화당을 지지한 반면, 남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당 본부를 불신하게 되었고, 19세기 이후 거의 항상 민주당 후보를 선출했던 남부 주에서조차 공화당의 리드를 허용하는 이례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이렇게 지지층 대부분을 잃은 민주당은 태도를 모호하게 한 채 공화당의 자유주의 노선을 추종했고, 남은 지지기반이었던 남부 주와도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으로서는 지금까지의 뉴딜 노선과 새로운 민권법을 향한 움직임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고뇌에 찬 선택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분열된 민주당에서 북부 민주당은 새로운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 진보파를 추종한 반면, 남부 민주당은 혐오스러운 북부와는 다른 새로운 파트너를 찾으려 했다. 윌리엄 더들리 페리(William Dudley Perry )가 이끄는 은빛군단, 일명 은셔츠 부대를 비롯해 찰스 커글린 신부, 독일인 협회, 쿠 클럭스 클랜과 같은 극우 세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유럽에서 패권을 장악한 독일의 영향을 받아 빠르게 성장했지만, 안정적인 지지기반과 정치적 운영 능력이 부족했다. 반면 남부 정치인들은 정권에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남부 이외의 지역에서 지지를 확대할 수 있고 백인의 우월성을 지지하는 세력을 원했고, 1944년 당시에는 각각 개별적으로 소규모 활동만 하고 있었으나(애초에 전쟁으로 인해 활동이 불법화된 조직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된 양측은 이 선거 결과를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자유주의를 기조로 하는 공화당 진보파와 북부 민주당,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보수파와 우파라는 대립 축이 성립하게 된다.


듀이의 4년


1945년 1월 듀이가 대통령이 된 후 48년까지 4년간은 비교적 안정된 정세 속에서 전후 재건이 진행되었고, 이 기간은 훗날 '듀이의 4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80일 회의'라는 정책 결정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저명한 경제학자, 재계 유력자, 정치인, 군인,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전후의 기본 방침을 급박하게 확정해 나갔다. 이 '80일 회의'는 FDR이 개최한 '백일 회의'를 강하게 의식한 것으로, 기간을 단축하여 신속한 의사결정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회의 진행은 난항을 겪었고, 실제로 회의록이 정리되어 듀이가 발표하기까지는 이미 100일이 지났다. 반대파는 이를 비판의 빌미로 삼은 반면, 듀이의 뉴딜을 의식한 정책은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도 일정한 이해를 얻으며 그들의 지지를 교묘하게 흡수하는 효과도 있었다.


페어딜의 공과 과


앞서 대공황을 겪은 국민들은 전쟁의 종결이 또다시 불황을 불러올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국민의 경제활동을 보호하고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듀이는 대규모 재정지출을 결정했고, 동시에 격화된 파업에도 큰 양보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뉴딜 정책으로 인한 막대한 지출과 소련에 발행한 부실채권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무리 연방정부라 할지라도 더 이상의 지출은 건전한 재정을 위협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뉴딜 시대에 쌓인 방대한 공공사업을 재검토하고 보다 효율적인 사업에 집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한 1946년에는 로버트 M. 라포렛 주니어(Robert M. Laforet Jr.)와 마이크 몬로니(Mike Monrooney)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입법 개편 법안이 제출되었다. 이 법안은 전쟁으로 비대해지고 복잡해진 정부 기능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도로, 항만, 항만, 공공시설 등의 위원회를 하나의 공공사업위원회로 통합하는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듀이는 이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사업의 효율화를 추진했지만, 이 과정에서 각종 상설 위원회가 축소되면서 의회의 이권을 쥐고 있던 남부 주 의원들과 더욱 험악한 관계에 빠지게 된다.


그 외에도 일본과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태평양 함대를 재건하기 위해 해군에도 많은 예산이 배정되었고, 조선소는 준전시 상태로 계속 가동하여 고용 창출을 꾀했다.

