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에 따른 진지한 개소리가 많으니 대강 보셈)

-블랙 선을 보는 동안 연상되는 작품이 넷 있었는데, 각각 가로 시리즈/신문기자/파칭코/기생충

-짧은 액션으로 최대의 효과를 뽑는다는 면에서 연상된 가로 시리즈이긴 한데, 짧지만 압도적인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통념적으로 인식되는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은 상당히 순한 편임. 감독이 작중에서 진순을 등장시킨 이유가 수긍이 가는 순간이어따.

-신문기자는 2020년에 나온 일본의 사회 비판 영화로 최근 우경화된 일본에서는 정말로 보기 힘든 부류의 영화. 코난 극장판이 어벤저스 시리즈를 잡아먹는 일본 영화판에서는 상업성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요가 없는 소재라는 건 애교고, 이런 작품에 출연한 후폭풍이 두려워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하는데도 자국 여배우를 쓸 수가 없으니 심은경을 주연으로 발탁했다는 뒷이야기를 알면 만감이 교차하게 됨. 그럼에도 용기 있게 출연한 마츠자카 토리(신켄 레드 시바 타케루 역)는 ㄹㅇ 상남자인듯

-파칭코는 동명의 소설에서 애플 TV에서 드라마화한 건데, 알다시피 강점기 당시 한국인의 한을 담담하게 묘사한 드라마. 일본에서는 날조니 뭐니 하면서 애써 부정했지만 위대하신 미국님께서 만드신 거라 찍소리도 못한 걸로 기억.

근데 왜 하필 파칭코 드라마판이 연상되었는고 하니, 블랙 선도 위대하신 미국님=아마존 프라임에서 만든 거라 "그런 거 없다."고 일축하고 싶은 일본에서도 책임의 소재를 묻기가 참 거시기할 거란 생각이 들었음. 자세하게 뜯어보면 미묘하게 다르겠지만.

그리고 전술한 내용의 연장으로, 미국이라는 빽을 두었으니 리스크 없이 자국민 배우로 꽉 채워서 촬영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영상으로는 결코 전달되지 않는 체취를 통해 인간의 계급 구조를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자연스레 기생충이 생각났음. 보통 가면라이더 시리즈에서 인간으로 의태한 괴인을 일반인이 알아보기가 지극히 어려운 반면, 블랙 선은 괴인과 관련된 것들이 나올 때마다 냄새난다는 묘사가 상시 등장함.

과학적으로 생각해도, 인간이 아닌 다른 동식물의 유전자가 섞인 이상 괴인의 체취가 보통 인간과 다를 수 있다는 건 충분히 현실성 있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전 작품에선 차용된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 그렇기에 냄새만 맡아도 구별짓고 차별의 대상으로 기피되는 블랙 선 세계관의 괴인은 독특한 존재로 자리매김했음. 황당하리만치 약한 신체 스펙도 그렇고.

-작중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외치는 괴인(카이진)이란 단어를 계속 듣다 보면 점점 외인(가이진, 즉 외국인)으로 들리는데, 일본에서 차별받는 외국인의 대명사 하면 바로 연상되는 것이 재일한국인.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괴인이란 대사를 외국인이나 재일로 바꿔 넣으면 블랙 선은 부조리의 극치를 달리는 블랙 코미디가 되어버림.

예를 들면 총리가 국민들을 재일로 만들어버렸다고 국회에서 추궁당하는 장면이나, 아오이를 재일로 만든 빌게니아를 용서 못하는 코타로, 그리고 인간이 재일이 되는 순간이 짜릿해서 인체실험을 멈출 수가 없는 빌게니아 등등. 그래서 장면은 되게 잔인하고 섬뜩한데 실소가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는 부분이 좀 많았음.

이건 내 감성이 괴상한 부분이라 여기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작중에서 괴인이 집중포화를 당하고 있어서 잘 부각이 안 될뿐 실상은 소수자나 경제적인 약자 등 하층민으로 분류되는 일반 일본 국민들도 우대를 받기는커녕 엄언한 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임. 그저 정책의 일환으로 더 밑바닥에 괴인을 깔아두고 그 불만을 묵살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기에 작중에서 강조되는 "괴인과 인간의 목숨은 1그램도 차이가 없다"는 작중의 대사는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함. 1그램끼리 비교해도 무게 차이는 없을 거 아녀.