그리고 듀이는 '위대한 사회'에서 흑인이 그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FDR 시대에 설치된 공정고용관행위원회(EEPC)를 근거로 인종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노동총동맹(CIO)의 '남부작전(Operation Dixie)'을 실시함으로서 개입을 시도했다. 당연히 남부는 이러한 CIO의 개입에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반발했고, 결국 남부 작전은 좌절되고 만다. 듀이에게 이 후퇴는 매우 치명적이었으며, 개입을 거부한 남부 주에 대해 "미국 내에는 보이지 않는 국경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평했다. 또한 같은 시기 공화당 내부에서도 보수파 상원의원 터프트와 하틀리가 노조에 대한 지나친 양보를 수정하고 파업과 직장 폐쇄를 제한하는 터프트-하틀리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44년 하원 선거에서 새로 의석을 확보한 많은 보수당원들 외에도 듀이를 싫어하는 남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어 듀이 대통령의 거부권 발동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이러한 연방의회에서의 움직임은 CIO에게 역풍으로 작용했다. 듀이의 일련의 경제 정책은 미국 전체에 완만한 재도약의 조짐을 가져왔지만, 남부와 중부의 농민들은 이러한 산업 지원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스스로를 '낙오자'로 여기며 반감을 키웠다.

・하와이-푸에르토리코 영토 문제


듀이는 민권법 제정 운동의 일환으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하와이 준주의 주 승격에 대해서도 검토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적으로 대일 최전선이 될 하와이에 대한 배려와 태평양에서 영향력을 확대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다음 선거에서 일본계가 많이 사는 하와이 주가 민권법을 지지하여 공화당에 투표할 것을 기대한 것이 분명했다. 이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대해 연방당은 격렬히 반발하며 하와이 정치와 연방정부 사이에 비밀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논쟁은 미국 전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1946년 9월 강제 투표를 통해 하와이를 강제로 주(州)로 승격시켰다. 이는 46년 중간선거에 따라 남부를 중심으로 결성된 연방당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하와이의 주 승격이 48년 대통령 선거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하와이와 병행하여 푸에르토리코의 주 승격에 대한 논의도 병행되었다.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에게 대서양 수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섬 중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히스패닉계가 민권법 지지층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원래의 독립운동이 이를 계기로 격화되었고, 46년 6월 푸에르토리코 독립당의 테러사건이 발생하면서 주 승격은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되어 48년 3월에 푸에르토리코는 새롭게 푸에르토리코 연방으로 '주'의 위치에 올라오게 되었다.


재무장과 육군의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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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새로 건조된 항공모함(1947년, 노퍽 해군기지)


전쟁에서 해방된 미국이었지만, 전쟁의 종결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을 잃고 괌 등을 일본에 양도한 탓에 태평양에서의 군사적 균형은 크게 일본에 기울어졌다. 또한 대서양으로 눈을 돌려도 독일 해군은 나날이 강력해져 잠재적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그 영향력이 크게 약해지고 있었다. 육군에서도 대규모 전차전을 경험한 독일에 비해 미 육군의 숙련도와 장비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아 장교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양양함대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칼 빈슨 하원의원은 지난 전쟁에서의 태평양 함대의 전술적 결함을 지적하며 하루빨리 함대를 재건해야 한다고 위원회에서 설명했다. 이 안은 이전급인 에섹스급을 능가하는 6만 톤급 함대 항공모함 8척과 손실된 전함, 잠수함의 보충을 주축으로 하는 대규모 법안이었다. 이 법안에 대해 빈슨은 반대를 예상했지만, 이 안은 해군 재건과 함께 조선소를 전시 체제로 가동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 공화당 진보파의 지지를 얻어 어렵지 않게 양원을 통과했다. 답변 시 유일하게 우려되는 점은 이 신형 항공모함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없는 크기라는 점과 해군의 항공모함 건조 시설 대부분이 동해안에 위치해 있어 취역 후 태평양 측으로 전개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항구의 조선설비를 확장함으로써 서해안 쪽에서도 대형 항공모함 건조와 정비가 가능해졌고, 1945년에는 우선 6척의 건조가 시작되었다.

 또한, 이와 동시에 군 조직 개편도 병행되어 1947년 새로 설치된 국방부에서는 초대 장관으로 존 H. 타워가 임명되었다. 그는 의회에 항공모함과 항공기의 중요성을 설파하여 항공모함 추가 건조와 공군력 확충을 승인받았지만, 이러한 해군 중시 경향은 전쟁 중 미묘했던 대통령과 육군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육군의 피해는 해군에 비해 미미했지만, 많은 육군 장교들은 육군의 병력 감축안이 제안된 것에 대해 분노했다. 특히 보수파는 듀이의 정책을 FDR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 주역은 예비역 장성인 모슬리였고, 마셜 장군을 비롯한 그를 존경하는 많은 고위 장교들도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고 침묵을 통한 긍정을 표시했다. 전쟁 중에도 군대 내 인종 통합에 단호히 반대했던 그는 이러한 육군 경시 풍조에 대한 불만과 맞물려 점차 그 발언을 선동화해 나갔다. 점차 모슬리는 극단적인 차별주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연방당이 결성되자 가장 먼저 지지를 표명하게 된다.

 군대 외의 모든 미국인들이 이 계획을 반갑게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급속한 국가 재건의 이면에는 막대한 재정적자가 발생했고, 경제도 다소 인플레이션 경향을 보이자 재정 보수주의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터프트는 듀이의 정책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압도적 다수당이었던 하원에서도 예산 확대나 노동 문제 관련 법안 통과가 어려워졌다.


46년의 군내 인종통합법


전쟁 중 군의 작전을 조사하는 전문위원회가 설치되면서 군대 내 심각한 차별이 지적되기 시작했다. 당시 육군은 9%, 해군은 2% 정도의 흑인 병사가 소속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부사관 이하 계급에 속해 있었고, 인종에 따라 훈련 커리큘럼이 달라지는 등 비참한 현실이 드러나면서 NAACP의 밀턴 P. 웹스터는 이를 비판하고 의회에서도 군대 내 인종 통합을 법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4군의 장교들과 결성 직후 세를 불려가던 연방당의 격렬한 반발을 받았고, 민주당 분열의 영향도 있어 의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남부 출신이면서도 민주당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하원의원 중 한 명인 린든 존슨은 민주당이 분열된 상황을 우려해 의회 공작에 착수했다. 인종 문제에 비교적 중립에 가까운 공화당 온건파 의원들을 끌어들여 법안의 조항을 완화하고 '무독성화'한 후 통과시켜 양측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존슨은 상원 법사위원회를 설득하여 법안 조항에 대해 ① 10년 이내에 육군 보병의 훈련 커리큘럼을 통합할 것, ② 건설 등 후방 작업에서 인종분리를 폐지하는 것으로 크게 효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공화당 내에서도 진보파는 이 수정안에 크게 실망했지만 남부 작전에 실패한 듀이는 흑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실적'에 굶주려 있었고, 어쨌든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게 되었다. 한편 남부 의원들에게도 법안 통과 자체는 허용했지만, 법안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어느 정도 이해를 구하고 의회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존슨은 이 성과로 남부 의원과 북부 의원 모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 '마지막 민주당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46년 중간선거

1946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남부 민주당은 공식적으로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당인 연방당을 결성했다. 그들은 민주당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고, 어떻게든 남부의 인종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악마와의 계약을 맺었다. 여기에는 극우 사상을 표방하는 컬트나 친 독일파 정치단체가 있었다. 그 중에는 은빛군단의 '추장'으로 악명 높은 윌리엄 더들리 페리, 한때 해산 위기에 처했던 독일인 협회의 프리츠 쿤,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던 선동가 찰스 커글린 신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전 양대 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은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을 잃은 국민들에게 FDR에 대한 비판과 음모론이라는 '위안'을 제공했다. 이러한 존재를 '품위가 없다'며 싫어하는 보수 정치인들도 많았지만, 말 그대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운 우익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방당은 남부 이외의 지역에서 지지를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인종차별을 공언하는 정당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낀 공화당 역시 그들의 선동에 대해 연방당을 '파시스트'로 규정하며 선동으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하원 의석수에서는 공화당이 과반수를 지켰지만 연방당이 100석 이상으로 약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은 과거 지지기반이었던 남부 표심이 그대로 연방당으로 넘어가면서 거의 모든 지지를 잃었다. 이 선거 결과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양당 체제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느꼈다.

반면 공화당은 과반수 유지라는 1차 목표를 달성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새로운 대항마가 된 연방당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그 중에는 파시즘과 백인우월주의 단체도 포함되어 있어 과거 민주당에 비해 훨씬 더 위험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거 결과에서도 북동부와 서부의 지지층으로부터 효과적으로 표를 얻을 수 있었던 반면, 중부에 기반을 둔 공화당 보수파의 일부에서 연방당으로의 이탈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46년 이후 듀이의 정책은 보다 지방에 초점을 맞춘 정책으로 바뀌었고, 중부 지역에서의 선거 활동에도 힘을 쏟게 된다. 그러나 보수파에 순응하는 것은 듀이의 본래 지지기반인 도시 자유주의자들의 이탈을 초래할 수 있어 양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심하게 된다.