-그런데 밑바닥에 깔아둔다는 건 결국 아래에 쌓이고 쌓여 하층집단을 이루는 하나의 기반이 된다는 소리인데, 현실 일본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받는 열악한 대우와 그에 반비례하는 의존도를 고려하면 이 또한 코미디.

-사견인데, 상술한 내용들을 곱씹어보면 결국 감독이 진짜로 외치고 싶었던 말은 괴인이나 외국인 같은게 아니라 "비국민"이 아니었을까 싶음. 일본제국 시절 군부의 말을 안 들으면 비국민(=황국신민 아님)의 낙인을 찍어 이지메의 대상으로 몰아버리는, 권력으로 국민들을 강제로 통합하는 전체주의의 이음동의어나 다름없는 단어임.

하지만 현재 비국민은 그 우경화된 일본에서조차 너무 차별적이라 방송 금지 단어로 지정된 것도 모자라 입에 담았다간 극우들에게조차 인격체 취급을 못 받는 사어인데, 솔직히 현재 일본을 보면 해당 단어를 입에 담는 것만 피하고 있을 뿐 비국민 다루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행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음.(도쿄 올림픽 유치로 들끓었던 때라거나 샷건당한 모 총리의 국장 반대 의견을 내놓으면 묵살당하는 식으로.)

결국 현재 최하층에 자리잡고 있는 대상이 괴인일 뿐, 적당한 구실을 붙이면 언제 누가 차별의 대상이 될 지 모르는 것이 작금의 현실.

그리고 이는 딱히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일본에서 좌익 운동은 그 급진적인 성향과 폭력성이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과 맞물려 별 공감 형성을 못한 채 사장되어 "사회에 불만 있는 놈들끼리 모여서 하는 폭력적인 헛짓거리" 혹은 "와(和)를 깨는 메이와쿠(민폐) 행위" 정도로 인식되고 있음. 이 인식의 벽은 굉장히 두터워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탄핵 촛불 시위를 보고서 민주주의 국가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사회가 혼란스럽고 야만스러워 보인다"는 감상을 내놓았을 정도.

감독도 각본가도 일본인이니 누구보다도 이런 일본 시청자들의 정서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텐데, 이 블랙 선이란 작품은 진짜 여러가지 의미로 노빠꾸 무지성 질주를 해버린 듯한 느낌이 물씬 풍김. 오죽하면 자국 시청자들이 이해나 연상을 못할까봐 상징적인 요소들을 이다지도 노골적으로 배치했을까 싶고. 박한 평가일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내에서 묘사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세련미가 떨어져서 은유가 아니라 직유로 보일 지경임.

그럼에도 감독이 이러한 기조를 유지한 이유는 이 작품이 단순한 시사 풍자 영화가 아니라 가면라이더 50주년 기념작, 그것도 심지어 원작이 자국내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던 가면라이더 블랙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까놓고 말해 향후 우리나라에서 ㅃㄹㄹ나 또봇 같은 아동 애니메이션의 50주년 기념작으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제작자더러 미쳤다고 욕을 할 텐데,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봄.

한국 영화계였다면 어느 IP에 묻어가는 게 아니라 감독 스스로 각본을 쓴 오리지널 작품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 흥행도 노릴 수 있겠지만, 일본 영화계에서 그런 식으로 하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소가 산재해 있음.

그렇기에 블랙 선의 감독과 각본가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압도적인 전통을 자랑하는 가면라이더의 후광을 입어도 모자라거 외국 자본을 통해 간신히 시도할 수 있었다는 현실에 누구보다도 좌절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유기농 이유식 만들어 좋아하는 캐릭터 식기까지 써서 정성껏 떠먹여줬더니 맛없다고 퉤 뱉어버리는 편식쟁이들을 보며 제작진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품을 끝까지 보다 보면 감이 안 좋은 사람도 염세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이 짙다는 걸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데, 사견이지만 제작진은 애초부터 블랙 선을 통한 희망적인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함.