국민통합당의 결성


중간선거를 통해 양당 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던 민주당은 일찌감치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고, 그들은 매우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민주당이 공화당에 '당의 통합'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숙적의 군문으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했고, 결정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결정은 큰 저항 없이 기이할 정도로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된다. 많은 민주당원들은 백인우월주의를 공공연하게 공언하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치운 연방당에 맞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공화당에게 영혼을 팔아치우기라도 해야한다는 것이 중요하단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민주당에게 이 결정은 남부의 지지를 잃는 동시에 남부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제안은 47년 2월에 공화당 본부에 전달되었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기본 노선을 같이 하는 북부 민주당의 힘을 얻는 것은 공화당으로서는 표의 분산을 피하기 위해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고, 계속 세력을 확장하는 연방당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이렇게 공화당과 북부 민주당은 '국민통합당'으로 통합되었고, 79년 만에 통합당의 이름이 미국 정계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통합당의 결성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남북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고, 사회 불안과 분열의 가속도는 점점 더 심해졌다.

또한 구 공화당 내에서도 보수파는 자유주의적인 북부 민주당의 합당에 반발하여 터프트를 중심으로 몇몇 의원들이 연방당으로 합류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랄프 O. 브루스터와 밀턴 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듀이는 이 시점에서 인종 문제에서는 연방당, 재정 문제에서는 구 공화당 보수파라는 두 적을 갖게 된 것이다.

심판의 날

중간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통합당은 중부에서 열띤 선거활동을 펼쳤다. 반면 미시간, 일리노이, 오하이오 등 중서부 주에서는 연방당의 기세를 꺾지 못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종 신문의 사전 조사에서도 통합당 승리와 연방당 승리의 예상이 엇갈리며 '신만이 알 수 있는 일'로 변질되었다. 듀이는 깊어지는 분열과 선동에 대해 "오늘날 민주적 생활양식은 전 세계적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 전체주의의 공포에 대한 민주주의의 해답은 국민에게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약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라고 연설하며 민주주의와 이성의 승리를 호소했지만, 그 어떤 말도 폭력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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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투표 결과는 그림과 같다.

통합당: 268표 

연방당: 266표


(1948년 11월 6일 뉴욕 타임즈)


라는 역사적인 근소한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오기까지 여러 주에서 당선확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었고, 재검표를 포함한 선거의 혼란은 오히려 이제부터였다. 연방당은 즉각 법원에 재검표를 요구하거나 통합당의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음모론자들이 거리에서 연설을 반복했다. 특히 은빛군단은 통합당이 승리한 주의 정부 시설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 습격을 자행하고 주 방위군과의 충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의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회당 및 공산당은 비공식적으로 인민전선을 조직하고 국민통합당과 협력했다. 즉, 통합당은 공산주의자와 협력관계에 있다.

선거 결과의 2표 차이는 이번 선거에서 새롭게 3명의 선거인을 확보한 하와이주(하와이주에서는 통일당이 승리)의 차이로 인한 것이며, 통합당은 하와이주에서 부정한 정치 거래를 통해 승리했다.

많은 북부 주에서 통합당을 지지하는 관료들이 많아 미리 통합당 득표수가 많이 계산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커글린 신부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연방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공통된 견해가 되었다.


특히 득표율이 양당 모두 49%대의 접전을 벌인 미시간과 델라웨어, 독일인 협회의 주요 활동 지역인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뉴욕 주에서는 난투극, 폭력사건이 일상화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는 12월 2일 흑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단지 공장과 주 정부에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이었지만, 전미지위향상위원회(NAACP)는 즉각 이 파업을 인종 해방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흑인 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주장했으며, 노예해방운동가 존 브라운이 1859년 같은 날 처형된 것을 계기로 이를 '존 브라운 파업'으로 명명했다. 이로 인해 시위는 노동 문제에서 인종 문제로 전환되었고, 사태는 급속도로 가속화되었다. 통제력을 잃은 흑인들은 도심에서 폭도화되었고, 이에 은빛 군단은 디트로이트 지부를 중심으로 '의용군'을 결성해 백인 거주지의 '경비'를 맡았다. 또한 포드사 서비스 부문의 해리 베넷은 사설 경호원을 조직해 노동조합을 습격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서는 사형 제도가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에 의해 철저한 린치가 자행되어 디트로이트는 공포에 휩싸였다. 정부가 조기에 주 방위군 투입을 결정하면서 폭력 사태는 며칠 만에 진정되었지만, 미국 국민들에게 미국 사회의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실제로 이후 노동조합은 흑인에게 더 양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연방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과 공산주의자가 결탁한 위험성을 추구했다. 또한, 온건한 백인들 사이에서는 지나친 흑인 폭동으로 인해 흑인에 대한 동정심이 반감으로 바뀌면서 사회 분열이 다음 단계로 진행되고 있었다.


의회는 춤을 춘다 (1949년 민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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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크로우 법에 항의하는 흑인 단체 (1948, 조지아주 애틀랜타)


이 사건을 계기로 연방정부는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민권법 제정에 착수했고, 12월 중순에는 위원회에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역시 쟁점이 된 것은 민권법에 담길 내용과 법적 형식이었다. 통합당은 기본 노선으로 흑인의 투표권 보호 조항을 설정한다는 방침에는 일치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흑인의 권리에 대해 어디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것인가가 가장 큰 쟁점이 되었다. 또한 형식에 있어서도 NAACP는 단호하게 헌법 개정을 통한 인종 평등 명시를 요구한 반면, 애초에 통합당은 양원에서 2/3 의석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불가능했고, 법 제정이나 해석 변경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온건파 중에는 인종 평등을 명시하면 오히려 흑인을 특별히 보호하는 정책이 어려워진다는 목소리도 있어 의회 내 조정이 난항을 겪었다. 반면 연방당 세력은 착실하게 준비를 진행하며 민권법 표결을 강행할 경우 미국으로부터의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은빛군단이나 독일인 협회는 1946년 이후 나치 독일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하며 유사시 독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왔다.

노력의 한계

1949년 1월 21일, 사상 유례없는 삼엄한 경비 속에 제33대 미국 대통령 토마스 E. 듀이의 취임식이 열렸다. 듀이는 취임 연설에서 경제적 부흥과 함께 민권법 제정을 약속했고, 연방당은 이에 대해 '불참'의 형태로 대응했다. 이런 가운데 북부 주에서 연방당 극우 세력의 폭동 활동이 진정되고 있는 것에 대해 국민 대다수는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신문과 라디오는 이를 '폭풍 전의 고요함'이라 부르며 X데이가 가까워졌다고 부추겼다. 게다가 연방수사국(FBI)의 비밀 수사를 통해 남부 주들이 주 방위군을 동원하고 물자를 집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알게 된 백악관은 마침내 내전의 위기를 감지하고 참모총장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중장에게 반란의 규모와 예상되는 사태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아이젠하워 보고서로 불리는 이 조사를 통해 반란군의 규모가 과거 남북전쟁의 남군을 능가하는 규모이며, 최악의 경우 독일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는 엄중한 현실이 밝혀졌다.

이에 듀이는 2월 14일 인종 평등의 필요성과 흑인의 진정한 해방이 남부에 가져올 밝은 미래를 호소하는 라디오 연설을 했다. 그러나 남부 주에서는 라디오 방송국이 방송을 금지해 대통령의 목소리가 남부를 비추지 못했다. 그러나 3일 후 애틀랜타에서 헤브레이 자비회 사원 폭파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ANP(미국 나치당)가 범행 성명을 발표한다. 이로 인해 연방정부는 마침내 대통령령으로 주 정부에 대한 강제 개입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FBI의 사건 수사를 명분으로 남부 주에서 반통합당 운동을 일제히 검거하기 위한 것으로, 반유대주의 테러리스트 검거를 명분으로 삼는다면 남부 주들은 저항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남부 주들은 이를 연방정부의 주 권리에 대한 침해라며 이 개입을 단호히 거부했다. 물론 남부 민주당 출신 연방당 정치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연방당 극우파 활동가들을 특별히 보호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남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연방정부의 개입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것이었고, 이 시점에서 그들은 완전히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강제 개입을 위해 파견된 연방군이 노스캐롤라이나 주 경계로 진군하는 순간, 주 방위군의 봉쇄로 인해 진군이 저지된 것이다. 이 현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12시간에 걸친 협상이 결국 결렬되고 주 방위군과 연방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 만은 분명한 사실이며, 2월 28일, 이곳에 다시 국경선이 생겨나면서 제 2차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제 2차 남북전쟁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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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미주연방에 제공한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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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파견한 '의용군'