부조리의 도가니나 다름없는 이 거대한 세상은 개인의 계몽이나 각성 정도로는 꿈쩍도 안 하고, 선인이든 악인이든 결국 시간에 휩쓸려 역사의 표류자가 되어버리는 무정함 속에서, 블랙 선은 모든 사람의 등가치를 역설하며 영웅의 실패와 어리석은 역사의 반복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음. 그렇기에 블랙 선의 세계에 괴인은 있지만 초인은 없고, 총에서 발사되는 흉탄 앞에서는(개체차는 있겠지만) 누구나 평등하게 죽음을 맞이함.

이런 독보적인 나약함은 기존 특촬 액션 히어로 문법에 익숙한 특덕들에게 특히 눈엣가시같은 요소겠지만, 작품에서 제시하는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제작진이 필요악에 가까운 선택을 했다고 생각함. 기왕 현실적인 문제를 끌고 왔으니 묘사 또한 현실적으로 일체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니.

애초에 특출난 개인의 기지로 문제가 단박에 해결되는 게임 같은 세상은 말초적인 즐거움으로 인기몰이를 위해 만든 이세계물 같은 데서나 나오는 거고.

-블랙 선의 완전 새까만 눈과 관련해서 말이 많던데, 단지 힘을 응축할 때 붉게 명멸하는 연출이 ㅈ간지라서 그렇게 디자인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함.

작중 미나미 코타로는 50년의 세월동안 마모된 무기력한 인간이었다가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아오이와 만남으로써 삶의 의욕을 되찾아 스스로 싸울 것을 결의하는데, 그 결의가 행동으로 폭발하는 순간이 바로 가면라이더 블랙 선의 눈이 붉어지는 순간임.

하지만 눈에 드리운 어둠은 너무나도 깊고, 케타민으로 통각을 둔화시켜야 간신히 거동을 할 수 있는 괴인 미나미 코타로는 너무나도 노쇠한 존재이기에, 찰나의 순간만 인간으로서 빛날 수 있었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됨. 그러한 결말을 암시하기 위해 일부러 검은 눈으로 디자인한 것은 아닐까.

-블랙 선은 1화부터 일식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화에서 완전히 일식이 이뤄진 상태에서 타이틀 로고를 내미는 장면으로 끝이 남. 근데 일장기에 덩그러니 그려진 히노마루는 이름 그대로 태양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고, 그걸 국기로 삼은 나라의 이름은 태양의 나라, 즉 일본임. 그 일본의 상징이라는게 통념적인 문화권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검정색으로 까맣게 물드는데, 결국 가면라이더 블랙 선은 현재의 일본을 의인화한 상징적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사족인데 작중에서 미나미 코타로는 노부히코와 아오이 정도를 다들 블랙 선이라 부르는데, 블랙 선은 일본어로 발음하면 브라쿠 상, 즉 "블랙 씨"가 되는 깨알 유머가 있음. 일본어에서 명칭 뒤에 붙는 상이란 단어가 친분은 있지만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쓰이는 것을 고려하면, 작중 코타로의 입지하고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듯. 일반적인 하급 괴인과 격을 달리하면서도 속세에 관심을 끊고 스스로 늙어 죽어가길 선택한 코타로에게 은근히 어울리는 호칭이라고 할까.

-현지 여론에 "좌익들이나 좋아할 법한 투쟁 이야기는 70년도에도 많이 봐서 식상하다." 같은 내용이 있던데, 나는 되레 이렇게 되묻고 싶음. "반세기 넘게 똑같은 지적을 했는데도 귓등으로도 안 들은 사회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게 더 호러 아님?"

-일반적인 이야기 흐름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블랙 선의 결말이 호불호가 씨게 갈릴 텐데, 나는 이 부분조차 제작진이 알면서도 고의로 이렇게 만들었다는 의혹이 듦. 분명 제작진들도 현재의 일본을 개선할 수 있는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되었음 영화를 만들 게 아니라 진작 정계부터 진출했을 거고.