이렇게 시작된 2차 남북전쟁도 역시 일시적일 뿐, 곧 남부는 저항을 포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강했고, 미국 측은 그들을 반란군으로 인정하면서도 항복하면 관대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이러한 낙관적인 전망은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그것은 독일 '의용군'의 존재였다. 이 '의용군'은 이름만 의용군일 뿐 정규군 사단이며, 동부 전선에서 싸운 정예 독일군의 존재로 인해 미군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의 지원은 단순히 의용군의 전력뿐만 아니라 제공된 중장비와 전차도 미 육군을 능가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어 점차 강대해지는 미주연방군에 대한 미국의 조바심이 커져갔다. 또한 이러한 지원은 주로 해상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미국 해군은 독일 함정을 자칫 공격할 경우 독일이 본격적으로 개입할 빌미를 줄 수 있어 출동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영국 해군도 미국의 위기 상황에서 함대를 대서양에 배치했지만, 결국 독일 함선을 방해할 수 없었다.

모즐리 장군의 탈영

육군은 이전 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개전하자마자 연방군으로 탈영하는 부대가 속출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연로한 고급 장교들에게 많았는데, 모즐리 장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전직 참모로서의 인맥과 실력으로 많은 인원과 물자를 연방군에 공급했고, 마셜 장군은 모즐리 장군이 편지로 연방군 참여를 털어놓자 아무런 의사표현 없이 그를 따랐다. 모즐리 장군의 옛 부하들 중 미국에 남아있는 사람은 아이젠하워 정도였고, 이 사건은 미국을 크게 실망시켰다.

해군 문제

해군은 육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탈영이 적었고, 어쨌든 함대는 출동하지 않고 내전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미군이 점차 북쪽으로 후퇴하자 연방정부 측 해군은 일시적으로 함대를 서해안으로 철수하는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전후에 건조된 항공모함과 전함이었다. 이들은 핵심인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본국의 내전 중에 남미를 우회하는 무리한 작전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동해안에 배치된 대서양 함대와 서해안에 배치된 태평양 함대는 거의 그대로 점령지의 세력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군 장교들의 사정과 귀중한 함정을 내전으로 잃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양 세력의 해군은 모든 출격 임무를 거부하게 되었다.

중남미의 붕괴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독립당의 테러가 발생했고, 그 외의 카리브해 섬들은 필요한 물자가 들어오지 않아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는 중남미 국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긴박했던 국제 정세 속에서 미국을 다음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시도는 1889년 이후 계속된 범미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19세기 말 미국의 '먼로주의의 재해석'은 유럽으로부터 신대륙을 보호하는 중립법에서 신대륙을 자신의 세력 하에 두는 것을 정당화하는 독트린으로 전환되었다. 화하는 독트린으로 전환되었고, 범미회의는 이 미국 제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기반 중 하나였다. 실제로 1942년 열린 회의에서는 유럽에 대한 독일과의 고립 및 대일 전쟁에 대한 협력이 결정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을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성역으로 지켜내겠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그러나 1944년 미국이 사실상 패전하여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후퇴시킨 것은 이 미국의 전략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이 '현실'을 받아들인 미국은 1944년에 이어 1944년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의도된 것은 앞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독일, 일본에 맞서 중남미에서의 우위를 지키는 것이었다. 혁명의 발발을 두려워한 미국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비합법화를 비롯한 조항을 수락한 국가에 대한 재정 지원을 제안하고, 친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한 권위적인 정권이라도 승인한다는 방침을 내세워 남미 국가들을 어떻게든 자기 밑으로 묶어두려고 노력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미국 추종적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대체로 미국이 기대하는 효과를 거두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중남미에 대한 막대한 지원금은 전후 미국의 재군비로 인한 적자 재정을 가속화시켰고, 보수적인 균형재정론을 주장하는 정치인, 경제학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일단 외침을 억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내의 공화당 온건파와 기타 보수파의 갈등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리고 1948년 4월, 제9차 회의가 보고타에서 개최되어 반공, 반파시즘을 기조로 하는 '보고타 헌장'이 체결되고 미주기구의 출범이 선언되었다. 이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대륙 블록 구상은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지만, 당시 미국 국내 정세는 이미 위기적 분열에 이르렀다. 그리고 실제로 1949년 초 미국이 내전 상태에 접어들면서 성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기구는 그 기능을 다하기도 전에 기능을 정지하고 말았다. 명목상으로는 미 연방 정부가 미주기구 본부를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하고 각국도 미주기구에 계속 참여하고 있지만, 각국에 대한 재정 지원 중단, 인플레이션의 도래, 미국의 국제적 발언권 약화 등으로 인해 그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샬롯츠빌 전투와 베넷의 야망

남북전쟁의 전세가 점차 연방당 쪽으로 기울면서 6월에 접어들자 연방군은 이미 버지니아 주 수도 리치몬드를 점령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군은 예비 병력 대부분을 버지니아 주 북부의 도시 샬롯츠빌에 배치했다. 이곳을 잃으면 몇 주 안에 워싱턴 D.C.가 전장이 될 수 있다는 역전의 각오로 이 전투를 맞이한 것. 6월 11일 아침 8시, 은빛군단군 제1기갑사단 조지 워싱턴이 남쪽의 참호를 공격하면서 샬롯츠빌 전투의 막이 올랐다. 이어 10시 30분에는 서쪽에서 독일 의용군 사단이 돌격을 시도해 방어선 돌파에 성공했다. 버지니아 대학에서 저항을 시도한 학생들은 모두 학살당했고, 미국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던 버지니아 대학 캠퍼스는 잔해더미로 변했다. 전투는 시가전으로 전환되어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점차 미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다. 사령부는 진지를 사수하고 각지의 방어대에 사수 명령을 내렸으나 오히려 병력 분산과 낭비를 초래해 효과적인 지연전을 펼치지 못했다. 결국 13일 19시 30분 교외 북부 비행장을 지키던 마지막 부대가 항복하면서 조직적인 전투는 이곳에서 끝을 맺었다.

 이 소식을 접한 워싱턴 D.C.에서는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무심코 탈출을 준비했는데, D.C.에 모여 있던 정치인과 관료들은 대부분 후자의 사람들이었다. 미군은 수도에서의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고 연방당의 세력이 약한 서부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이 탈출의 혼란과 철수하는 수뇌부에 대한 실망으로 동부 해안의 미군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연방군은 6월 21일 허무하게 무너진 수도를 점령했다.


기업국가의 성립


또한 이 시기 스틸벨트에는 미국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 있었다. 독일제 무기와의 성능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군은 포드, GM, 크라이슬러를 비롯한 거대 기업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속속 요구했다. 하지만 독일에 비해 전쟁 경험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미국, 더군다나 연방정부의 무리한 요구 사양과 납기에 이들 기업들도 대응할 수 없었고, 불평과 요구만 늘어놓는 정부에 불만이 쌓여만 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놓여있던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는 역사상 유례 없는 시도가 실행에 옮겨지려 하고 있었다. 포드사 서비스 부문의 악명 높은 인물인 해리 베넷은 이전부터 노동자 관리와 모든 규제와 제약에서 벗어난 포드가 얼마나 많은 잠재적 생산력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미국 정부를 대신해 기업이 시민을 새롭게 관리하는 '기업 지배주의'를 제안했다. 베넷은 이 제안을 GM, 크라이슬러에 전달하며 'U.A.I.A.'에 의한 스틸벨트 관리를 주장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으로 받아들여 졌지만, 어느 쪽이든 미국 정부는 이미 무너졌고, 다가올 연방군은 중서부의 '귀중한 노동력'인 흑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양측이 합의하여 기업에 의한 통치 시스템이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노하우는 20세기 초부터 실시된 거주 노동자 추적과 '사회학과'에서의 생활, 교육 수준 조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포드, GM, 크라이슬러의 3대 기업과 스틸벨트에 기반을 둔 산업체들이 연합한 세력인 'U.A.I.A.'가 성립되었고, U.A.I.A. 가맹 기업에서 일하는 시민들은 그대로 그들에 편입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중서부 대도시 만을 세력으로 삼았으나, 미군이 철수한 지역으로 진출하여 결국 동쪽으로는 오하이오, 서쪽으로는 와이오밍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세력화 했다.