-그렇기에 더욱 외면받기 일쑤였던 현실의 문제를 제시하는데 집중했던 거 같은데, 그랬다간 극우들한테 살해 협박이나 칼빵 맞기 쉬운 일본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더더욱 가면라이더와 아마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함. 제작진의 생존 차원에서 권위와 자본에 타협해야만 하는 현실이라니.

-아까부터 계속 노골적인 묘사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은근히 사린 부분 또한 있는 거 같음. 왜냐하면 대놓고 재일을 묘사하는데도 진짜로 재일교포3세 출신 배우인 쿄 노부오 씨나 공대유 씨는 코빼기도 안 보였는걸.

-한편 일본인 혼혈 2세 배우들이 눈에 띄는데, 차별 반대라는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비백인 혈통을 선택한 듯함. 그럼에도 주조연 배역 중에 백인 배우가 하나도 없는 건 좀 의아했음. 다인종국가인 미국을 백인들의 나라로 인식할 정도로 인종 문제에 둔감한 일본인들에게 올리버 존슨이나 닉 역할로 백인 배우를 캐스팅했다면 아마 역효과가 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같은 아마존 프라임 독점작인 아마존즈하고 비교하면, 슈퍼히어로 장르로서 지닌 매력은 아무래도 아마존즈 쪽이 더 높다고 생각함. 하지만 고어와 관련해서는 조금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아마존즈는 적자생존의 처절함이 부각되는 편이라 유혈에 내성이 있다면 담담하게 볼 수 있지만, 블랙 선은 묘사가 덜 잔인해도 묘하게 현실적인 세계관과 중우들의 악의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연출 덕에 아마존즈보다 기분이 더 찝찝함. 아마존즈가 찝찝한 건 코여사가 시청자 멘탈을 갈아버리라는 주문을 시라쿠라스한테 받아 스스로 억눌러 왔던 무언가가 폭발한 거니까 아무래도 결이 다르고.

-결국 이 가면라이더 블랙 선이란 작품은 특촬물이라는 틀에 익숙한 일본인일수록 외면받기 쉽고 일본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는 외국인들은 남의 나라 이야기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데, 한국에서 블랙 선이 1위를 먹은 결과가 어느 정도는 그 근거가 되리라 생각함. 특히 원작인 블랙 선의 리메이크라는 부분에 얽매일 수록 불호인 부분이 늘어나리라 보는데, 나는 디케이드에서 잠깐 출연한 미나미 코타로밖에 모르니까 그런 거 개의치 않았음. 특촬물 스토리가 군데군데 구멍이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는 관례 같은 거라 애초에 신경 껐고.

그렇다고 원작에 대한 존중을 싸그리 배제하지는 않았고, 슈퍼히어로 장르에 대한 존중 또한 의외로 분명해서 독특한 풍미로 완성된 거 같음. 구체적인 사례는 원작을 잘 모르니 건너뛸 거지만.

-근데 마지막화에 원작 오프닝을 꺼낸 건 좋은데, 라이더 칩스가 부른 버전으로 먼저 접해서 그런지 원조 가수였던 쿠라타 테츠오의 가창력은 좀 많이 거시기했음.

-메인 OST도 강렬해서 좋긴 한데, 가면라이더보다는 제5공화국이나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 감상이 들었음. 중요한 매순간마다 뽕 차오르게 틀어주니까 마치 히트 헤븐을 섭취한 괴인처럼 만성적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감각에 시달리다 보니 좀 지치는 느낌도.

-50주년이라는 이름이 허언이 아니듯, 블랙 선은 좀 나이를 먹고 머리가 굳은 상태로 보는게 이해도 깊고 적응하기도 쉬울 듯함. 재미가 없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특촬 히어로 중에 이토록 일본 국내의 정치 시사 관련 제반지식을 요구하는 작품이 드물다 보니 반발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함. 그럼에도 어떻게든 가면라이더로서 다가서려고 노력한 제작진의 노고는 인정할 수밖에 읎따.