전황의 안정화


많은 남군 지휘관들은 워싱턴 D.C.를 점령하면 북군이 항복하고 독립 또는 남부의 인종적 질서 유지를 약속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미국 정부는 일체의 화해를 거부하고 철저한 항전을 결의했다. 또한 보스턴에 임시로 설치된 동부군 사령부의 아이젠하워 중장은 미국 수뇌부가 서부에서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 북동부 주 방어를 위한 '레오니다스 작전'을 발동했다. 이 작전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이용한 산맥 전선과 북부에서는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의 산림지역에서 매복과 지연을 기대하는 북부 전선으로 구축되었다. 평야지대에서 연방군의 전차에 대항하지 못한 미군은 산악지대에서 마침내 이들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북부에서도 의외로 연방군의 공세가 늦어지면서 필라델피아주는 잃었지만 뉴욕주 경계에서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다. 이렇게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은 이후 몇 달 동안 정체되어 있었지만, 그 사이 각 세력 내부의 상황은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페리-베넷 협정과 좌파전위대의 성립


미국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 출범한 연방당과 U.A.I.A.는 첫 전투의 쾌승으로 승리에 크게 가까워진 반면, 양측의 내부 위협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구체적으로는 점령지에서 저항을 계속하는 연방정부 충성파 레지스탕스, U.A.I.A.의 경우 공산당-사회당이 주도하는 노동조합 연맹과의 갈등, 연방당 내에서는 상황이 진정되면서 민주당파, SL(은빛군단), ANP(미국 나치당)의 세력 다툼이 재연되고 있다. 재연이다. 내부의 위협에 맞서 단결하기 위해 U.A.I.A.와 연방당은 완전한 이해관계의 일치를 위해 일시적인 반공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 공동전선을 통해 U.A.I.A.는 폭력적인 저항을 하는 극좌파를 소탕하는 데 성공했고, 베넷은 페리를 직접 거론하며 칭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흑인을 중요한 노동력으로 끌어안고 있는 U.A.I.A.는 결국 연방당의 정책과 공존할 수 없었고, 베넷은 사회주의자들을 유린한 SLD가 다음 타깃으로 삼을 것이 자신들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한편, 중서부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은 극좌파 세력은 자신들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무법천지가 된 록키산맥 지역으로 대장정이라는 유랑을 시작했다. 일시적으로 협력관계에 있던 미국 정부도 노동조합 자체는 지지했지만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냉담했다. 이렇게 중서부에서 탈출한 노조 지도자들과 연방정부에서 추방당한 좌파 지도자들은 콜로라도 중부의 도시 덴버에서 합류해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한 잠정적 연대로 '좌파전위대'를 결성했다. 원래 보수적인 기풍이 강한 중부에서 무리하게 끼어든 좌파의 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고, 정부를 장악하고도 지역 세력과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한 전선 내부에서도 사회당과 공산당, 트로츠키주의자 등의 세력이 뒤섞여 있어 단결력은 항상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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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のアメリカ(1944‐1950)

 太平洋戦争はアメリカ太平洋艦隊に大きな損害を被らせることとなり、結果として太平洋と中国権益における日本の優越を認めることになった。しかし、アメリカ本土は無傷であり超大国としての力は失われてはいなかった。とはいえ欧州でのドイツの覇権の確立と、プライドを傷つけられた国民の間には依然として明るい社会の到来を歓喜できるものは少なかったのである。さらに、ホノルル条約締結後わずか2ヵ月の8月10日にFDRが死去し、第33代大統領に昇格した進歩党出身のヘンリー・ウォレスは国民と民主党からの信頼を失っていた。そこで民主党は次の大統領候補の選出に苦心することになる。 1944年選挙に於いて専ら争点となったのは当然ながら戦後の復興政策であった。民主党はニューディール路線の継続を掲げ、政府支出により戦後に訪れるであろう混乱に備えると主張した。民主党大統領予備選挙はトルーマンを候補として選出したが戦争の影響により民主党の支持は失墜しており、選挙前から共和党の勝利になるであろうことは誰もが分かりきっていた。しかし、その一方で共和党は肝心の大統領候補の選出に手間取っていた。主要な候補者としては北部の進歩派と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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